예수와 다른 종교전승

(7:1-10, 11-17)




눅7:1-10절(마8:5-13절)과 눅7:11-17절(누가에만 있다.)은 눅7:18-23절의 서론인 눅6:20절 이하에 결합되 어 나온다. 이것은 7:18-23절의 몇 가지 사항을 살펴볼 때 분명해진다.

1) 7:18절(마11: 12과 다르다.)에서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요한의 제자들이 말했다. 처음 읽는 독자는 "이 모든 것"을 7:1-10과 11-17절에 나오는 하나의 기적으로만 이해하거나 둘 다와 연결시켜서 이해할 것이다.

2) 비록 7:21절(마태에는 없다.)에서 예수가 요한의 제자들 앞에서 기적을 행하는 것으로 말하는 이 특 별한 행위들은 7:22절 행위들(마태11:5절과 같다)과는 정확하게 같지 않다. 7:22절의 능력있는 사역 목 록은 사35:5절, 61:1절의 내용과 일치하다. 다만 이사야에서는 문둥병자가 깨끗해지는 것과 죽은 자가 일으켜지는 것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이 두 주제는 어쩌면 엘리야-엘리샤 전승을 반영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참고. 눅4:25-27에 구약 인용문이 나온다.). 누가의 유일한 전승인 7:11-17절, 즉 죽은 자 의 일으켜짐이 7:18-23절 이야기에 앞서 나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7:22절에 죽은 자를 일으키는 내용이 나온다.

3) 7:22을 보면 능력 있는 사역에 대한 기록 이후에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가 나온다. 물론 이것은 예수가 자기 목적으로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6:20절에서는 자기가 분명히 행했던 것이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 구절에 비춰 보아 7:18절에 나오는 "이 모든 것"이 7:1-17절(예수가 행하고 말했던 것)에 속한 것처럼 "이 모든 것"이 6:20절 이하에 속한 것으 로 저자는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례 요한은 무엇을 근거로 믿는가? 누가에 의하면 종말 사건이라고 성경이 예언한 대로 가난한 자들 에게 행해지는 기적들과 선포들이 세례 요한에게 제공된다. 요한의 반응을 기대하고 있는 이 자료는 요 한의 제자들이 보고 듣었던 것으로 구성된다(7:22; 참고. 요일1:3절).

이런 유형(예수에 대해서 반응하도록 하는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는 종말론적 메시지)이 사도행전이 가 지고 있는 패턴이다(참고 2; 3-4; 8; 10; 13; 16). 본 것들과 듣은 것들과 비교해서, 저자의 이런 시각 으로부터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사실 제기된다.

더 넓은 맥락에서 저자는 특별히 눅7:1-10절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 구절에서 백부장이 믿음 있는 이방인의 유형으로서 그려지고 있다. 증거로 제시된 두 가지 방향이 이것을 분명하게 해 준다.

첫째, 비록 마8:5-13(참고 요4:46-54)에 나타나는 전승이 눅7:1-10절에서 반복된다 하더라도, 누가적인 치료 양식은 3-6절에 의해서 확장된다. 누가의 백부장은 마8:5-7절에서처럼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두 심 부름꾼을 통해 간접적으로 예수와 대면한다. 처음에는 유대 장로들을 통하여, 그리고 두 번째는 친구들 을 통하여 예수와 대면한다. 유대인에게 파송받은 자가 백부장의 장점에 대해 예수에게 말한다: "이 일 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7:4-5절)"

두 번째, 누가적인 단락은 분명히 행10:1-2절에서 다시 나온다: "가이사라(Caesarea)에 고넬료 (Cornelius)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백부장----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 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누가-행전(Luke-Acts)의 모든 기술적 틀 안에서 사도 행전의 사건들은 누가복음서와 내용과 순서 면에서 평행을 이룬다. 이것으로 저자는 마치 7:1-10절이 이방인의 개종의 전조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처럼 두 이야기를 결합한다. 달리 말하면, 7:1-10절에서 백 부장 이야기는 사도행전 이야기에서 이방 선교를 위한 예수의 선례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눅8:26-39절이 사도행전 13-28장에서 바울로 하여금 유대인 영역을 벗어나 이방인 세계로 나아 가게 하는 근거를 제공하는 것처럼 7:1-10절은 사도행전 10장의 베드로의 행위에 대한 예수의 선례를 제공하고 있다. 7:1-10절에서 백부장은 유대 영역에서 믿음있는 이방인의 전형이다.

더 나아가 이 백부장은 예수를 보지 않고도 믿은 사람의 본보기이다: 그는 직접적이 아니라 두 심부름 꾼들을 통해서 예수와 대면한다. 그는 "예수를 보지 않고 예수를 사랑하는(벧전1:8)" 이방인을 대표한 다. 요한은 제자들을 통해서만 예수에게 접근한 기독교인들의 이야기에서와 복음서 거의 끝날 무렵에 행한 축복-즉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복이 있다(20:29)-에서 이와 비슷한 점을 말하고 있다.

유대인 장로들이 백부장의 종교적인 믿음과 그에게 행해야 하는 바 합당한 점을 예수에게 말할 때(4-5 절), 우리는 다른 누가적인 주제를 접하게 된다: 다른 종교 전승에 대한 태도: 누가가 그리고 있는 3가 지 초점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1) 누가는 예수를 유대교의 성취자로 믿는다.

(2) 예수가 많은 이방 종교를 판가름한다고 생각한다.

(a) 기독교는 전적으로 마술적이지 않다; 즉 영적인 힘을 인격적으로 사용한다(행 8:9이하; 13:6이 하; 19:19이하).

(b) 기독교는 물질적인 탐욕을 추구하는 이방 종교를 청산한다.(행19:23 이하)

(c) 기독교는 창조자보다는 피조물(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회개를 요구한다(행17:22이하; 14:8).

(3) 저자는 또한 피조물 대신에 창조주를 예배하고 윤리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빛을 추구하고 있는 이 방인들의 경건을 예수가 완성한다고 믿고 있다. 이런 태도는 행10:34-35절에서 베드로가 말한 연설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 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눅7:1-10에서 예시된 바가 바 로 이 3번째이다. 이렇기 때문에 누가가 자연신학(즉 사람이 세상이나 혹은 인간 본성의 추론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혹은 일반 계시(하나님은 세상을 통하여 그리고 모든 인간의 심연(depths) 속에 서 자신을 들어냄으로써 모든 시간과 장소 속에서 역사하신다.)를 믿고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이런 점에서 헬라 유대교 사상, 바울, 순교자 저스틴과 누가를 비교해서 누가의 사상을 분명하게 나타 낼 수 있다.

(1) 고대 유대교는 일종의 자연신학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솔로몬의 지혜(The Wisdom of Solomon, 13:1-9)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피조물의 위대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유추를 통하여 그들의 창 조주인 하나님에게까지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말한다(5절); 하지만 이방인들은 이러한 유추를 하지 못했다(1절). 이방인들이 실패한 것을 이어받아 아브라함이 자연을 통하여 신을 유추했던 또 다 른 전승을 요셉푸스(Josephus) (Antiquities. 1:7:1 154-57)는 제공하고 있다(예. Genesis Rabbah 38:13). 아브라함의 이주(The Migration of Abraham), 35에서 필로(Philo)는 질서로부터, 그리고 인간 본성 속 에 있는 법칙으로부터 신적인 것을 유추할 수 있음을 말한다. 고대 유대교의 어떤 그룹에서는, 모든 인 간은 자연이나 혹은 자기 자신들에 대한 유추를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연신학 이 있었다.--실제로는 어떤 사람은 행하고 어떤 사람은 행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누가-행전(Luke-Acts)의 저자는 헬라 유대교와 공통점을 갖고 있다. 행14:17절의 두스드라(Lystra)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행한 연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듣는다.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 케 하셨느니라." 자연 질서 안에 하나님을 증거하는 표적이 있다. 이 표적이 보이고 인식되고 있는 지 에 대해서는 분명한 말을 하지 않고 있다. 12, 13, 18절 연설의 맥락에서 보면, 이방인들이 하나님에 대 한 지식을 얻지 못했음을 보여 주는 것 같다. 바울이 행한 연설, 행17:22-31절을 보면,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17:27)." 하지만 29, 30a, 23절은 이방인들이 창조자를 찾기보다는 오히려 피조물을 예배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지 못했 다. 이러한 두 구절들은 시13:1-9절과 매우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본래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 가능성은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

행10장의 독특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이 있음을 말한다는 것이다(또한 눅7:1-10에서도)(2절). 고 넬료는 분명하게 가능성을 실현했다. 올바른 유추를 했던 사람들은 행10:34-35에서 베드로가 말한 바로 이러한 이방인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저자를 바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행4:12과 함께 여기서 말하는 강조점을 이해하여야만 한다. 4:12절에서 베드로는 말한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 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행10장의 고넬료 이야기에 나타난 자연신학을 통한 이방인의 올바른 유추는, 예수에 대한 베드로 설교에 의해서, 그리고 고넬료와 그의 가정 위에 임한 성령에 의해서 완성되어야만 한다. 성령은 그들이 믿음 안에서 응답하였다는 표지이다. 누가-행전(Luke-Acts) 신학에서 예수는 자연 질서 속에 주어진 하나님 증거에 대한 가장 올바른 반응 이다. 눅7:1-10에서 백부장이 유대인들에 의해서 합당한 자로 소개될 때, 위에서 주목한 바대로 이 가 치 있는 백부장은 행10장의 고넬료의 전형이다. 그리고 후에 이 고넬료는 누가 시대의 모든 계층의 사 람을 상징한다. 저자는 그리스도를 위해 준비하였으며, 빛을 따르는 덕스럽고 경건한 이교도를 염두에 둔다. 이런 이교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완성시키는 분이 그리스도이다.

(2) 이 문제에 대한 누가-행전(Luke-Acts)의 관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바울 사상과 누가 사상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롬1:19에서 보면, 이 절 후반부가 앞부분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19절b)"라는 이 부분은 바울이 자연 신학보다는 일반계시와 관련해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계시 매개체는 "만물"이다; 계시 시기는 "창세로부터"이다: 계시 내용은 "영원하 신 능력과 신성"이다(1:20). 롬1:21절에서 바울은 계시가 적어도 인간들이 반응할 정도로 실현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하나님에 관한 이방 인의 지식에 대해서 바울과 누가의 입장에는 몇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누가는 헬라 유대교와 같이, 피조물을 예배하지 않고 창조주를 인식하는 이방인에 관해서, 일반계시 대신에 자연신학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3) 마지막으로 순교자 저스틴과 비교해 보자. 2세기 초반 교회 교부인 이 사람은 일반 계시를 믿었다. 하나님 아들의 선재성(preexistent)을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스토아적인 이성)과 동일시했다. 즉 저스틴은 모든 사람들이 비록 일반계시를 곡해하거나 남용하기도 하지만, 일반계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든지 이성을 따라 산다고 한다면, 비록 무신론자라 하더라도, 기독교인이다.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Socrates)(Apology, 1, 46:1-4)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이 일반계시는 불완전하기에, 성육신으로 드러난 특별계시에 의해서 보완되어야 한다(Apology 2, 13). 바울이나 저스틴의 강조점은 일반계시에 있다. 바울과는 달리 저스틴은, 창조된 질서를 통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깨우치는 우주 적인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반계시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누가-행전(Luke-Acts) 저자와 바울처럼 저 스틴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역사는 어떤 것을 행하게 함에서 필연적이며, 하나님의 역사가 없이 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참고. Clement of Alexandria, Stomateis, 6).

이교도들이 가진 종교적인 잠재성에 대해서 바울이 가장 비관적이다. 일반계시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죄에 대해 책임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저스틴은 가장 낙관적이다. 일반 계시를 따르는 사람, 이성에 의해 사는 사람, 즉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들은, 비록 특별 계시와 무관하게 산다 하더라도, 기 독교인으로 여길 수 있다. 헬라 유대교와 연결되어서 누가는 이 두 사람의 입장 사이에 있다. 이교도들 이 하나님에 대해서 종교적으로 반응할 가능성을 평가함에서 누가는 전적으로 긍적적이거나 전적으로 부정적이지도 않지만, 뉘앙스가 다르다. 어떤 이교 종교에 대해서는 예수는 배타적인 심판자이다: 그리 고 다른 이교적인 경건에 대해서는 예수는 자연 신학이 이미 걸어온 길을 완성한 자이다. 누가 7장과 사도행전 10장은 후자의 입장에 대한 저자의 평가를 제공한다.

예수에 의해 완성된 백부장의 경건을 저자는 어떻게 이해하는가? 비록 유대인 장로들이 백부장을 "합 당하다"고 여긴다 하더라도(4절), 이방인 친구들로 이루워진 두 번째 대사는 백부장이 자기를 무가치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음을 분명히 말한다(6절). 자기의 무가치성을 고백한 이후, 백부장은 예수의 권위 있 는 말씀에 대해 자기의 내적 신뢰를 말한다: "보소서" 그는 말했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7:7-8절)"

피조된 질서에 대해 예수가 실제로 권위를 가지고 행하는 것이 눅8:22-25절의 누가 이야기에는 분 명히 나타난다. 여기서 예수는,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 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7:9)"라고 반응한다. 유 대 장로들이 백부장의 선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예수는 그의 신앙을 칭찬한다. 그래서 이 이야 기는 백부장을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경건한 이방인의 모델로서 말한다. 이 백부장의 경건은 예수 앞 에서 자기의 무가치성을 고백함으로써, 그리고 자기의 믿음을 예수의 권위 속에 놈으로써 완성된다.

7:1-10절과 5:1-11절의 비교를 통해 우리는 유대인 베드로와 이방인 백부장이 같은 방법으로 예수에게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a) 죄 혹은 무가치성에 대한 고백(5:8; 7:7),

(b) 예수의 권위에 대한 신뢰(5:5, 11; 7:7-8).

베드로의 입을 통해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행한 베드로의 연설문에서 누가는 이와 같은 주제를 말한다 (행15장). 여기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은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 하셨느니라(행15:9)"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 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15:11절)" 바울은 일찍이 갈2:15-16절에서 이 점을 말했다. 유대인의 전승이 성취되든, 혹은 빛에 대한 이방인의 적절한 반응이 완성되든 간에, 예수의 길은 과거(무가치성 혹은 죄) 와의 단절을 요구하고, 새로운 권위(주의 주권)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다.

누가의 견해에 의하면, 예수는 다른 모든 것들이 지시하는 궁극적인 계시이다. 예수가 다른 종교 전승 들과의 관계에서 심판자로 존재하든지, 아니면 그 성취자 혹은 완성자로 존재하는지 여부는, 다은 종교 전승들과 예수 안에 나타난 계시 간의 불연속성 혹은 연속성의 정도에 달려 있다. 예수와 가장 밀접한 연속성을 가진 종교 전승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예수 앞에서 여전히 "무가치"하며 그래서 예수의 궁극적인 권위 아래 복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