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믿음과 성공

17:11-19:44 (A. 17:11-18:30)




눅17:11-19:44절은 독특한 누가 전승과 공관복음 전승과 병행을 이루는 자료들이 함께 섞여 있는 긴 사 상 단락(unit)이다. 이 단락의 구조는 ABCD:A'B'C'D'이다.

(1) 17:11절은 예루살렘으로의 이동에 대해 말한다; 18:31-34절에서도 같은 것을 말한다.

(2) 거룩한 도시로의 여행 구절마다 치유 기사가 따라 나온다(17:12-19; 18:35-43절). 두 치유 기사는 구조적으로 비슷하다:

(a) "예수여, 궁휼히 여기소서"(17:13; 18:38절);

(b)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c) 하나님에게 찬양한다/찬양하였다(17:18, 15; 18:43절).

앞의 치유 이야기는 두 가지 면으로 구성된다. 후반부는 구원을 다룬다; 두 번째 치유 이야기 다음에는 또 다른 이야기(19:1-10절)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구원 주제로 연결된다.

(3) 치유 다음에 나오는 두 단락은 종말에 대해 다룬다(17:20-18:8; 19:11-27절). 두 단락은 모두 이미 실현된 종말론(over-realized eschatology)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한다; 두 단락은 모두 내림(parousia)과 주의 강림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모습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룬다.

(4) 뒤의 두 단락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응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단락들(units)이다. 눅18:8절 b에서 제기된 문제점을 18:9-30절은 다룬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18:9-30절 은 여기서, 그리고 지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의 의미를 보여주는 그런 여러 전승을 포함하 고 있다. 비슷하게 19:27절에서 제기된 문제점을 19:28-44절이 다룬다: "나의 왕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19:28-44절의 두 부분은 이스라엘에 의한 예수의 배척 을 보여준다. 저자가 다양한 자료들을 자신의 목적에 맞도록 주요 골격을 형성한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의 다음 단원은 18:31-19:44절을 다룰 것이다. 이 단락에서는 17:11-18:30절을 세 가지 면에서 다 룰 것이다:

(1) 17:11-19;

(2) 17:20-18:8;

(3) 18:9-30절.

눅17:11-19절에서는 치유와 구원과의 관계를 다룬다(참고. H. D. Betz, "The Cleansing of the Ten Lepers [Luke 17:11-19],"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90:314-28 [1971].).

눅17:11-19절은 기적 이야기이다. 저자는 이 이야기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서 생긴 사건이라고 소개한다. 이런 묘사는 분명히 16절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언급을 그럴 듯하게 만들어 준다. 지역적인 색깔이 분명히 나온다: 문둥병자들은 함께 모여 있었다(왕하 7:3절). 다른 사람과 신체적인 접 촉을 피했다(레13:45절이하; 민5:2절). 그러나 이들은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가 까이 살았다. 이 이야기의 특별한 점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기적 이야기라는 것이다: 11-14절은 열 문둥병자가 깨끗해진 것에 대해 말한다. 반면에 15-19절은 그들 중 한사람만이 깨끗해졌음과 사마리아 사람의 회심에 대해 자세하게 말한다. 이 이야기는 왕하 5장에 나오는 문둥병자의 치유와 회심의 두 부 분으로 말하는 이야기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Naaman)이 엘리사(Elisha)의 명령에 순종하여 요단강으로 가서 일곱 번 씻었을 때 치유되었다. 치유 받은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엘리사에게 돌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였다. 구약성서는 한 외국인의 회심을 위해 어떤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는지를 말한다. 눅17:11-19절도 마찬가지로 사마리아 사람의 회심을 위한 촉매가 된 예수 의 기적을 말한다. 19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만 한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 라(se,swke, se)" 여기서 "구원하였다"는 말은 단지 신체적으로 깨끗해진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아홉 명들도 치유는 받았다. 사마리아 사람의 구원은 예수의 치유 은혜 속에서 주는 그분을 알며, 적절하게 반응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런 이야기의 절정은 후반부에 오기 때문에, 누가는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을 강조한다. 저자는 치유 받은 이 사람의 태도에 주목한다. 단순히 치유 받은 경험이 구원은 아니다. 신체적 나음 이상의 구속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행하 셨음("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16절")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주도권을 느낄 때, 그리고 신앙이 이 주도권에 반응하여 관계를 낳게 될 때, 오직 그때에만 치유가 구 원 안에서 일어난다고 누가는 말한다.

종종은 그럴 듯하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개입을 느끼고, 이에 적절히 반응한다고 누가는 말한다. 치유 후에 하나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께 복종한 문둥병자는 사마리아 사람이다; 아홉 유대인은 어 떤 응답도 하지 않았다. 이방인의 믿음은 누가적인 관심이다(예. 7:9; 10:25-37; 행10-11장). 누가는 그 들의 믿음과(참고. 이방인의 눈이 열리게 되는 내용이 나오는 행26:16-18절)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없는 유대인들의 믿음 없음(행28:26-27절에서 유대인들은 보지 못한다.)을 대비시킨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거부와 복음에 대한 이방인들의 열렬한 영접을 예시하 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사도행전의 이야기에서 본다. 그리고 이미 누가-행전이 쓰여진 그 시기에는 보 편화되었다.

눅17:20-18:8절은 3가지 종말 문제를 다루고 있는 혼합 구절이다:

(1) 하나님 나라가 올 그 때를 계산하려고 하는 행동;

(2) 이미 실현된 종말론(over-realized eschatology)

(3)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우주적인 결정 내용에 대한 의심.

20-21절의 선언 이야기(pronouncement story)는 하나님 나라가 올 때를 묻는 시도를 예수가 거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질문한다. 첫 번째 예수의 답변을 보면, 이 질문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 전에 어떤 징조가 나타날 것이라는 가정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대답은 다음과 같은 형 태를 갖는다.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고 취할 수 있는 곳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 다" 예수는 이런 전제를 배격하며, 그 대신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느 니라"(비록 언어적으로 '너희 안에'가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예수가 바리새인들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너희 안에'는 적절하지 못하다. 개역에는 '너희 안에'로 번역되어 있지만, 이곳에서는 저자 의 위의 이런 생각을 존중하여 "너희 가운데"로 번역하였다.[역자 주])

누가는 이 구절이 예수의 사역 안에 있는 성령의 임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참고. 11:20; 4:18-19, 1; 3:22절.). 누가는 두 가지를 지적한다.

(a) 비록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한다고 하더라도(예. 10:9절), 종말의 때를 계산하려 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예. 행1:6-7절). 이것은 묵시적인 사고(일어나는 사건들과 그 시간에 관한 청사 진을 결정하기 위해 역사적인 사건과 자연적인 재해들을 이용하려는 시도)를 배격하는 것이다. 어거스 틴(Augustine)은 자신의 책 "하나님의 도성(18:53)"에서 이점에 대해 말한다:

년수를 아는 것이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고 … 이 주제에 대해 계산하는 자의 모습을 예수께서 물리쳤다는 것을 진리(예수)의 입으로부터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세상에 남아있을지도 모를 년수를 헛되이 계산한다.

마가의 예수는 같은 방법으로 말한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 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13:32)."

(b) 왕국 본연의 모습으로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징조는 지상 예수가 영의 능력부음을 받은 그 사역 의 성격에 있다(예. 4:18-10절).

20-21절의 선언 이야기에 이어 나오는 혼합된 강연(17:22-37절)은 실현된 종말론으로부터 보호하는 역 할을 한다. 이 강연은 선언 이야기와 형식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이어져 있다. 형식적으로, 17:21절에 나오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는 17:23절에 '보라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에서 반복된다. 논리적으 로는, 왕국의 실재에 대한 강조로 연결된다. 20-21절은 예수 사역 속에 실재하는 왕국에 대해 말한다. 22-23절에서 내림(parousia)("인자의 날 하루"는 유대교의 "메시아의 날" 그리고 구약의 "이날들" 혹은 "훗날들"-즉 메시아적인 날이거나 새시대의 기독교화한 표현이다)을 경험하기를 원하는 제자들은 그것 이 이미 실재한다고 들었다(그들이 너에게 말할 것이다,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 제자들은 이런 주장을 믿지 말아야 한다. 이런 논리적 연관성에서 볼 때, 22-37절은 왕국의 존재를 실현된 종말론의 용어로 읽지 않도록 하는 방식으로 20-21절을 해석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논리적인 연결에서부터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히 누가 교회 중에 있는 몇몇은 비밀스런 방법으로 종말을 현재에서 경험하 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지원하기 위해서 20-21절을 사용한다. 내림(parousia)의 성격, 시간, 그리고 장소에 대한 해석을 22-37절은 배격한다.

내림은 모두에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이미 실재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제자들 은 저들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22-23절). 내림은 사건으로써 공간적으로 제한되지 않고, 보편적이고 순 간적인 것이 될 것이다(24절). 그것은 예수의 수난(25절) 이후에 일어날 것이다. 백성들이 일상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 일어날 것이다: 즉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장사지내고, 팔고, 심고, 집을 지을 때에 일 어날 것이다(26-27절, 28-30절). 내림에 대한 더 나은 태도는 세상 모든 관심에 대해 절대적으로 무관 심하는 것이다. 뒤를 돌아 볼 필요가 없다(31-33절). 내림이 임할 때, 그 내림은 위대한 분리자가 될 것 이다(34-35절). 37절에서 내림이 어디에 일어날 것인가를 묻는 제자들의 물음에 대해 예수는 답한다: "시간표를 묻는 것처럼 일어날 장소에 대한 지도를 요구하는 것도 쓸데 없는 일이다: 광야에서 독수리 가 빙글빙글 돌며 모여드는 곳은 시체가 있는 곳임이 분명하듯이, 인자는 공정한 방법으로 심판하기 위 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은 필요하지 않다"(I. H. Marshall, The Gospel of Luke, p.656.)

저자는 20-21절을 이미 실현된 종말론의 용어로 해석하지 못하게 하도록, 인자의 내림에 초점을 맞추 는 종말론적인 자료모음을 사용하였다. 예수의 사역(이 경우에는 성령) 속에 나타난 왕국의 실재는 내 림이 이미 일어났다고 하는 기독교인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수 없다. 내림은 미래 사건이고 우주적인 범위를 갖는다.

실현된 종말론의 문제는 초기 기독교에서는 널리 퍼져 있었다. 신약 밖에서도 수많은 자료들을 볼 수 있다.

(a) 시몬(Simon)과 카포크레테스(Carpocrates)에 속한 자들에 대해서 이레네우스(Irenaeus)는 말한다. 그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은 단순히 그들이 선언하는 진리에 대한 지식일 따름이다"고 생각한다 (Against Heresies, 2:31:2.).

(b) 이레네우스는 또한 "그에게 세례받음으로써 그의 제자들이 부활을 얻었다"고 메난더(Menander)가 주장했음을 말한다(Against Heresies, 1:23:5.).

(c) 나아센사람들(Naassenes)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부활이라고 생각했다고 히포리투스 (Hippolytus)는 보고한다(Refuta tion of all Heresies, 5:3).

(d)이태리 발렌티니안(Valentininians)의 헤라클레온(Heracleon)과 프톨레매우스(Ptolemaeus)도 역시 비 슷한 생각이라고 히포리투스(Hippolytus)는 말한다(Refutation, 6:30).

(e) 나그 함마디(Nag Hammadi)에서 나온 도마 복음서(the Gospel of Thomas), 말씀(Logion) 51에 보 면, 제자들이 예수께 묻는다. "언제 새로운 세계가 옵니까?" 예수가 대답한다. "너희가 기대하는 바는 올 것이지만, 너희는 그것을 모른다."

(f) 또 다른 곱틱 문헌, 부활(De Resurrectione)에 보면 "너희는 이미 부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g) 빌립복음서(the Gospel of Philip) 121:1-5절은 말한다. "'죽은 그들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 는 사람들은 잘못이다." 만일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먼저 그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이 죽어서도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신약성서 안에 이와 비슷한 문제가 여러 곳에서 나온다.

(1) 딤후 2:17b-18절은 이 문제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2) 고전4:8절(참고. 15:12절 이하)에도 같은 장면이 나온다.

(3) 빌3:12-15절(참고, 11, 12, 20절)과 살후 2장(참고 2절)에 경고하는 같은 입장이 나온다. 누가가 씨름 하는 이런 문제는 초기 교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런 실현된 종말론에 대한 첫 번째 저자의 반응은 먼저는 분명한 입장 혹은 종말에 진행되는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내림은 현재에 요구되는 경험과는 다른 성질을 가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터 툴리안(Turtullian)의 육체의 부활(On the Resuration of the Flesh) 19장과 고전15:22절 이하, 빌3:12절 이하, 살후2:1절 이하에서 이와 비슷한 반응이 발견된다.

성령의 경험을 종말의 경험으로 생각하려는 오해를 여기서 누가는 막고자 한다. 성령의 경험이 초기 기 독교에서 내림의 경험으로 이해될 때마다,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점들이 생겨났다.

(1) 완전주의(perfectionism)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죄없이 살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요1서 1:8, 10절).

(2) 신령주의(spirituality)는 성적인 본성을 초월한다고 믿었다(고전7; 11:2-16);

(3) 개선주의(triumphalism)는 박해, 궁핍, 병, 나약함을 초월하여 경험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고 전4:8-13; 고후12:1-10절.). 누가 이전 세대에서 바울은 이런 실현된 종말론에 대항하고 있었다. 사도들 에게 기독교 신앙은 믿는 자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나누는 것이다(롬8:17; 고후1:5; 4:10; 빌3:10 절이하; 골1:24절.) 믿는 자에게 성령의 경험은 지금의 실재 한계 뒤에 남거나 능가하는 능력이 아니라, 연약함 속에서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다(고후4:7; 12:9절 이하; 13:3절 이하). 누가는 바울의 이해와 같이 한다. 비록 누가가 특별히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의 삶 속에서 있는 성령의 능력의 경험을 강조하는 것 에 집중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능력은 이 세대의 한계 내에서 경험되는 능력이다(참고. 9:21절과 함께 4:18, 44; 참고. 행14:22절과 함께 2장). 바울처럼 누가에게도 "지금(now)" 그러나 "아직 아니(not yet)"야 말로 이 세상에 있는 기독교적 실존이다.

눅18:1-8절은 마음을 느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경고한다. 이 단락은 17:20절에서 시작된 종말론적 강 연의 확장이다:

(a) 18:1절은 제자들이 여전히 연설을 듣고 있음을 보여준다.

(b) 인자가 올 것이라는 표현(18:8절)이 17:22, 24, 26, 30절에서도 반복된다.

여기서 우리는 내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과 많은 의문을 생기게 한 행동들에 관한 의문과 마주친다 (참고. 12:45-46; 벧후3:4절 이하; 클레멘스후서23:3-24:1: 클레멘스후서 11:1-7절). 정말로 인자는 오는 가? 이 모든 시간 뒤에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지지할 것이라고 우리는 실제로 믿을 수 있는가? 수년 안에 "왕국이 오라"고 우리는 기도하지만,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18:1-10절에 나오는 비유는 말한다. 누가는 말하기(1절)를 제자들에게 기도하고 마음을 느슨하지 않게 하도록 격려한다(참고. 21:36 절). 이 비유가 처해있는 문맥에서 본다면, 이 이야기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내림에 대한 희망을 버리 지 않고 오히려 왕국이 임하도록 계속해서 기도하라고 격려한다. 사람의 필요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무관심한 불의한 재판관이라고 하더라도, 단지 자신이 가진 것을 없애달라고 하는 과부의 주장을 당연 한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면, 의로운 재판관인 하나님은 얼마나 풍성하시겠느냐?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 짖을 때, 하나님은 빠르게 택하신 자를 변호하실 것이다. 내림을 위해 기도하라.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 실하셔서 자기 백성을 변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단락은 또한 의심하는 병에 걸린 자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종말까지 믿음 있는 제자가 남아 있 을까(참고. 히6:11-12; 10:36- 39; 벧후3:11-14; 계2:7)? 비유의 서론(1절)은 어떻게 하는 것이 신앙인지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기도하기 때문에 사람은 낙망하지 않는다. 신앙이 유지되는 것은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에 달려 있다. "기도 속에서 우리는 현실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며,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물 을 실제의 모습 그대로 보기" 때문이다 (H.A.Williams, The Simplicity of Prayer [Philadelphia: Fortress, 1977], p.69.). "우리가 기도를 적게 할수록 기독교적 방식으로 삶을 경험하는 것도 적어진 다. 우리는 다른 정신세계로 이주한다."(J.Neville Ward, The Use of Praying [New York: Oxford University, 1977], p.141.) 그러므로 누가적인 시각은 항상 기도하라(빌4:6-7절)는 것이다.

눅18:9-30절은 8절b에서 제기된 문제를 다루고 있는 복합 단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신앙을 볼 수 있을까? 이 단락은 내림 전 시기에 하나님/예수에 대한 우호적인 반응과 적대 적인 반응을 실례로 들며, 느슨한 두 개의 병행 부분으로 들어간다. 좋지 못한 상황 속에서 불신앙의 가면이 벗겨지는 것과 불가능한 것 같은 사람들 속에 있는 신앙의 모습을 각 부분은 담고 있다.

(1) 첫 번째 부분인 눅18:9-17절은 비유(9-14절)와 비유의 요점을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15-17절)로 구 성된다. 비유는 성전에서 기도하는 두 사람을 설정한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11-12절)이고, 다른 한 사 람은 세리(13절)이다. 바리새파(Pharisee)는 1세기 유대주의 종파 중에서 가장 자유롭고, 경건하고, 헌신 적인 종파에 속한다. 더욱이 이 바리새인은 바리새파의 요구 이상을 행한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의 십일조를 행한다. 유대 의식에 따라서 기도한다(참고. 시17:3-5절). 하나님을 삶 의 풍성함의 근원으로 여긴다(18:9절의 편집적인 서론은 이점을 놓쳤다).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도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 사람이나 기도자에게 어떤 잘못이 발견될 수 있는가? 바리새인은 그 시대 종교인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종교인이다. 다음에 나오는 세리는 그의 부정직함과 유대 백성들에 대 한 불충과 더러움(그의 자세는 그도 이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으로 인해서 팔레스틴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멸시를 받는 사람들 중에 속한다. 이 세리의 기도 역시 유대적인 의식을 따르고 있다(참 고. 시51편). 절망에 대한 탄식, 자비에 대한 간청이 그것이다. 그의 상황은 정말로 희망이 없는 상황이 다. 만일 그가 회개한다면, 5배의 배상을 해야만 한다. 만일 그가 자신의 더러운 삶을 청산하고자 한다 면, 그는 그의 생계를 잃고, 로마의 미움을 살 것이다. 이 사람은 그 당시 가장 나쁜 사람의 전형이다. 이 사람을 옳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는 말한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 보다 더 의롭다함을 받고 자기 집으로 내려갔다("용서받다"-참고. 에스드라12:7절에서 "의롭다 함을 받 다"는 기도 중에 듣게 되었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이 이야기는 상황 역전이라는 전체 누가복음 주제와 잘 어울린다. 새로운 세대는 지금의 악한 세대의 가치와 구조를 바꿀 것이다. 탄생 이야기(the birth narrative)(1:51-53절)와 평지설교(Sermon on the Plain)(6:20-26절)에서도 이러한 주제를 볼 수 있다. 여행 이야기(9:51-19:44절)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종말론적인 역전을 보여준다. 지금 악하다 선하다고 하는 평가마저도 뒤바뀔 것이다. 다음의 구절들을 생각해보라. 10:29-37절(선한 사마리아사람/악한 제사장 레위인); 10:38-42절(행동하지 않은 선한 마리 아/행동하는 악한 마르다); 11:37-41절(선한 더러운 자/악한 깨끗한 자); 12:13-34절(선한 가난한 자/악 한 부자); 14:7-11절(선한 낮은 자/악한 높은 자); 15:11-32절(선한 탕자/악한 형); 16:19-31절(선한 나사 로/악한 부자); 18:18-30절(선한 가난한 자/악한 부자) 18:9-14절(선한 세리/악한 바리새인)은 이런 주제 문맥에 의한 예수의 가치 역전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좋은 예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는가? 바리 새인처럼 분명히 선한 사람이 무엇을 잘못했는가? 세리처럼 분명히 악한 사람을 무엇 때문에 옳다고 할 수 있는가?

이 비유는 무엇보다 먼저 좋지 않은 상황 속에 있는 불신앙의 가면을 벗겨내고 있다. 서론(9절)은 이런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이 비유는 이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a) 그들은 스스로 옳다고 한다(자족하는 경건).

(b)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긴다(영적 교만).

이런 자세를 결론(14절)은 자기를 높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진상이다. 그는 의에 대 해 자족하며(12절), 자기 나은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하찮게 본다(11절). 그는 자신이 행한 것과 행 하지 않은 것을 신뢰한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낮추시는 자는 바로 이 런 사람이다.

바리새인의 가면을 벗기면, 우상숭배가 드러난다. 그는 하나님의 특권을 참칭하였다. 이것은 악마적인 행동이다.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다(참고. 고전4:5절). 다른 사람들을 업신 여기지 말고 삶의 풍성함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종교적으로 더 낫다고 느끼지 않는 것이다. 믿음은 결코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게 하는 것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영적인 교만은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며,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자신의 높아짐을 역전시킬 것이다.

두 번째 이 비유는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 속에서 믿음을 정의한다. 경멸스런 세리의 기도가 응답되었 다. 왜?

(a) 그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했다(은총).

(b) 그는 자기가 행한 것들이 아니라 자기가 받으려 하는 것을 희망했다(용서).

결론은 이런 태도가 자기를 낮추는 것이라고 말한다(14절).

똑같은 관점이 바로 다음 단락, 18:15-17절에서도 이어진다. 반면에 막9:40절은 결혼, 자녀, 소유에 대해 서 가르치는 일련의 전승층의 부분으로서, 이와 똑같은 자료를 사용한다. 누가는 이 자료를 제자가 되려 하고, 인자가 올 때 신실하게 발견되려면 무엇을 생각해야 되는지를 그리고 있다. 이 문맥에서 하 나님의 나라를 영접하기 위해서는 어린 아이와 같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겸손하라는 것을 의미한다(참 고. 약4:6-10; 벧전5:6-10절에서 겸손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은 탁월한 영을 가진 자를 기뻐하신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 런 분은 아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은 돌이키지 않는 사악한 죄인을 피하신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또한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분이 아니다. 왜 그런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말하는 14절a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판단을 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행동하시는 지를 감 히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고 주장한다.

(2) 눅18:9-30절의 두 번째 부분인 눅18:18-30은 깨달음의 이야기(recognition story)(18-23)와 예수와 그의 제자들 간의 대화(24-30절)로 구성된다. 이 두 가지 요소들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사람과 하나 님 앞에서 낮추는 사람의 예를 보여준다. 깨달음의 이야기(그가 전에 알지 못했던 것에 관한 무언가를 알게해주는 이야기이다)는 율법사의 가면을 벗긴다. 율법사는 새 시대를 상속할 하나님의 백성 중에 거 하게 하는 삶의 방식에 대해 예수에게 질문한다. 신30:15-20절의 정신에 따라서, 예수는 계명을 말하였 다. 율법사가 어렸을 적부터 이것들을 지켰다고 분명하게 말하자,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오 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22절)." 이 말씀으로부터 율법사는 전에 알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배웠다. 그는 자신이 우상 숭배자였음을 배웠다. 비록 그가 하나님과 돈 (mammon)을 동시에 예배하려고 했지만, 검증을 받게 되자, 자기 의 재산이 실제로는 자기 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는 언제나 인간이 의지하고 있는 지상의 안전장치를 제거할 것을 요구한다(E. E. Ellis, The Gospel of Luke, p.217.)." 그는 부족한 신앙 때문에 가장 중요한 첫 째 계명을 실제로 지 키지 못했다. 예수는 부자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응답한다(24-27절).

예수와 그의 청중과의 이 대화(24-30절)는 우상적인 관계들과 결별하여 예수에게 바쳐진 삶을 신앙이 라고 정의한다. 율법사가 거부한 이 소명에 충실한 제자 베드로가 말한다: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 을 다 버리고 주를 쫓았나이다(28절; 참고. 5:11, 28절)" 왕국을 위해서 모든 것과 모든 관계를 이렇게 버리고 겸손(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내림 때에 인자는 이것을 신앙으로 인정 한다(참고. 9:57-62; 14:25-33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가족을 버린 자는 금생에서 더 많은 것으로 받게 될 것이다(30절). 아마도 이것은 교회에서의 새 가족에 대한 말일 것이다. 이 원리는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자는 하나님이 주고자 하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는 것이다. 막10:30절, 마 19:29절과는 다르게 누가는 부를 약속하지 않고, 다만 공동체만을 약속하였다(29절의 '집'은 가족의 일 원인 '부인, 형제, 부모, 자식'을 의미한다.). 저자는 어떤 필요한 경우나 유용한 관계 속에서도 경건을 부유함(prosperity)과 연결하지 않는다(참고. 행11:27-30; 24:17절). 그에게서 경건은 때로 가난함이다(눅 2:24; 14:21; 16:19절 이하). 이것은 부와 가난에 대한 더 큰 성서적 관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구약성서에는 부와 가난에 대한 다양한 태도가 있다.

(a) 어떤 그룹에게 부는 의로움으로, 빈곤은 병든 것과 관계가 있다: 예를 들면, 신명기 신학(신28:12절 이하; 8:7-10; 26:1-9절)에 속하는 지혜 그룹(잠6:6-11; 10:4; 28:19절)이 그 예이다.

(b) 다른 그룹의 경우에 부는 악과 연결되어 있으며, 반대로 가난한 자는 하나님이 옹호하는 의로운 자 로 여겨질 수 있다: 예를 들면, 예언 문학에서(암8:4절 이하; 믹2:1-5; 렘5:28절) 그리고 다른 지혜 그룹 (잠28:6; 시락10:21-23절)에서 그렇다

(c) 여전히 다른 그룹에서 부도, 가난도 이상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 모두가 타락시키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의 필요에 맞게 적당히 있어야 한다(잠30:7-9절). 그러므로 부에 대한 일관된 관점 은 없다.

신약은 부와 소유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다: 부나 가난은 가치가 아니다. 이런 입장은 신학적인 상황에서 주어진 지적이다. 비록 부가 창조(즉, 죄로부터 분리. 참고. 에덴 동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의 도라고 하더라도, 부는 부활 이후 새 시대 속에 있는 그의 의도이다(참고. 마8:11-12 혹은 메시야적 연 회에 대한 기술). 현재의 부와 가난은 모두 피조물의 타락과 연관이 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우선적으 로 피조물이 자기 죄(우상과 불의)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금생에서 믿는 자에게 부가 보장되지 않는다(요3서 2절은 요10:10절에서와 같이 어떤 재정적인 축복도 말하지 않는다. 막 10:29-30절은 아마도 기독교 공동체의 재원에서부터 기독교인에게 유용한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빌4:10-13절에서 다른 식으로 가난과 부에 대해서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리 고 우리의 유익(즉 궁극적인 구원-롬8:28절)을 위해 오히려 빈곤과 풍부함을 이용하신다. 만약 우리와 함께 교제하시기 위해 풍부함의 기적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불완전함에서 치유되기 위해 알거지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것이다.만약 우리 가 부요함을 다룰 줄 안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신다면, 불행한 자들과 나누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 신약성서에는 소유에 대한 두 가지 주요 관점이 있다: 하나는 물질에 대한 우상적인 집착이 있어서는 안 되고, 개인의 마음이 의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신앙 공동체에서 생활의 구조가 신앙의 가치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신약성서는 지금, 여기서 믿는 자들에게 번영이 보장되어 있다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은 실현된 종말론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