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기

17:11-19:44 (B.18:31-19:44)




눅18:31-19:44절은 17:1절에서 시작한 잘 짜여진 긴 단편의 두 번째 부분이다. 각 부분은 예루살렘을 향 하고 있는 예수의 움직임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연이어서 치유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에 는 종말론 단락,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에 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예루살렘을 향하는 예수의 움직임(18:31-34절)을 말한 다음, 여리고(18:35; 19:1절)와 연결된 두 이야기 (18:35-43; 19:1-10절)가 나오는 데, 이 이야기에서는 예수가 준 구원(18:42-se,swke, se, 이것이 너를 구원하였다; 19:9-swthri,a,구원.)에 대해 다룬다. 여기서는 예수가 준 선물(18:43; 19:8절)에 대한 사람 들의 반응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 두 이야기는 회개의 결과로 인한 전형적인 모습(paradigms)을 보여준 다. 먼저 18:35-43절은 마20:29-34(두 소경), 막10:46-52(소경 바디매오)절의 공관전승과 병행을 이룬다. 이 3 복음서에서 공통되는 것은 소경의 요청이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 고 "내/우리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이 예수에게 바라는 바이다. 예수는 이 요구에 대해 소경을 고 침으로 답한다. 분명히 이 치유는 다른 문제를 지각할 수 있는 문을 열었다. 치유 결과 그/그들은 예수 를 따랐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사람의 입장에서 질문한 한 가지 물음에 대한 예수 답변은 예수가 해결 할 수 있는 또 다른 단계에 대한 것에 대해 알도록 이끈다. 예수는 그/그들이 살고 있는 곳을 버리고, 그/그들이 살기에 필요한 곳으로 그/그들을 데려갔다. 마태와 마가 이야기와 누가 이야기의 결정적인 차이가 눅18:43절과 마20:34절 그리고 막10:52절에 나온다. 마태에는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쫓으 니라." 마가에는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쫓으니라." 누가에는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 을 돌리며 예수를 쫓으니"이다. 이 누가의 시각은 17:15, 18절에서 깨끗해진 나병환자의 반응과 유사하 다(참고7:16절). 치유에 대한 이 사람의 반응과 회개는 수직적인 것 즉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참 고. 7:36-50절). 신체적인 필요를 위한 이 만남이 영적인 회개로 이끌어 열렬한 찬양을 하게 한다. 여기 에 나오는 이것은 때때로 회개의 한 전형적인 모형(paradigm)이다.

회개의 결과로서 두 번째 전형적인 모습(paradigm)이 19:1-10절에 나온다. 이것은 논쟁 이야기(a conflict story)(예수 행동/1-6절, 7절에는 비평, 이에 대한 예수 반응은 9-10절)인데, 이 이야기는 누가 복음 5장에 나오는 레위(Levi)를 부른 이야기(둘다 다음과 같은 것이 나온다. 예수는 어디론가 가고 있 는데, 그곳에 세리가 있었다; 예수가 부른다; 긍정적인 반응이 주어진다; 그러자 예수가 그 세리의 집으 로 들어간다; 반대가 생겼다; 예수는 그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반응한다. 그리고 "내가 왔다"는 말이 덧 붙혀진다)와 많은 점에서 비슷하다. 8절은 처음 읽을 때에 문제가 있는 구절로 나타난다. 이것은 7절과 의 연결을 끊어놓는다. 7절에서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왜냐하면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기 때 문이다." 그리고 9절b에서 예수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 다"라고 반응한다(삭개오에 대해 백성이라고 한다.). 게다가 8절은 매우 누가적이다: "주여"와 "회개(참 고. 5:32절)." 저자는 전승되어 내려오는 한 이야기에 8절을 더한 것처럼 보인다. 본래 이 이야기는 예 수와 삭개오가 함께 한 식탁 교제에 대해 말하였다. 여기서 삭개오가 예수를 기쁘게 영접한 것은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참고. 7:35-50절). 8절을 첨가함으로써, 저자는 이 식탁 교제들 을 통해 은총에 대한 이 부유한 세리의 적절한 반응을 자세히 설명한다. 이것은 수평적인 은총이었다. 삭개오가 말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 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나이다." 구약성서에서는 토색한 사람이 시인을 하고 자발적인 배상을 할 때 는 훔친 양에 1/5를 더하여 갚아야 한다(레6:5; 민5:7절). 고의적인 강도 행위에 대해 사람이 강제적으 로 행위 배상을 해야할 때, 동물이 살아 있다면 2배로 지불하지만, 죽었거나 팔았을 경우에는 4배나 5 배로 배상해야 한다(출22:1, 3절b-4; 삼하12:6절). 삭개오는 자기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 후자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며, 기꺼이 배상했다. 이러한 행위는 부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보여주었다. 사람에게 는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에게는 가능하였다(18:27절). 8절에서 세리인 삭개오는 결단하고 실천하였으며 그 결과 9절에서 예수는 삭개오의 삶에 구원이 임했다고 선언한다(참고. 7:36-50절). 그의 이름이 말하 는 대로 그는 참으로 의롭거나 순수한 사람이다.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전승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교회의 경험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면, 편집된 이 논쟁 이야기를 회개의 전형적인 모형으로 새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a) 이 단원은 예수가 어떻게 사람을 끌어당기는가를 보여준다(1-4절). "주님은 때때로.....주님이 아직까 지 알려지지 않았고 숨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맹목적인 감정으로 그들을 주님에게 데리고 온 사람들 을 격려한다....주님은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그 때에도 그들에게 자신을 드러낸다(Calvin's Commentaries: A Hamony of the Gospels, trans. T. H. L. Parker [Grand Rapids: Ederdmans, 1972], 2:281.)." 아직 알려지지 않은 그 사람 예수를 슬쩍 보기 위해서 무화과 나무 위를 오르는 삭개오를 끌 어 당기는 무언가가 주님에게 있다.

(b) 이 이야기는 또한 주님이 한 사람에게로 갔음을 말한다(5-7절). 계3:20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실제로 나타난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거한다'는 말은 바울(예. 갈2:20; 골 1:27절)과 요한복음(예. 14:23; 15:5절)이 널리 사용하는 용어이다. 예수가 죄인 삭개오(Zacchaeus)의 집 에 들어간다는 것은 용서를 의미한다.

(c) 이 구절은 덧붙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는 삭개오가 마음 속의 생각을 드러내 보였다고 인정해 주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이 사람(8-9절)을 보증한다.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이 보증을 입증해 준다: 변화된 삶(8절)과 예수의 증거(9절). 요한1서의 저자는 말한다.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도 다음의 두 가지 똑같은 근거를 말한다. 한 편 으로는 변화된 삶의 증거가 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 거니와(요일 3:14; 참고. 4:12절b)" 다른 한 편으로는, 내적인 증거가 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 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4:13; 참고. 3:24절b; 참고. 롬 8:15-17; 고후1:22절)". 누가복음의 저자는 지상의 예수 이야기에서 부활 이후의 실재를 미리 보여준다. 이것은 회심의 두 번째 모형(paradigm)이다.

눅19:11-27절에는 적어도 세 가지 구성요소가 있다:

(1) 11-12절a (비록 "그가 말했다고 하더라도")는 누가의 첨가 부분이며, 서론적인 자료이다;

(2) 3명의 종에게 자기 일을 맡기고 떠나 간 한 사람에 대한 비유이다(마25:14-30절);

(3) 12, 14, 15a, 27절은 이 비유가 정치적인 비유임을 말해주는데, 아마도 17b와 19절이 그 실례들이리 라(F. D. Weinart, "The Parable of the Throne Claimant [Luke 19:12, 14-15a, 27] Reconsidered," Cathorlic Biblical Quarterly, 39:505-14 [1977].). 이 요소들은 구원사에 대한 은유(allegory)로 결합되었 고, 세 가지 요점을 만들고 있다.

1) 17:22절 이하에서 처럼 여기서 저자는 실현된 종말론(over -realized eschatology)을 배격하고 있다. 서론은 "그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고 지적한다. 다음에 나오는 이 은유(allegory)는 종말은 아직 아니라고 말한다. 먼저 예수는 왕권을 받 기 위해서 떠났으며(참고. 행1:11; 2:36절), 다시 올 것이다(참고. 행3:20-21절). 왜 누가는 부활절 이후 자기의 독자들에게 이 점을 분명하게 강조하고자 했는가? 19:11절이 누가 교회의 문제점을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면, 아마도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을 내림(parousia)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 이에 대한 대답으로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직 아니다(not yet)." 부활 (ressuration)/승천(ascension)과 내림(parousia) 사이에(추론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일어나는 것과 자신의 부활 사이에) 서로 차이가 있다.

2) 이 비유의 주요 초점은 귀인이 돌아올 때 세 종의 책임에 대한 것이다(15절b-26절). 여기서 누가는 질문을 제기한다. 승천과 내림사이의 이 기간(interim) 동안 예수 종들의 책임은 무엇인가(참고. 12:35-48절)? 이들에게는 자기들의 명령에 신실할 것이 기대된다. 신실한 종들은 생산적인 자들이다. 즉 자기들이 부여받은 것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자들이다. 그들은 보상받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일할 재원이 똑같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차이점이 고려되었다. 비록 누가가 마25:30절처럼 아무 것도 말하 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비생산적인 종은 벌을 받을 것이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 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고전3:10-15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누가도 신실하지 못한 종의 공로는 불타서 없어지지만 "그 자신은 구원을 받을 것" 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내림(재림) 시에 제자들에게 내려질 심판은 그들이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들이 칭찬과 보상을 받을 것인가 여부에 초점을 맞춘다.

3) 비록 누가는 세 번째 종의 마지막 처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귀인이 자기를 다스릴 것을 거절한 이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다(14, 27절). 14절의 이야기는 동시대 사건들을 이 용하고 있는 듯하다. 기원전 4년에 아켈라우스(Arche laus)는 자신의 아버지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의 왕국을 얻기 위해 헤롯을 떠나 로마로 갔다. 유대인들은 봉기하였고, 그를 반대하기 위한 50 명의 사절들을 로마에 보냈다(Josephus, Antiquities, 17:8:1 § 188; 17:9:3 § 222; 17:11:4 § 317; War, 2:6:1, 3 § 80, 93). 누가의 비유는 예수의 왕권을 거절하는 유대인들(참고. 23:2, 36-37절)(그리고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 대해 말하기 위해 당시의 이 사건들을 이용한다. 내림 때에 예수의 통치를 거절한 이들은 심판받을 것이다(27절: 참고. 12:8-9; 행17:30-31절):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27절은 19:29-44절의 주요 쟁점인 예루살렘에 의한 예수 의 거절이라는 상황을 위해 설정되었다.

눅19:29-44절은 세 가지 사건을 담고 있다:

(1) 예수는 나귀를 타고 환호를 받는다(29-38//마21:1-9//막11:1-10절);

(2) 바리새인의 저항(39-40//마21:15-16절);

(3) 예루살렘에 대한 애가(41-44절).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제자들(37, 39절)"이라는 단어로 연결된다; 첫 번째 세 번째는 "평화"라는 말로 연결된다(40, 44절).

1) 19:29-38절에서 예수는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간다. 예수가 나귀를 탄다는 전승은 올리브 산에 설정된다(19:29절). 이 구절은 슥14:4절의 반영하는 듯이 보이며, 그래서 종말론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하지만 19:11-27절과 17:22절 이하를 보면, 이것이 반드시 종말적인 용어로 생각될 필요는 없다. 게다가 나귀(짐을 질 수 없는 동물만을 성스러운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민19:2; 삼상6:7절)를 탄다는 것 은 슥9:9절(마21:5과 요12:15절은 이점을 분명히 한다)의 반영임이 분명하다. 예수는 전쟁 중에 오는 것 이 아니라 평화 가운데 온다(참고. 2:1-20절). 많은 누가적인 특성들은 우리에게 저자의 특별한 관심을 말해준다.

(a) 누가복음에는 나무 가지가 나오지 않는다(마21:8//막11:8//요12:13절). 나무 가지는 민족주의적인 색 채를 띠고 있기 때문에(마카비후서 10:7절), 이 단어를 생략함으로써 예수 운동에 어떤 혁명적인 요소 도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b) 그래서 심지어 제자들이 예수를 "왕"(38절-아마도 19:12, 15절을 차용한 것이리라)으로 부른다고 하 더라도, 이것이 23:2절의 고소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c) 누가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를 나귀 위에 태웠다(35절-마21:7//막11:7//요12:14절은 예수가 동물 위 에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제자들이 예수를 왕으로 맞이했다고 말한다: 예수는 스스로 왕권을 주장하 지 않는다.

(d) 누가복음에서 예수를 환호한 사람은 제자들이다(마21:9절//요12:12절에 처럼 군중이 아니다). 그들이 보았던 능력있는 일(참고. 18:43; 7:16절) 때문에 그들은 다소나마 예수의 정체(8:9-10절)를 이해한다. 비 록 그들은 아직까지 고난의 필요성(18:34; 24:25-27절)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누가복음에서 예 수가 나귀를 탄 것은 제자들이 예수를 평화의 왕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설정하고 있다(참고. 20:21-26; 23:2-4절).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부르시면서 오셨다.

우리는 시간을 기간이나 혹은 내용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하리라.

(a) 기간-연대기적 시간은 시계나 달력으로 측정될 수 있다;

(b) 내용-순간을 담고 있는 시간의 특성이다. 즉 식물을 심거나 밥 먹는 시간과 같은 것이다. 후자와 같은 시간은 우리에게 기회에 직면하게 하거나, 우리의 반응을 요구한다. 19:44에서 예수는 "초청의 시 기"에 대해서 말한다. 하나님이 그의 사역 속에서 자신의 백성을 부르셨으며, 자신의 백성을 돌아보셨 다고 저자는 말한다(참고. 7:16절). 예수가 활동한 시간의 내용은 하나님의 방문이었다(17:21; 11:20; 10:9절). 나귀 위에 예수를 태운 제자들은 예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방문을 인식하였다(35절).

2) 19:39-40절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저항(누가에만 나온다)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평화의 왕을 거절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참고. 행13:27절).

3) 19:41-44절에 나오는 도시에 대한 애가(참고. 사29:3; 시137:9절)는 예수를 거절하는 유대인들과 예루 살렘의 멸망을 함께 묶어 말한다(참고. 13:34-35; 21:20, 21, 24; 23:27-31절). 비극은 하나님이 방문하는 시간을 예루살렘이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44절; 참고. 1:78; 7:16절).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부르셨으나, 그의 방문은 인식되지 못하였다. 70년 이후 누가 공동체가 유대 백성들이 평화의 왕을 거절하였다는 것 은, 평화의 도시에 멸망을 있게 한 열심당의 폭력을 선택하였음(참고. 23:18-19, 25절)을 말하는 것 같 다. 이런 점이 이스라엘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대해 큰 의문을 갖게 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누가의 평가는 5가지 정도로 요약될 수 있으리라.

(1)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절하기 이전에도, 누가는 이스라엘을 두 가지 차원으로 생각한다: 첫 번째는, 종족이나 국가에 의한 역사적인 백성인 유대 국가(예. 7:5; 23:2; 행10:22; 24:10, 17; 26:4; 2:19절); 두 번 째는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 국가(예. 1:68; 2:32; 7:16; 행7:34; 13:17절).

(2) 저자는 유대인이 예수와 기독교 메시지를 거절한 내용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예. 2:34; 4:28-29; 13:34; 19:14, 39, 44; 20:13-16; 23:1-2, 18-19, 23; 24:20; 행4:1-2, 17-18; 5:17-18, 40; 7:58; 13:45; 14:19; 17:5-9, 13; 18:5-6, 12-17; 19:8-9; 20:3; 21:27-30절). 그와 동시에 누가는 최초의 신자들이 유대인이었 다는 것(행1:13-14, 21절)과 예루살렘과 그 밖의 다른 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행 2:41, 47; 4:4; 5:14; 6:7; 13:43; 17:4, 12; 21:20절)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므로 누가는 기독교 운 동이 이스라엘을 두 그룹으로 양분하였음을 보여준다: 회개하는 자와 회개하지 않는 자(2:34-35절). 이 스라엘은 복음을 거절하지 않았지만, 그 복음 때문에 분열되었다.

(3) 누가 관점에서 유대 나라에서 회개해야 할 장본인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믿는 유대인들게, 그리고 그들을 위해 약속이 성취되었다. 이 회복된 이 이스라엘은 이방인을 위한 모든 선교활동의 전제조건 이다(행15:15-18절).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을 재건하고 회복하셨다. 그 결과 이방인들이 주님을 찾는 다. 하지만 회개하지 않은 유대인의 일부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였다(행3:23절). 회개하 지 않은 유대인의 일부가 버림을 받을 것이라는 공식적인 진술은 세 번 나온다. 선교적인 활동의 주요 영역 속에서 한번 언급된다. 행13:46절을 보면, 바울(Paul)과 바나바(Barnabas)가 비시디아 안디옥 (Antioch of Pisidia)에서 믿지 않는 유대인에게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행 18:6절을 보면, 고린도(Corinth)에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그를 반대하자, 바울이 말한다.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마지막 행28:25-28절에 서 바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말한다.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을 알라 저희 는 또한 들으리라"

(4) 오직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해야만, 이방인을 향한 문이 열려진다고 누가가 생각했다고 말하는 것 은 잘못이다. 그리고 오직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여야만, 이방인을 향한 문이 열려진다고 말하는 것 도 똑같은 잘못이다. 하지만 이 두 견해 모두 누가의 전체 관점의 일부분이다. 즉 행15:15-18의 견해와 행13:46절과 18:6절, 그리고 28:25-28절의 견해 모두는 저자의 전체적인 관점을 나타낸다. 첫 번째 경우,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기독교 공동체는 회복한 이스라엘로서 이방인에게 구원을 전하는 도구이다(행 15:15-18절). 이방인은 믿는 이스라엘인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이나 할례없이, 그리고 변절자가 되 지 않고서도 이스라엘인이 되었다(행15장). 두 번째 경우, 누가의 교회가 민족적, 국가적 실체인 이스라 엘에게 복음을 전할 의무를 느끼지 않은 것은 회개하지 않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과 결별하였기 때문이다(행13:46; 18:6; 28:25-28절). 그러므로 하나님 백성은 더 이상 민족이나 국 가가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사도행전 마지막에서 볼 수 있는 누가의 관점이다(눅20:9-18절). 다만 믿지 않는 유대인은 예루살렘의 몰락과 성전 파괴를 경험하는 역사적인 백성으로 남을 뿐이다 (13:35절a; 19:41-44; 21:20-24; 23:28-31절). 그들은 더 이상 이스라엘에 속하지도, 하나님 백성에 속하 지도 않는다. 게다가 성전과 거룩한 도시의 멸망은 인종적, 민족적인 이스라엘이 예수를 거절한 결과로 이해된다(참고. 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3:5:3-6에는 이런 기독교적인 관점이 명백하게 진술된 다. 그리고 무고한 사람의 순교로부터 역사적인 재난이 비롯하였다는 유비적인 해석을 위해서는 고대사 (Antiquities 18:5:2 §116-19)에서 헤롯이 세례 요한을 다룬 것에 대한 벌로서 헤롯 군대가 멸망하였 다는 요셉푸스의 진술을 보라.).

(5) 롬9-11장에서 바울이 그랬듯이 누가도 전체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게 되 는 것에 자극을 받아서, 내림(재림) 전에 결국 회개할 것을 내다보았는지는 논쟁의 여지를 남긴다. 대부 분의 학자들은 롬11장에 나오는 역사적인 바울과는 다르게 행28:25-28절에 나오는 누가적인 바울을 생 각한다. 그는 이방 교회로 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소수의 학자들은, 롬11:20절에 나오는 바울처럼, 누가도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될 때를 바라고 있다고 생각한다(예. A. W. Wainwright, "Luke and the Restoration of the Kingdom to Israel," Expository Times 89:76-79 [1977].). 행1:6절과 눅21:24절, 28절, 22:28-30절은 이 입장을 지지한다. 이 본문에 대한 의문은 많지만, 누가-행전 (Luke-Acts)에서 이방 기독 공동체가 내림 이전에 유대 국가의 최종 회심을 기대하였다고는 할 수 없 을 것 같다. 저자는 개인적인 유대인들의 회심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선교의 방향에 관한한, 이 방인 선교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 점에서 누가는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ryr)과 비슷하다. 저스틴 은 차세대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도 여전히 기독교로 회심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Dialogue with Trypho, 32, 55, 64). 교회 내에서 살고 있는 이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저스틴은 율법을 지키도록 허용했다(Dialogue, 47:2).

이스라엘을 말할 때, 누가의 입장은 다음의 세 가지 입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기독교는 유대교의 완성이다;

두 번째, 국가-인종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과 동일하지 않다. 국가 그 자체를 위한 미래의 희망은 없 다;

세 번째, 예수에 대한 개인적인 결단으로써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