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도의 대가

(눅9:51-10:24)




여행 단편(9:51-10:24절) 중 가장 중요한 사상 단락(unit)들이 여러 연결 장치에 의해서 연결된다. 눅 9:52절과 눅10:1절을 보면, 예수는 목적지에 가기에 앞서 누군가를 먼저 보낸다. 누가는 이렇게 눅 9:51-62절과 눅10:1절 이하를 연결한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하는 기사(9:52-56절)에 이어서 제자도(눅9:57-62절)에 대한 3중 대화가 나온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배척 이야기가 3중 대화 첫 번째 이야기에 반영되어 나온다. 두 번째, 세 번째 대화(60절, 6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이야기 는 누가적이며, 눅10:1절 이하와 연결된다. 그리고 9, 11절에도 왕국에 대한 언급이 반복해 나온다. 이 역시 누가적이다. 눅10:1-24절 단락(unit)은 여러 연결 고리로 연결된다: 1, 3-4, 16절은 '보내다'를 동사 로 사용한다; 5-7, 8-9, 10-11절에는 '네가 들어가는 어디서든지(집, 혹은 도시)'가 나온다; 12, 13-15절 은 '더 오래 참을 것이다(그날에 혹은 심판 때에)'는 말로 연결된다; 17-20절은 70인이 돌아 왔다는 표 현으로 연결된다(특히 17절에서는 기쁨에 대해서 말하며, 20절에서는 '기뻐하다'는 표현이 반복되어 나 온다.); 21, 22절은 '아버지'와 '계시'를 동일 개념으로 사용한다. 21-22절은 하나의 단락으로서 '같은 시 간'이라는 시간적인 언급을 하는 점에서, 그리고 예수의 '기쁨'을 말한다는 점에서 17-20절과 연결된다 (17-20절에서 처럼 단어는 다르지만 개념은 같다.). 결론적인 단락인 23-24절은 23절의 도입부(그의 제 자들)에 의해, 그리고 10:16절과 연결된 '듣는다'라는 핵심단어에 의해, 앞 구절과 연결된다. 이런 식으 로 저자는 9:51-10:24절 전체를 하나로 연결한다.

이 단락은 ABA' 형태를 띠고 있다: 9:52-56절은 A이다; 10:1-24절은 A'이다; A와 A'에서 예수는 자기 의 도래를 준비시키기 위해서 제자들을 파송한다; A와 A'에는 배척의 동기가 나온다. 눅9:57-62절은 B 이다; 예수를 따를 때에 치러야 할 대가가 여기서의 초점이다. 눅9:51-10:24절이 말하고자 하는 사상에 대해서 논할 때는, 반드시 누가 자료의 패턴을 고려해야만 한다. 그래서 눅9:52-56절과 눅10:1-24절은 함께 다루어야 하고, 눅9:57-62절은 따로 다루어야 한다.

A(눅9:52-56)와 A'(눅10:1-24)는 세계 선교라는 누가 신학을 반영한다(눅2:32; 3:6; 4:25-27; 8:26절 이 하). 한편으로 예수는 눅9:52-56절에서 사마리아 영토로 들어간다. 비록 그가 사마리아에서 배척을 받았 지만, 이 이야기는 예수의 삶의 이야기에서부터 행8장에 나오는 기독교인의 사마리아 선교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눅10:1-24절은 행13장-28장에 나오는 이방인 선교에 대한 예시이 기도 한다.

(a) 눅10:1절은 누가복음에서 독특한 구절로 70인 혹은 72인(i.e., 열둘이외에도)에 대해서 말한다. 이들 은 둘씩 파송된다. 이 구절은 누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열 둘에게 말하고 있는 눅22:35절 이 눅10:4절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0장은 원래 열둘에게 말한 자료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 이다. 본문은 70명과 72명에 대해서 똑같이 증거하고 있지만, 맛소라 본문, 창세기 10장에 의하면 민족 의 수는 70명이지만, 70인 역에 의하면 72명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어떻게 읽든 그 요점은 같다. 70명이 든 72명이든, 이것은 세계의 모든 민족을 상징한다: 선교는 보편적인 것이다.

(b) 선교 활동에 대해 열 둘에게 가르치는 마태 10장의 많은 자료들이 누가 10장1-24절에 나온다. 그러 나 누가에는 마10:5-6절에 나오는 말씀들이 나오지 않는다: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비록 누가가 비록 유대 지역 안에서의 70인 선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더라도, 누가는 말씀들을 생략하고 모든 국가를 상징하는 수를 말함으로써 이방인 선교를 예시하고 있다.

(c)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사건에서 일련의 내용과 순서가 대응적으로 나오는 것이 누가-행전을 지배 하고 있는 기본 유형이다(C. H. Talbert, Literary, pp. 15-23.). 누가의 이 두 작품 사이에 나오는 이런 병행주의(parallelism)에 의하면, 누가는 행13장 이하에 나오는 바울의 이방 선교와 대응하는 기사를 눅 10:1절 이하에 기록한다. 이러한 3가지 요소를 종합할 때, 누가가 10:1절 이하를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의 도하고 있음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눅9:52-56절이 행8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선교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 한 것처럼, 눅10:1절 이하는 교회의 이방선교를 예시하고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바울의 이방 선교가 정 당하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갈릴리 사역 초기 눅4:16-30절에 나오는 것처럼 여행 이야기(the travel narrative)와 눅9:52-56과 10:1-24(A와 A')에도 누가의 보편주의가 있다: 복음은 모든 이에게 전해져야 만 한다.

눅9:1-6, 52-56; 10:1절 이하 구절들은 복음서 내에 있는 같은 유형으로 하나의 의미를 나타낸다. 이 세 구절 모두 예수가 제자들을 '보냈다'고 말한다. 눅9:1-6절은 보냄 받은 사람들이 12명임을 분명히 말하 는 반면, 눅9:52-56절은 모호하다: 52절은 사자들을 보냈다고만 말할 뿐이다. 반면에 54절은 야고보 와 요한을 말함으로써 열 둘이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 같다. 10:1절에서는 70명(혹은 72명)의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말한다. 여기서는 '다른 사람'이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열두명 이상이 선교에 관련 되어 있다: 사실 사실 선교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에 열 둘에 의해서만 수행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열 둘과 바울처럼 다른 사람의 사역에 대해서도 구별을 두고 있는 사도행전 이야기의 암 시를 엿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볼 때, 눅9:1-6, 52-56; 10:1절 이하는 사명을 위해 살았던 예수 의 지상 생애에 근거한다. 예수는 행1:8절에서 제자들에게 이 사명을 명령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눅9:52-56(A)과 10:1-24(A')은 세계 선교 신학을 보여줄 뿐 아니라, 선교할 때 중요한 지침을 제공한다. 한편으로 A와 A'에는 선교의 보편성에 이어서 복음을 배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이 배척에 대한 두 가지 다른 반응이 나온다.

(1) 사마리아 일화(episode)(9:52-56절)를 보면,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를 거절하는 자들에게 하늘로부터 불을 내릴 것을 그에게 요청하였다. 이 내용은 왕하1:10절에 나오는 엘리야 일화(episode)를 떠오르게 한다(비교. 시락48:3절). 하지만 예수는 배척자들에 대한 어떠한 보복도 허락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배척에 대응하라는 지침이다. 이 지침은 비기독교인을 공격하려고 하는 태도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는 초기 기독교의 교훈이다(롬12:18-21; 벧전2:20-25; 3:16-17절).

(2) 70(72)인 선교 단락에서 배척에 대한 반응은 9:5절에서 반응하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눅10:10절은 제자들을 거절하는 사람들에 대한 상징적 행동으로써 신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가르친다(참고. 행 13:51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비시디아의 안디옥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의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렸다.). 이러한 상징적인 행위는 메시지를 거절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백성에 들지 못할 것을 선언한다. 이렇게 선언은 하더라도, 보복은 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상 흐름을 추적해 볼 때 알 수 있는 것처럼, 눅10:1-24절을 보면, 선교사에 대한 여 러가지 지침들이 나온다. 모든 고장과 마을에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10:1) 후에 하나님께 선교 사역을 위한 일꾼들을 보내줄 것을 기도하라는 요청이 나온다(2절; 참고. 행13:1-3절). 선교사들은 자기들의 안 전(3절)과 생존(4절a)을 철저히 하나님께 의존한다. 이들의 선교는 시급하며 결코 지체되어서는 안된다 (4b절; 참고. 왕하4:29절). 선교사는 다른 사람의 호의를 끌어내려고 애써서는 않된다(참고. 고전9:4절 이하). 그리고 한 집에서 접대를 받고 있을 때에 다른 집으로 옮기지 말아야 한다(5-7; 행16:15; 참고 왕상17:15; 왕하4:8절). 이들은 유대인 음식 법에 얽메이지 말고 차려주는 대로(8절; 참고. 고전10:27절) 먹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능력있는 행동으로 선포되어야 한다(9절. 참고. 눅11:20). 선교사들도 예수 와 동일시되기 때문에 선교사를 배척하는 행위는 심판을 자초한다(12, 13-15절): 선교사를 배척하는 것 은 예수를 배척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와 아버지가 동일하기 때문에 예수를 배척 하는 것은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다(16절; 행9:51; 22:7-8; 26:9-11, 14-15절). 사탄의 존재를 부수는 능 력을 보여준 선교사들의 사역 속에서 예수의 능력은 분명하게 드러난다(18절; 눅10:19절을 행28:1-6절 과 비교해 보라; 행18:9-10; 행27:23-24절). 하지만 사탄적인 힘을 압도하는 능력의 드러남이 제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주의 사자가 그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면서도 하나님 나라 를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참고. 마7:22; 고전9:27절). 영혼의 구원이 선교사들의 가장 근본적인 관심이 되어야 한다(20절; 참고. 출32:32; 시69:28; 시87:4-6; 시139:16; 단10:21; 단12:12절). 이것은 제자 들로 하여금 기적적인 것에 덜 관심 갖도록 하려는 경고이다. 예수 이름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 책에 자기 이름이 기록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 자들에게 오 히려 주어진다(눅10:21절). 하나님만이 자기 아들이 누구인지 아신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권위를 주셨다. 이 권위는 선교사들이 행하는 권위이다(눅10:22; 참고. 눅3:21-22절). 더 나아가 아들은 아버지를 알기 때문에 아버지와 그의 뜻을 알려준다(눅10:22b; 참고. 눅9:35절). 마침내 예수 제자들은 자기들이 본(경 험한) 것 때문에 축하를 받는다. 이들은 성취의 때가 올 때 사탄을 압도하는 선교사들의 능력의 표지를 보았기 때문이다--이 성취의 때를 과거의 사람들은 볼(경험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이 요약을 통해 다음 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교회의 이방선교를 예시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복음서가 쓰여질 당 시의 요구 사항에 부합할 어떤 교훈이나 지침(예. 선교사 의무: 자기들 앞에 있는 어떤 음식도 먹어야 한다; 능력있는 사역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균형있는 관심)을 주려고 이 단락을 사용하였다.

눅9:57-62절(B)이 말하려는 주안점은 제자가 되기 위한 대가에 있다. 이것은 세 가지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a-나는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57-58);

b-나를 따르라(59-60);

a'-나는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61-62).

제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가 요청한 사명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음을 이 세 가지 대화는 보 여준다. 각각의 대화에서 예수는 자기를 따르려고 하는 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a(57-58)에서, 어디를 가든지 기꺼이 따르겠다고 말하는 자에게 예수가 반응한다. 사마리아 도시(9:53 절)가 예수 받아들이기를 거절했을 때, 예수는 그를 따르는 결과에 대해서 말했다: 예수는 집이 없다; 가정도 없다(참고. 시락36:24-26절 밤이 되었는데 아무 데서나 머무는 자는 총각이며, 자기 집이 없는 사람이다); 예수가 가는 곳 어디든지 따르겠다는 것은 인자가 가진 집 없는 운명까지도 공유하는 것이 다(참고. 눅18:28-30절). 그러므로 제자도의 결과에 대해서만 곰곰히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회의에 빠지 게 될 것이다.

b에서 예수는 주도권을 가지고 말한다. '나를 따르라(59a절)'는 것에 대한 반응은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59b)'이다. 죽은 자의 장사는 유대인들에게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 선되는 종교적인 의무이다. 일반적으로 시신을 만지는 것이 금지된 제사장조차도 가까운 친척일 경우에 는 만질 수 있다(신21:1-3절). 그러므로 부친 장사는 유대인에게 자식된 기본적인 도리이다(토비트4:3; 6:15절). 시신을 매장하지 않는 것은 시신을 방안에 그대로 방치한 것으로 여긴다. 시신 방치는 사람을 더럽게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어떤 종교적인 예식에도 참여하지 못한다. 시락서38:16절은 이런 맥락 에 잘 들어맞는다: "나의 아들아 죽은 자를 위해 눈물을 흘려라....존경심을 가지고 시신을 매장하라. 그 리고 매장을 소홀히 하지 말라." 예수의 대답은 바로 그 일을 즉시 행하라고 하였다: 제자는 가서 선포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제자가 된다는 것은 가족에 대한 어떤 의무보다도 우선되는 것이기 때문이다(참 고. 딤전5:8a에는 예수를 위한 포기 사항의 어떤 측면이 빠져 있다: 즉 여기서는 마땅히 가족을 돌봐야 하는 요청이 주어진다).

a'(61-62)에는 또 다른 사람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엘리사처럼 그는 가족과 작별한 후에 따르겠다 말한다(왕상19:19-21절). 예수는 잠언의 형태로 대답한다(Hesiod, Works and Days, 443; Pliny, Natural History, 18, 19, 49): 한 순간이라도 한눈 팔지 않고 목표를 행해 나아가는 자만이 쟁기 질을 똑바로 할 수 있다.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종말까지 참고 기다리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한 마 음만이 필요하다(참고. 빌3:13; 히12:1절 이하; 마5:5; 13:44-46절).

위의 3중 대화는 제자도의 대가에 대해 2가지로 말한다. 하나는 종말까지 한 마음으로 참아 예수께 헌신하라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부업처럼 다른 일에 덧붙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전부이 다. 다른 모든 의무들을 재고하게 할 만큼 '제자가 되는 것'은 엄숙한 직무이다"(Robert Karris, Invitation to Luk [Garden City, New York: Image Books, 1977], p. 130.)." 선교사로 파송받은 제자들 은 자기들이 예수와 맺었던 관계처럼 모든 일보다도 제자되는 것을 우선적으로 가지라고 독자들에게 요구하며, 더 나아가서 제자들끼리도 서로서로 그렇게 하라고 청자들에게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