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눅10:25-42)




눅10:29-42절은 눅10:27절의 두 가지 위대한 사랑 계명을 하가다(탈무드의 우화) 양식으로, 그리고 반대 순서로 해석한다.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29-37절)에서는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27b) 사랑하라는 것이 계명의 의미라고 말한다;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38-42절)는 전심으로(27a) 하나님을 사랑하는 명령에 대해서 해석한다. 눅10:25-42절에 대해서 말하려면, 누가가 설명하고 있는 두 부분 모두를 다루 어야만 한다.

누가 신학에 의하면, 선한 사마리아 이야기는 자기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설명한다. 눅10:25-37절 형식은 논쟁대화 형식이며, 2개의 병행부분을 가진다(J. D. Crossan, "Parable and Example in the Teaching of Jesus," New Testament Studies 18:285-307 [1972].). 전반부 25-28절은 4개의 요소로 이 루어져 있다:

(1) 율법사의 질문(25절);

(2) 예수의 반박 질문(26절);

(3) 율법사 자신의 대답(27절);

(4) 예수의 명령(28절).

후반부 29-37절도 역시 4개의 요소로 구성되었다:

(1) 율법사의 질문(29절);

(2) 예수의 반박 질문(30-36절);

(3) 율법사 자신의 대답(37a);

(4) 예수의 명령(37b).

두 부분 모두 '이웃(27, 36절)'과 '행하라(25, 28, 37절)'라는 중심 단어로 구성되었는데, 분명히 이 형식 은 다른 개념들과 비교할 때에 사용하는 누가적인 형식이다.

눅10:25-28절은 마태 22:34-40절과 막12:28-31절과 병행된다. (a) 마태에서처럼 누가도 율법사를 예수의 적대자로 말한다. 율법사는 예수를 시험하려고 와서, 예수를 선생(랍비)으로 부른다.

(b) 하지만 마태와 마가와는 다르게, 예수에게 한 질문은(25절) 가장 큰 계명 혹은 첫째 계명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상속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참고18:18절).

(c) 더 중요한 것은 누가에서만 예수가 질문한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써 있느냐?": 이것이 논박의 질문 이다.

(d) 누가만이 예수가 아니라 율법사가 대답하게 한다(27절).

(e) 마지막으로 누가복음서만 예수는 반응하고 명령한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 리라"(28절). 첫 번째 논쟁 대화의 전반부는 누가적인 결정을 따른다.

다른 한편, 눅10:29-37절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유일한 구절이다. 일반적으로 30-35절은 선한 사마리 아 사람 비유이고 29, 36-37절은 편집적인 구절로 알려져 있다. 두 번째 논쟁 대화는 누가 혹은 누가 이전에 생긴 것이다. 이 편집적인 자료가 29-37절을 전형적인 논쟁 대화 형식으로 만든다. 저자는 이런 형태를 갖기 위해, 자료를 가지고 만들었거나 혹은 여러 자료들 중에 더 나은 것을 선택하였다(누가가 마태, 마가 끝 부분에 나오는 율법사의 질문을 생략하고 있음에 주목하라.).

각 부분 시작에 나오는 두 질문을 대해 살펴본 다음, 각 부분 끝에 나오는 두 명령을 살펴봄으로써 이 이중 논쟁대화의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다.

(1) 율법사는 예수께 물었다. "영생을 얻으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26절)?" 하나님의 백성은 새 시대를 상속받는다고 유대인들은 생각했다. 대화하고 있는 사람 모두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 질문의 의도는 분명하다. 개인적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 백성의 자리를 보장받기 위해서 해야 할 것 이 무엇인가 율법사는 질문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렇게 율법사가 물을 때, 그는 하나님의 계약 백성인 다른 사람 을 알아 보는 방법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이 유대인은 "이웃"을 같은 백성이나 혹은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으로 생각하였다. 즉 그는 동료 유대인들을 이웃으로 생각한 것이다(참고 마5:43절). 유대인들은 자 기 백성들끼리도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고, 이웃의 영역에서 배제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면, 바리 새인들은 그 땅의 일반 사람들을 배제하였다. 그리고 쿰란 공동체도 "어둠의 자식들"을 제외하였다(1 QS 1:10; 9:21 이하). 유대인은 대개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인들을 이웃에서 제외시켰다. 여기서 율법 사의 질문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2) 논쟁대화에서 두 부분 모두가 같은 주제로 끝나고 있음에 주목하라: "하라"-29절은 "이것을 하라 (현재부정사).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37b절은 "가서 그와 같이하라(현재부정사)"는 것이다. 이렇게 표 현한 것은 계속적인 행위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는가?"에 대한 질 문으로 이 대화의 두 부분들을 시작한다면, 이 대화는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하는가를 명령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이 대화가 지시하는 행동 양식은 무엇인가?

첫 번째 부분에서 율법사는 하나님의 계약 백성이 갖는 태도에 대한 자기 견해를 말한다: 신6:5절-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레 19:18절-이웃을 사랑하라. 이 두 구절은 율법사의 대답에서 나온다. 12 족장의 유언(Testaments of the Twelve Patriarchs)이 기독교 이전 유대교를 말한다고 전제한다면, 두 개의 가장 큰 명령은 이미 유대인 생각 속에 있었다(T. Issacher 5:2; 7:5; T.Dan 5:3). "네가 옳게 대답 하였다(28a)--예수는 율법의 이러한 해석을 인정했다.--"이것을 하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참고. 28b. 레18:5; 갈3:12). 행함에 대한 강조는 "말씀을 듣고 그것을 행하라"고 강조하는 누가의 생각과 일치 한다(눅8:21; 6:47; 3:10-14; 1:38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계약에 대한 충성의 표시 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과 더불어 새 시대에 살도록 보장할 것이다.

누가는 연이어서 율법사의 자기 의로움에 대해 다룰 필요가 있기 때문에 29절(참고. 16:15; 18:19-21)을 이렇게 변형시켰다: "하나님 백성에 속한 자들을 어떻게 알아서, 그들을 내가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누가는 선한 사마리아사람 이야기를 한다. 이 이야기 이후에 예수는 묻는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절); 누가 하나님의 계약 백성처럼 행했느 냐? 누가 사랑하였느냐? 율법사는 당연히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자니이 다"(37a절). 이 단락은 예수의 명령으로 결론을 맺는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b).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편집 면에서 누가의 전형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 랑하는 것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주석처럼, 우리도 가서 이렇게 행해야 한다는 것이 이 이 야기의 요점이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해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에서 누가는 예수가 어떻게 행했느냐가 아니라 저자 당시 기독교인들이 행해야 할 것을 말하고자 한다.(Jan Lambrecht, "The Message of the Good Samaritan [Luke 10:25-37]," Louvain Studies 5:121-35 [1974]) 누가의 맥락은 하나님의 계약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랑을 보여주어야 함을 말한다.

(a) 사랑은 정결례에 제한 받지 않는다(참고. 행10, 15장).

(b) 사랑은 친구로만 국한되어서 안되고 보편적인 범주를 지녀야 한다(참고. 눅2:32; 3:6; 4:25-27; 10:1 절 이하).

(c) 사랑은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참고. 눅6:32-36절).

바로 이런 것들이 예수가 사랑했던 방법들이다.

눅10:25-37절을 정확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이 부분을 주석하는 과정을 무시할 필요가 있 다. 그 반면에 일반적으로 한 단락의 해석은 누가가 자료를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가 차지하는 역할을 다 룰 것이다. 이것을 진행하기에 앞서 최근의 비유 해석에 대해서 말할 필요가 있다(가장 좋은 요약은 노만 페린의 다음의 책이다. Jesus and Language of the Kingdom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6], pp. 89-193.).

최근의 비유 연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준다.

(1) 복음서에 사용된 비유 방식은 분명 원래 그 비유가 기능하였던 바로 그 형식은 아니다(예레미아스, Jeremias).

(2) 비유의 기능은 교훈과 자극을 주기 위함일 것이다: 즉 직유는 알려지지 않은 것을 잘 알려진 것에 비추어서 그 의미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하나님 나라처럼). 은유는 전혀 다른 두 요소들을 나란히 배치 하여 상상할 수 있도록 자극한다. 이 자극은 청자로 하여금 비유 안에 있는 상황을 판단하도록 만든다 (펑크 Funk, 크로싼 Crossan). 최근 많은 해석자들은 비유의 자극적인 기능을 강조하였다. 선한 사마리 아 사람의 비유는 이런 것들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논쟁 대화(controversy dialogue)에서 편집적인 것들을 제외하면, 눅10:30-35절만이 비유이다. 내용에서 유대교와 다르고, 형식에서 초기 기독교와 다른 이것이 예수의 사역 속에서 나타난 비유의 본래적인 모 습이다. 본래적인 비유의 유대교 청자들처럼 비유를 듣기 위해서는 독자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앗시리아(Assyria)가 기원 전 722년도에 사마리아(Samaria)를 정복한 이후에 그들을 추종하였던 혼혈인종의 후손들이었다(왕하 17 장). 혼합적인 종교를 소유하였던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웠고, 에스라(Ezra)와 느헤미 아(Nehemiah)가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야훼 성소(the sanctuary of Yahweh)를 복원하려는 노력에 대해 서 반대하였다(스 4:2이하; 느2:19; 4:2절 이하). 요세푸스(Jose phus) 는 이 사건은 페르시아(Persia)의 마지막 왕이 다스리는 시기(335-30 B.C.)에 일어났다고 말하지만(Antiquities 11:8:4 §324.), 그의 이야 기는 의심스럽다. 이 사마리아 성전은 기원전 128년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에 의해서 파괴되었 다(Josephus, Anti quities 13:9:1 §256; War 1:2:6 §63).-요세푸스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오랜 변절과 반역에 대한 분노 때문에 파괴되었다고 말한다. 폼페이(Pompey)는 기원 전 63년에 유대인의 속박으로 부터 사마리아인들을 해방시켰다. 기독교가 발생할 즈음에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 사이에는 적대감이 있었다(예. 요4:9; 눅9:52, 53). 랍비들 중에는 사마리아 사람들로부터 유대인들이 도움받았기 때문에 이 스라엘의 구속이 지연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이런 격언이 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의 생명 을 구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b. Sanhedrin 57a). 이런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 청자는 사마리 아 사람에 대한 어떤 말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반응할 수 밖에 없다.

두 번째, 성서에 충실했던 유대인들은 정결법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율법 중에는 죽은 시 체를 만지게 되어 생기는 부정을 다루는 것도 있다(민19:11-13, 14-19; Mishna, Eduyoth, 8:4). 위에서 살펴 본대로, 제사장들은 심지어 친척들의 장례에도 면제받았다. 다만 그들의 가족들(어머니, 아버지, 아들, 딸, 형제, 결혼하지 않은 여동생/레21:1-3절)의 경우에는 예외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제사장들이 부정을 피하기 위함이다. 심지어 대제사장은 자기 부모를 장례함으로써 자기를 더럽힐 수 없었다(레 21:10-11절). 그러므로 예수의 청자들은 제사장과 레위인이 거의 죽은 사람과의 일련의 접촉을 피했다 고 하는 것을 듣었을 때, 이들은 성서의 의도대로 그가 행동했다고 하는 것으로 청자는 이해하였을 것 이다(G. B. Caird, The Gospel of St. Luke [Baltimore: Penguin Books, 1963, p. 148.).

이 비유는 사마리아 사람을 영웅으로 그리고, 성경을 믿고 따르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죄인으로 말한다. 그러면서 비유를 듣는 자들이 이 단어들이 가지고 있는 시대 상황과는 다른 내용, 즉 말할 수 없는 것 을 말하게 된다. 나쁜 사람(사마리아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선한 사람(제사장, 레위인)은 나쁜 사람이 다. 만일 듣는 이가 비유의 이런 판단을 인정한다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의 가치들은 다 파 괴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예수의 생애 부분에 이 비유를 위치시킴으로써, 저자는 뭔가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려 하기보다는 고정된 개념에 도전하고, 자극하고, 그 개념을 부수게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예수의 판단에의해 전형적인 가치관이 도전을 받는다; 사람들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인 고정관념이 이 비유를 통해서 누구에게나 있는 이기적인 관념이라고 평가절하된다. 이것은 매우 자극적이다. 이 비 유는 다른 사람에 대한 선입관과 선과 악을 정의하는 기준들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또 이 비유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청자들과 너무나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는 바로 이 예수에 대해서 질 문하게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나의 평가를 뒤집어 놓은 사람, 그는 누구인가?

자극과 도전적인 예수의 원래 의도가 누가복음서에서는 제자들에게 자기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 치는 모범적인 이야기로 사용되었다. 저자가 원래 자료를 섞어 놓은 것은, 기능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 도, 연속성은 있는 것 같다. 같은 비유라 하더라도, 다른 가치로 말해진다면, 듣는 이들로 하여금 과거 의 회심과는 다르게 오히려 옛 가치를 바꾸게 한다. 옛 가치를 완전히 버린 새 사람만이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다. 비유를 통해 다시 얻게된 가치관은 우상적인 견고함이 깨어지는 만큼 새로워질 것 이다"(W. A. Beardslee, "Parable Interpretation and the World Disclosed by the Parable," Perspective in Religious Studies 3:123-39 [1979]).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하나의 모범적인 이야기로 사용한 목적은, 옛날 가치관을 이미 버린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구성해 주기 위함이다. "이 두가지 형태의 연설 - 확증과 동요 -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것은 기독교적 비전을 전달하 기 위함인 것처럼 보인다"(W.A.Beardslee, "Narative Form in the New Testament and Process Theology," Encounter 36:301-15 [1975]). 그렇다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그것이 전달되는 사 람들에 따라서 두 가지 기능을 한다. 즉 어떤 사람들의 세계와 가치는 깨트려져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세계는 더 견고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사상 단락(unit)의 두 번째 부분인 10:38-42절은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이다. 비록 누가 신학 차원 에서 사마리아 사람 비유가 원래 자기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의 의미를 다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일화는 첫 번째 명령의 의미를 다루고 있다. 눅10:25-28절과 연결된 눅10:38-42절을 이해하게 하는 실 마리는 아키바(R.Akiba)에 의해 주장된 해석적인 원칙이다: "성경의 매 단락은 그 다음에 나오는 단락 에 의해 설명된다"(신명기에 나오는 Sifre §131.) 여행 이야기의 교차대칭(chiasm) 구조 속에서 눅 18:18-30절은 눅10:25-42절과 상응하면서 보강된다. 두 단락 모두에 똑같은 배열이 나온다.

(a) 법에 대한 대화;

(b) 이웃 사랑;

(c) 주님 사랑(Bastian Van Elderen, "Another Look at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in Saved by Hope, pp. 109-19.)

네 모든 마음과 영혼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주님(예수)의 발 앞에 앉는 것을 뜻한다고 눅10:38-42절은 말한다. 사람의 발 앞에 앉는 것은 "누군가 아래에서 배우는 것"이거나 "누군 가의 제자가 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참고. 행23:3-바울은 "가마리엘 발 아래에서" 일으켜졌다). 모 든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라고 누가는 말한다. 분주함은 아무 것도 보증하지 못한다; 예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참고. 5:5). 본문적인 문제들이 마르다의 도발적인 요청에 대한 예수의 반응(40; 참고. 12:13; 6:41-42절)을 이해하기 어렵게 한다. 최고의 사본이 제공하는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하는구나; 한 가지로도 충분하다";

(2)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하는구나; 몇 가지만 혹은 한 가지만 필요하다."

주어진 증거를 가지고도, 최종적인 결정을 하기가 어렵다. 만일 (1)을 선택한다면, 그 의미는 마리아가 필요한 그 하나를 선택한 것이 된다. 그것은 제자도이다. 마리아는 접대하는 주인이 되기보다 예수의 칭찬을 받는 자가 되었다(참고22:27). 이 경우 마리아는 "주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것으로" 사는 자이 다(신8:3; 참고 눅4:4; 요6:27절). 만일 (2)를 선택한다면,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한 쌍 혹은 하 나의 올리브만 있더라도, 현재는 만족한다." 마리아는 이미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했다"(F. Danker, Jesus and the New Age, p. 133.). 이 선한 역할은 "영생을 갖게 하는 음식"이 될 것이다(요6:27). 예 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이 선물을 주었다. 이 구절을 어떻게 읽든지 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 수에게 복종하고 그의 칭찬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요점이다.

이 이야기에서 마리아와 마르다는 대조적인 교훈이다. 마리아는 예수에게만 전념하는 것으로 특징지어 진다. 마리아만이 예수의 칭찬을 받았다. 마르다는 분주해서 예수에게만 온전히 집중하지 않는다. 그 이 유는 "많은 봉사(much serving)(40절)" 때문이다. 예수를 위해 일하고자 했던 그녀의 소원이 오히려 예 수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녀에게 필요한 예수의 칭찬을 받지 못하게 하였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에서 사마리아 사람을 자기 이웃을 사랑한 자의 전형으로 그린 것처럼, 누가는 마리아를 하나 님이 온전히 사랑한 사람의 전형으로 그린다.

10:25-42절의 사상 단락은 제자들이 되기 위해 행해야 할 두 위대한 명령에 대한 해석을 다룬다. 자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마리 아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약 백성들에게 있는 두 가지 특징들이다: 즉 주님의 칭찬 을 받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그것이다. 만약 전자가 없었다면, 후자는 무용지물이 되거나, 자 신의 본분을 다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게 만드는 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