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 무엇을 위해, 무슨 이유로?

(11:1-13)




눅11:1-13절은 여러 개의 독립된 전승으로 구성되었다:

(a) 1-4절(참고. 마6:9-13);

(b) 5-8절(누가에만 나온다);

(c) 9-10절(참고. 마7:7-8);

(d) 11-13절(참고. 마7:9-11).

이 전승들은 기도라는 주제에 의해 모여졌고 내부 연결장치로 연결되었다.

(1) 1-4절은 다음의 여러 가지 방법들로 연결되었다:

(a)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2, 5절)"-누가에만 나온다;

(b) 아버지(2, 11절), 하늘 아버지(13절);

(c) 빵(3), 한 덩이(5절) 후자는 누가에만 나온다.

(2) 5-8절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8절)"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9절)"가 연이어 나옴으로 연결 된다. 후자는 마태7:7절에는 나오지 않는다.

(3) 9-10절과 11-13절은 "묻다(9-10, 11, 12, 13)"에 의해서 연결된다. 분명히 저자는 기도라는 하나의 단락(unit)으로 이러한 여러 자료들을 묶으려고 한다.

이 현재 형태에서 이 구절은 연이어 나오는 예수의 가르침(didache)(2-13절)으로 제자들에게 교훈하려 한다(1절). 이 구절의 내용은 무엇보다 먼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에 대해서(2-4절), 그리고 기도 하는 습관을 갖지 못하는 이유를(5-13절) 다룬다.

예수의 제자는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분명히 누가의 시각이 드러난다. 눅11:2-4절은 주님 기도 의 원래 형태를 보여준다. 기도에 대한 이런 모습이 초기 기독교에서 발견된다: 마6:9-13절; 눅11:2-4 절; 디다케(didache) 8:2, 디다케(didache) 안에 나오는 이 형태는 마태복음에 의존한다. 그러기 때문에 초기 교회에는 2가지 기본적인 기도 형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마태에는 유대 기독교 내에서 회람된 기도의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누가에는 1세기 말에 이방 기독교인들이 사용한 기도 형태가 나온다. 기 도의 본래 형태는 간구의 수에서는 누가의 경우가, 그리고 언어적인 면에 있어서는 마태의 경우가 더 일반적으로 더 원전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Joachim Jeremias, "The Lord's Prayer in Morden Research," Expository Times 71:141-46 [1960], R.E.Brown, "The Pater Noster as an Echatological Prayer," New Testament Essays [Milwaukee: Bruce, 1965], pp. 217-53.).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다음 의 결과들이 생긴다: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해지소서;

당신 나라가 임하소서.

내일을 위한 빵을 오늘 우리에게 주소서;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빚진 자들을 용서한 것처럼 우리

가 진 빚을 용서하소서;

그리고 우리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다만 우리를 악한 존재로부터 구하옵소서.

두 개의 "당신-간청(Thou-petitions)"과 세 개의 "우리-간청(Us-

petitions)"이 나온다. 두 개의 "당신-간청"은 같은 내용의 반복이다. 이미 제자들은 왕국 안에 있으며, 기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당신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요구는 최후의 완성을 요구하는 것이 다. 그리고 먼저 나오는 두 간청은 새 세대가 오도록 하나님께 중재 요청한다. 하나님에게 이 의미는 당신의 이름이 회복되는 것이고, 당신의 통치가 인정되는 것이다.

앞에 나오는 두개의 "우리-간청"은 제자들로 하여금 종말론적 승리를 간구하게 한다. '에피오우션 (evpiou,sion)', 이 단어는 잘 안 사용되기 때문에 그 뜻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3세기에 오리겐(Origen) 은 말했다(De Oratione 27:7). 그리이스 작가 중에 어느 누구도 이 단어를 사용한 예가 없었다. 어원적 으로 이 단어는 다음의 두 가지로 번역될 수 있다: "매일(evpi eivnai)" 혹은 "미래를 위하여(evpi + eivnai). 제놈(Jerome)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히브리인의 복음서는 그것을 후자 방법으로 읽되, 종말론 적인 빵, 하늘로부터 나온 만나, 혹은 메시야 잔치를 위한 음식으로 이해한다. 처음의 두 간청은 종말론 적이기 때문에, 종말론적 방법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하늘 양식을 위한 간청은 용서를 구하는 기도 즉 죄에 대한 종말론적인 용서와 병행된다. 새 세대가 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회복되 는 것이며, 하나님의 통치가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한다; 제자들은 메시야적 연회에 참여 할 것이며, 그들의 죄는 궁극적으로 제거될 것이다.

마지막 "우리-간청"은 악마가 역사하는 종말론적 유혹에 대한 것을 다룬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기 직 전에 하나님과 악마의 최후 로 싸우는 대결에서 제자들은 숨을 곳을 구한다: 우리를 유혹과 그 유혹의 근원으로부터 구하소서.

이 모든 기도는 하나님과 각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자들의 공동체의 기도이다("우리에게 주 옵소서, 우리 빵"; "우리를 용서하소서"; "우리를 인도하소서" "우리를 도와주소서"). "아바 아버지"는 기원 후 천년 경 유대인들의 기도에서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 즉 이 단어는 유대인 어린아이가 자 기 부모에게 말할 때 사용하는 바로 그런 말이다. 이렇게 흔히 사용하는 단어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거나, 불경한 것이었다(Joachim Jeremias, The Central Message of the New Testament [London: SCM, 1965], pp. 19-21.). 매우 독특한 이 관계는 격의 없는 친밀한 관 계라고 설명될 수 있겠다. 공동체는 기도에서 다음 두 가지를 요구하였다:

(1) 하나님과 제자 모두를 이롭게 할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신속한 도래

(2) 세대의 전환 전에 나타나는 종말론적 위기에서의 보호.

역사적 예수는 즉각적인 세대 전환을 위해서 기도하고 새로운 세대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기도하는 것은 순전한 마음을 요구한다. 마음은 요동하기 쉽기 때문 이다. 제자들은 본질적으로 단 한 가지, 즉 궁극적인 이상의 실현, 하나님 나라, 새로운 세대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제자들은 이런 것이 즉각 나타나기를 기도해야 한다. 왜 그들은 이 한 가지만을 바라지 못하는가? 왜 그들은 이 한 가지 일만을 바랄 수 없는 것인가? 이렇게 기도할 수 없는 그들에게 이것 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런 점에서 이 기도는 듣는 이들에게 욕망의 정화를 요구한다.

주님의 기도의 누가적 형태는 간구의 수가 아니라 단어에서의 원래의 모습과 다르다. 그러나 3-4절에 서 "우리-간구"로 시작하는 것은 원래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 옵소서"(3절). 누가의 현재 시제 "계속해서 달라"(마태는 단순과거 시제를 사용한다)와 누가의 독특한 단어 "날마다"(참고. 9:23; 19:17; 행17:11절)는 이 간구에 대한 이해를 결정한다. 'to.n evpiou,sion(톤 에피우시온)'이 "어디에서든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여기서는 "날마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겠다. 저자는 제자들의 기도가 매일 매일의 육신의 필요를 채워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임을 알고 있다. 이 상황에서 종말론적인 기도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제자들 중 어떤 이들은 특별한 소유물 없이도 파송되었으며(9:3; 10:4절), 그들의 요구가 충족되었다(22:35절)는 것을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하 고 있다. 그들이 소유를 위해 기도한 것은 매일의 필요를 위한 것이었다. 누가가 불필요한 것을 소유하 는 것을 적대시하였다는 것을 알면, 누가는 이런 것에 대해 적대적으로 표현한다(예. 12:16-21). "너희 는 오직 일용한 양식만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한 이 말의 의미를 사람들은 아마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절에 나타난 누가의 특성이 저자의 의도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다. 반면에 마태는 하나님에 대 한 관계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깨어진 상태를 '빚'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리의 공격을 누가는 '죄'라는 단어로 그린다. 하지만 누가는 간구의 두 번째 부분에서 '빚진 자'라는 단어를 생략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빚진 자를 모두 끊임없이 용서하고 있음을 상술한다. 이 문 장은 복음서 밖의 증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문맥에 의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이 단락도 역시 소유에 대한 누가의 관심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참고. 6:27-38, 특히 34-35, 30). 그들이 자기에게 빚진 자( "빚"으로 이해된다)를 모두 용서해 준 것처럼, 하나님께 지은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해야만 한다는 것 을 독자에게 알리는 것이 저자의 주안점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공동체 내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용서가 주어진다는 것은 마태의 본문보다 더 넓은 의미를 지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서든, 여기서 기도는 다시 역사 안에서 그 무엇을 위해 간구한다.

만일 3, 4절a에 나타나는 간구들이 이 세상에서의 제자들의 일상적인 생활과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면, 종말 직전의 고난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읽혀지는 4b절의 마지막 간구와는 다르다: "우리를 유혹에 들 지 않게 하소서"는 분명히 일상적 생활의 유혹에 대한 것이다(참고. 4:13; 22:38; 행20:19). 이 간구는 악 에 대한 내적 유혹뿐 아니라 신앙을 유혹하는 외적 시련에 대한 것이다(참고. 시락2:1이하; 롬5:3-5; 약 1:13). 그렇다면, 이 간구는 유대인의 기도와 병행한다. "죄의 기운에, 그리고 범죄의 힘에, 유혹의 세력 에 빠져들지 않도록 나를 인도하소서"(b. Berkoth 60b).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이라는 구절이 "유혹 받 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혹에 지지 않는" 것을 하고, 이런 부정적인 것이 생각 을 규정한다면, 이 간구를 "우리가 유혹에 굴복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J. Carmignac, Recherches sur le 'Notre Pere' [Paris: Letouzey & Ane, 1969], pp. 236-304, 437-45.). 이런 생각은 누가적인 사고와 섞여 있다: 예수(4:18; 22:28절.)와 그의 제자들(22:28; 행20:19; 14:22)이 유혹을 받지만, 성령의 능력 부음때문에 그들은 유혹에 지지 않고 승리하였다.

누가적인 첫 번째 두 간구도 매우 비슷하게 읽어야 할 것이다. 종말을 위한 요청이 분명히 배제되고 있 지는 않지만, 그 범위는, 제자들의 현재까지도 충분히 포함하도록 확장된다. 2절b 본문에 대한 변형은 "당신 이름이 신성시되소서"이다. 왕국은 "성령을 우리 위에 임하게 함으로" 온다(Tertullian, Aganist Marcion, 4:26.). 여기에서 이 두 가지 "당신-간구"를 이해할 방법이 있다. "하늘 아버지가 성령을 요청 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줄 것"이라는 11:13절이 주어졌다면, 이 간구는 성령의 선물이라는 용어로 분명 히 이해될 수 있는 왕국의 임함에 대한 요구이다. 비록 본문에 대한 변형이 본래의 것이 아니라 하 더라도, 독서를 통해서 이 구절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것은 누가-행전에 나오는 성령과 왕국의 관계를 설명한 후에만 결정할 수 있다(참고. J. D. G. Dunn, "Sprit and Kingdom," Expository Times 82:36-40 [1970-71]; S.S.Smalley, "Spirit, Kingdom and prayer in Luke-Acts.").

바울에게 성령은 다가 올 나라의 드러남이다. 성령이 임하는 곳이 왕국이다. 성령을 갖는다는 것은 여 기와 지금의 왕국에 참여하는 것이다(참고. 고전4:20; 고후5;5; 롬8:23; 14:17절). 왕국의 능력에 대한 사 상과 하나님 영의 역사하심을 매우 밀접하게 연결하고 있는 누가-행전(Luke-Acts)에서도 이와 같은 것이 발견된다. 사실 이것들은 같은 의미이다. 행1:4절을 보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40일 동안 나타나, 사도들에게 하나님 왕국에 대해서 말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는 성령 세례에 대해 말한다(행1:4-5절). 사도들이 부활하신 주님에게 왕국에 대해 묻자(행1:4-5), 그는 성령에 대한 말로 대답하였다(행1:6). 눅 12:32절은 말한다. 제자들에게 왕국을 주는 것이 아버지의 기쁨이다. 11:13절과 평행을 이룬다: 아버지 는 성령을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줄 것이다. 또한 17:21절은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유일하게 예수가 성령을 가진 자이기 때문에 그를 통해 왕국이 드러난다고 누가는 말한다(1:35; 3:22; 4;18절). 예수가 성령을 가지고 있기에 왕국은 예수 안에서 드러난다(1:35; 3:22; 4:18절). 누가-행 전(Luke-Acts)에서 성령의 임재는 "이미" 임한 왕국이다. 왕국이 있는 곳에 성령이 있다. 하나님의 종 말론적 통치는 성령에 의해 중재되며, 성령이 통치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예수는 성령의 탁월한 (par excellence) 운반자이다. 그래서 복음서에서 "당신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기도한 제자들은 오순절 에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서, 그 기도가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음을 깨닫는다. 이러한 경험 속에서 그들은 죽기 전에 "하나님 왕국을 볼 것이다"(9:27). 만일 왕국의 현재 차원과 성령의 선물을 동일하게 여긴다 면, "왕국이여 오소서"의 11:2절은 종말론적인 간구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간구는 또한 성령의 선물 을 구한다. 이 간구는 본문과는 다른 초기의 변형이지만,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누가의 사상을 잘 드러 낸다.

제자들은 무엇을 위해 기도할 것인가? 예수 삶의 정황(Sitz im Leben)에 의하면, 주님의 기도는 하나님 께 즉각적인 세대의 전환을 구하는 내용의 간구일 것이다. 이 기도 속에 들어 있는 요구들은 청자들 이 하나님과 그의 통치를 사모하면서 갖는 환상을 부수도록 촉구한다. 누가복음 상황에서 이 모범적인 기도는 교훈적인 목적이 있다. 즉 이 기도는 계속되는 역사 현장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제자들을 가르친다: 기도해야 할 내용은 매일의 빵, 용서, 유혹을 극복하 는 것, 성령 선물,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이다. 복음서 안에서 이 기능 변화는 50년 혹은 그와 같은 기 간 동안 있어 온 교회의 생생한 경험에서 비롯한다. 그때에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 속에서 능력 나타남 을 체험하였다.-그 능력은 세상을 멸할 것이다.-이 능력은 믿는 자들 중에 이미 활동하고 있다. 이 능 력은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줄 것이다. 이렇게 경험된 현실로부터 이들은 하나님이 역사를 달성하도 록 기도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필요에 끊임없이 채워주시기를 기도한다.

제자들이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눅11:1-13절은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의 가르침으로(5-13절), 그 리고 그의 모범으로(1절) 대답한다. 한 편으로, "주여 우리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치소서"라고 제자들 이 요청하는 것은 바로 예수의 모범 때문이다. 제자는 예수가 보여준 대로 기도한다. 예수는 실제로 기 도를 실천하신 분이다. 예수는 기도로부터 영적 힘을 공급받는다.

다른 한 편으로, 11:5-13절에 나오는 예수의 가르침은 기도해야 하는 이중적인 이유에 대해서 말한다. (1) 5-10절에 나오는 비유는 누가에만 있다(5-8절). 그리고 비유에 대한 해석(9-10절)이 연이어 나온다. 이 비유는 여행 중에 한 밤중에 돌아와, 먹을 것이 없는 어떤 이웃에 대한 이야기이다. 친구가 일어나 서 자기 필요를 들어 줄 때까지 뻔뻔하게 친구에게 요구한다. 이 이야기는 두 가지 방법으로 아주 다르 게 이해될 수 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이 요구를 들어 줄 때까지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간청하라는 것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이웃이 처음에 "아니라"고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간청이 응답될 때까 지 계속 간청한 것처럼, 제자들도 역시 하나님께 뻔뻔하게(RSV에서는 "끈덕진 요청[importunity]". NEW에서는 "부끄럼없이[shamelessness]") 계속 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 비 유를 "더욱 더 많은" 이야기라고 이해한다(참고. 18:1-8절). 이웃의 요청을 들어주기를 주저했던 사람이 단지 이웃이 뻔뻔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간청했다고 해서 그 요청을 들어 주었다고 한다면, 열정적이 고 능동적인 하나님께서는 너의 기도에 '더욱 더 많이' 응답하실 것이다. 제자들은 기도해야만 한다. 하 나님께서는 대답해 주시고자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해석이 더욱 더 그럴 듯 해 보인다. 왜냐하면 (a) 18:1-8절, 이 구절과 병행하는 구절이 이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b) 하나님은 분명히 기도에 응답하시기 때문에 사람에게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습관이 있음을 11:9-10절은 지적한다; (c) 11:11-13절은 "더욱 더 많이"의 형식을 취한다; (d) 첫 번째 해석은 마6:7절의 정신과 다 르다. 이렇게 볼 때, 5-10절의 기능은 왜 기도하는가에 대해 답변하는 것이다: 제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기 때문에 기도한다.

(2) 눅11:11-13절은 제자들이 기도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에 대해서 말한다-여기서는 다시 "얼마나 더 많이"라는 사상의 형식을 담고 있다. 11-13절은 마태의 평행구와는 두 가지 면에서 다르다(마7:9-11). 그 두 가지는 중요성과 내용이다.

(a) 누가의 두 비교는 생선-뱀과 계란-전갈을 이야기하는 반면 마태에서는 빵-돌과 생선-뱀을 말한다. 이러한 차이는 별 의미가 없다. 배경 정보는 병행구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도움이 된다. 한편으로, 생선-뱀 병행은 갈릴리 바다에 있는 부정한 생선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 생선은 길이가 5피트나 되며, 육지에서 기어다닌다. 그래서 뱀처럼 보인다. 마치 뱀장어 같은 이것을 여기서는 뱀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전갈의 사지가 없다면, 뱀장어-전갈은 분명히 일치한다. 죄 많은 부모라고 하 더라도 자기 새끼에게는 잔인하게 대하지 않고 뭔가 좋은 것을 주려고 한다는 것이 여기서 말하고 있 는 요지이다. 악한 부모라 하더라고 자식들이 요구할 때에는 악한 선물을 주지 않고 좋은 선물을 준다. 하나님은 이보다 얼마나 더 풍성한가?

(b) 그러므로 마7:11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부께서는 요청하는 자에게 선한 것으로 줄 만큼 풍성 하시다." 눅11:13절에는 "천부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줄만큼 풍성하시다." 여기서의 차이는 중요 하다. 누가의 생각에 의하면, 천부의 좋은 선물은 좋은 물건이 아니라 성령이다. 세례 후 예수가 기도할 때, 성령이 그에게 임하였다(3:21-22). 행1:14절에도 제자들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성령이라는 오순 절 선물 이전에 기도하였다. 실로 저자는 오순절의 근거가 되는 예수의 약속을 11:13절에서 보고 있다. 일어난 일은 부활하신 주님의 약속 성취뿐(눅24:49; 행1:4-5, 8절) 아니라 지상 예수의 성취이다. 11:11-13절 구절은 왜 제자들이 기도 습관을 가지는가 하는 두 번째 이유를 말한다. 하나님은 요청하는 자에게 해로운 것을 주시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특히, 그는 요청하는 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내 주실 것 이다. 만일 5-10절의 요지가 하나님의 응답의 확실성이라고 한다면, 11-13절의 요지는 하나님께서 주시 는 선물의 좋음이다. 13절에서 기도하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준다는 것을 이해한 독자는 이제 더 큰 단락과 함께 시작되는 사상을 접하게 된다: "당신 왕국이 임하소서"(2절). 성령의 선물 속에서 하나 님의 통치는 지금 임재한다. 더 나아가서, 아버지는 왕국을 주시기를 원하신다(12:3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