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에 대한 성서적인 시각

(11:14-36)




눅11:14-36절의 많은 자료들은 공관복음 다른 구절과 병행하지만, 누가는 이것들과는 다르게 사용한다: 예수는 자기 행동(14절)으로 두 번의 예기치 않은 공격을 받는다(a/15절; b/16절). 이어서 예수는 이들 공격에 대해 두 번 반응한다(a'/17-28; b'/29-36). "행동-공격-반응"의 이런 형식이 누가적인 이야기의 특징이다(예. 5:17-26에서보면, 20절에서 행동, 21절이 공격, 22-24절이 반응이다. 7:36-50절에서 보면, 37-38절이 행동, 39절이 공격, 40-48절은 두 부분으로 반응한다; 13:10-17절에서 보면, 10-13절이 행동, 14절이 공격, 15-16절이 반응이다. 15:1-32절에서 보면, 1절이 공격, 2절이 공격, 3-32절이 반응이다; 행 11:1-17절에서 보면, 1절이 행동, 2-3절이 공격, 4-17절이 반응이다.). 이 단락(unit)은 대체로 예수의 기 적에 대한 두 가지 반응으로 이루어져있다(누가에만 14절이 있다):

(1) 예수를 마술사라는 비난(15절).

(2) 예수 권위를 입증하는 증거를 제시하라는 요구(16절)(누가에만 나온다).

눅11:14절의 예수의 행동은 기적 이야기의 요약처럼 보인다. 그밖의 다른 곳(4:39; 6:18; 8:2; 9:6,1; 10:9,17; 13:11,14,16; 행5:16; 10:38, 참고. 마12:22.)에서도 저자는 치유를 귀신 축출로 이해한다: 사람이 말하지 못한 것은 말 못하게 하는 귀신에게서 기인한 것이다:

(1) 눅1:20-사가랴(Zechariah)는 신적인 선언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말을 못하게 되었다;

(2) 눅11:14-어떤 사람이 말할 수 없는 것은 벙어리 귀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3) 막7:32-이 사람이 말 못하는 것은 귀신에 들렸다거나 신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타고난 것 이었다. 병들게 된 원인에 대한 성서의 광의적인 관점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일반적으로 병의 원인 에서처럼 성서에서 다루는 벙어리 됨의 원인으로 이 세 가지 모두를 분명히 언급한다.

(1) 병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로 생긴 것이다(예. 삼하12: 14-23, 특히15절; 왕하 15:4-5; 고전 11:29-32).

(2) 비록 하나님이 자기 목적을 위해서 사탄을 이용하였을지라도. 다른 곳에서는 병은 사탄에게서 비롯 한다(예. 욥2:6-7; 눅13:16; 고후12:7절).

(3) 계속해서 다른 곳에서는 인간의 죄 또는 사탄의 괴롭힘으로 병이 생긴 것이 아니라, 인간이 참여한 피조 질서의 불완전함에서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창3:14-19에는 이 견해에 대한 근거가 발견된다. 요 9:2-3; 롬8:19-23; 고전15:50; 갈4:13-14). 비록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육신(도덕적)을 지니고 있기에 병들게 된다(왕하13:14; 단8:27; 갈4:13; 빌2:25-30; 딤후4:20).

11:14절에 나오는 인간 고통의 원인은 벙어리 귀신에 의한 것이다. 그는 죄 값으로 하나님께 벌받은 것 도, 파괴된 피조 세계의 불행한 희생자도 아니다: 그는 사탄의 노예가 되었다.

만일 병에 걸리는 원인에 대해서 성서가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고 한다면, 병을 고치는 것 또한 다양 할 것이다.

(1) 사람이 죄로 병들었다고 한다면, 병을 고치기 위한 적절한 행동은 참회, 고백, 용서이다(참고. 요 5:14-16, 여기서는 죄 때문에 병든 것으로 다룬다. 특히 16a; 참고 고전11:30-31).

(2) 사탄이나 그의 무리의 공격으로 병들었다고 한다면, 다음의 두 가지로 병을 고칠 수 있다.

첫 번째, 귀신을 예수의 이름으로 쫓아낼 수 있다(예. 행16:18; 19:11 이하). 죄 때문에 혹은 악마적인 공격에 의해 병들었다면, 신약성서 기자들이 왜 표적과 기적이 복음에 따라오는 것으로 이해하는 지를 우리는 알 수 있다(예. 고후12:12; 롬15:18-19). 죄나 사탄의 박해가 예수에 의해 정복되는 곳에서는 반 드시 치유와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종종 육체적, 심리적 구원은 예수가 악을 정복한 부산물로 나타 난다. 그런 구원도 기대된다.

두 번째, 결국 하나님만이 사탄의 압박에서 건질 수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즉시(참고. 욥.) 혹은 생명 이 다하기까지도(참고 고후12:7이하) 어떤 것을 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은 선한 목적을 위해서 고난 을 사용하신다(고후12:9; 참고. 롬8:28).

(3) 만일 병이 자연 세계에서의 불완전함에서 생긴 것이라면, 다시 두 가지 견해가 나올 수 있다. 그 하나는 신약(예. 복음)과 구약(왕상17:17-24; 왕하4:32-37; 5:1 이하)에 다 나오는데,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과 약을 통해 치유된다(예. 사38:1-5, 21; 딤전5:23; 참고. 토비트에 보면, 의약적인 지식이 하나님으 로부터 계시를 통해 나왔다/예. 6:7-8). 이 두 가지 견해는 성서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나온 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에게 세계를 이해할 능력을 줌으로써 간섭하시고, 구속자인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죄와 흠을 인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우리를 위해 창조적인 일 을 행하신다. 만일 하나님이 창조자이며 구속자라고 한다면, 이 두 견해가 서로 충돌할 필요가 없다. 둘 다 하나님의 속성이고, 둘 다 하나님의 행동 방법이다(참고. 시락38:1-15). 병에 대한 여러 가지 원인을 성서가 보여주기 때문에, 이것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원인에 의해서 병이 생기는가, 그리고 무엇이 더 나은 치료인가,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을 영적, 감정적, 육체적 단계에서 치료하 고자 하시는가, 혹은 부활 때까지 육체적인 치료를 하고자 하시는가를 식별할 필요가 있다.

눅11:14절에 나오는 인간의 질병 치유는 해방(구출)의 의미를 가진다. 즉 예수가 능력있는 말씀으로 더 러운 영을 쫓아낸다. 이 사람에게 죄에 대한 회개가 요구된 것도 아니고, 처방을 위해 의사에게 보내진 것도 아니다. 그는 사탄의 노예였다. 그래서 예수는 성령의 능력(4:14)으로 그를 해방시켰다.

예수가 벙어리 귀신을 해방시키도록 하는 기적적인 하나님의 간섭은 예수를 두 번이나 공격받도록 한 다. 어떤 이는 말한다. "사탄의 왕인 바알세불(Beelzebul)의 힘으로 그는 사탄을 쫓아낸다(15절)." 이것 때문에 예수는 마술사라는 도전을 받는다: 즉 예수가 자기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악마적인 힘을 사 용하고 있다는 비난이다. 나아졌는가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예수의 방법이 의심을 받는다. 그를 시험 하려는 자들이 예수의 귀신 축출을 비난한다. 이들은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예수에게 요구했다(16절): 즉 이들은 예수를 신임할 수 있게 하는 확실한 무엇을 요구하였다. 사람이 좋아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것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증거를 대라는 것이다. 치유에 대한 이런 두 가지 불신 에 대한 반응을 통해서 저자는 예수의 기적적인 행동이 언제나 신앙을 부른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예수의 귀신 축출이 악마적인 힘에서부터 나온 것이라는 비난에 대한 반응은 이중적이다.

(1) 17-19절은 기적이 무엇이 아닌지를 말한다. 예수를 마술가로 말하지는 않는 이유는,

(a)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17-18),

(b) 모순되기 때문이다(19).

분열은 멸망을 야기하기 때문에 비논리적이다. 그러므로 사탄은 자기 영역 내에서의 폭동을 용납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귀신 축출로 인해서 예수를 마술사로 비난하는 것도 역시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다른 유대인들은 "바알세불의 종"이 되지 않고서도 귀신을 축출하기 때문이다(행19:13이하;요셉푸스, Antiquities 8:2:5 §45-48; 2:13:3 § 286; 토비트6:1-7; 8:1-3). 만일 예수에 대한 비난자들이 마술적 인 다른 귀신 축출자의 일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들은 예수에게 그와 같은 이름으로 부 를 수 없다.

(2) 20-23절은 예수가 행한 기적의 의미에 대해서 말한다. 예수의 기적을 "하나님의 손(하나님의 직접 적인 행동, 참고. 출8:19; 31:18; 신9:10; 시8:3)으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위에 임했다는 것이다(20).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성령이 거의 같은 의미로 나오는 11:1-13절과 부합한다. 더 강한 자(참고. 3:16절)가 사탄(21-22절)을 제어한다는 의미이다. 부서진 갑옷을 소유하는 것은 승리의 증거이 다(참고. 삼하2:21 칠십인역). 하지만 악마의 축출(24-26절)로 인해 증명된 그 하나님 나라의 힘을 받아 들이지 못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인간의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는 다만 악마적인 활동의 재개를 방해하는 것 뿐이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도다(27-28절). 귀신 축출은 예수를 마술사로 드러내는 증거가 아니라 그의 사역 안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고 있다 는 증거이다. 하지만 이 신적인 능력으로부터 영구한 유익을 받기 위해서 사람은 적절히 반응해야만 한 다.

증거 요구에 대해 예수는 하나님 권위를 가지고 3가지로 대응한다.

(1) 이 세대에게는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29-30절). 막8:11-12절은 "이 세대에게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말하는 비슷한 전승을 가지고 있다. 마12:38-40절은 누가와 매우 유사하다: "선지자 요나의 표적 외에는 어떤 표적도 없다---(12:39절)". 하지만 마12:40절에서 저자는 선지자 요나 의 표적 이해에 대한 자기 이해를 설명하기 위해서 마태 복음서에 독특한 진술을 삽입한다: "요나가 밤 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마태에 의하면, 요 나의 표적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표적을 구하는 요구에 대한 예수의 대응에 대한 누가의 견해는 마태나 마가의 견해와 다르다. 누가는 요나의 표적을 회개를 위한 요나의 소명으로 이해한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30절)";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였다"(32절). 표적 요구에 대해 예수의 첫 대응은 회개를 위한 예언적인 소명만이 유일한 표적이라고 말한다.

(2) 예수의 두 번째 대응이 31-33절에 나온다: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심판하여 비난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남방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 솔로몬의 지혜와 요나의 선포에 대해 적절하게 반응하였 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솔로몬이나 요나보다도 더 위대한 분에게조차 적절하게 반 응하지 못했다. 그분은 예수의 사역 속에 있는 성령의 현존이다.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심판하며 증거 할 것이라는 이 언급은 유대인의 신념과 매우 상반된다(참고. 고전6:2절에 나오는 유대인 신념에 대한 기독교인의 차용). 표적 요구에 대한 예수의 두 번째 대응은 회개하라는 요구를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 잘 받아들였다는 것을 말한다(참고. 행13:44-52; 20:23-29; 눅7:1-10).

(3) 예수의 세 번째 대응은 33-36절에 나오는데, 비연속적인 3가지 근원적인 말씀이다(33, 34-35, 36절). 다만 '등불'이 반복되어 나온다. 이 문맥에서 예수의 사역은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비추는 빛으로 비유된다. 이 빛으로부터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빛이 비추지 않는 것은 그 빛을 받는 자 때문이다. 만일 남자나 여자가 온전한 눈을 가지고 있다면, 빛은 그 사람 전체를 가득 채울 것이다. 눈 은 막지만 않는다면 빛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채광 구멍으로 생각되었다. 만약 눈이 건강하지 않 다면(즉 막혀있다면), 몸은 바깥에서 비치는 빛을 받지 못하여 어둡게 될 것이다(잠4:19 참조). 누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영적인 시각이 병들지 않은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이방인들이여!);

예수 사역에서 분명히 드러난 하나님의 통치의 빛을 그들은 분명히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려고 하는 사람들의 빛이 되는 것이 예수의 사역이다(33절). 사람들이 이러한 예수의 사역에 응답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병든 눈과 먼 눈으로 인하여 영적인 기관이 어둠으로 가득찼기 때문이다(34-35절).

정확하게 이해하자면, 예수의 치유 사역에서 드러나는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그의 통치가 현존하 고 있다는 증거다. 하나님 통치를 경험한 사람만이 사역 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게 된다 (참고. 그레코-로마의 원리는 가진 만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사역하시는 하나님을 알기 를 원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회개하고 적절하게 응답하라는 그의 부르심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 다. 회개는 했지만, 자기 삶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예수 사역 안에서 드러나는 하 나님의 나라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각자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면, 기적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임재를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