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의 응답

(15:1-32)




누가 15장은 서론(1-3절)과 3개의 비유(4-7; 8-10; 11-32절)로 구성되었다. 이 중에서 둘은 누가의 자료 이다(8-10; 11-32절); 세 번째는 마18:12-14절과 병행을 이룬다.

첫 번째 두 비유(4-7; 8-10절)는 평범한 표면 구조를 가지고 있다:

(1) 어느 남자/어느 여자;

(2) 한 마리 양을 잃음/한 드라크마를 잃음;

(3) 양을 찾음/동전을 찾음;

(4) 친구와 이웃을 불러 말하기를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친구와 이웃을 불러 말하기를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를 찾았노라";

(5)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내가 너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두 이야기는 14:28-32절의 두 비유와 13:1-5절의 두 사건처럼 "혹은(or)"이라는 단순한 말로 연결된다. 이 세 비유는 "기쁨(6-7; 9-10; 23-24, 32)", "왜냐하면 잃은 것을 찾았기 때문이다(6; 9; 24; 32.)", "회 개(7; 10; 18)"라는 핵심 단어들로 연결된다. 전체 15장은 결론에 의해서도 연결된다: 탕자를 받아들이 고 그를 위해 잔치를 여는 아버지에 대한(27-30절) 큰 아들의 불만은 예수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 와 함께 식사하는 것에 대한 바리새인의 원망을 반영한다(1-2절).

이 장은 저자의 개성있는 기교가 잘 드러낸다.

(1) 누가의 다른 곳에서 이와 비슷한 형태가 발견된다: 예수의 행동(1절)이 자기에 대한 공격을 일으키 며(2절), 이런 공격에 대해 예수는 반응한다(3-32절, 참고. 눅13:10-17;11:37-44, 14-23; 5:29- 32, 17-26).

(2) 눅5:36-39절은 단수 형태로 일련의 세 개의 비유적인 말씀을 소개한다. 눅15:3절에서도 마찬가지이 다-"그가 다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3) 눅13:1-9절에 있는 예수의 두 말씀은 짧고, 비슷하게 구성되었으며, 더 긴 비유가 연이어 나온다. 눅15장 전체는 누가적인 구성으로 한 단락(unit)으로 읽어야만 그 의미가 살아난다.

이 장의 서론(1-3절)에는 두 가지 내용이 나온다: 발단(1-2절)과 전이(3절). 발단은 예수가 추방자들과 함께 하는 것에 대한 바리새인의 원망이다(죄인은 일반적인 우리의 도덕적인 해석과 평판이 나쁜 사회 적 지위를 뛰어넘는 함축된 의미를 가진다). 바리새인의 태도(5:29절 이하; 7:39; 15:1-2절)는 악한 일 을 한 사람과 함께 하는 것에 대한 구약의 경고(잠1:15; 2:11-15; 4:14절 이하; 시1장; 사52:11; 참고 고 후6:14-18절)를 반영한다. 이것은 랍비적인 격언 안에 구체화되었다. "사람은 사악한 자들과 함께 하지 말라, 심지어 그에게 율법을 말하지도 말라(출18:1절[65a]에 대한 랍바 미드라쉬)". 이와 대조적으로 예 수는 추방자들과 먹고 마신다. 왜냐하면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5:32절)"라고 예수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들의 집으로 들어간다. 왜냐하면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기 때문이다(19:10절). 15:2절에 나오는 '영접하다 (prosde,comai)' 동사는 예수가 죄인들을 환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단지 그들과 함께 먹는 것 만이 아니라, 더 신랄하게 바리새인들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 행위에 대해 원망할 때, 본문은 우리를 예수의 비유(3 가지 이야기)로 우리를 이동시킨다(3절).

이 세 이야기 중 첫 번째는 잃어버린 양에 대한 비유이다(참고. 겔34장; 시119:176절). 이 비유는 마 18:12-14절과 병행을 이룬다. 누가의 요점은 마태의 병행 구절들과 비교할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태 18장은 마태복음에 있는 다섯 개의 큰 교훈 모음의 네 번째이다; 이것은 교회 내의 제자들 간의 관계 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특별히 제자들에게 연설한다. 12-13절은 교회 내에 있는 "소자"에 대해 말하는 18:1-14절 단락의 부분처럼 보인다(즉, 이들은 거만하고 영리한 사람들에 의한 사기에 의해 계속되는 두려움 속에 있는 일반 제자들이다.). 이 단락의 요점은 이중적이다:

(1) 일반 기독교인들을 죄에 빠지게 하지 말라(6, 7-9절).

(2) 누군가가 길을 잃었다면, 그를 찾아라(5, 10-14절).

마18:12-13절에서 양은 잃어버린 양이 아니라는 것을 주의하라: 양이 길을 잃은 것이다. 결론인 18:14절 은 하늘 아버지는 소자 누구라도 잃어버리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 이 양의 비유는 길 잃은 기독교인들을 다루는 방법을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누가에서 한 마 리 양은 잃어버린 양이다(15:4, 6절). 더 나아가서 비유에 덧붙여진 해석(7절)은 "잃어버림"의 의미를 분 명하게 해준다. 7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죄인, 즉 예수가 함께 먹은 추방자들이 누가복음에서 잃은 자이다.

잃은 양에 대한 누가의 이야기에서 목자의 기쁨과 잃은 양을 찾은 것에 대해 기뻐하는 친구들과 이웃 의 기쁨이 어울린다. 만일 그의 동료들이 잃은 양을 찾았을 때 목자의 기쁨에 참여했다고 한다면, 바 리새인들은 죄인이 회개한 것에 대해 얼마나 많은 기쁨으로 하늘에 참여해야만 하는가? 그의 원망에 대해 예수가 말한다. 내가 함께 먹고 마신 추방자들의 뉘우침에 대해 너는 나와 함께 기뻐할 수 있느 냐?

두 번째 이야기인 잃어버린 동전 비유는 같은 것을 말하는 다른 비유일 뿐이다. 반복은 강조를 위한 것 이다. 잃은 동전을 찾은 것에 대한 기쁨(장신구인 동전이 아니라 여자가 모은 일부분인 동전이다)이 주 요 관심이다. 창문이 없는 집에서 잃어버린 동전을 찾을 때까지 작은 등을 켜고 진흙 마루를 청소하는 중동 여인의 모습은 앞의 이야기 결론과 비슷한 결론(10절)에서 절정을 이룬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 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5:10절)."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동전 비유는 모두 한사람 죄인의 회개조차도 하늘에서는 기쁨이라고 말함으로써, 예수가 추방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이 두 이야기는 말한다. 만일 당신이 목자인데, 잃은 양을 찾았을 때, 또 여인으로 잃은 동전을 찾았을 때, 당신은 느낄 것이다; 죄인이 회개할 때, 하나님이 느끼는 것이 그것이다. 너는 네 친구들과 이웃들 이 어떻게 너의 찾음에 대해 기뻐함으로 너와 함께 하는지를 안다; 함께 느끼는 기쁨과 같은 종류의 기쁨이 죄인의 회개에 대한 하늘의 반응이다. 질문은 분명하다: 너는 기쁨을 함께 할 수 있는냐? 그들 의 기쁨 속에서 하나님과 하늘의 무리들과 함께 할 것이냐?

세 번째 이야기인 두 아들 비유는 아마도 복음서 비유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비유이다. 이 이야기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탕자에 대해(11-24절), 두 번째는 형에 대해(25-32절) 집중한다. 이 비유 두 부분의 초점은 먼저 아들에게 그리고 다음은 아버지에게 집중된다. 이야기 첫 번째 부분에서 탕자에 대한 묘사는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킨다.

(1) 탕자는 아버지를 마치 죽은 것처럼 여긴다. 재산법에 의하면, 자녀는 아버지 생애 동안에라도 재산 을 분배받을 수 있다(참고. 시락서 33:19-21절).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가 죽은 후에만 그 재산을 처분할 권리가 있다.

(2) 필요가 생길 경우에 아버지를 돌봐야 할 그의 것(18, 21절)을 탕자는 탕진하였던 것이었다: 그는 자기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어겼다(출20:12; 신5:16절).

(3) 그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유대 공동체에 가는 것 대신에 이방인에게 갔다(15-16절). 더욱이 그는 유대인이 죄라고 여기는 그런 삶을 살았다(돼지를 먹이는 일). 지중해 연안의 사람에게 원치 않는 요구 를 부드럽게 거절하는 방법은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 여겨지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 의 종교적 실천행위를 방해한 이런 일조차도 젊은이를 막지 못했다. 여기서 젊은 탕자에 대한 묘사는 바리새인들이 세리에 대해 느끼는 감정들과 비슷하게 나타난다. 그는 세련되지 않았고, 부정하였으며, 비열하였다.

이 이야기 첫 번째 부분에 있는 아버지에 대한 묘사는 놀랍다. (1) 둘째 아들의 요청을 아버지가 거절 할 것이라고 기대되었지만, 아버지는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12절).

(2) 탕자의 요청은 집으로 돌아올 때에 아버지에게 기대하고 있는 응답을 반영하고 있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19절)" 전형적인 유대인 아버지라면 아들이 확실하게 뉘우칠 때까지 이런 방법을 생각했 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아들에게 회개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였을 것이다(참고. 19:8절). 굴욕적인 면이 있을지라도, 아버지는 그 대신에 집밖까지 나와서 극적인 행동으로 기대하지도 못한 사랑을 공개적으로 보여주었다. 아버지의 행동은 억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달려갔다. 그것도 매우 급하게 달렸다. 옛 날 동방에서 달리는 것은 점잖치 못한 행동이다(시락서 19:30절 "옷차림과 웃는 모습, 그리고 걸음걸이 는 그의 인품을 나타낸다[공동번역] "). 그렇지만 그는 달렸다. 포옹으로 탕자가 무릎꿇는 것을 막았다. 볼에 입을 맞춘 것은 용서와 화해의 표시이다. 가장 좋은 옷은 명예의 표시이고, 반지는 권위의 표시이 다(참고 에스더3:10; 8:2; 창41:42). 그리고 신발은 자유로운 사람의 표시이다.-노예는 맨발로 다녔다. 그 리고 잔치는 기쁨의 표시이다: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 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23-24절)." 앞의 두 비유(15:7; 10절)에 대한 해석에서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여기서도 잃었다가 찾는 기쁨은 같다. 양이나 동전을 찾는 기쁨은 당연한 것이다. 이것들은 가치가 있으며, 발견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있다. 그러나 탕자의 돌아옴에 대한 아버지 의 "지나친 기쁨"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아버지의 기쁨에 대해 의아해 할 것이다.

탕자의 경우에서처럼, 두 번째 이야기에서 형은 부정적인 느낌을 보여준다(25-32절).

(1) 주제넘게 아버지에게 한 연설(29절)에서 그는 공개적으로 아버지를 모욕했다.

(2) 그는 아버지의 지나친 사랑을 비난한다(29-30절).

(3) 그는 동생이 가족의 일원이 아니라고 선언한다(29b-"내 친구들", 30절-"이 아들").

(4) 더욱이 모든 것이 형의 것으로 남겨졌지만, 그는 아직까지 그가 원하는 것을 처분할 수 없었음에 대해서 불평한다. 그렇다면, 그도 역시 아버지가 죽어 없어지기를 바랬던 것이다. 바꿔 말한다면, 비록 그가 모든 명령을 지켰다(29b)고 하더라도, 그는 율법 안에서 있으면서 율법 없이 살았던 것이다(외 형적이 아니라 영적으로). 만일 탕자가 드러난 죄인이었다고 한다면, 형은 드러나지 않은 죄인이었다. 그의 모습은 분명히 사랑이 아니다.

다시 비유의 두 번째 부분에서 아버지는 화를 낸다. 형이 분노로 반응하자, 아버지는 나와서(28절) 말하 였다. "애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e;dei-참고2:49; 4:43; 9:22; 13:16, 33; 17:25; 19:5; 22:37; 24:7, 26, 44절) 하니라(31-32절)." 주어진 상황에서 이 진술은 하나님이 잃은 것을 찾았을 때(참고. 15:7, 10절) 당연히 기뻐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인이 회개한 것에 대해 기쁨으로 반응하는 것은 적절하다(하나님의 행동이라 정의된 것처럼).

이 관점에서 세 번째 이야기는 첫 번째 두 이야기와 연결된다.

(1) 죄인의 뉘우침에 대한 하늘의 기쁨은 잃은 양을 찾음에 대해 목자가 행복해 하는 것(7절)보다 더 크다.

(2) 죄인의 뉘우침에 대한 하늘의 기쁨은 여인이 잃어버린 동전을 찾음으로 기뻐하는 것(10절)과 마찬 가지이다.

(3) 죄인의 뉘우침에 대한 하늘의 기쁨은 비록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하더라도, 탕자가 돌아올 때 아버 지가 한 행동과 같다. 하지만, 어떤 점에서 앞의 두 이야기와 이어지지 않는다. 이점은 열려있다. 아버 지의 기쁨에 대한 형의 태도는 나오지 않는다. 형은 목자의 친구나 여인의 이웃이 그와 함께 했던 것처 럼 탕자의 돌아옴에 대해 그와 함께 기뻐하라는 초청을 수락할 것인가? 비유를 듣는 자인 모든 "형"이 결정하도록 이 점은 열려져 있다.

두 가지 초점을 가진 모든 비유가 그렇듯이, 강조점은 후반부에 있다. 절정은 질문으로 우리에게 다가 온다: 당신은 탕자의 돌아옴에 대해 이 공통적인 기쁨을 공유할 것인가? 만일 그럴 수 없다면, 왜 그럴 수 없는 것인가? 그러므로 15장은 죄인의 돌아옴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에 대한 세 가지 진술 뒤에는 질문이 제기된다: 당신은 이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는가? 만일 그럴 수 없다면, 왜 그럴 수 없는가? 당 신은 뉘우치려고 한 죄인의 그 노력에 대해 기뻐할 수 없는가? 만일 당신이 목자나 여인의 기쁨을 느 낄 수 있다면, 아버지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당신은 사람보다는 짐승이나 돈에 의해서 더 영향을 받는가(12:15-16; 14: 5절)?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기쁨이 없다는 면에서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왜 기뻐하라는 하나님의 요청에 참여하지 못하는가? 자기 행동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예수는 오히려 자기들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2절). 이미 살펴본 대로, 32절에는 결론 이 빠져있다. 청자는 자기 반응을 결정해야만 한다.

이런 식으로 비유가 청자에게 질문할 때, 기독론적인 질문이 표면 아래 숨어 있다. 청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도록 요구받는다.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고 고백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1-2절의 바리새인 은 "우리가 형인가?"를 스스로 질문하도록 요구받을 뿐 아니라, "무슨 권리로 예수가 그렇게 판단하는 가?"를 질문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