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명령의 가능성

(17:1-10)




눅17:1-10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신 4개의 독립된 말씀들의 작은 모음집(collection)이다:

(1) 17:1-2(마18:6-7; 참고. 막9:42절);

(2) 17:3-4(마18:15, 21-22);

(3) 17:5-6(마17:20절);

(4) 17:7-10(누가에만 나온다).

이 모음집은 두 가지 질문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a) 무엇을 위해 제자들을 부르는가?

(b) 그들은 그것을 할 수 있는가?

앞의 두 말씀(1-2, 3-4절)은 앞선 물음에 대한 답변이며, 뒤의 두 말씀(5-6, 7-10절)은 뒷 질문에 대한 답변한다.

예수가 자기 제자들의 삶 속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답은 앞의 두 말씀에서 주어진다. 이 말 씀은 죄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와 관계가 있다. 첫 번째, 1-2절은 다른 사람에 대한 범죄를 다룬다; 두 번째, 3-4절은 다른 사람의 범죄 다룬다. 일반적(3절)인 경우이거나 특별한(4절) 경우이다.

(1) 1-2절은 소자 중 한 사람이라도 실족하게 하는 제자들에게 경고한다(참고. 고전8:9절 이하, 10:32; 롬14:13-21; 요일2:10; 계2:14절). 이 주제는 기독교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여기에 있는 이것들은 영 향력의 위험(th perils of influence)에 대해 다루고 있는 자료이다. 마18장과 바울의 후기 편지들, 요한 일서와 요한계시록은 이 주제가 초기 기독교에서 진지한 주제였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예수는 나약한 기독교인들에 대해 끼치는 영향에 대해 책임지게 한다.

(2) 3-4절은 처음에는 책망하고, 그런 후에 죄지은 자를 용서하라는 것이다. 이 다른 사람에 대한 기독 교인의 책망은 그들을 용서하는(눅23:34; 24:34절과 더불어 22:54-62절) 그리스도의 행동에서 비롯된다 (행10:15; 참고. 계3:19절). 누가에서 이 이중적인 행동은 잠정적으로는 제자들 각자의 삶의 모습(style) 이 된다. 반면에 마18장에서는 이 이중적인 행동은 제자화에 대한 교회 법규에 규정된 기독교인의 의무 이다. 저자가 바울을 용서의 화신으로 여긴 것과는 다르게, 행15:36-41절에서 바울은 실제로 책망하고 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가진 영향력을 책임 있게 쓰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회개하는 자에게 는 그의 죄를 끝까지 용서하라고 요청한다.

우리에게 요구된 무엇을 우리는 할 수 있는가? 소자를 실족시키지 말라는 요청과 끝까지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라는 요청은 사도들로 하여금 예수께 더 나은 신앙을 위해 질문하게 한다(참고. 11:1절). 전형적인 동방 어법으로 예수는 생생하고 극적인 그림으로 말한다. RSV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너 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너희는 이 뽕나무에게 '뽑혀 바다에 심겨라' 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을 것이다(6절)." 이 번역에서 비롯되는 암시는 사도들 이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정말로 작은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놀라운 일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헬라어 본문을 통한 가장 나은 해석은 "만일 믿는다면(네가 할 수 있다는 생각), 너는 이 뽕나 무에게 말할 수 있다. '뿌리채 뽑혀'....." 이 말은 네게 정말로 작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Nigel Turner, Grammatical Insight into the New Testament [Edinburgh: T. & T. Clark, 1966], pp. 51-52.). RSV 역의 요점은 사도들이 정말로 작은 믿음이라도 있다면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헬라어 사본에 의한 정확한 읽기의 요점은 사도들에게는 최소한의 믿 음이 있는 데, 이것만으로도 불가능한 것을 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말씀과 병행을 이루는 마17:20과 21:21절과 막11:22-23절의 경우로부터 17:6절 의미에 관한 좀 더 나 은 관점을 얻는다. 이러한 병행은 다른 상황에서도 나오는데 매우 다른 내용이다.

(a) 마17:20절은 치유 이야기 절정 부분이다. 세 공관복음 모두에는 전이 문장이 나온다. 반면에 마9:29 절은 제자들이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는 사실 때문에 실패했다고 말한다. 심지어 눅9:37-43절은 제자들의 실패의 주제를 다루지도 않고, 어떤 암시도 하지 않는다(9:41). 마17:20절은 제자들이 실패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 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 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b) 마21:21절과 막11:22-23절은 모두 무화과 나무 저주 문맥 속에서 하신 말씀으로 둘이 비슷하다. 마 태의 관심은 분명하다. 제자들은 예수에게 기적적인 것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묻는다. 예수는 다음과 같 이 대답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 나 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참고. 약1:6-8 절).

이 말씀을 두 번 말한 마태와 한 번 말한 마가의 경우와 누가는 두 가지 면에서 다르다.

첫 번째, 누가는 산이 아니라 뽕나무를 말한다.

두 번째, 누가는 제자들에게 도덕적인 행동을 하라고 하는 문맥에서 이 말씀을 한다(17:1-4절).

하지만 마태와 마가는 예수의 기적적인 행동이 성공한 것임을 이 말씀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제자들에 게 이런 성공을 약속한다. 이 세 공관복음 모두에는 공통적인 관점이 있다. 여하튼 이렇게 두 가지 형 태로 말한 말씀은 그것이 도덕적이든, 기적적인 것이든, 예수 제자들의 삶 속에 놀라운 힘이 나타나게 도와준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신앙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a)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을 조정하는 그런 마술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신앙 으로 하나님을 구석으로 몰아 세울 수 없으며, 우리를 유명하게 만들어 줄 그런 선풍적인 인기가 있는 쇼를 보여 달라고 하나님에게 강요할 수도 없다"(Malcolm Tolbert, "Luke," Broadman Bible Commentary [Nashvill: Broadman Press, 1969], 9:134). 마술로 사람은 영적인 것을 통제할 힘을 가지 려고 행동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기 명령을 따라 행할 것이다. 신약성서, 특히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 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신앙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예를 들어, 눅17:11-19절을 보면, 치유 받은 사마 리아 사람은 예수가 한 치료 속에서 하나님을 보았으며, 감사와 찬양으로 반응하였다. 신앙은 언제나 인간적인 반응이다.

(b)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은 개별적인 주권 에 대한 개별적인 반응이다. 다시 바울과 눅17:11-19절은 이 점을 말한다.

하나님의 개별적인 주권에 대해 관계를 통해 제자들이 개별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한다면, 6 절은 이 문맥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은 용서함으로써 죄인들과 관계한다(15:11-32절). 하나님은 용 서받은 죄인들에게 자비를 보여주셨고, 지금도 보여주신다. 제자들은 신앙 안에서 스스로 죄 짓는 사람 에게 자비와 용서로 대한다(6:35-38; 11:4절). 언제나 용서할 수 있게 될 만한 더 나은 믿음을 위해 요 구하는 사도들의 요청에 대한 답으로 예수는 말한다. 네게 임하는 하나님 주권에 대해 반응하면 너희는 살 것이다. 하지만 네 반응이 제한적이다. 만일 네가 믿음으로 반응한다면, 하나님은 언제나 너를 용서 하시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끝없이 용서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마태와 마가에서 발견되는 로기온(예수어록) 자료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원하는 바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제자들의 확고부동 태도로 반응하는 것은 기적에서 비롯 한다. 하지만 만일 하나님이 주어진 상황 속에서 주도권을 행사하지 않는데도, 제자들이 주도권을 행사 하는 것과 자기들이 하나님에게 행하도록 말하는 것을 하나님은 행하실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 고 하나님의 능력을 강요하려고 하는 것은 마술이다. 우리들이 간청하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행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차라리 믿음은 하나님의 주도권에 의해 하나님과 함께 행동하는 협력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완수하실 것임을 보여주었다. 누가에 의하면, 이러 한 신적 주권은 기독교인들에게서 진행되고 있는 종교적인 경험의 일부분이다(참고. 행4:19-20, 31; 5:19-20, 29; 7:55-60; 8:26, 29; 10:9절 이하, 44-48; 11:15-17; 13:1-13; 16:6-10절).

눅17:1-6절에는 이 점과 연결되는 사상이 나온다:

(1) 만일 어떤 제자가 시비하는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고 용서하는 사람이 된다면, 언제나 그 제자는 믿음으로 자랄 것이다;

(2) 그 제자가 하나님이 행하신 방법에 대해 반응하며 살고 있으며 하나님이 그를 조정하시기 때문에, 심지어 가장 많은 믿음을 요구하는 불가능한 요구라고 하더라도 가능하게 된다(심지어는 하나님 주권 의 일부분에 대한 반응으로도 인간 관계 속에 있는 놀라운 행동의 원인이 될 정도로 하나님의 은혜로 운 주권은 너무나 관대하다는 생각). 믿음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요구된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누가는 믿었다.

만일 제자들이 요구된 것만을 할 수 있다면, 제자들은 요구된 것 이상은 할 수 없다. 17:7-10절 비유에 서 말하고 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이중적인 의무를 수행하라고 강요받는 노예같은 사람을 여기 서 만나게 된다. 그는 농장 일(쟁기질하고 양을 돌보는 일)과 가정 일(저녁을 준비하고 봉사하는 일) 둘 다를 하였다. 오래 동안 일을 한 후에도 그 하인은 주인으로부터 감사하다라는 말을 기대할 수 없었 다. 그는 하라고 명령된 바를 단지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말한다. 제자들이 "명령된 모든 것을 행했을 때(끊임없는 용서)", 그들은 자신들이 명령받은 이상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여기 엔 도덕적 우월성이나 장점에 대한 어떤 개념도 있을 여지가 없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주도권이 크게 주어진다면, 제자들의 믿음의 반응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명령은 성취될 수 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성취도 기대하는 것 이상을 넘어갈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