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에서의 시험

눅19:45-21:38(A.19:45-21:4);2:1-7;11:37-54;14:1-24





눅19:45-21:38절은 누가복음서에서 큰 사상 단락(unit)을 구성한다. 19:47절(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과 21:37(매일 예수는 성전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은 자료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삽입구 (inclusion) 역할을 한다. 19:45-46절에서 예수는 도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전으로 들어간다. 이 단편(section)에서 성전은 예수의 가르치는 자리인데(참고. 2:41-51절), 이 가르침은 하나님이 파견한 대 리인과 유대 백성 사이의 대결을 야기한다. 그 결과 하나님의 사자가 거절된다. 성전 주변에서 행한 가 르침은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1) 19:45-21:4절. (2) 21:5-38절. 이 장에서의 초점은 앞 부분에 있다.

눅19:45-21:4절 대부분은 공관복음서에서 병행된다. 하지만 누가는 "성전에서의 가르침" 동기에 적절하 게 이 모든 자료들을 편집하고 있다.

눅19:45-20:18절에 있는 자료는 종교적으로 평판이 있는 지도자들에 대해 경고한다. 이 경고 속에서는 4가지 요점들이 지적된다.

(1)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종교 지도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하는 것을 묵과하지 않으신다. 성전에 들어 가서(19:45-46절) 예수는 종교 지도자들이 성전의 목적을 왜곡하는 것에 대해 나무란다(참고. 사56:7; 렘7:11절). 예수의 행동과 말씀은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양육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 지 못하였음을 증거한다.

(2) 양들이 먹지 못할 때, 다른 것들로 그 결핍이 개선되기를 기대할 것이다. 예수가 매일 성전에서 가 르친 것(19:47절a)은 유대 지도자들의 실패에 대한 반응일 것이다.

(3) 종교 지도자들은 예상되는 이중적인 반응을 보인다(20:1-19절). 지도자들은 개혁자의 권위를 질문한 다: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2절)." 이렇 게 도전했을 때, 예수는 반문으로 대응한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4절)" 이 질문 의 뜻은 "유대종교 체제 외에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할 수 있는가?"인데, 백성들은 그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6절b). 여기에는 또한 종교적인 체계를 포함한 모든 관료 체계의 특성인 탐욕으로 인해 포도원이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잊게 한다. 예수는 종교 지도자들과는 다르게 백성들(주 목하라. 19:48절에 나타난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과 20:19절에 나타난 지도자들의 반대되는 것 사이를 대비시킨다)에게 비유로 가르친다. 이 이야기는 누가가 이해하고 있는 구원사에 대한 실제적인 또 다른 은유(allegory)이다(참고. 14:16-24; 19:11-27절). 이 후에 농부들(the tenants)(종교적인 관료들)은 하나 님의 예언자들 가운데(예. 세례 요한-20:4-7절) 나타난 하나님의 권위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은 반 복해서 하나님의 사자를 적개심으로 대한다(13:34; 행7:52절). 지금 이들은 심지어 사랑하는 아들마저도 거절하였다(3:22; 행7:53절):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14절)." 이 비유는 관료들이 그를 알고도 거절하였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진짜 포도원 주인로 하여금 포도원을 다스리는 것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들은 그랬던 것이다. 이들은 또 다른 예언에 대한 청지기가 되는 것을 그만두고, 자기 권리를 가진 주인으로 행동하고자 했다.

(4) 아들에 대한 이러한 거절로인해 제도화된 지도력이 파멸당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비유는 하나님 아들을 거절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 농부들(the tenants)은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와서 그 농부들 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20:16; 참고. 19:27절)." 이 구절은 예루살렘의 멸망이나 이방인에게 좋은 소식이 옮겨졌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종교적인 지도자들을 공격한다(19절). 예수에 대 한 거절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관리자로서의 역할은 박탈당하였고,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임 명되었다(누가적인 상황에서, 사도들/22:28-30절; 행1:15-26절). 사랑스런 아들을 죽인 사람들에 대한 응 징은 매우 단호하다: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로 가 루를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18절)." 누가의 특색을 보여주는 이 구절은 에스드(Esth) 3:6절에 대한 랍바 미드라쉬(Rabbah Midrash)에서 랍비들이 인용한 말과 비슷하다: "돌이 항아리 위에 떨어지면, 항 아리에게 저주가 되며, 항아리가 돌 위에 떨어져도, 항아리에게 저주가 된다. 어떤 경우에든 항아리에게 저주가 임한다(참고. 눅2:34; 12:8-9; 행4:12절)." 포도원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의 주장에 대해 동의하느 냐 아니냐에 따라서, 종교 지도자에 대한 입장이 결정된다. 이것은 모든 종교 제도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기준이다.

예수를 불신임하려는 첫 번째 시도는 실패하였지만, 20:20-26절에서 이들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넘기기 위한 두 번째 시도를 한다(20; 참고. 18:32절). 예수가 그들의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것 인가가 초점이다. 우리가 먼저 복음서의 나머지 부분으로부터 나온 20-26절의 배경를 면밀하게 살펴 봄으로써, 이 구절을 잘 이해할 수 있다. 2절에 나오는 인구 조사와 관련해서, 우리 목적과 밀접하게 연 관된 눅2:1-7절은 결정적인 배경자료이다. 이 문장은 두 가지로 번역할 수 있다.

(1) 일반적인 방법은 그것을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다. "구레뇨(Quirinius)가 시리아(Syria)의 총독 되었 을 때, 제일 먼저 인구조사를 하였다(RSV)." 만일 이런 식으로 번역한다면, 연대기적인 문제가 있다. 구레뇨는 기원후 6년까지 시리아 총독이 아니었다. 기원후 6년에 그는 유대의 대리 통치자인 코포니우 스(Coponius)와 함께 인구조사를 하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 새 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유다 갈 릴리 사람 아래에 있는 열심당원(Zealot)은 봉기하였다(Josephus, Antiquities, 18:1:1, 6 § 4-10, 23-25.). 어려운 점은 1:5절이 유대 헤롯 대왕(Herod the Great) 때에 세례요한이 탄생하였다고 기록하 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헤롯 대왕은 기원전 4년에 죽었을 것이다. 눅1:26절은 엘리사벳(Elizabeth)이 임신한 지 6개월 후에 예수가 태어났으며, 헤롯 대왕 때에 태어났다고 말한다. 마태복음 1-2장에서도 역시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는 적어도 10년간의 차이가 있다(기원전 4년-기원후 6년). 의식적이든 무의 식적이든 간에, 저자는 실수하였다(Horst Moehring, "The Census as an Apologetic Device," in Studies in the New Testament and Early Christian Literature, ed. D.E.Aune [Leiden: Brill, 1972], pp. 144-60.).

(2) 니겔 터너(Nigel Terner)는 2절에 대해서 다른 번역을 주장한다(Grammatical Insights into the New Testament, [Edinburgh: T. & T. Clark, 1966], pp.23-24.). 그는 그리이스(Greek) 시대에는 "앞 선" 혹은 "우선"이라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문법적으로 "처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곤 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 인구조사는 구레뇨 가 시리아를 통치하고 있을 때보다 이르다는 말이 된다(참고. 요5:36; 고전1:25에도 비슷한 표현이 나온 다.)". 만일 이렇게 읽을 수 있다면, 누가의 경우에는 연대기적인 실수는 없다. 그래도 남는 의문은, 왜 저자는 구레뇨나 인구 조사에 대해서 말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 두 번역 중에서 받아들여야 할 것은 무엇이든 간에, 분명한 것은 누가가 구레뇨를 말하는 이유이다. 인구조사가 갈릴리 유다로 하여금 폭동을 일으키게 한 이유였기 때문이다. 이 폭동에서 열심당(Zealot) 운동이 나왔다. 인구 조사와 관련된 갈릴리 사람 유다의 폭동에 대해서 행5:37절은 말한다. 눅2:2절에서 구레뇨와 인구 조사에 대해 저자가 말할 때, 그에게는 유다 폭동 같은 것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유다의 행동은 분명히 일반적인 갈릴리 사람들에게 있는 반항적인 성향 그것이었다. 하스몬가 (Hasmoneans)가 유대 국가를 회복하였는데, 갈릴리 사람들은 기원전 63년 이후 하스몬 국가의 재창건 을 도왔다. 반란의 실례들은 다음과 같다. 에스키야(Ezekias)의 지도 아래(47 B.C.) 일어난 반란, 안티고 누스(Antigonus)(40-37 B.C.)에 대한 반란, 헤롯 대왕이 죽을 때(4 B.C.) 일어난 반란, 로마가 대리자를 시켜 행한 인구조사에 대한 유다의 반란(A.D. 6), 그리고 66-74년에 일어난 유대인들의 폭동이 있었다 (F.Loftus, "The Anti-Roman Revolts of the Jews and the Galilenans," Jewish Quarterly Review 68:78-98 [1977]). 예수의 형제였던 갈릴리 사람들이 시민의 자기 권리를 위해 투쟁한 것으로 누가가 그 리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처럼 요셉(Joseph)은 로마의 법에 순종한다. 예수 가족은 로마 관리들의 비난을 사곤 했던 갈릴리 사람들의 반항적인 생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참고. 13:1-2절).

평화의 왕으로 태어나신 그 분(2:1-20절)은 역시 이와 같은 생각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는 나 귀(평화의 상징)를 탔다. 어떤 독립운동에 대한 수식도 없으며(나무 가지가 나오지 않는다), 단지 제자 들의 환호만이 있다: "하늘엔 평화 높은 곳엔 영광." 더욱이 저자는 예수가 성전으로 들어감(19:45-46 절.)으로써 거의 모든 악을 제거할 것이라 말한다. 독자는 이런 배경 하에서 20:20-26절을 읽어야만 한 다. A.D. 6년에 갈릴리 유다는 가이사(Ceasar)에게 세금내는 것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Josephus, Antiquties, 18:1:6 §23-25; 20:5:2 §102.). 세금내는 것을 하나님에 대한 반역적인 행동으로 보았다. 지 금 정탐군들은 예수에게 묻는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과 바치지 않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율법적(성서적)입니까?" 예수가 무엇을 답하든 간에, 책잡힐 것이라고 이들은 생각한다. 예수는 동전을 달라 하고는, 동전 위에 그려진 상이 누구의 상인가 물었다. 반대자들이 "가이사"라고 대답하자, "그러 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주라"고 말했다. 이 상황에서 말씀은 두 가지 점을 말한다.

(1) 이 말씀은 하나님의 주권을 확고히 한다. 누가의 관점에 의하면, 정치 권세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 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는 사람에게 권세를 주신다(참고. 4:6-"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즉, 하나님이 준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권한을 참칭하는 통치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참고. 행12:20-23절). 선택에 직면할 때, 제자는 인간에게보다는 하나님에게 복종해야 만 한다(행4:19-20; 5:29절). 가이사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왕국만 이 있다. 하나님이 바라는 형태와 같은 형태에서만 가이사는 예수 제자들로부터 충성을 받을 수 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로마 관리들은 복음서의 설교자를 보호해 주었다. 이것은 저자가 로마 관리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묘사를 잘 설명해 준다(행13:7, 12; 16:35-39; 18:12-17; 19:35-41; 21:31-39; 22:25-26; 23:19-24, 31-32; 27:42-43절.).

(2) 예수 어록(Logion)은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정치적 입장에 대해 분명히 말한다. 24-25절을 세금 납 부를 옹호하는 것으로 보지 않기는 대단히 어렵다. 가이사의 돈을 가이사에게 주라. 가이사의 돈을 사 용하는 사람들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낼 것이다(참고. 롬13:6-7절). 예수가 "우리들이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을 금하게" 했다는 유대인의 비난은 잘못된 것이라고 저자는 이해한다(23:2절). 예수가 국가에 대해서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복종의 맥락 안에서 예수는 국가에 대한 복종을 옹호하였다. 초기 기독교 운동에서 로마인들이 이방과 유대인들의 폭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였을 때 에(예. 행18-19장),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롬13:1-7; 딤전2:1-2; 딛3:1-2; 벧전2:13; 클레멘트1서61; Pol Phil 12:3; Justin, Apology Ⅰ, 17:3; Tertullian, Apology, 30.). 로마에 대한 충성과 우호의 태도는 2세기 동안 내내 교회의 특성이었다. 황제 숭배와 박 해에 직면하여 기독교인들이 이를 거절하게 되었을 때,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이 관점으로부터 국가에 대한 저항의 논리를 발전시켰다: "하나님에 속한 것은 하나님에게 드려라."

이 구절은 더 큰 의문을 낳는다: 누가는 예수가 어떤 정치적, 사회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 는가? [예수, 정치와 사회](Richard Cassidy, Jesus, Politics, and Society [Maryknoll, N.Y.: Orbis Books, 1978])는 누가의 예수 상이 간디(Gandhi)와 같이 비폭력으로 저항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말한다. 카시디(Cassidy)는 세 가지 가능성에 대해 연구한다:

(a) 무저항(물리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악의 실재에 대해 직접적으로 책임있는 대결조차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러한 악으로부터 고통받는 것을 정당화한다; 이들은 자기 스스로 힘을 가진 자들의 폭력에 저항하는 어떤 방어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이 다른 이들의 태도나 행동을 언젠가는 변화 시킬 것을 바란다.)

(b) 비폭력적인 저항(사람에 대한 폭력은 피하지만,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사회의 적인 악의 실재에 대 해 책임있게 대항한다; 궁극적으로 그들의 행동을 좋게 변화시킬 수 있는 대화를 하려고 하는 것이 이 들의 바람이다.)

(c) 폭력적인 저항

기독교가 처음 태동할 때, 유대인들 사이에는 이와 같은 태도 혹은 이와 유사한 태도가 전형적인 형태 였다.

(a) 열심당(Zealots)들은 로마에 대항하기 위한 무장 봉기를 지지하였다.

(b) 요셉푸스(Josephus)는 예수 시대에 있었던 두 가지 비폭력적인 저항의 예를 보여 준다. 첫 번째가 고대사와 전쟁사에 나온다(Antiquities 18:3:1 § 261-309 ; War 2:9:3 § 184-203.). 빌라도(Pilate)가 예 루살렘에 우상을 들여오는 것에 저항하기 위해서 5일 동안 연좌 농성하였다. 죽을 위험에 처해 있었지 만, 이들은 끝까지 저항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법을 어기기보다 는 오히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낫다고 이들은 선언한 것이다. 이런 저항 때문에 빌라도는 예루살렘 으로부터 이 골치 아픈 우상을 제거하였다. 두 번째도 고대사(Antiquities 18:8 §244-72)와 전쟁사 (War 2:10 §184-98)에 나온다. 여기서는 한 달 이상 동안 씨 뿌리는 시기까지 벌판에 남아 있었던 유 대인들의 행동에 대해서 말한다. 이 저항은 성전에 세워진 갈리굴라 황제(Caligula)의 동상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c) 하스몬가(Hasmonean)가 통치하던 동안 적어도 몇몇 바리새인들(Pharisees)이 정치적인 역할을 하 였다 하더라도,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에 대한 봉기에서부터 로마에 대항한 첫 유대 봉기의 실패 까지 바리새인들은 통치 형태와 통치자들에 대한 어떤 태도를 보이는 것과 같은 직접적인 정치에는 참 여하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바리새인들은 유다 내의 로마 통치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은 것 같다.처 럼 보인다. 이들의 유일한 관심은 하나님의 백성이 율법을 준수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누가는 카시디가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예수를 그린다. 예수의 사회적 정치적인 입장에 대 한 누가의 그림 속에서 이 세 가지 요소를 인식해야만 한다.

(a) 비록 예수가 정치적인 통치자에 대해 어떤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예. 13:31-33절), 이것이 예수가 간디처럼 비폭력적인 저항을 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리새인처럼 예수도 정치적인 통치 자에 대해서는 냉담했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모든 권력과 권위는 하나님에게 속해 있 으며, 모든 역사는 그의 목적에 의해 펼쳐지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이런 통치자들은 전혀 중요 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예수와 쉽게 대화할 수 있는 어떤 공동의 전제가 통치자들에게 있지 않기 때문 에, 예수는 그들 앞에서 침묵하였던 것이다.

(b) 하지만 유대 체제에 대해서 예수는 관심을 보였다. 여기서 예수는 비폭력적인 저항의 태도를 보인 다. 예수와 유대 지도자들은 자주 대결한다(예. 5:12-6:11; 11:37-54; 13:10-17; 14:1-24; 16:14-15; 19:47-20:47절). 오직 19:45절만이 폭력적인 모습에 대한 암시가 나온다. 하지만 성전 정화의 이야기를 구성할 때, 저자는 이 사건을 예수가 계속 가르치는 장소인 성전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정화하는 것으로 구성하였다. 더욱이 예수가 유대교 관헌들에게 폭력으로 저항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음을 22:49-51절은 분명히 보여준다. 유대교의 체제와 대결할 때, 예수는 대화와 행동의 변화에 도움을 주는 비폭력적인 모습을 지녔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예수와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종교적인 가치에 대해서 공 통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이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이런 백성과 함께 한 대화는 유익한 것이 될 수 있었다.

(c) 사회 변화를 위한 예수의 일차적인 수단은 그의 제자들의 공동체 내의 생활 구조였다. 예수는 제자 들 중에서 사회적 태도에 대한 혁신적인 변화를 보았다. 지금 그들은 종말에 모든 인간 가치를 회복시 키는 하나님의 빛 안에 있는 살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물론 어떤 이들에게는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행17:6절). 예수의 주권 하에서 성령 안에 있는 새로운 삶을 반영하는 사회적 인 관계의 구조를 실현함으로써, 기독교 공동체는 더 큰 사회 안에서 사회 변화의 요인으로서 작용한 다.

교사인 예수를 불신임하려고 하는 세 번째 시도는 사두개인(Sadducees)으로부터 나온다. 이들은 부활 을 부정한다(참고. 행23:8; Josephus, Antiquities, 18:14 § 16-17; War, 2:8:14 § 164-64.). 부활을 제거 하는 것은 사두개인들이 바리새인들(Pharisees)을 괴롭히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예를 들면, 부활하게 될 사람이 시신을 접촉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정결례가 요구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그들은 묻 는다(b. Niddah 70b.). 아니면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에서 죽은 자로부터 부활을 가르치고 있는 부분 을 분명하게 말하라고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눅20:27절 이 하에는 이런 사두개인의 계략이 잘 드러난다. 이들은 신25:5-10절에 나오는 수혼법(levirate)에 의거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만일 형제가 자녀가 없이 죽었다면, 살아있는 형제는 그 형제의 아내를 취해서, 죽은 형제를 위해 자녀를 낳았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첫 아들은 죽은 형제의 아들이 되었다(참고. 창38:8; 룻3-4장). 비록 수혼제(levirate)가 예수 시기에는 지켜지지 않았다고는 하더라도, 부활이 일부다체제를 승인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 질문은 제기되었던 것이다. 일부다체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으며, 모세의 율법도 이것을 배제하고 있다.

예수의 대답은 이중적이다.

(1) 37-38절에서 예수는 사두개인들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의 지속적인 성격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제기한 문제로부터 도출한 결론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예수 대답의 형식은 랍 비적인 논쟁괴 유사하다. 탈무드(Talmud)(예. b. Sanhedrin 90b-91a.)에서 우리는 이 질문을 다시 접한 다. "부활이 토라에 나오는가?" 랍비들은 도움이 될 많은 구절들을 제시한다(예. 민18:28; 15:31; 출6:4; 15:1; 신31:16절). 1세기에 한 종파주의자가 가말리엘(R.Gamaliel)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어째서 거룩 한 분이 죽은 자를 일으킬 것임을 알 수 있는가?" 가말리엘(R. Gamaliel)은 신31:16절, 사26:19절과 Cant 7:9을 제시하여 말하였지만, 헛수고였다. 그들은 신11:21절,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리라고 너 희 열조에게 맹세하신 것"을 듣고서야, 비로소 만족하였다. "너희에게"가 아니라 "그들에게"가 본문의 초점이다. 약속은 족장의 부활로만 성취될 것이기 때문에, 부활이 토라(오경)에도 나온다는 것이다. 아 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출3:6절을 제시함으로써, 눅20:37-38절은 이러한 랍비적 인 논쟁 형식을 따른다. 야훼(Yahweh)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다. 족장들은 분 명히 죽었지만 그들은 일으켜질 것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사람들과 관계를 가질 때에는 죽음으로 관계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죽음이 그와의 관계를 끊는 것 을 허락하시지 않는다(참고. 롬8:35-39절).

(2) 34-36절(마22:30절과 막12:25절보다 꽤 길다.)에서 예수는 제시된 물음이 적절하지 않음을 말한다. 왜냐하면 이 물음이 지상에서의 삶과 부활 이후의 삶의 차이를 다루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부활 이후 사람은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생의 삶에서 행하는 성적 인 결합 형태는 부활 이후에 소용이 없다(참고. 2 Baruch 51:10; 1 Enoch 104:4, 6; 1 QSb 4:24-28; 1 QH 2:21절 이하; 6:13). (이러한 식의 추론이 주어졌다면,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은 이미 죽은 자로부터 일으켜졌다고 믿는다[고전4:8]: 그러면 결혼에 대한 이들의 태도가 이해될 것이다[고전7장]. 그러므로 하 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는 다른 세상의 삶이 어떤 것이 될지를 안다[참고. 눅6:20-26; 13:28-29; 16:19-31 절]).

사두개인(Sadducees)에 대한 비난에 이어서 나오는 예수에 대한 서기관의 칭찬은 두 가지를 비판하는 계기가 된다.

(a) 서기관 신학에 대한 비판(41-44절)

(b) 서기관의 삶의 방식에 대한 비판(20:45-47; 21:1-4절)

그들의 신학에 대한 비판은 서기관들에게(41절, 참고. 39절), 그리고 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비판은 제자들에게 주어진다(20:45절). 눅20:41-44절에는 예수에게 질문한 사두개인의 질문과 매우 비슷한 서기 관들의 질문이 나온다. 이 단원(pericope)은 시편 저자 다윗이 먼저 "주님"이 하나님이고, "내 주님"이 메시야임을 말한다(42). 이 두 가지를 전제하면, 어떻게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44)? 다 윗은 주님을 자기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 물음에 대해 답변하지 않았지만, 누가 독자들은 자기 만의 답변을 가질 것이다. 다윗의 아들(1:69; 2:4; 3:23-38절)인 이 사람이 부활(resurrection) - 승천 (ascension) - 고양(exaltation)으로 다윗의 주님이 되었다(행2:34-36; 13:22-23, 33-37절).

(b) 서기관의 삶의 방식에 대한 비난은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율법학자들에 대한 앞선 비난(11:37-54; 14:1-24절)을 부분적으로 반영한다. 이전의 구절들을 간략하게 조사해 보는 것이 이런 관점을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눅11:37-54절에는 식사하기 위해 앉아 있다(37절). 여기에는 두 평행단위가 나온다.

예수에 의한 자극(38절) 예수에 의한 자극(45절)

바리새인의 반응(38절) 율법학자의 반응(45절)

바리새인에 대한 경고 율법학자에 대한 경고

(39-44절) (46-52절)

그리고 예수에 대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음모에 관하여 말하고 끝난다(11:53-54).

이 구절들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의 삶의 스타일에서 외적인 모습과 내적인 실재 사이에 차이가 있 음을 보여준다. 다음의 두 가지 인용은 이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 들지 아니하셨느냐(39-40)";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44절)."

눅14:1-24절의 배경은 바리새인 집에서 있었던 저녁 식사이다. 저녁 식사 장면은 4개의 분리된 전승들 (14:1-6, 7-11, 12-14, 15-24절)을 하나로 묶어주는 문학적인 장치이다(참고. Plato, Symposium; Esther; Ep Artist § 182-294; Plutarch, Nine Books of Table Talk). 이 4개의 전승들은 분명하게 교차대칭구 조(chias- tic pattern)로 분석된다.

A. 외형적인 모습은 종교인이지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 다(14:1-6).

B. 손님으로서의 이기심(14:7-11).

B' 주인으로서의 이기심(14:12-14).

A' 외형적인 모습은 종교인이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14:15-24).

이 구절들도 또한 외적인 모양과 내적인 실재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첫 번째 전승(1-6절)은 안식일에 고창 병자를 고쳐준 것을 바리새인과 손님들이 반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자기의 종교적 의식을 보호하는 데는 열심이지만 이 사람에 대해서는 아주 냉담하게 무관심하고 있음을 예수 의 행동과 말씀은 드러내 보인다. 5절을 보면,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든 우물(fre,ar; 출21:33은 특별 한 경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말한다)에 빠졌다. 가장 나은 본문 전승은 "아들이나 소"라고 말한다. 예 수는 묻는다.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 냐?" 이 경우에 이것을 해야 하는가? 안식일에 다른 사람을 도울 경우에 대한 몇 가지 규정이 있다. 쿰 란(Qumran)에서는 사람인 경우에는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구덩이에서 꺼낼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 나 짐승인 경우에는 안식일에 꺼낼 수 없다(CD 11:13-17). 탈무드(Talmud)(b. Shabbath 128b.)에는 다 음의 두 가지 지배적인 입장이 있다: 온건적인 입장은 구덩이에서 짐승을 꺼내는 것을 허용한다; 강경 적인 입장은 짐승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만이 허용된다. 그러므로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짐승의 경우 에는 다른 입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경우에는 안식일에도 꺼내는 것이 허용되었다고 하는 것이 다. 눅14:5절은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짐승이나 사람이나 모두 다 밖으로 꺼낼 수 있음을 말한다. 예수의 논점은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옮겨진다: 안식일에 짐승이나 아들을 꺼내는 것이 유대 법에서 도 허용된다면, 병이라는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곤경에서 해방시켜 주어야 하는 것은 얼마나 더 분명한 가? 이 논쟁은 바리새인의 완악함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외형적으로는 종교적인 사람이지만(안 식일을 지키려고 한다.), 곤경에 빠진 사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다.

두 번째, 세 번째 전승(7-11; 12-14절)은 식사하는 사람들의 이기심을 보여준다. 7-11절은 손님들이 저 녁 식사에서 상좌 자리를 찾는 것에 주목함으로써 시작한다(7절). 예수는 하나님 행동 양식에 기초해서 처방한다("낮은 자리에 가 앉으라"): "무릇 자기를 높히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 라(11절; 참고. 1:48, 52; 3:5; 18:14; 6:20-26절)." 장차 자기에게 도움을 줄 사람만을 주인이 초대했음을 12-14절은 전제한다: 주인의 이기심을 보여준다. 예수는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방법에 근거해서 처방한 다("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초대하라"):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게 될 것이다(14절)."

네 번째 전승(15-24절)은 현재 함께 먹고 있는 사람들이 한 경건한 말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 되도다(15절)." 예수는 행동이 따르지 않는 말의 공허함을 보여주는 비유(allegory) 로써 응답한다. 누가-행전(Luke-Acts) 이야기에는 개괄적인 구원사가 나온다. 이스라엘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예언자)을 통해서 메시야적인 연회에 참석하라는 초청을 받았다. 연회 때 가 되자, 하나님은 자기 종(예수-행4:4:27; 3:26절;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오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자기의 일상적인 것들을 이유로 이 초청을 거절하였다(참고. 눅17:26-30절). 유대인 지도자들로부터 거 절당하자, 주인은 먼저 유대인 중에 추방당한 자들과 이방인들에게 관심을 돌렸다(참고. 15:1-2절). 15 절의 경건한 고백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쓴 가면이다. 이 비유(allegory)는 고 백과 실천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예수는 외형적인 모습 너머, 내적 실재를 드러내는 전체 모습에 주목하였을 것이다.

20:45-47절에서 예수는 서기관의 삶의 방식에 대해 비난한다. 외형적으로 서기관들은 위선적인 종교인 이다. 아직도 그의 상황은 47절a에 머물러 있다: "그는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즉, 그들은 지불하지 못한 빚에 대한 담보물이라고 말함으로 그렇게 한다.)." 제자들이 조심해야 할 외적인 고백과 내적인 실재의 차이가 바로 이런 것이다(45-46절a). 21:1-4절에 제자들이 본받아야 할 내용이 나온다. 유대 율법은 두 렙돈 이하의 돈을 금지한다. 하지만 과부는 최선을 다해 가장 작은 것을 바쳤다. 그렇지만 그는 부자들 (서기관과 같은)보다도 칭찬을 받았다. 예수는 "바친 양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써야 할 것까지도 바친 것에 주목한다"(I. H. Marshall, The Gospel of Luke, p. 750.). 서기관들을 조심하라! 과부를 따르라! 후 자는 전부를 바쳤다. 하지만 전자의 모습은 허위이다.

예수의 성전 멸망에 대한 언급 앞부분에 이 내용이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도전하지만, 아무도 그를 이기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