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식사

22:1-23:56 (A. 22:1-38)




22:1-38절 자료의 대부분은 최소한 느슨한 병행을 이룬다. 하지만 자료의 보편적인 특징은 분명히 누가 적이다. 예수가 매일 가르쳤던 성전(19:45-21:38절.)에서 도시로 장면은 이동한다. 예수와 유대 지도자들 간의 갈등이 지적인 논쟁에서 무리가 없을 때 예수를 잡으려는 음모로 바뀐다(22:1-6절). 사탄이 합류 하고(22:3), 유월절 절기가 어두움이 지배하는 시간이 되어 버린다(22:53). 사탄이 돈을 이용하여 유다를 조종한다(22:5; 행1:18a; 요12:4-6절).

눅22:7-38절을 보면, 식사 장면이 두 부분으로 나온다: 식사 준비(7-13절), 그리고 고별사와 식사(14-38 절).

(1) 준비 장면에서는 먼저 예수가 등장한다. 식사를 준비하도록 베드로와 요한을 보낸다. 그들이 식사 할 장소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를 예수가 예언한다. 그들이 성에 들어갔을 때,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한 남자를 만날 것이다(보통 여자들이 물동이를 가지고 가기 때문에 이는 드문 경우이다.). 그 사람이 제 자들을 사용할 수 있는 방으로 안내할 것이다. "저희가 나가 그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 니라"(비교. 19:32). 예수의 말이 이 경우에 아주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그래서 누가의 청자들은, 14-38 절에 나오는 예수의 예언이 성취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신18:2에서는 예언이 성취되지 않는 것 을 보고 거짓 선지자를 구별한다.).

(2) 이 식사 단락의 해석은 본문 19b-20절에서 나오는 질문들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서방 사본(The western Text)은 다음 말을 생략하였다. " '너희를 위하여 주는.....,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 라' 저녁 먹은 후에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 이 말들이 다른 사본들에 거의 다 나온다. 짧은 본문과 긴 본문 중에 어느 것이 더 오 래된 본문인가에 대한 논의를 계속해서 해왔다. 1950년대까지는 더 짧은 본문이 더 오래된 사본이라 는 일치된 견해가 학자들 사이에 있었다. 그러나 P75 (약 주후 200년경으로 추정되는 Bodmer 누가 파 피루스)는 이 논쟁에서 오히려 더 긴 본문이 오래된 사본이라는 주장을 뒷받침을 해 주었다. 여기서 우 리는 이 입장을 따를 것이다.

이 식사 단락에는 먹고 마심에 관한 두 편의 말씀이 나온다(15-18, 19-20절). 첫 편에는 두 개의 평행 되는 말씀이 있다.

1)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5-16)

2)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 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 하리라(17-18)

이 절들은 특히 유월절과 연관되어 있다(15):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까지 유월절을 먹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고로 이는 미래를 향한 말들이다. 만약 우리가 16절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이 부분을 불가피하게 메시야 잔치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비교. 13:29; 14:15절). 그러나 18절이 부활 후에 예수가 제자들과 먹고 마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24:41-42; 행1:4; 10:41; 비교. 눅 9:27절). 이것이 부활 후의 나타남과 내림 후의 잔치 둘 다 포함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반복적 으로 그에게 다가오는 운명을 예고해 왔다(9:33, 44; 12:50;13:32-33; 17:25; 18:32-33절). 지금 그는 이제 그 때가 왔음을 말하고 있다.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에 별세(exodus 9:31)한다. 즉 그는 이 세상을 떠 날 것이다.

이 상황에서 15-18절은 뒤따라 나오는 고별사에 초점을 맞춘다. 이 고별사에는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몇 가지 특색들이 있다: 영웅은 그가 죽을 것을 안다(벧후 1:15 사도도 그의 죽음을 떠남(exodus)으로 표현한다.); 그는 핵심 인물들을 모아 고별사를 하는데 이 고별사엔 두 가지 구성 요 소가 있다 - 그가 떠난 다음에 있을 일들에 대한 예언이 먼저 나오고, 다음엔 그가 떠난 후에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가에 대한 훈계가 나온다. 누가는 식사를 고별사의 배경으로 설정했다. 22:15-18절에서 예수는 자기가 죽을 것을 말한다; 19-38절의 고별사에서 적절하게 예언들과 훈계들이 나온다. 7-13절에 서 예수의 예언이 글자 그대로 성취되었기에, 예수 예언은 신빙성이 보장되었다. 고별사를 사용하려 고 했다는 점이 22:7-38절의 구조를 결정해 준다. 분명히 누가적인 말이 마지막 만찬(15-18)에 포함되 어 있으며, 이 누가적인 말이 삽입된 것은 무엇보다 예수로 하여금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을 하기 전에 죽을 것임을 말하게 하기 위함이다. 누가는 이 대목을 성찬식의 모델로 그리기 보다 다가 올 죽음을 예 언하는 예수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b) 병행되는 두 번째 부분인 19-20절에서 우리는 또 다른 두 항목을 발견한다.

1)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을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19).

2)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20).

이 절들은 유월절과 분명하게 연결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기를 기념하여 이 식사를 계속할 것을 요구한다(19). 그리고 그의 죽음은 새 언약의 보증이라고 말한다(20). 이는 과거를 향하고 있다. 고전11:23-25절에서 나오는 바울의 주의 만찬 전승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이 부분에서 누가는 예수의 죽음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 적절한 해답을 얻으려면 세 가지 표현을 분 석해야 한다: '새 언약', '내 피로', '너희를 위하여 주는'

첫째로, 예수가 그의 죽음을 '새 언약'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을 생각해 보자. 이 말은 렘31:34-34에 나 오는데, 그곳에서 야훼께서 이스라엘과 '새 언약'을 맺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내가 나의 법을 그 들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33). '새 언약'이란 표현은 나오진 않지만, 비슷한 약속이 겔36:26-27 에 나온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고후3:3, 6절에서 바울은 렘31장을 인용한 다: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 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3절).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6절).

예레미야는 밖으로부터 오는 낡은 명령과 대조되는, 안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께 충성하고자 하는 열정을 새 언약으로 보고 있다. 바울은 이 열정을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눅22:20절은 이 새 언약 정신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 죄로 부패하였기에, 새 언약을 필연적으로 맺어 야 한다(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새 언약에서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 여금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고 소원을 갖게 하는"(빌2:13) 책임을 떠맡으신다. 예레미아와 에스겔이 예 언하고 바울과 누가의 예수가 말하는 새 언약의 새로운 점은, 사람이 하나님과 신실한 관계를 맺는 데 그 책임을 하나님이 떠맡으신다는 점에 있다.

둘째로, 예수는 새 언약을 그의 피로써 보증한다. 이는 출24:3-8절에 나오는 계약 의식의 반영이다. 모 세가 백성들에게 피를 뿌린 후에 말하였다. "보라 이는 여호와께서....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8). 예수는 그의 임박한 죽음이 마음에 새 언약을 새김으로써,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힘을 얻을 것이라 고 말한다. 누가 신학에서, 바울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내적인 힘은 성령이다. 잔을 마신 후에 예수 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의 약속을 보았다. 이 약속은 제자들 안에서 성령의 의해 이루어 질 것이고, 그의 죽음에 의해 보증될 것이다. 예수의 죽음이 누가-행전에서 희생 제물로 여겨진다면, 이 제물은 계 약의 보증으로서의 제물이지 속죄를 위한 제물은 아니다.

셋째로, 떡을 가지고 말한 "너희를 위하여 주는"이란 표현은 속죄제물을 언급할 때 쓰는 표현으로 이해 되어서는 안된다. "주어진(??????)"이라는 이 단어가 희생 제물을 말할 때에 사용되기도 하지만(예 출 30:14; 레22:14절), 순교자를 언급할 때도 사용된다(사53:10). "너희를 위하여(???)"도 역시 희생제물 뿐 만(레5:7; 6:23절) 아니라 순교자의 행동을 언급할 때도 사용되었다(마카비Ⅱ 7:9; 8:21; 마카비Ⅳ 1:8, 10 절). 누가는 예수의 죽음을 순교로 보기 때문에, 이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의 순 교가 제자들에게 놀라운 영향을 끼쳤는데, 곧 새 언약에 관해 말해진 것들이 그들에게 이루어진 것이 다.

22:19-20절에서 떡과 포도주를 놓고 한 예수의 말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의 죽음은 성령 안에서의 생활을 특징적으로 드러내는 새 언약을 보증하는 순교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기 의 죽음을 반복적인 식사 속에서 기념할 것을 요구한다. 이 식사는 공동체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 기에 잊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직접적인 맥락 안에서 볼 때, 19-20절은 고별사의 기능을 하며, 누가는 이 형식 안에 자신의 자료를 삽 입하였다: 15-18절에서 예수는 그의 임박한 죽음을 예언한다; 19-20절에서 그는 자기 죽음이 새 언약을 보증할 것이라 예언하면서, 사도들에게 자기를 기념하면서 새 언약 백성이 되라고 훈계한다. 또 다른 구성 요소가 21-38절에 나온다.

눅22:21-23절은 예언이다. 예수와 함께 있는 누군가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 마26:21-25//막14:18-21과는 달리, 누가의 예수는 식사 후에 배반을 예언한다(시41:9). 이는 예수와 함께 먹는 자도 배반할 수 있다 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비슷한 내용이 고전10장과 요13장에 나온다. 이는 초대 기독교에서 심각한 문제였다(비교 A. V??bus, The Prelude to the Lukan Passion Narrative [Stockolm: Este, 1968], p. 24). 주의 식탁에 참여했다고 해서 배교하지 않으리라고 결코 보장되지 못한다. 이 식탁이 어떤 마술적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고 누가 공동체에 경고하고 있다.

눅22:24-27은 훈계이다. 누가는 마20:25-28//막10:42-45와는 달리, 예루살렘 도상이 아니라 예수와의 식 사 후에, 제자들이 큰 사람이 누구인가 서로 다투고 있는 것으로 그린다. 이는 예수와 함께 먹는 자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망에 사로 잡힐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비교. 고전3:1-4, 12-14; 요13; 마 23:1-11; 이 욕망 역시 초대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이 다툼은 누가의 매우 독특한 가치의 역전으로 해결된다: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찌니라." 이 역전의 모델은 예수이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이 구절은 권위를 내세우는 지도자가 공동체 에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비교. 12:41-48절). 그 만찬이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바른 관계도, 이웃과의 조화로운 관계도 보장하지 못한다.

이 두 경고 뒤에, 예수는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두 가지 약속을 한다. 22:28-30절에는 첫 번째 약속 이 예언의 형태로 나온다. 예수와 함께 예수의 고난에 참여한 사람들은 메시야의 잔치(비교. 13:28-29; 14:15절)와 마지막 심판에 참여할 것이다(비교. 마19:28; 고전6:2, 3절): 예수가 그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 의 궁극적인 승리를 약속한다.

두번째 약속은 눅22:31-34절에서 예언과 격려의 형태로 나온다. 예수는 사탄이 그의 제자들을 공격 할 것을 예언한다(31절에서 '너희'는 복수이다; 비교 욥1-2; 슥 3:1-3절). 그리고 그들을 위한 중재의 기 도를 약속한다(32절에서 "너"는 단수이다; 비교. 요17:15; 롬8:34; 히7:25절). 그리고 베드로가 세번 부인 할 것을 예언한다. 베드로의 실족을 누가는 배교로 여기지 않는다. 베드로는 결코 부인하지 않으리라 큰 소리치지만 예수를 부인할 것이다. 하지만 곧 뉘우칠 것이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할 수 있는 대로 형제들을 굳게할 것을 명령한다. 사탄이 제자들의 배교를 획책하지만, 예수의 기도가 그들을 보호할 것 이다. 이는 부활하신 주님이 하늘에서 중보 기도하실 것을 예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위로의 약속이다.

눅22:35-38절에서 예언을 배경으로 한 훈계로 고별사를 마감한다. 뒤따르는 자들도 주님처럼 고난(그는 불법자로 여김을 받았다, 즉 행악자로 처형되었다-23:39이하)을 받을 것이다. 이전의 평화로운 전도 여 행은 더 이상 기대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을 훈계한다: 고난과 자기 희생을 대비하 고 주의 길을 따르라. 이것들이 믿음을 연단할 것이다. 벧전1:6-7절이 이를 잘 말해 준다. "그러므로 너 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가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이 예수의 말을 문자적으로 듣고 검 둘을 가져 온다. 실망한 예수는 "족하다"라는 말로 대화를 마친다.

22:14-38절의 고별사는 예수의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배교, 다툼, 부인 그리고 박해가 있을 것 을 경고한다. 제자들은 바르게 행동하라는 훈계와 더불어 확실한 약속도 받는다. 예수의 죽음이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보증한다; 그는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그와 함께 하는 제자들에게 궁극적인 승리를 약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