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들의 모델

22:1-23:56 (B. 22:39-23:25)




눅22:39-23:25절은 다른 공관복음서의 자료들의 대부분과 병행한다. 하지만 형식만은 매우 누가적이다. 예수의 죽음을, 제자들을 위한 모델인, 순교로 여기는 누가 입장에서 보아야 이 구절의 의미하는 바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예수의 죽음에서 두 가지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는, 다른 신약의 증언들과 대조적으로(바울같이, 예. 고전15:3; 고후5:21; 롬3:25; 마26:28절), 누가는 예수의 죽음을 죄사함과 연결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a) 사도행전의 베드로(2:38; 3:19; 5:31; 10;43절.)와 바울(13:38; 17:30; 26:18절) 설교에서 죄사함은 부활 하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다(눅24:47절). 그래서 십자가 상의 예수의 죽음은 죄사함과 결코 부합되지 않는다.

(b) 막10:45절과 대조적으로("인자의 온 것은....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눅 22:27b절("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에는 속죄의 죽음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다.

(c) 눅22:37절(사53:12절)과 행8:32-33절(사53:7-8절)은, 이사야 53장을 인용하면서, 종이 희생 제물로 죽 는다는 내용은 생략했다.

(d) 누가-행전에서 세례(행2:38, 41; 8:12, 13, 16; 8:37-39; 9:18; 10:47-48; 16:15; 19:5; 22:16절)와 주의 만찬(눅22:16-20; 24:40 이하; 24:41 이하; 행2:42-46; 20:7, 11; 27:35절)이 모두 예수의 속죄하는 죽음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대조. 롬6:3 이하; 고전11:23 이하). 누가-행전에는 죄사함을 지상의 예수가, 특히 식사 때에(19:7f; 15:1ff; 5:29-32), 그리고 부활 후에는 고양된 주님이 선포한다(행3:28; 4:11; 5:31-"이스 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 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다른 하나는, 누가는 예수의 죽음을 순교로 그리고 있다. 그의 죽음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압력을 넣어 정치 지도자들이 무죄한 자를 죽인 불의한 살인이다.

(a) 예수는 기소 당한 죄목에 대해 무죄이다(23:4, 14, 15, 22, 41, 47절).

(b) 유대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22:66; 23:1-2, 10, 13, 18, 21, 23, 24;비교 행5:27, 30; 13:27절)들이 예 수를 잡아 넘겼고, 이방인들(23:34; 행4:27절)이 그를 처형했다.

(c) 예수의 죽음은 유대인 관점에서 과거 예언자들의 고난과 병행한다(13:33; 행7:52 - "너희 조상들 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치 아니 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너희가 죽였고 이제 너 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그래서 예수는 긴 순교자 계보의 끝에 위치한다.

(d) 마카비Ⅱ 7:2, 11; 마카비Ⅳ 6:1; 10:23에 나오는 다른 순교자들처럼 예수는 고발자 앞에서 침묵한 다. 이사야의 순교처럼 예수의 순교도 악마가 획책한다(22:3, 53절). 헤롯이 순교자들을 죽일 때처럼(요 세푸스, Antiquities, 17:6:2-4 §167), 예수가 죽을 때도 해가 빛을 잃었다(22:44).

(e)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행악자 중 한 사람이 순교자로서 죽는 예수를 보고 그에게 말한다(23:40-43 절).

(f) 예수의 순교자로서의 죽음은 구약 예언의 성취이고(눅23:25-27, 46; 행13:27-29절),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행2:23).

둘째, 예수의 순교는 제자들을 위한 모델로 보인다. 이 점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 죽음 이야기와 누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죽음 이야기가 병행되고 있음을 살펴보면 더 분명해진다.

(a) 예수와 스데반 모두 공회에서 재판받는다(눅22:66 이하, 행6:12 이하).

(b) 두 사람 모두 순교자로 죽는다.

(c) 행7:59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고 표현된 눅23:46의 반영이다.

(d) 행7:60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는 눅23:34절의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 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의 반영이다.

(e) 두 이야기(눅22:69; 행7:56) 모두 인자의 말을 담고 있다: 행7:56절은 복음서 외에 인자를 말하는 유 일한 구절이다, 예수가 인자로 언급된다.

(f) 두 이야기 모두가 죽음으로 복음전도의 열매를 맺는다(눅23:39-43; 행8:1 이하; 11:19 이하). 더구나 스데반의 순교는 예수 말씀의 성취이다: 눅21:12-19, 특히 16절(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역시 12:1-12절). 예수와 스데반의 죽음은 누가-행전에서 순교로 그리고 있다. 전자는 후자의 모델이다.

예수의 죽음을 순교로 보고, 이를 따르는 자들의 모델로 여기는 누가의 입장에서 22:39-23:25절을 살펴 보자. 여기서, 예수는 자기 공동체의 모범(example)으로서 순교의 길을 간다. 많은 점들이 이를 뒷받침 한다.

(1) 눅22:39-46절은 예수가 재판받기 전에 나오는 두 일화 중 첫 번째 일화이다. 예수를 감람산에서 시 험에 들지 않도록 보호해 줄 것을 기도하는 모범을 보이시는 분으로 그리고 있다. 누가는 자기 목적을 담기 위해 이 기도 장면을 나름대로 구성한다.

첫째, "제자들도 쫓았더니"(39)를 강조하고 있다. 마태나 마가와는 달리 누가는 예수와 제자 사이의 떨어뜨려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제자들은 예수의 시험에 항상 함께 하였다(22:28; 행14:22절). 누가는 부활절 이후 제자들 증언의 신빙성을 위해서 도처에 나오는 예수의 사역 만큼이나 따르는 사도들의 모 습을 중요하게 여긴다.

둘째로, 예수의 이 기도 이야기에는 훈계가 담겨 있다. 예수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말한다(40, 46; 비교 11:4 - '들어 가다'는 '굴복하다'는 의미이다.). 명령법 현재는 지속적인 힘을 가진다: "기도하라". 어둠의 시대에 사탄의 공격에 맞서 싸우는 스승 예수와 제자들의 무기가 기도이다(21:36, 18:7-8절). 이 구조는 이야기의 의미를 확장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환난이나 박해를 만나면, 기도하라고 명령한다(비교. 행4:23-31절). 제자들에게 실족한 상황이라는 전제 속에서 이 명령이 주어진다(눅22:22, 32, 34, 54-62절).

셋째로, 기자는 예수를 기도하는 기독교인의 모델로 그리고 있다. 다른 공관복음에는 없는 34-35절은 진정성에 대한 의심을 받는다. 이 구절이 있어야 하는 강력한 내용상의 증거가 있다. 누가가 기도를 다 룰 때에는, 하늘 사건이 뒤 따라 나오는 경향이 있다(예. 눅3:21-22; 9:28-31; 행10:1-7절). 힘을 돕는 사 자의 가장 좋은 병행은 단10:18-19와 랍바 창세기(Genesis Rabbah) 44에 나온다. 이는 마카비 시대 (Maccabean period)에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 사람들에게 들려준 이 야기이다. 땀과 피의 가장 좋은 병행은 마카비Ⅳ 6:6, 11; 7:8에 있는 에르아잘(Eleazer)의 순교 이야기 이다. 이 두 조목 모두 누가의 전체적인 경향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순교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이 구절들을 포함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수는 기도하고 있는데, 하늘부터 사자가 나타나 더 힘껏 기 도하도록 돕는다. 여기에서 예수는 더 이상 아버지와 제자들로부터 버려진 존재가 아니다. 그가 순교를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갖도록 사자를 하늘이 보낸다. 예수는 위기 때마다 기도하여, 자기가 말한 기도 명령의 본을 보여주었다(행4:23-31, 12:1 이하; 16:25 이하). 가르치고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예수는 어둠 의 시대에서 순교할 각오를 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J. Warren Holleran, The Synoptic Gethsemane [Rome: Universita Gregoriana Editrice, 1973], chaps 3, 6, 7).

마지막으로 기도의 내용은 순종이다: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강력한 기도로 시험이 극복된다(비교 엡6:18; 골4:2절). 예수의 기도는 제자의 모델이다.

(2) 22:47-53절에 나오는 두 번째 일화에서 예수는 자기 공동체를 위한 선생이며 모델이다. 이 체포 이야기에서 다른 공관복음과 비교해 보면, 두 가지가 저자의 의도로 수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a) 49절에서 제자들이 일어나는 일을 보고 있다. 그래서 말한다. "주님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b) 51절을 보면, 제자 중 하나가 대제사장의 종 오른쪽 귀를 잘라 버리자, 예수가 말한다. "이것까지 참으라(No more this)" 그리고 예수가 귀를 만져 낫게 해 준다. 이 두 가지를 통해 예수는 순교를 피하 기 위해 물리적 폭력을 행하는 것을 금한다: 자기 방어를 위한 폭력은 허용되지 않는다.

(3) 22:54-23:25절에 나오는 재판에서 예수는 자기 공동체 사람들이 위기의 시기에 취해야 할 몇 가지 모델을 보여준다. 재판을 세 번(밤에 공회, 아침에 공회, 빌라도) 말하는 마태, 마가와는 대조적으로 누 가는 네 번의 재판(22:66-산헤드린, 23:1-빌라도, 23:8-헤롯, 23:13-빌라도)을 말한다. 이것은 바울 재판 과도 병행되는 것 같다(행23-공회, 24-벨릭스, 25-베스도, 26-헤롯 아그립바).

⒜ 누가에서 예수는 대제사장의 집에 잡혀 있지만, 밤에는 재판이 없었다. 독자들이 새벽을 기다리는 동안,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다(54b-62). 사탄이 베드로를 흔들고 있다(22:31). 이 대목에서 누가의 독 특한 점은, 예수가 돌이켜 베드로를 봄으로써(61a), 베드로가 회개의 통곡을 한다는 점이다(62; 몇 사본 에서는 생략되었지만, 이른 사본에 나오므로 이 절의 진정성은 분명하다.). 순교자 예수는 길 잃은 제자 들을 제 자리로 돌이키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22:32). 지금 개인적으로 죽음의 위기에 처했어도, 예수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이 점에서 예수는 공동체를 위한 모델이다. 이 예수의 충실함이 우리 의 충실함을 불러일으킨다(딤전6:13-14).

⒝ 예수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고 있어도(22:42), 그가 순교를 청한 것은 아니다. 이것을 재판들은 분 명히 해준다. 날이 새자, 예수는 공회로 끌려갔다(22:66). 그곳에서 간단히 심문받았다. 예수에 대한 고 소는 단지 그가 말한 것만을 근거로 하였다. 마26:60//막14:56-57절에 나오는 거짓 증언은 누가복음에는 없다. 문제는 그의 정체성이다: 네가 그리스도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마26:61//막14:58절에 나오 는 성전 파괴에 관한 언급도 누가에는 없다. 예수는 답변을 회피한다. 첫 번째 답변은 다음과 같다. "유 대 지도자들이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종을 변호하실 것이다(행2:33-36; 5:31; 7:56절)." 두 번 째 답변은 간단하다. "그것은 네가 말한 것이다(70절; 저자의 의도를 살려 번역함 - That is what you say)." 이 회피는 당시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예수는 순교를 청하지 않았다. 세네카같은 이교도 선생 들은 말했다(Epistle 24:25). "무엇보다도....약한 자는 많은 것을 가지려 한다. 특히 죽음을 갈구한다. 이 렇게 되지 말라." 유대 선생들은 자기를 파괴하는 순교에 대한 과도한 열망을 비난하며, 죽음의 자리에 서 벗어나라고 주장하였다. 초기 기독교도 같은 입장을 취했다: 폴리캅은 순교(the Martyrdom of Polycarp), 4에서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 포기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복음이 그렇게 가 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키프리안 행전(the Acts of St. Cyprian)은 말한다. "우리의 제자도는 스스로 포기하는 것을 어느 누구에게도 허용하지 않는다" 예수는 죽음을 갈망하지도, 자기 파괴에 빠지지도 않 았다. 단지 아버지의 뜻을 따랐을 뿐이다. 하나님의 뜻이 순교로 인도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제자들의 원형이다.

⒞ 유대 공회는 예수에게 사형을 언도하지 않는다. 마태복음(마26:66)과 마가복음(14:64)에도 그렇게 나 타난다. 그들은 예수를 두번째 재판을 받도록 빌라도에게로 끌고 갔다(23:1). 23:1-5절에 유대 지도자들 의 고소문이 나온다. 그들은 앞선 자기들의 재판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으로 예수를 고소한다. 그 내 용은 매우 정치적이다;

1) 백성을 미혹했다;

2)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했다;

3) 자칭 왕이라 하였다(2절).

물론 누가는 독자들에게 그 고소가 거짓임을 알려준다(비교. 19:41-44에서 예수는 평화를 원하고 있다; 20:21-25에서 세금을 금하지 않았다; 22:67-70에서 그의 정체성에 관한 그의 대답은 모호하다). 이 거짓 증언으로 고소당하는 점에서도 예수는 그를 따르는 자들의 원형이다. 로마 관리가 가장 관심 갖는 것은 왕권에 대한 것이었다(비교. 행17:7-8절). 그래서 빌라도가 묻는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의 대 답(3)은 공회에서와 같다(22:70). 그는 회피한다. 빌라도의 판결은 공회의 것과 다르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는 죄가 없도다." 유대 지도자들이 더욱 강하게 말한다: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 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고자 혁명 의 고장인 갈릴리를 언급하였다. 이들은 거짓 증언을 하고 있다. 그의 제자들도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 예수가 갈릴리인임을 알자, 빌라도는 예수를 헤롯에게 보냈다. 마침 그가 예루살렘에 있었다(6-7). 그는 예수를 보고자 했다(비교. 9:9). 헤롯이 세 번째 재판을 주재한다. 이 기록은 누가복음에만 있다. 이것은 세 가지 역할을 가능케 한다.

1) 신19:15절에서 두 명의 증인이 요청되는데, 예수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두번째 관리(증 인)의 역할을 헤롯이 한다. 23:14-15절을 보면, 백성을 미혹했다는 항목에 대해 예수는 틀림없는 무죄이 다. 두 관리가 이에 동의한다.

2) 이것은 시2:1-2절을 성취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이 구절은 행4:25-26, 27절에 인용되었다.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헤롯과 빌라도가 모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이 헤롯과 빌라도를 우 호적으로 보고 있다는 판단이 더 타당한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기 때문 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4장은 그들이 예수를 죽이는 데 가담했기에 그들에게 적대적이다.

3) 에베소서는 예수의 죽음이 인간의 적대감, 특히 유대인과 이방인의 나누어짐을 화해케 하였다고 말 한다. 23:12절은 유대 지도자(헤롯)와 이방인(빌라도)이 예수의 피가 흐르는 바로 그날에 하나가 되었음 을 말하고 있다(John Drury, Tradition and design in Luke’s Gospel [Atlanta: John Knox, 1976], pp. 16-17.). 이 세 번째 설명은 가능하지만, 누가의 구도에서는 분명하지 않다. 이 단락의 주된 기능은 첫 번째 설명인 것 같다. 누가가 '죄 없는 예수' 상에 집중하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예수는 제자들의 모델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 라 그리스도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벧전3:17-18)

⒠ 예수의 무죄함에 대한 강조는 네 번째 곧 마지막 재판에서도 계속된다(23:13-25). 여기서 빌라도의 모습은 재판관보다 오히려 예수의 옹호자이다. "내가....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14-16) 여기서 '때려서'(chastisement)는 가벼운 매질을 하고 엄하게 경고하 는 것이다(비교 행16:22-24; 22;24절). 빌라도는 결국 예수에게 선고 유예로 판결내리려 하고 있었다. 대 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들, 즉 예수의 적대자들(바리새인은 없다)이 모두 예수를 죽이고 바라바를 놓 아 주라고 소리 질렀다(18). 이 점이 복음서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증거도 없는, 백성을 미혹한 죄목으로 예수를 죽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도시에서 민란과 살인 죄를 범한 자를 풀어 주라고 소리치고 있다(19). 빌라도가 세 번째로 예수를 풀어주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22).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23)-빌라도는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갖혔던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였다. 재판들의 전체적인 인상은 다음과 같다. 죄 없는 사람이 죄를 선고 받고, 순교자로서 죽음의 길을 가고 있다.

누가는 예수가 죽음을 향하고 있는 과정을, 제자들이 자기들의 이야기로 읽어 주기를 바란다. 죄가 없 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적대자들의 뜻에 따라 넘겨져서 고통(행16:19-39)을 받게 되고 심지 어 죽기도(행7) 할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그들의 무죄함이 입증될 것이다. 이럴 때 기독교인들은 기 도해 왔고, 시험에 들지 않게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는데,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22:39-46). 순교는 청 해서는 안되고, 또 순교를 피하기 위해서 폭력을 써도 안된다. 거짓 증언으로 제자들이 고발될 수도 있 다.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고소 당한 사람의 죄목이 오히려 고소하는 사람의 죄일 때가 자주 있다. 이 런 위기의 때에 우리의 모델은 예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