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와 순종

22:1-23:56 (C. 23:26-56a)




23:26-56a절은 다른 공관복음에도 나오지만, 그 목적은 전혀 다르다. 이 부분에서 누가적인 특징을 발 견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는 첫 장면인 26절에 있는데, 여기에서 구레네 시몬이 나온다. 누가는 시몬 을 예수 뒤를 따라가며, 십자가를 지는 사람으로 묘사하며, 이를 통해 제자도(비교. 9:23, 14:27 - 십자 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뿐만 아니라 예수가 누구인지(개척자, 인도자, 앞서 가면서 따르는 자들을 위 해 길을 열어 주는 사람 - 비교. 19:28 행3:15, 5:31, 히2;10, 12:2절)도 말한다. 예수는 제자들 앞서 간다 (19:28); 제자들은 예수가 열어준 길을 따라간다. 시몬은 예수의 모든 시험에 함께 한 제자들의 상징이 다(22:28). 신약성서는 여러 곳에서, 이 책에서 처럼, 예수를 '모범'(example)(요13:15, 벧전2:21절)으로 말한다. 이 '모범'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인도자-따르는 자' 구도를 의도하기 때문이다. 예수에 대 한 이러한 묘사가 다음 단계를 설정한다.

32-56절은 예수의 길을 수평, 수직의 두 관계로 묘사한다. 저자는 다른 사람과의 수평적 관계에서 예수 의 무죄를 강조한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의 수직적 관계에서 예수의 순종을 강조한다. 이 흐름들이 이야기 속에서 뒤섞여 있더라도, 이 둘 모두를 보지 않으면 예수의 길을 바로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소년 시절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2:52)졌던 바로 그가 지금 이 두 관계를 강조하면서 생 을 마감하고 있다. 저자는 예수를 이렇게 묘사함으로써 따르는 자들의 모델로 그린다. 본문을 읽으면서 이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눅23:32-43절에서 예수는 행악자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린다. 다양한 반응들이 나타난다. 이야기의 몇 요소들이 눈에 띈다.

⑴ 34a,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 다."는 많은 사본에는 없다. 하지만 그 진정성은 거의 확실하다. 이 말과 사상이 매우 누가적이다(아 버지-10:21; 11:2; 22:42; 23:46;. 몰랐기 때문이니 사하여 주옵소서-행3:17; 13:27; 박해자들을 위한 중보 기도-행7:60절). 예수의 말이 십자가에 처형되는 이야기의 주요 부분마다 나온다(23:28-31, 43, 46절). 만약 예수의 이 말이 없다면, 구조가 흐트러진다. 물론 28-31과 갈등을 빗기 때문에 혹은 A.D. 66-70년 의 사건이 그 기도가 이루러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기에 생략하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기도는 사 53:12절의 반영이다: "범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 을 실천하고 있다(6:27-28; 17:14절): 그는 하나님의 뜻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그 뜻에 순종한다.

⑵ 관원들(35), 군병들(36-37), 달린 행악자 중 하나(39)의 반응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 던져진 3중 유혹이다. 이는 초기에 광야에서 받았던 3중 유혹(4:1-13절)과 매우 비슷하다: "만약 네가 그리스도, 왕 이라면 너를 구원하라." 아직 예수가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광야에서처럼, 그는 자신을 위하여, 심지 어 자기 목숨을 구하는 일에도 그 힘 쓰기를 거절했다. 이 사실을 잘 이해하려면, 예수의 사역 전반에 걸친 조망이 필요하다. 광야 유혹은 세례받고 기도할 때, 그 응답으로 성령이 충만히 임했을 때에 있었 다(3:21-22; 비교 4:16-21절). 이때 문제는, 예수가 성령의 능력을 자기 이익을 위하여, 자기 영광을 위 하여, 동기가 순수하지 못한 일들을 위하여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성령, 곧 성경 말씀으로 예수 는 그 유혹을 극복했다. 그 후로부터 예수는 그의 능력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다. 십자가 위에서 의 유혹은 9:18절에서 시작된, 예수 사역의 절정(exodus)을 향한 여정 속에 계속 있었다. 이때부터 예수 는 거절당함, 고난, 그리고 죽음의 길을 걷고 있다. 모든 애착은 우상 숭배와 같다. 그가 이 가능한 애 착을 모두 떨쳐 버릴 때,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길을 완성하게 된다. 지금 마지막 시점에 왔다. 그는 십 자가 달려 있고, 생명력은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있다. 바로 이 때 그에게 같은 질문이 다시 제기된다. 예수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과연 성령의 힘을 사용할 것인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 애착은 생명 그 자 체이다. 여기서 생명은 단지 물질적으로 계속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네가 그리스도, 왕이라면, 너 를 구원하라." 십자가에 달린 한 행악자가 여기에 "우리를" 첨가한다(39). 이 마지막 애착도 하나님보다 다른 것, 즉 생명에 더 집착하게 하는 우상 숭배와 같은 것이기에, 예수는 이를 떨쳐버린 것이다. 그는 죽기까지 복종하신다(빌2:8). 그는 죄를 범하느니(우상숭배자가 되느니) 차라리 죽을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완전한 순종을 하였다(히5:8-9; 벧전4:1-2절).

⑶ 십자가에 달린 다른 행악자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자기가 벌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유대교 전통에 따르면, 이런 행동은 참회의 표현이다(41-42). 그리고 그는 예수에게 죄가 없음 을 선언했다. 그리고 말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42)" 내림(來臨) 때에 예수가 이 탄원을 들어줄 것이다(9:26; 12:8-9; 18:8b; 19:15; 21:27, 36b). 그러나 예수는 즉각적인 지복 을 약속하는 대답을 하였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 낙원은 원래 왕이 소유하고 있는 정원이나 사냥터를 말한다. 유대교에서, 낙원은 의인들에게 약속된 나라이다-. 누가는 이를 "아브라함의 품"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16:22). 그의 견해는 개인적 종말론 이다. 즉 종말은 각 개인의 죽음이다(예 12:4-5, 16-21; 16:19-31; 23:43; 행7:55-60절). 이 종말론의 뿌 리는 고대 유대교이다. 아브라함 묵시록 21은 말한다. "의인은 죽으면 바로 낙원으로 간다. 거기서 천상 의 열매들과 만복을 즐긴다. 반면에 악인은 즉시 지하 세계로 간다." 에녹1서에서는 의인이 이미 생명 동산에서 살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누가-행전처럼, 바울도 이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예 고전5:8; 빌 1:23절). 순교에 대한 고대 사상의 배경을 알면 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누가가 어떻게 예수의 순교를 이해하고 있는가를 잘 파악하려면, 이교도, 유대교, 초대 기독교가 어떻게 순교를 이해했는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다. 첫째로 이교도의 순교 이해를 살펴보자. 고대 많은 학 파는 순교를 긍정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 참된 철학자들이라면, 자신이 가르친 대로 자신도 살아야 한다. 이것은 상식이다.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철학자들의 가르침은 가치가 없다(예 Seneca, Epistle, 52:8-9; Dio Chrysostom, Discourse, 70:6). 고대 철학자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 철학자들이 그렇지 못하다면 참된 철학자라 할 수 없다. 몇몇 사람들은 이를 아주 단호하게 말하였다. 요세푸스는 과장해서 자기 철학을 위해 죽는 그리스 철학 자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하였다(Against Apion, 1:8). 같은 정서가 루시안(Lucian)에게도 발견되었다 (The Fisherman, 31): "그들은 자기 삶과 행동에서.... 그들의 주장과는 모순되게 [철학을] 실천하지 않 는다." 에픽테투스(Epictetus) (Discourses, 1:29:56)도 말했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한가?....행동 으로 자기 주장을 입증하는 사람이 부족하지 아니한가?" 세네카도 이와 같이 외친다: "우리 학파는 자 주 치욕적인 조소를 당한다- 우리는 철학의 말만 하지, 행동하지는 않는다." 철학자들의 성실성을 냉 소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기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죽으려고 한, 그리고 실제로 죽은 철학자 들도 가끔 있었다.

침묵의 철학자 세쿤두스의 생애(The Life of Secundus the Philosopher)는 기꺼이 죽으려고 함으로써 자기 신념을 지킨 예가 나온다. 어머니를 죽게 한 사고를 이유로, 세쿤두스(Secundus)는 스스로 자신을 파문하고, 남은 생애 동안 침묵을 결심한다 -이는 피타고라스파(Phythagorean)의 생활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하드리안(Hadrian) 황제가 아테네에 왔을 때, 그를 시험하고자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다. 세쿤 두스는 대답을 거부했다. 그래서 황제는 사형 집행인으로 하여금 그를 끌고가게 명령했다. 그 사형 집 행인은 비밀 지시를 받았다. "만약 세쿤두스가 말을 하면 죽여 버리고, 형장에서도 끝까지 말하지 않으 면 다시 데려 오라." 그가 자기 침묵의 서약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죽으려 하자, 다시 황제에게로 인도 되었다. 황제의 20가지 질문에 글로 대답하는 것이 허락되었고, 그 답변서는 신전 도서관에 보관되었다. 그가 죽음도 불사했기에, 그의 철학은 인정 받을 수 있었다.

⒝ 철학자가 죽으면서 전한 가르침이 때로는 큰 영향을 주기도 한다. 플라톤(Plato)의 변명(Apology)에 는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야기가 나온다. 39장에서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나는 마지막으로 너희들에게 예언한다; 왜냐하면 나는 곧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예언자의 능력을 갖게 될 것이 다. 나를 죽이는 너희들에게 나는 예언한다. 내가 죽자마자 너희들은 내가 받은 것보다 훨씬 더 무거운 처벌을 틀림없이 받게 될 것이다." 이 문맥에서 우리는 지금 고소인들을 더 많이 고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죽음이 그의 고소를 확증하였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에 그의 제자들이 아테네인들을 공격했 다. 이는 전에 결코 없었던 일이었다.

또 다른 편으로, 그리스-로마 선생들은, 순교는 어떤 결과도 생기게 하지 못한다고 경고한다; 순교는 몇 가지의 결과를 얻게 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결코 얻지 못한다(Lucian, Peregrinus, 13; Marcus Aurelius, 11:3:2).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특히 어떤 사람이 순교하려고 애를 쓴다면, 그는 죽음을 갈망한 것이기에 그의 순교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

고대 유대교가 취한 순교에 대한 입장은, 물론 차이가 있지만, 그리스-로마 입장과 비슷하다. 한편으로, 이들은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 두 가지 흐름이 나란히 있었다. 한 흐름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손에 순교자로 죽은 예언자의 순교에 관한 것이다(예. Lives of the Prophets[예언자들의 생애]; Martydom of Isaiah[이사야의 순교]; 비교. 마23:31-39; 히11:36이하; 살전2:15; 막12:1-12절).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성을 강조한다(비교. 눅 13:33-34; 행7:52절). 다른 흐름은, 이방인의 손에 순교자로 죽은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에 관한 것이 다. 참된 예언자는 죽음으로 자기 증언을 확증한다. 이는 그리스-로마의 이교 사상과 같은 견해이다. 마카비Ⅳ. 7에서 시리아인들은 율법학자이며 나이 많은 엘르아잘(Eleazer)에게 강제로 돼지고기를 먹이 려 했다. 먹기 싫으면 먹는 체라도 하라고 했다(마카비하6:18이하). 그러나 그는 이것을 거절하여 태형 을 거행할 곳으로 바로 끌려가, 기꺼이 채찍에 맞아 죽었다. 마카비Ⅳ 7:15에 말한다. "율법에 충실한 사람, 그는 죽음으로 믿음을 완성한다".

⒝ 때로는 순교가 유대교의 개종자를 생기게 했다. 한 전승에 테라디온의 아들 랍비 하니나(Rabbi Hanina ben Teradion)가 나오는데, 그는 모임에서 율법을 가르친 죄목으로 체포되었고, 화형당했다. 그 런데 이 과정을 끝까지 지켜본 사형 집행인이 스스로 불 속으로 투신해 버렸다. 그러자 "랍비 하니나와 사형 집행인은 낙원으로 들어갔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유대 선생들은 그리스-로마 이교 사상과 비슷한 순교에 대 해 경고하였다: 순교가 항상 다른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것은 아니다(마카비하6:29). 무엇보다도 순교를 너무 지나치게 열망하면, 이는 자기를 파멸시키는 것이다(예 Genesis Rabbah, 82).

고대 기독교는 순교에 대한 이교도와 유대교의 견해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편으로, 긍적적인 입장이 있었다. 이교도와 유대인들과 같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자기 주장의 진실성이 피로 보증된다고(예. 계시록; 저스틴, 변증, 12) 생각하였다. 단지 영지주의자(Gnostic) 몇 명만이 순교하는 것을 거부했다 (예. 이레니우스, Against Heresies, 1:24:3-6-바실리데스; Tertullian, Against All Heresies, 1-바실리 데스). 이교도나 유대인들보다 더 많은 기독교인들은 순교가 복음 전도에 더 이롭다고 믿었다: 순교가 복음전파에 도움이 되었다. 저스틴(Dialogue, 110)은 "우리가 박해 당하면 당할수록 믿는 이가 더욱 늘 어난다"라고 말하였다. 터툴리안(Tertullian)(Apology. 50)도 동의하였다: "우리는 죽으면서 정복한다.... 우리가 너희들에게 처형되면 처형될수록, 더 많은 수로 증가한다; 기독인들의 피는 씨이다." 디오그네투 스 편지(The Epistle to Diognetus) 6:9은 "기독교인이 처형당하면, 그들은 매일 더 많은 수로 증가한 다"라고 말한다. 또 같은 책 7:7-8은 "누가 그들을 야수에게 던져 주님을 부인하게 할 수 있는가? 아직 굴복시키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너희들은 그들이 많이 처형되면 더 많은 수가 늘어나는 것을 보지 못 하였는가?"라고 말한다. 락탄티우스(Lactantius)는 "종교가 인내와 죽음으로 믿음을 보존하고 하나님 을 기쁘시게 하면, 이것이 종교에 권위를 더해 줄 것이다(Divine Institute, 5:19)"라고 말했다.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도들은 이교도와 유대교도들과 함께 순교를 절제한다: 순교가 매우 설득력이 있 지만, 그러나 분명히 증거는 아니다(비교. The Acts of the Christian Martyrs, ed. H. Musurillo [Oxford: Clarendon Press, 1972], passim). 순교에 대한 과도한 열정은 비난받아 마땅하다(예. Martyrdom of Polycarp, 4). 그런 죽음에 대한 열망은 생명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믿음을 어길뿐더러, 그 행동의 설득력을 저하시킨다.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죽음 이야기는 이런 배경 하에 기록되었다: 예수는 죽음을 향한 열망 때문에 죽 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그 죽음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주장을 자기 피로 보증하고, 죽음으로 확증하였다. 그는 자기 입장에서 철저히 신실했다. 이 신실성을 보고, 십자가에 달 린 한 행악자가 회심한다: 예수의 죽음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다(비교. 행8:1, 4; 11:19이하 스데반의 순교 후 일어난 복음 전파). 이러한 구도가 예수의 죽음이 이기적인 행위가 아니었음을 설득력 있게 말해 준 다. 예수가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의 용서를 중재하는 분이라는 것을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가 회심 하였다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목적이다(5:29 이하; 7:36 이하; 15:1-2; 18:9-14; 19:1-10절). 죽기 전의 예수에 의한 회심과 확증은 이 이야기의 주제가 예수가 살아 있는 분이고, 용서를 보증하는 분이라는 것을 잘 말해 준다. 지상에서든, 부활 이후든, 예수는 살아있다(예. 행5:31). 누가가 바울이나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 죽음의 대속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 살았고 지금도 살아 있는 예수 를 통해 중재되는, 용서를 보고 있다. 누가-행전에서 예수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거부 때문에 죽었다. 수난 이야기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과 바울에 관한 이야기와 아주 비슷하며, 원래 거부당하는 이 야기다. 예수는 순교자로 죽고, 그의 피는 새 언약을 보증한다(22:20). 하지만 그가 속죄 제물은 아니다.

⑷ 눅23:44-56절에는 예수가 죽고, 장사된다. 예수의 죽음 이야기에서 몇 가지가 두드러진다(44-49).

⒜ 정오부터 세 시까지 캄캄했다(비교 아모스8:9). 그리스-로마 정서에서 우주적으로 중요한 사건은 우 주적 징조에 의해 증명된다(예 Lucan, Civil war, 7:199-200에서 파르살리아 전쟁에서 "하늘에서 슬퍼 하는 신이 태양을 희미하고 어둡게 함으로써, 전쟁을 예고했다"라고 말한다).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 의 권세로다"(22: 53).

⒝ 예수가 죽을 때 한 말,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는 누가복음에만 있다. 이 는 시31:5절의 인용이다. 대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27:46/ 막 15:34)는 없다. 예수는 조용히,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죽는다. 이 모습은 뒤따르는 기독교 순교자들의 모 델이다. 예수는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조용히 죽었다. 백부장은 이를 지켜보다가 예수의 무죄함을 믿게 되었다. 마27:54과 막15:39절에서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말하는 백부장과는 달리 누가의 백부장은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말한다(47-dikaio?). 다른 공관 복음서에서 백부장은 기독론자인데, 누가에서는 변증가이다.

⒞ 49절에서 갈릴리인들이 예수의 죽음을 증언한다. 사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수난 사건 내내 참여한 이 사람들이, 부활 후 발전된 공동체에서 감독권을 행사할 바로 그 "예수와 함께 한" 자들이다. 여기서 우 리는 확인한다: 예수는 실제로 죽었다.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를 장사하는 누가의 이야기는 마태, 마가의 같은 이야기와 두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첫째, 51절은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라"이다. 달리 말하면, 요셉은 예수가 무죄라고 생각하는 산헤드린 의원이었다. 예수의 무죄성은 23장의 주요 흐름이다:

⒜ 빌라도-4

⒝ 헤롯-15

⒞ 빌라도-14

⒟ 빌라도-22

⒠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하나-41

⒡ 백부장-47

⒢ 아리마대 요셉-51-예수의 무죄를 주장하는 마지막 인간 증언자.

둘째, 누가 기자는 몇 명의 여인들이 예수가 장사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또한 그들이 갈릴리로부 터 그와 함께 왔었다는 점을 강조한다(비교 8:1-3). 그리고 그들은 예수의 몸이 어떻게 눕혀졌는지를 보았다. 예루살렘 사건에서 누가는 죽어 장사되고 일으켜지고 승천한 자의 육체적 실재성을 부각하려 한다. 그래서 예수의 시체에 관하여 언급한다. 누가는 갈릴리에 있었던 자들을 예루살렘 사건의 증인으 로 기록함으로써, 교회의 주님이신 분의 육체적 실재성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은 분과 갈릴리에서 활동했던 분과의 연속성을 보증하기를 원한다. 신학적으로 이는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이 죽은 사람 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죽음은 실제 사건이다. 이런 고통을 통하여 예수의 순종은 완성되었다.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을 영광으로 간다는 것은 고통의 또 다른 측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