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명령과 아브라함의 순종"

(창 22:1-19)

노세영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구약학)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희생제사 즉 인간 희생제사의 폐지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본문의 의미를 제한시킨다는 것은 본문을 매우 좁은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사학적이고 구조주의적인 주석방법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뿐만 아니라 이 본문의 해석학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먼저 본문의 구조를 간단히 살펴보자.

 

위의 구조를 자세히 살펴보자. 1a는 본문의 내용이 전환된다는 신호이며 동시에 본문의 서론 격이다. 다음으로 첫 번째 하나님의 명령과 아브라함의 순종이 나온다(1b-10).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은 자세를 가다듬고 그 부름에 응답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즉시 아브라함에게 그의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칠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논쟁을 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 준비하기 시작한다. 이 준비는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고통은 사흘 동안 계속되고, 여행을 하는 동안 어떠한 상황이 벌어졌는지 어떠한 대화가 일어났는지를 저자는 말하지 않고 있고 다만 급하게 진행되는 여행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사흘 동안의 여행 후에 아브라함은 거의 목적지에 이르러 두 사환에게 그곳에 머물도록 명령하고 그와 이삭이 다시 되돌아 올 것을 약속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동안 이삭은 아버지에게는 대답하기 고통스러운 질문을 한다: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은 이에 대답한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는 아주 단순하다. 그러면서도 이 단순한 대화는 독자로 하여금 이 부분에 와서 그 긴장이 더하게 만든다.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곳에 이르른다. 독자는 여기에서도 아브라함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그의 단순한 행위만을 읽게 된다. 아브라함은 도착하자마자 제단을 쌓고 나무를 올려놓은 후 이삭을 잡아 제단 위에 묶고 그의 손을 뻗어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기 위해 칼을 잡아들었다. 이 지점에 이르러서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는 긴장의 절정을 이룬다. 지금까지는 매우 급하게 이야기가 진행되어 오다가 이 곳 하나님이 명령한 곳에 이르러서는 이야기의 템포가 매우 천천히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이삭을 희생시키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행위가 하나하나 상세히 기록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서술기법은 독자로 하여금 긴장의 절정에 이를수록 그 이야기에 더 긴장하게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더 집중하게 한다.

이삭을 막 죽이려고 하는 순간 급하게 부르시는 야훼의 사자의 부름과 함께 그 위기는 막을 내린다. 여기에서 두 번째의 하나님의 명령과 아브라함의 순종이 시작된다.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르고 아브라함은 자세를 가다듬고 응답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죽이지 말도록 명령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이제서야 알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러한 명령에 기쁨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삭을 죽이는 것만을 취소하고 번제의 희생제사는 계속되어진다. 그러한 상황하에서 완전히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삭의 질문과 같이 번제를 위한 양이 없다는 점이다. 이 때에 하나님은 첫 번째 아브라함의 순종에서 아브라함이 번제를 준비한 것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하나님이 희생제사를 위한 번제의 양을 준비하신다. 마침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수양을 바침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완성한다.

이제 이야기는 결론을 향하여 나아간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강하게 약속을 한다: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내릴 것이며 그의 후손들을 번성케 하며 그리고 그의 자손들은 그의 적들의 문을 유업으로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그의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든 위의 구조분석을 통하여 우리는 이 이야기의 전경을 쉽게 발견한다. 본문의 본론은 두개의 구조적인 평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의 부름, 아브라함의 응답, 하나님의 명령과 아브라함의 실행. 이 이야기를 듣는 청중은 처음부터 이삭에 대한 위협이 여기의 주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묘사가 그 주제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순종이 가장 중요한 주제라는 사실은 이야기의 형태를 분석함으로써 더 분명해 진다. 첫째로 우리는 문장이나 단어의 반복을 발견한다.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은 2, 3, 9절에서 반복하고 있다. 저자에게 있어서는 모리아의 위치와 이름에 대하여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그곳이 2절에서 하나님이 지정한 곳이냐 하는 점이다. "두 사람(아브라함과 이삭)이 동행한다"라는 말도 6절과 8절에서 반복된다. 이 문장은 2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과 관련되어진다 : "너의 아들을 데리고… 땅으로 가라…"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라는 말도 12절과 16절에서 반복하여 나타난다. 여기에서 지적된 반복된 문장들은 모두 하나님의 명령과 관계되어 아브라함이 순종하여 실행하는 과정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둘째로 인간의 특성에 대한 언급들은 이야기의 전경을 이해하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어떠한 불평이나 질문이 없이 하나님의 명령을 즉시 준행한다. 이삭도 역시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의 대답이 불만족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적어도 이삭이 자기를 제단 위에 올려 묶어 죽이려고 하는 아버지를 밀치고 도망갈 수 있는 젊음이 있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은 이삭이 수동적으로나마 그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종들 역시 그의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다(5, 19절). 이 등장인물들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 하나님 : 명령 → 아브라함 : 순종, 아브라함 : 명령 → 종들 : 순종, 아브라함 : 능동적인 순종 → 이삭 : 수동적인 순종. 즉 저자는 모든 등장 인물들의 특징을 말함으로서 명령과 순종이라는 도식을 진술하고 원하였던 것이다.

주요 구절에 대한 주석

1a : 1a에서 이 이야기의 기능을 쉽게 발견한다. "시험한다"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혹은 어느 개인과의 관계성을 표현할 때 사용되어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나 한 개인이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키는가 하는 것과 그들의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알기 위하여 이스라엘 / 개인을 시험하신다고 말하고 있다(신 8:2; 대하 32:31). 따라서 시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던가 혹은 하나님께 순종하는가 하는 것들과 관련이 있다(출 20:20; 신 13:4-5). 그러면서도 동시에 신명기서에 따르면 시험의 목적이 파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선을 이루고자 함이라고 하고 있다(신 8:16). 이러한 개념을 본문에 적용한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파괴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고 궁극적으로 그를 선한 곳으로 인도하고자 함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은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증명되어진다. 시험 후에 하나님은 이제 하나님을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외아들조차도 아끼지 아니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알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 결과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축복과 번성의 약속을 받게 된 것이다(15-18절).

1b :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아"하시며 이름으로 아브라함을 불렀다. 이 이름은 우리로 하여금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창 17:5)라고 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나게 한다. 그러한 새로운 관계성 아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아"하고 불렀다는 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앞에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나게 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창 12:2; 17:6-7). 따라서 아브라함은 앞에서 한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며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실는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2절 : 하나님은 명령형을 사용하여 아브라함에게 그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칠 것을 명령한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신을 "아브라함"이라고 불렀던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이 현재 명령하는 그 명령을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적어도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열국의 아비가 되기 위하여서 이삭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아들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서 얻게 된 약속의 아들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깨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더군다나 번제란 찬양, 기쁨, 축제 감사의 행위로 간주되어지기도 하였다(창 8:20 이하; 삼상 6:14; 레 22:17 -19; 민 15:1-16). 실질적으로 번제가 죽음의 공포와 관련되지를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의 번제는 결코 감사나 축제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희생제사가 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이 타당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약속과도 결코 일치하지 않고 모순이 있음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암시한 바와 같이 이러한 번제의 모습이 11절 이후에는 나타난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이지 말도록 한 하나님의 급한 명령은 아브라함의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하였음에 틀림이 없고 그가 실제로 수양을 가지고 드린 제사는 번제의 본래 의도와 같이 감사와 즐거움의 제사였을 것이라는 말이다.

11-14절 : 이 부분에 와서는 전체 이야기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변화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어떠한 명령에도 순종하였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의 생명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주셨으니 하나님이 그 생명의 주권자이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말이다. 약속의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것도 그의 첫 번째 명령을 취소하는 변덕스러움도 하나님의 권한 아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본문은 독자로 하여금 하나님은 곧 하나님이시라는 실체를 깨닫게 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가지 특이한 것은 독자는 하나님이 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하고 이제는 죽이지 말라고 하시는지를 알고 있는 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12절에서 왜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였는지를 말씀하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두 가지 명령의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당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다만 계속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수양을 대신하여 희생제물로 바침으로서 맏아들 이삭의 생명을 대속한 것이다(출 13:13; 34:19-20을 참조). 그러나 상징적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그의 아들을 바치었고 이제부터는 더이상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19절 : 흥미롭게도 저자는 이삭에 대한 언급이 없이 다만 아브라함만이 그의 종들에게 돌아와서 브엘세바로 갔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것은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이삭이 아니라 아브라함이고 이 이야기의 목적이 그의 순종의 행위를 강조함임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삭은 상징적으로 완전히 하나님께 바쳐진 자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 이삭은 아브라함이 죽기 전까지는(창 25:5-8) 수동적 인물로 나오다가 26장에 이르러서야 주요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메시지

  본문에서 새롭게 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시험에 대한 우리의 이해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당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이 이야기의 저자는 시험이 이삭을 파괴하거나 아브라함의 희망을 꺾어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최종적으로 선을 이루기 위해서임을 단어의 사용을 통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다만 아브라함이 아마도 느꼈던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자신에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확신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욥의 시험을 기억한다. 그는 하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모든 재산과 가족과 건강을 빼앗기는 시험을 당하였다. 다만 성서의 독자는 사탄이 하나님께 "욥이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두려워하리이까?)"라고 말하는 데서 그 해석학적 단서를 찾는다.

구조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이야기의 주제는 사실상 우리가 지금까지 강조해 왔던 '아브라함이 순종함으로 복을 얻었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은 다만 부수적인 산물일 뿐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견디기 힘든 하나님의 명령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가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신 하나님이 그를 다시 희생제물로 죽이라고 명령하는 하나님의 모순된 명령에서, 그리고 다시 그를 죽이지 말라는 변덕스러운 명령에서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인정하였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는(욥 1:21) 욥의 고백과 같이 우리에게 어떠한 고난이 오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든지 온전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적어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복을 기대하고 그 시험을 치른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알고 그에 순종하였을 뿐이다. 비록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복의 길이 아닐지라도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