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교역 개발을 위한

패러다임의 전이(paradigm-shift)에 관한 소고

설은주  목사

 

1. 들어가는 말

2. 복음서에 나타난 여성의 사역의 유형

  A. 예수의 선교여행의 동료 및 제자로서의 여성 사역

  B. 메시야의 증인으로서의 여성 사역

  C. 십자가의 증인으로서의 여성 사역

  D.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여성 사역

3.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여성 성직의 배제

  A. 초기 교회: 평등한 은사 공동체

  B. 교부 시대의 감독제 - 교회 가부장화의 시작

  C. 콘스탄틴 이후 기독교의 제국 종교화 - 교회 위계질서의 고정화

  D. 종교 개혁 이후 - 성직차별 극복을 위한 시도

4. 여성 사역 지도력 개발의 저해 요인 

  A. 남녀에 대한 신학적 오해

  B. 여성차별과 관련된 성서해석의 문제

  C. 왜곡된 성역할의 고정관념의 문제

5. 새로운 여성 교역을 위한 패러다임의 전이

  A. 여성원리 실천을 위한 여성교역의 내용

  B. 교역의 통전성

  C. 공동체적 교역에로의 전환

나가는 말

 

 


Ⅰ.들어가는 말

요즈음, 교회와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요구되고 있다. 종전의 남성중심적 관점에서 볼 때 사회, 역사, 문화적으로, 특히 교회에서의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 있어 주변적인 존재로 여겨오던 여성들의 존재와 그들의 삶과 경험이 여성 자신의 입장에서 인식되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자각이 높아지고 있다. 여성의 지도력을 소외시키거나 여성의 교역을 배제시키는 일은 기독교 공동체의 본질과 예수 그리스도의 평등사상을 왜곡시킨다는 일이다. 그런데, 그 동안 여성의 특성과 역할은 부수적이고 열등한 것으로 생각하는 왜곡된 인간이해로 말미암아 남녀관계가 지배-피지배의 관계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인간관계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류 모두를 파괴시킨다. 남성과 여성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리고 서로 동등하고 상호적인 관계로 지음받았다. 여성의 인간성 회복은 여성 자신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류의 인간성 회복의 실마리이며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의 올바른 관계 형성의 기반이 된다.

남성과 여성의 지배-종속의 관계는 여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생존과 성장에 관계되는 문제라고 볼 때 이 문제는 여성들 뿐 아니라 교회가 함께 책임을 지고 풀어야 할 과제이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여성의 역할을 제한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상징화시키고 더 나아가 이러한 현상을 강화시켜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교회의 현실은 세계 교회의 신학과 실제의 방향과는 달리 남성중심의 지도력 강화 및 교권제도의 강화로 교회의 지도력은 전적으로 남성들에게 한정되고 있으며 여성은 교회의 지도력과 성직안수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성서적 근거에 있다기보다는 전통적인 남성우위의 개념과 잘못 이해되고 있는 인간학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본 소고에서는 예수의 평등주의적 비전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여성의 사역을 검토하고, 기독교 역사 속에 나타난 여성사역 배제의 왜곡된 부분과 여성지도력 개발을 저해하는 몇 가지 요인들을 검토함으로써 오늘의 교회 여성사역 및 지도력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발견하려고 한다. 그리고 대안책으로서 새로운 여성교역을 위한 패러다임의 전이(paradigm-shift)의 한 모델을 통찰해 보고자 한다.

Ⅱ.복음서에 나타난 여성 사역의 유형

여성에 대한 예수의 태도및 그의 선교활동에서의 여자들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검토는 예수가 당시의 유대인들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수의 여성관과 여성의 역할에 대한 그의 태도는 예수 당시의 어느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다. 신약시대의 유대사회는 철저한 가부장적 사회였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타난 여성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그 시대와 완전히 상이했다. 예수가 살았던 당시는 족장시대의 남성중심적 우위적 가부장적 사회제도였기 때문에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어 여성의 권리나 가치는 아버지나 남편에 의해 임의로 처분될 수 있는 사회였다. 그리고 엄격한 토라, 율법, 랍비문헌에서 여성을 금하는 성전의식을 실행하여 남자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었고 그 남성적 권한을 신성시하여 여성제자란 있을 수 없었으며 이스라엘의 연중행사인 유월절, 초막절, 오순절에도 남성만이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처럼 여성의 종교적 신성성이 억압되어 여성은 거룩한 종교적 영내에서 추방되었음은 물론 종교의식을 행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그 시대의 문화와 전통, 신학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태도로 도전했다. 예수는 여성의 인간적인 존엄성과 권리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므로 여성들을 희생물로 만드는 사회제도를 거부하였다. 또한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는 성서적, 랍비적 과습을 타파하였으며 여성의 가치나 여성의 증언을 무시하는 관행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시 일반적인 유대적 사고와 관례와는 달리 예수는 여자의 본성, 능력에 대해 남자와 비교하여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여자를 결코 열등한 존재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 대하였다. 그러므로 여성에 대한 태도나 여성의 역할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예수는 과격한 개혁자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부활절 사건 이 후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도 예수의 공동체는 남성과 함께 여성에게도 신앙의 공동체에 참여할 동등할 권리를 부여하였다. 이것은 당시 유대교나 다른 이방인들의 집단에서는 가질 수 없던 권리였다. 성별과 사회적 계급에 관계없이 어느 누구든지 예수를 믿을 수 있었고 그를 따를 수 있었다.

신앙의 공동체에 들어가는데는 신앙과 헌신 외에는 어떤 것도 요구되지 않았다. 예수는 여성을 제자나 여행 동료로도 용납하였다. 그와 같은 예수의 행동은 예수의 공동체에서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A.예수의 선교여행의 동료및 제자로서의 여성사역

예수의 선교 운동에서의 여성들의 참여와 역할에 관하여 누가는 상당히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누가복음 8장 1-3절은 예수의 선교여행의 여성동료에 관한 사실을 보도한다. 이 귀절은 당시의 유대교 관습상 여성들이 랍비와 함게 여행하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 당시의 관행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누가복음 8장에 의하면 예수의 여행 동료 중에는 여성들이 포함되어 있다. 누가복음 10장 38-42절에서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 역시 제자가 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여성들로 묘사되고 있다. 예수는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태도를 격려하시며 우선시하신다. 이 모든 것은 당시 유대사회의 풍토와 관례에 비추어 볼 때 자연스럽지 못한 행위들이었다.

여자의 손에 토라가 들어가느니 불에 태워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풍토에서 여자가 랍비의 발 밑에 앉는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행위와 예수의 태도는 여자에게도 배울 권리와 제자가 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시사한다. 마리아의 태도는 궁극적으로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여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자세이며 예수는 남자 제자들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는 마리아의 열망을 용납하신다. 이것은 당시의 종교적, 사회적 관습에 비추어 볼 때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예수는 전통적인 관습과 고정적인 관념을 넘어서 여성의 인간적인 권리와 제자직을 인정하신다.

B.메시야의 증인으로서의 여성사역

요한복음에서는 여자들이 결정적 순간에 모범적인 제자들로서, 사도적 증인으로서 나타난다. 또 요한복음의 4:1-42에서는 사마리아 지역의 선교에 있어서 한 여자의 선교적 역할을 보도한다. 예수와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는 계시적 성격을 대표하여 예수를 "세상의 구세주"라고 하는 사마리아 여자의 고백에서 절정에 이른다. 예수가 사마리아 여자를 복음 선포자로 택한 사실은 우연적인 것이었다고 결론짓기는 어렵다. 예수는 보다 신뢰할 만하고 경건하며 가정적으로 흠없는 유대인 남자를 택해서 메시야의 선포를 위탁해야 했음이 더 논리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의도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비롯되었다 하더라도 메시지를 전하는 복음 선포자는 사마리아 여자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수의 태도를 요한복음서의 기자는 여자의 인간적인 존엄성을 인정하는 모습으로 기록할 뿐 아니라 그와 같은 예수의 자세에 있어서 여자를 예수와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합법적 증인으로 제시한다.

C.십자가의 증인으로서의 여성사역

예수의 생애에서 가장 결정적이며 최종적인 사건, 즉 십자가 사건의 일차적 증인은 12제자 측근 제자가 아닌 예수의 여자 추종자들과 선교여행의 동료들이었다. 마가복음서의 제자직에 대한 이해는 주로 고난당하는 메시야직과 섬기는 제자직을 중심으로 제시된다. 예수의 메시야직에 대한 바른 이해는 예수의 기적 또는 그의 권위있는 교훈에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고난과 죽음의 길로 그를 따라가는 제자직에서만 가능하다. 또한 진정한 제자직이란 예수의 삶을 그대로 본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명을 위협받는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예수를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남자 제자들은 고난과 십자가의 길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진정한 제자직으로 부르는 예수의 소명을 깨닫지 못했다. 고난받는 제자의 도에 대한 열 두 제자들의 오해와 몰이해는 예수의 수난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그러한 위기의 순간에 진정한 제자의 도를 지켜나간 제자들의 무리가 있었음을 시사하며 그들은 바로 여자 제자들이었음을 명백히 한다. 그들은 12제자들이 예수를 부인하고 도망갔을 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십자가의 현장까지 따라간 자들이다. 예수의 수난에 있어서 12명의 남자 제자들은 예수를 버린 반면, 여자제자들은 오히려 예수를 돕거나 헌신적이었다.

D.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여성사역

기독교 신앙과 증언의 문제에서 여성들에게 주요한 위치를 부여하는 것은 빈무덤 전승이다. 사실 신약성서의 기록에서 가장 의의있는 여성의 역할은 예수의 빈 무덤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 여성들이라는 전승에서 발견된다. 이 전승은 네 복음서 모두에서 발견된다.

복음서에 의하면 여성들은 부활사건의 최초의 증인들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가서 전하라"는 특별한 지시를 받았다. 그 표현은 복음선포자 및 사도의 직무를 의미한다. 그들은 또한 전할 메시지의 내용까지도 지시받았다. 4복음서의 기록은 모두 안식일이 지난 새벽에 여성들이 예수의 무덤에 찾아갔다가 빈 무덤을 발견한 최초의 증인들이었으며 다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최초의 사람들이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초기 교회에 널리 알려진 전승이었다. 복음서에 의하면, 특히 마가의 복음서에 의하면 여성제자들은 고난당하는 제자직과 섬기는 지도자직의 참된 모형으로서 나타난다. 그들은 예수의 죽음, 장례, 부활에 대한 사도적 증인들로서 부활의 메시지의 최초의 선포자들이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그 여성제자들이 부활의 소식을 전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최초의 선포자들로서 인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성서해석과 강단의 설교에서는 이 사건의 의의가 주의깊게 고려되지 않았다. 그러나 부활의 최초의 증인이고 부활소식의 최초의 선포자로 파송되었다는 성서의 보도는 사역에 있어서 남성들과 대등한 여성들의 위치와 역할을 위해 투쟁하는 오늘의 교회에 있어서는 상당한 의의를 지닌다. 만일 이런 사실이 바르게 이해되고 전수되었더라면 여성들이 공식적인 성직사역으로부터 배제당하는 역사적 오류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교회의 오랜 역사에서 부활의 최초 증인들이 여성들이었으며 그들이 부활소식의 최초의 선포자로서 파송되었다는 사실과 그 의미는 간과되어 왔고 과소평가되어 왔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는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보면 기독교 복음의 핵심적 부분이 예수의 여성제자들의 증언에 근거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의의가 깊다고 볼 수 있다.

 

Ⅲ.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여성성직의 배제

그 동안 교회론이나 목회론은 역사 속에서 나타난 교회와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교회의 차이를 연구하는데 있다.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원래 교회가 가졌던 본질적 사명과는 다른 모순된 상황에 빠졌다고 보는 것이다. 성서와 역사사이에 나타나는 긴장관계에 대한 규명은 주로 역사적으로 발전되어 온 교회직분들과 교회 질서들의 발전을 연구하는데 집중하였다. 교회의 제도화 과정에서 나타난 성직과 평신도직의 분열과 갈등은 위의 두 긴장관계의 대표적인 현상이다.

사실 목회론의 역사는 교직체계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기독교 역사와 전통에서 우세한 지위를 점해왔던 가부장적 신학은 여성이 성직을 맡지 못하도록 금지시켜 왔다. 여성들을 평신도의 영역으로 여성들의 성직과 지도력을 배제시킨 것이다. 목회신학자 P.Bernier가 추구하는 "공동체 중심의 목회회복"의 관점은 우리에게 상당히 유용한 틀을 제공해 준다. 그는 목회의 과제를 5가지 영역(공동체의 형성, 복음의 전파, 예언, 양육, 선교)으로 설명하면서 목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동책임이며 헌신의 삶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 역사를 목회적 관점에서 조명한 그의 책 <Ministry in the Church>에서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구분을 넘어서 공동체에 헌신하는 목회를 추구하고 있다. 그러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어떻게 여성의 성직이 배제되었는가를 살펴보자.

A.초기교회 : 평등한 은사공동체

초기 교회는 제도가 없었다. 따라서 전문화된 목회도 없었다. 직접적인 영적 능력을 받은 사람은 성을 초월하여 자신들이 받은 카리스마적인 은사를 사용할 수 있었다. 카리스마적 공동체가 가능한 것은 메시야적 질서를 강조하는 교회관으로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여성들도 동등한 상태로 새로운 계약에 들어갈 수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 시기에는 독점적 목회유형이 없었다. 공동체 모두의 유익함을 위해 일했으며 목회의 은사는 카리스마적으로 주어졌다. 목회는 일부에게 제한된 교권적 소산이기보다는 다수에게 공통된 기능으로 간주되었다.

설교, 가르침, 치료, 기적, 예언과 마찬가지로 사도, 전도자, 교사를 세웠다. 권위는 직책 그 자체와 결합되지 않고 덕을 세우고 섬기는 인격의 행위에 달려있다. 초기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체제의 성격은 신적으로 확립된 영구불변의 것이라기보다는 공동체의 필요에 부응하는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력은 봉사와 예배중심의 직책이었다. 따라서 지도자의 권위와 기능에 대한 것보다는 지도자의 자질에 관한 관심이 훨씬 강조되었다.

감독, 장로, 집사라고 불리는 직책과 관련된 언급에서는 각 직책의 기능이나 성격보다는 직책을 맡은 사람들이 지녀야할 자질을 보다 관심하고 있었음이 특징적이다. 그것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력의 특징은 위계질서에 근거한 지도력이 아니라 철저히 섬기는 지도력이었기 때문이다. 신약에서 지도력은 어디까지나 공동체를 위한 은사로써 이해되고 있다.

초기의 카리스마 공동체는 상이한 은사를 지닌 지체들의 연합체로 은사들은 서로 섬기고 봉사할 때, 권위로 주어졌다(고린도전서12:4이하, 로마서 12장). 바울의 사도직 수행은 많은 동역자들에 의해 지원받았다. 바울의 동역자로는 뵈뵈나 브리스길라, 마리아(롬16:6), 유니아 같은 여성들이 많았으며 그들은 성(性)때문에 교회의 핵심 역할로부터 배제되지 않았다. 바울의 동역자들의 이름이 약 150명 가깝게 바울서신에서 제시되고 있는데 이들은 고정된 교회직책을 갖지 않았고 유형화되지 않았다. 이들은 전통적인 유대인과 이방인의 노예와 자유인, 남성과 여성이라는 구분을 넘어서 형제와 자매라는 궁극적인 호칭 안에서 협력하였다.

초기 공동체의 지도력은 교회공동체 구성원들, 남성과 여성들이 함께 나뉘는 책임이었고 직책과 기능사이에 명백한 구별이 없는 평등한 공동체였다고 볼 수 있다.

B.교부시대의 감독제 - 교회 가부장화의 시작

바울에게서 보이는 카리스마 공동체는 시간이 경과하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그리스도의 결정적 재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역사적 실존에 순응하기 시작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그들의 지도자로 주장하는 기독교인들과 제자들만이 존재했으나 1C말경부터 서서히 제도화되면서 가부장적 가족질서가 교회의 모델로 정착하지 시작했다. 그러면서 교회내의 지도력 사이의 우열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은 교회의 가부장화 과정과 일치한다. R.Ruether는 이 시기를 교회의 지도권이 회중에게서 감독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감독제 기독교'로 명명하였고 바로 이 시기를 가부장화의 시작이라고 보고 있다.

후기 바울공동체는 회당의 전통적 지도권의 형태를 받아들여 감독, 장로, 집사, 여집사들의 위계질서에 기초한 회중교역(Congregational Ministry)을 발전시켰다. 그 후 2C말경 감독제의 모델이 더 발전하여 감독은 도시의 주요 회중에서 주재 목회자가 되었고 장로나 원로들이 이끌고 있는 회중들을 감독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감독제 기독교는 가부장적 질서를 기반으로 역사적 합법화를 이루어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Elisabeth S.Fiorenza는 교회의 가부장화를 공간적인 의미에서 지역지도권의 강화과정으로 파악한다. 초기 지도력은 우열이 아닌 구별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지역을 초월한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지도력, 두 번째는 가정교회의 지도자이었던 여성들의 지도력들, 세 번째는 감독, 집사들을 중심으로 한 지역 지도자들을 말한다. 이 세 지도력은 2C에 오면서 지역지도권이 강화되면서 공동체의 결정권을 병합하여 초기 가정교회 울타리를 넘어서 지역교회로 정착하였다. 지역지도자들에게 이전된 권위는 남성에게 한정된 지도권에로의 변화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교회는 감독과 집사의 위계질서에 근거한 제도교회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교회에서 영향을 발휘하고 있던 가정교회의 후원자나 부유한 기부자들인 여성들의 영향이 1C 말부터 주변부로 이동하였다.

C.콘스탄틴 이후 기독교의 제국 종교화-교회 위계질서의 고정화

기독교가 정형적인 위게질서의 틀을 갖추게 된 것은 4C로 로마제국에 의해 국교화되면서 부터이다. 콘스탄틴의 개종과 더불어 기독교는 엄청난 숫적 성장을 이루었고 로마제국의 조직의 도움을 받아 직위, 칭호등을 기독교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의 숫적 증가는 필연적으로 교인들을 관리할 수 있는 조직을 강화시켰고 교리문답과 성례전으로써 교인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들어오면서 지도력은 뚜렷하게 성직자 계급과 평신도 계급으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평신도(Laity)라는 용어는 3C부터 시용되기는 하였지만 처음부터 구별된 개념은 아니었다. 그들은 세례받은 남성신도로 구성된 엘리트 집단으로 여성은 제외된 남성만의 집단이었다. 이들은 성직자 부재시 그 역할을 대행할 수 있었으며 세례도 베풀 정도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평신도라는 말은 성직자의 대립개념으로 이해되었다. 모든 권력은 성직자에게 집중되었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몇 가지 점에서 정당화되었다.

예전의 봉사를 위한 서품,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특별한 경제적 관계를 나타내는 레위인 유형론에 대한 논증, 죄를 정화하고 용서할 수 있는 권위를 지닌 대제사장의 역할이었다. 이러한 신학적 근거는 제단의 성직자들과 평신도의 구분을 명확하게 해주었다. 이때부터 여성들은 평신도층에 편입되었고 목회에 대한 이중적 이해가 생겨났다. 전문목회의 영역인 설교, 가르침, 성례전과 일반목회의 영역인 평신도의 역할로 나누어지고 그 가치도 다르게 평가되었다. 목회의 위계질서가 고착화된 것이다.

중세로 넘어오면서 교회의 위계질서는 훨씬 더 강화된다. 평신도들은 점점 주변으로 밀려났는데 교회법은 평신도를 문맹자들, 바보들, 가난한 자들, 세상의 육적인 자들과 똑같이 취급하엿다. 반면에 권력을 쥔 평신도 즉, 왕과 왕족들은 그들이 특별히 성별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평신도들과 다르게 인식되었다. 그 당시 교회 법률가들은 교회공동체를 상위계급과 하위계급으로 분류하면서 목회의 능력은 오로지 상위계급에서 완전히 실현된다고 보았다. 모든 권력은 "위로부터 오는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교권제도의 발전을 부추겼고 교회와 성직의 동일화를 가져왔다. 평신도들은 교회 내에서 어떤 역할도 부여받지 못하고 단지 목회적 관심의 대상으로 되어버렸다.

D.종교개혁이후의 성직차별 극복을 위한 시도

16C Matin Lurther의 종교개혁은 로마 카톨릭의 교권주의에 대항한 교회개혁 운동이었으나 성직자와 평신도의 분열을 막지는 못했다. 그가 주창한 만인제사장설은 성직자만이 사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도 사제가 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성직도와 평신도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부정했다. 그러나 루터는 교회 안에서 특별한 목회그룹의 필요를 인정하면서 말씀을 설교하는 누군가를 필요로 했으며, 목회의 기능을 말씀을 설교하고 말씀을 가지고 교회를 치리하는 것으로 말했다. 루터는 두 사제직이 동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루터는 모든 기독교인은 임무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하면서 임무와 일, 은총과 사역의 계약을 구별하였다. 은총의 계약에서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지만 사역의 계약에서는 하나님은 구별을 주셨다는 것이다. 사역의 계약이 갖는 구별성은 다시말해 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종들에 대한 주인들의, 자녀들에 대한 부모들의 고정된 사회질서를 여전히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마틴 루터와 다르게 급진적인 종교개혁주의자들은 은총의 계약과 사역의 계약의 동일성을 주장했다. 은총으로 충만한 한 여성이 비록 배우지 못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도, 설교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은총의 계약은 하나님의 형상에 있어서 모든 사람의 본래적인 동등성 회복을 의미하기 때문에 은총은 모든 계급과 성구별을 폐기한다는 것이다.

17C 퀘이커 교도들이나 18C 초기 Methodism, 19C의 유토피아즘과 결합한 미국 부흥운동은 급진적인 개혁주의자들의 이러한 평등성을 받아들여 기존의 성직과 계급적인 위계질서를 타파했다. 이들은 교회행정에 있어서 상당한 역할을 여성들에게 부여하면서 남성과 여성의 평행적 체제를 발전시켰다. 비록 여성들이 안수를 받지 않았으나 평신도 설교자들과 지도자로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기존교회와 분리될 수 밖에 없었다.

카리스마적 지도권과 역사적 교회사이의 갈등은 18-19세기에 있어서 미국 기독교의 끊임없는 특징이었다. 교회갱신의 부흥운동과 유토피아 운동들은 모두 초기 19세기의 대각성에서 꽃피었다. 부흥주의는 성직자와 평신도, 안수받은 자들과 받지 않은 자 사이의 괴리를 파괴하려는 경향이었다. 여성들은 부흥운동에서 탁월한 영향을 행사했으며 카리스마적 설교가들은 역동적 연설, 예언, 치유의 은사들로써 부어져서 대학교육 혹은 위계질서적 안수의 혜택없이 신앙하는 공동체로부터 그들에 대한 응답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합법화되었다.

19C 미국 전도자들은 일반적으로 회심이 사회적 중요성을 가졌다고 믿었다. 부흥운동의 더 급진적인 쪽은 시민전쟁 이전의 몇 십년 동안에 노예폐지 주의와 평화주의에로 쇄도했다. 사회관계의 불의한 패턴-그것이 백인들에 대한 흑인들의 예속이었든, 혹은 남성들에 의한 여성들의 예속이었든 간에 그런 불의한 패턴들에 반대했다. 이러한 유토피아 운동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이 양성적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구원된 인간성은 인간성의 본성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사이의 소외를 극복할 것이며 새로운 통전적 인간 (Wholistic Man)을 창조하리라는 것을 믿었다.

19C 유토피아주의에서 구원된 사회의 비전들은 인간해방의 역사적 대리인 (agent)과 구원된 인간성의 전위로서의 교회의 비전들과 혼합되었다. 그 양 비전들은 여성해방의 어떤 관점과 삶의 남성적 또 여성적 원리들과 공유들의 새로운 동등을 포함했다.

이상과 같이 초대 기독교로부터 19C말까지 교회사의 1900년 이상을 회고해보면 두개의 근본적인 다른 개념들 사이의 긴장과 모순을 발견한다. 그것은 제도로서의 교회와 영으로 충만한 공동체 교회사이의 긴장과 갈등이다. 역사적 제도로서의 교회는 기존의 사회질서, 그것의 위계질서, 정치질서들을 신성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교회의 정치조직은 기존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위계질서를 반영하려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영으로 충만한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개념은 이러한 사회적 위계질서를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영으로써 부여되어 있으며 서로서로 섬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으로 충만한 교회는 기존 사회질서와 신성화된 그것의 종교적 대리인들로부터의 출애굽(exodus)으로 불리워졌다고 믿는다.

 

Ⅳ.여성사역 지도력 개발의 저해요인 - 여성성직안수 배제 요인

A.남녀에 대한 신학적 오해

신학적 전통은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이성, 정신, 자유, 윤리적 이상으로 생각해 왔으며 이러한 이성, 혹은 초월적 정신은 남성에 의해 대표되는 것으로 여겨왔다. 기독교 전통에서 가부장적 인간학의 고전적인 원형을 Augustine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영성의 속죄 가능성을 인정하며 이로써 하나님의 이미지에 여성의 이미지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여성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단지 이차적으로만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어거스틴의 전통을 계속 잇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을 수용함으로써 여성은 열등하다는 관념을 더욱 진실한 것처럼 만들어 버렸다. 그는 남성의 종자가 인간육체의 형상을 제공해주며 여성은 다만 이것을 육체로 구체화시키는 일만 한다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과학적인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여성차별적인 인간학을 수용하게 된다. 여성은 불완전한 인종이며 잘못 태어난 남성(misbegotten male)으로 본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가부장적 인간학의 흐름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긴 했지만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오진 못했다. 루터는 여성은 타락을 통해 여성본래의 평등을 상실하게 되었고 정신과 신체에서도 열등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에게 남성에 대한 예속은 여성에 대하여 저질러지는 죄악이 아니라 여성의 죄악에 대하여 내려지는 형벌로써 그것은 신성한 심판의 결과로 보았다.

칼빈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예속을 타락에 의한 것으로 보지 않고, 그리고 그것이 인간본성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예정된 사회적 직위의 차이를 반영된 것으로 본다. 즉 남녀의 지배와 복종하는 관계는 우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 때문이라고 본다. 종교개혁자들이 수도원적 금욕과 고행대신 구약전통의 생식과 가정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신성시하는 한편, 여성을 위험한 성적 악마의 표상에서 구출하여 순종하고 봉사하는 정숙한 아내의 모습을 부각시켰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여자는 순종하는 몸이라는 생각과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여전히 영혼과 몸이라는 이원론적인 틀 안에서의 개혁이라고 R.루터는 비판한다. 이러한 사고는 칼 바르트(Karl Barth)에게서 더욱 분명해진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비유로써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창조론에서 다루면서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권리와 지위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평등한 권리와 지위가 유지되는 유일한 길은 창조의 질서 속에서 남성이 겸손하게 여성에 대해 인간의 공통된 존재와 행위 속에서 격려자, 지도자 내지는 인솔자로서 앞서가는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보았다.

바르트가 예수의 처녀 탄생이 남성의 행위를 배제하는 표징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세계사의 가부장적 지배를 부정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남자의 상위는 인간성의 가치, 위엄, 영예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남녀관계가 선후, 상하관계로 고정되어 설명되는 한 그것은 지배구조화될 수밖에 없고 그것은 남성의 세계(man's world)속에서의 여성의 자리(woman's place)가 될 수 밖에 없고 전자가 후자를 규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르트는 여성은 가정관리에 남성은 직업적 영역에 종사해야 하는 것으로 주장한다.

이러한 기독교의 인간이해의 전통 속에서 그동안 여성의 목회지도력은 배제되어왔다. 이것을 R.R.Ruether는 남성의 이데올로기가 투영된 성차별적 이원론에서 남성은 항상 본래적 (authentic)자아이고 여성은 항상 그 자아가 상대하는 대상(other)으로서 정의되어 왔다고 비판한다. 여성을 성직에서 제외시킨 것은 분명히 교회가 여성을 열등한 인간존재로 보는 잘못된 인간학에 기초를 두어왔던 것이다.

여성들이 그들의 성 때문에 설교하고, 성례전을 거행하고 양떼에게 목회를 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B.여성차별과 관련된 성서구절의 해석의 문제

성서의 고전11:2-16, 고전14:33-36, 창2:18-25, 딤전2:9-15, 딛2:3-5… 등은 여성의 직위에 관한 신학의 논쟁거리가 되어왔다. 그리고 이 구절은 문자에 얽매인채 편협되고 왜곡되게 해석함으로서 여성이 성직에 임명되지 못하게 하는데 저해요인이 되어왔다. E.Ardener는 억압집단이 갖는 주요 특징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지배집단에 비해 자신의 입장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구사력을 갖지 못하는 것(Inarticuleness, mutedness)이라 한다. 이것은 계급적 억압이든 인종적 억압이든 여성 억압이든 관계없이 모든 불평등 관계에서 발견되는 공통적 특성으로 지배적 Communication 체계에서 소외되어 왔음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이러한 현상은 성서해석의 역사 속에서도 나타난다. 그래서 성서해석은 단순히 여성억압적 현실의 반영으로서의 이해보다는 하나님의 참된 말씀과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을 추구하기 위해서 텍스트가 침묵하고 있는 그 현실을 지시하는 단서들과 암시들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E.S.Fiorenza는 성서해석에 있어서 성서를 신화적 원형(mythical archytype)이 아니라 역사적 원형(historical prototype)을 채택해야 한다고 본다. 전자는 불변하는 무시간적 패턴을 수립하는 하나의 이상적인 형식인데 반해 후자는 속박적인 무시간적 패턴 혹은 원리가 아니다. 고정된 신화적 패턴으로서 성서를 규정하지 않는 한, 교회의, 사회 역사적 상황들의 변화하는 조건들 하에 있는 사회, 교회적 개념구조들의 성서적 수용도전, 혹은 갱신의 역동적 과정을 적극적으로 용인할 수 있다.

  1.고린도전서 11장 2-16절의 해석문제

유대 계통에서는 여자들이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큰 혐오감을 주었다. 공중 앞에 베일을 쓰지 않고 나타나는 여자는 결혼서약을 모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탈무드는 남편에게 그런 여자와 이혼하도록 명령했다. 유대적 가르침은 여자의 머리와 음성은 성적 자극을 준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베일을 쓴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였다.

바울은 여자가 수건을 쓰는 문제에 대한 주장을 창조의 교리(고전11:7,9)와 자연 혹은 관습(고전11:13-16)에 기초하여 펴나가고 있다. 바울은 두가지 점에서 여자의 의존적 위치를 정당화시킨다. 여자는 남자 다음에 만들어졌다는 의미에서 시간적으로 이차적인 존재이며 남자를 위하여 지어졌기 때문에 기능적으로 이차적인 것으로 보고있다(고전11:8-9). 이것은 창조역사에서 뿐 아니라 관습에서도 진술된다.

여자가 길게 머리를 기르고 그것에 자존심을 느끼는 태도는 자연에 있어서나 관습에 있어서 그들이 남자들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징한다(고전11:14-15). 따라서 긴머리는 수건과 맞먹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남자가 긴 머리를 하고 있는 것이 욕됨을 가리킨다고 한다.

여기서 바울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바울은 양성간의 차이를 창2:18-25에 근거하여 논함에 있어 창조의 교리 전체가 아닌 일부분만 적용시켰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 모두 그의 형상으로 창조하였고 각자에게 독립적이고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셨다는 사실도 하나의 중요한 진리이다(창1:27). 또한 하나님께서 서로를 위하여 창조하셨고 한몸이 되는 그들의 결합을 통해 양자의 필요 를 채워주셨다는 사실이 또 다른 중요한 진리이다(창 2:18-25). 바울은 문화적 태도를 지지하면서 성의 차이를 시인한다. 하지만 성의 차이는 성의 동등성을 향해 진술되고 있다. 바울은 여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고전122-14장) 성의 차별없이 주어지는 받은 바 은사들을 표현해야 하고, 기도와 예언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전11:5)고 하고 있다. 그리고 고전11:8-9의 언급에 이어 주안에서는 남자없이 여자가 있을 수 없고 여자없이 남자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남녀 양성간의 갈등이 해결되는 것은 그리스도안이다. 여기서 바울은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에 근거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하여 전통적인 입장을 초월하고 있다. 여자가 수건을 써야한다는 바울의 가르침은 교회 안의 여성들이 기존의 사회적 관습과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으며 신앙심과 관계되는 것은 아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여자들이 그런 태도를 보임으로써 사람들이 미친 사람들처럼 머리를 풀어헤친 이방 주신교나 또한 육체와 결혼을 천하게 본 영지주의자들과 혼동하지 않도록 했다. 베일의 정확한 목적과 이 구절의 분명한 의미가 무엇인지 수세기 동안 신학자들의 논쟁해 왔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가부장제 문화가운데서도 솔선수범하여 막중한 지도력을 감당한 기독교 여성들이 교회 안에 있었으며 그들이 목회에서 보여준 용기로 인해 오랫동안 기억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견은 놓쳐버리기 쉽다. 왜냐하면 제한된 문화에서 적용된 가르침을 초문화적으로 고정시키려는 시각으로는 부분적인 것에 매여서 신학적인 메시지를 가려 버리기 때문이다.

  2.고린도전서 14장 33-36절 해석의 문제

이 본문은 바울이 단순히 여자는 교회에서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 곧 여자는 회중가운데서 지도적 역할을 맡아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처럼 들린다. 여기서 어려운 점은 여자들도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고전 11:2-16과의 모순이다. 고전 11-14에서 기도와 예언은 사적인 행위가 아니라 공중예배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자들에게 기도하고 예언하도록 격려하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잠잠하도록 명령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침묵이 어떠한 성질의 것인지에 대한 결론을 얻게 해준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to speak(lalein)이지 to teach(didaskein)이 아니다. 즉 이 단어는 공식적인 강의나 권면이나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한 이야기나 잡담 정도를 의미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그들의 집에서 남편에게 물어보아야 할 질문에만 관계되는 것이었다(고전14:35). 이 구절은 교회에서 여성이 활동을 못하게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침묵은 한정적인 것이며 여자들도 성령의 감동아래서 기도하고 예언해야 한다(고전 11:5).

여기서 창조와 타락과 유다전통의 옛 질서를 뛰어넘는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여성들을 포함한 고린도 교인들은 옛 질서를 넘어 그들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새 역사의 충만한 빛 가운데로 들어왔음을 발견하게 된다.

  3.창세기 2장 18-25절 해석의 문제

창 1:27과 창 2:18-25 이 두 분문은 인간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이해와 논쟁에 사용되어 오고 있다. 이들은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주장되기도 하며 창2장은 특히 남녀관계를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만드는 것으로 사용되어지기도 한다. 창 2:18-20에서 하나님은 하와를 '그를 위하여 돕는 베필'로 지으셨다고 했는데 여기서 돕는다는 말은 어떤 종속적인 관점에서 돕는 (assistsnt)것이 아니다. 여기에 나타난 중요한 히브리어는 ezer(help)와 neged(meet) 라는 말이다. 이 말의 뜻은 영어로 ~에 상응하는 (corresponding to), 남자의 모든 요구인 육체적, 지능적, 사회적 교제등의 요구에 충분히 감당할(adequate) 수 있는 뜻으로서의 "베필"이라는 말이 더 정확한 번역이다.

또한 ezer란 도움(help)을 가리키는데 이말은 구약에서 21번 나온다. 16번에 걸쳐서 종속적 위치에서가 아닌 초능력적인 위치에서 돕는자로 나타난다. 시121:1-2에서 '나의 도움이 어디에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하고 있고 시 146:3-5에서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의 '그를 위하여 돕는 베필은 여자가 모든 면에서 남자와 동등하게 창조되었고 모든 위치에서 서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강력하고 필수적인 도움을 말한다.

창 2:22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라는 것에서 여자를 '아담의 갈빗대'라고 부르는 오해를 빗고 있다. 본문은 신중하고도 분명하게 그 추출된 뼈가 여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수고가 필요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남성의 ego를 부추켜주기 위한 자료가 될 수 없다. 더우기 갈빗대가 열등성이나 종속관계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위성을 부여하는 격이 되는데 이것은 창조기사 그 자체에는 없는 일이다. 창세기 2장에서는 우월성, 힘, 공격성, 지배력, 그리고 능력이 남성의 특성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다. 그와는 반대로 아담은 흙으로부터 창조되었으며 그의 생명은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호흡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존재에 대해 계획하시고 판단하실 동안 그 자신은 침묵가운데 수동적으로 있을 뿐이었다. 갈빗대는 연대성과 동등성을 의미한다.

C.왜곡된 성역할의 고정관념(Sex role stereotypes)문제

우리의 사회화는 여성에게는 이런 표현을 써야 하고 남성에게는 저런 표현을 써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오늘날의 사회화는 창세기 창조기사의 기본개념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남녀의 차이점을 강조했다. 창2장에서 여성을 또 다른 진흙으로 빚어 만드는 대신에 아담의 갈빗대로 만드신 하나님을 묘사한 것은 확실히 남자와 여자가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도 서로 훨씬 비슷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강조하는 사회화과정은 창세기가 가르치는 인류의 하나됨에 대한 거부이다.

우리가 영향을 받은 사회화는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극명하게 구분시켜 놓았다. 남성은 여성보다 더 공격적이며, 합리적이고 경쟁적이며 이에 반해 여성은 피동적이고 낭만적이고 주관적이라고 본다. 이러한 가정들을 Sex role stereotypes(성역할의 고정관념)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가정은 이 세상의 남성과 여성의 행동을 고정화하도록 만들고 있다. 남성들은 boss(보스)가 되어야 하고 여성들은 비서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사회학자들은 "도구적(instrumental)"이란 용어를 남성들의 사회화 특성과 동일하게 사용하고 표현적(expressive)이란 용어를 여성들을 사회화 특성과 동일하게 사용한다. 도구적 행동은 책임수행과 관련되어 있다. 즉 활동, 결단성, 지배, 자신감, 성취능력들이다. 반대로 표현적 행동은 사람들에게 적응하는 것이다. 즉 감정적 반응, 애정, 양육 등이다.

인간의 특성을 한쪽 성에게만 국한시키는 것은 인간정신에 해를 준다. 남성들에게 오로지 '도구적'으로 되도록 하는 것은 그들이 부드러워질 수 있는 기회와 그들의 느낌을 개방할 수 있는 기회와 인간 정신의 전분야에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들을 유독 '표현적'이 되도록 가르치는 것은 그들이 가치있는 전문직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와 그들의 독립적인 가치에 대한 감정을 모조리 빼앗는 것이다.

기독교 사회는 남녀간의 조화있는 관계로 특징지어져야 한다. 그래서 충분히 자격을 갖춘 여성은 남성과 같이 성직과 교회 지도자로서 모든 부분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될때만 교회는 남성과 여성이, 지배하시며 복종하시는, 도구적이며 표현적이신, 초월적이며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성서적 가르침에 진실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성서적인 완전함의 심볼을 우리에게 제시함과 아울러 하나님과 인간들로부터 사랑받는 지혜와 형상을 소유함으로써(눅2:52) 결함없는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고 말했을 때, 그는 남자지배, 여자 복종의 계급적 형태를 내포하는 고정관념적 행동의 붕괴를 내다보고 있었다.

우리가 성역할의 고정관념으로부터 해방되어 상호복종이라는 성서적 기준에 따르는 것은 개체적 인격 안에,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온전성을 증진시킬 것이다. 이와 같은 온전성은 엡4:11-13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선물을 은총으로 주셔서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예언하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들은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활동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교회 지도자들은 복음의 자유케 하는 메시지에 응답하기보다는 지배와 복종을 고집함으로 온전한 인간의 관계를 왜곡시키고 말았다. 성서 어디에서도 지도자의 은사는 남성에게만 주고 여성은 보조자나 복종하는 자가 되라는 가르침은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자기 자신의 은사나 다른 사람의 은사를 차별하고 거부하는 것은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의 성차별적 성역할 사회화는 여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역사 앞에 여성들을 좌절시키는 요인이 되며 동시에 성령을 슬프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성차별적 고정관념에 의한 여성의 역할과 지도력의 제한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다. 교회가 성역할 사회화 과정에서 여성들에게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성차별적인 메카니즘을 강화시킴으로써 온전한 하나됨의 역사를 막는다면, 요한복음 17장의 그리스도의 위대한 기도의 성취를 거부하고 있는 셈이다.

 

Ⅴ.새로운 여성교역(목회)을 위한 패러다임의 전이(paradigm-shift)

A.여성원리 실천을 위한 여성교역의 내용

  1.위계적 성직제도의 해체

여성교역의 지향점은 수직적인 위계질서를 타파하고 평등한 공동체를 만드는데 있다. 여성목회는 성직주의(교직주의)를 거부하는데 그것은 교직주의 속에 배태된 성직자 계급의 특권의식과 평신도의 의존적 사고방식, 그리고 성직계급을 독점하고있는 남성적구조 때문이다. 교권주의는 초기 카리스마 공동체가 구현했던 은사의 다양성 속에서 섬기는 봉사개념이 아니다. 성직(교권)주의는 성직자 계급의 특권을 인정하는 가부장적 위계질서이다. 따라서 성직계급의 특권화는 평등공동체 형성을 위해 극복되어야 할 과제이다.

  2.권위와 힘의 재정의

L.N.Rhode는 그의 저서 <Co-Creating>에서 권위로 가장된 힘의 오용을 비판하면서 교회의 위계질서에 의해 떠받쳐진 권위는 곧 남성들이 그동안 사회와 교회 속에서 누려온 힘에 의한 결과라고 말한다. 그는 악을 재정의하기를, 분배되지 않는 집중된 힘의 오용이라고 말한다. 남성 성직계급에게 집중된 힘, 그리고 그것에 의해 떠받쳐진 권위는 바로 독점적 권위라고 한다. 그러나 여성목회는 힘의 개념을 재정의한다. 힘을 적극적인 요소로 받아들이되 그 내용을 전면적으로 수정한다. 힘은 위에서 누르는 것, 한곳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일을 순환시키는 것이며 합의를 만들어 내는 것이며 민주화를 강조하는 것으로 재정의한다. 힘이란 위계적 산물이 아니라 공동체 모두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이다. 따라서 힘이란 집중될 수 없으며 골고루 나누어지고 분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여성 교역(목회)은 공동체로부터 부여된 권위를 강조한다. 은사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권위, 개개인의 신앙적 경험에 기초한 권위, 관계적인 신앙의 경험이 권위의 기초가 되고 있다. 개개인의 경험은 분산된 경험이 아닌 공동체에 스며들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 확산되는 통합적이고 다양한 경험으로 파악한다. 개개인의 삶의 경험 속에서 나타난 권위는 자신의 다양한 은사의 경험에 의한 것이다.

  3.공동체적 지도력

여성목회는 누가 기득권을 갖고 특권을 행사하면서 지도력을 갖는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여성목회가 지향하는 지도력은 한사람에 집중된 지도력이 아니라 공동체원 모두가 참여하는 지도력이기 때문에 권력이 집중되지 않는 공유된 힘의 상태에 관심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여성목회(교역)는 성직자에게 집중된 형태의 지도력을 언급하기보다는 공동체 자체가 공유하는 지도력을 강조한다. 공동체 자체가 공동체의 삶 안에서 성장하고 참여하고 표현을 결정함으로써 서로 서로에게 다양한 직무를 수행하도록 한다.

  4.교역 유형의 다양화

여성교역은 교역의 유형이 단일하거나 유형화될 수 없다. 다양한 목회형태가 있을 수 있다. 러셀은 새로운 목회자의 유형을 세가지로 제시하는데 변호자, 양육자, 평신도 유형이 그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변호자의 유형은 신학의 특수한 훈련을 받아 공동체 회원의 의식화 교육, 혹은 성인교육에 참여하는 형태이다. 양육자 유형은 회중의 잠재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공동체를 양육하는 유형으로 훈련과 능력, 그리고 중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미 여성들에 의해 실행되고 있다. 평신도 유형은 목사중심의 성직제도를 거부하고 경제적 자급자족을 통해 다양한 직능을 분담하는 팀목회(Team Ministry)를 제시하고 있다.

  5.통합자, 협력자, 조언자로서의 목회자

성직자 중심의 지도력의 변화와 성직자의 권위에 대한 문제제기는 필수적으로 교역의 개념의 변화를 가져온다. 교역(ministry)은 성직자 개인의 활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명감으로 살고 있는 신앙 공동체원 회중 모두의 활동이 교역이다. 따라서 교역은 지도력을 확보한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원 모두가 공동체의 교역에 참여할 수 있다.

지배적인 성직자, 의존적인 평신도의 분리구조를 넘어선 공동체 중심의 목회는 목회자의 개념을 변화시킨다. 평신도들 위에 군림하는 성직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봉사하는 개념으로 전환된다. 이때 봉사는 서로를 해방시켜주고 당사자를 소모시키지 않는 힘이다. 이럴 때 경쟁적 관계를 극복할 수 있고 상호권력을 부여할 수 있다. 봉사하는 성직에 기초한 목회는 공동체간의 은사들을 끌어내고 타인을 위해서 은사를 발전시키는 것이며 공동체가 그의 공동적인 삶을 상징화하고 서로에게 그 삶을 전달하고 서로를 강화하는 참여하는 공동체의 연결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목회와 공동체는 상호적인 관계이며 목회자는 공동체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B.교역의 통전성 (intergrity)

교역의 개념은 ministry와 pastoral care의 의미로 사용된다. ministry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목회(교역)의 개념으로써 설교, 예배, 교육, 행정, 상담, 목양등 일체의 목회적 기능과 분야를 다 포함한다. 이것은 교회의 사역이며 바로 그리스도의 ministry이다.

pastoral care는 포괄적인 ministry와의 유기적인 연관성 속에서 목양적 기능에 촛점을 맞추는 좁은 의미의 목회기능을 의미한다. 투르나이젠과 힐트너의 교역신학적 체계를 대비시켜 보면 교역의 통전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투루나이젠은 교역을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개개인에게 전달하는 데 그 본질이 있다고 정의한다. 그의 신학적 사고는 성과 속을 분명하게 구별하며 이러한 두 영역적 사고방식은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서 나타난 계시 밖에서는 신이나 인간 또는 역사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계시는 배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의 신학적 방법론은 연역적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세속적인 문화나 사회변화에 관계없이 권위적으로 군림한다. 그리고 말씀선포에서 성례전으로 이것이 다시 목회대화로 이어지는 투루나이젠의 목회구조는 수직적이다.

반면에 힐트너의 신학적 사고는 성, 속의 삶이 과정 속에 서로얽혀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와 목회상담이 세계 속에 내재화되어 있다. 그는 교회의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기능도 여성적이고도 모성적인 개념으로 규정한다. 그는 교회의 조직적 내지는 집단적인 기능을 양육, 보호및 관계라고 본다. 그의 교역 신학의 촛점은 목양적 관점에 있다. 목양적 관점의 3가지 기능은 치유, 지탱 및 인도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을 교회라고 하는 조직적 기구에 얽매이지 않고 회중을 개인적으로 돌보는 상담적 기능으로 보고있다. 양적인 교역의 개념과 집단적 교역의 기능으로 치달아온 한국교회의 교역의 구조는 이제 투루나이젠의 부성적인 측면과 힐트너의 모성적 측면을 고르게 활성화함으로써 균형잡힌 교역의 기능을 수행할 것이 요청된다.

이와같은 교역의 통전성을 교역의 기능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키기 위해서 Howard J.Clinebell의 남녀 양성적 통전성(androgynous wholeness)의 시각에서 교역의 직능과 영역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을 아래 그림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교역 직능과 영역의 양성적 통전성>

이것은 종래의 2가지 교역기능 즉 부성적 기능(복음선포, 사회참여, 교회행정, 기독교 교육)과 모성적 기능(목회상담, 예배집례, 지역사회 봉사, 세례와 성만찬)이 서로 지원적이고 상호 강화하면서 한 인간의 전인성을 증진시킬 뿐아니라 교회의 균형잡힌 성장을 가져오기 위한 교역기능의 내면적 관계이다. 교역자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교인들의 지평을 넓혀주고 당면 문제에 대한 성서적인 지혜의 빛을 비춰주며 성장의 필요성을 사랑의 정신으로 받아들이도록 권고할 수 있다. 그리고 상담을 통해서 이들의 문제를 가지고 대화하며 그들의 고통에 참여하게 된다.

예언자적 교역은 지역사회와 그 안에 있는 기관의 변화를 추구함으로서 그것들이 모든 인간안에 있는 전인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지원하게 하는 것이다. 제사장적 교역은 인간의 죄와 갈등을 치유하고 용서와 화해로 원형적인 회복을 성취하는 것이다. 교회행정은 지도력을 발휘하고 회중을 효과적으로 조직해서 보다 질좋은 목회봉사를 제공한다. 지역사회 봉사는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할 보다 넓은 지역사회에 있는 사람들의 욕구에 봉사하기 위한 사역이다. 교육은 전인적 성장을 촉진하고 종교전통으로부터의 적절한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다. 세례와 성만찬은 교육으로 다듬어진 인격과 신앙에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어 자양분을 섭취케 하는 것이다.

C.공동체적 교역에로의 전환

  1.목회적 요구들에 따른 기능들의 결합

성직 체계라기보다는 기능에 있어서 교역은 공동체의 목회적 요구들에 대한 참된 복수성(plurality)을 허락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다양한 기술과 은사를 가진 공동체의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내며 그래서 교역들로서 그들의 은사를 활성화한다. 충만한 공동체 생활은 다양한 능력자들이 필요하다. 많은 양의 교역이 하나의 임명된 특권계급으로 된다는 것은 많은 공동체의 요구들에 부적당하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아무도 어느 한사람이 모든 기술들과 은사들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들은 그들 자신의 멤버들 중에서 다양한 분야에 특별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발견하기 원한다. 그런 사람들은 그 다양한 분야에 능력자 혹은 목회자로서 구상될 수 있는데 이런 기술들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봉사를 단순히 소극적으로 소비하게 될 것이다. 목회자들의 기능은 이 다양한 활동들에 종사하기 위해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갖춘 협력자와 교사가 되는 것이다.

공동체는 목회기능의 가치들에 기반하고 멤버들의 재능을 지지하며 이런 능력에 힘을 부여하고 다른 이들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법을 안다는 것이다. 모든 기능들이 교회생활 속에서 실행될 때 충만한 교회생활을 하게 된다.

  2.교직주의로부터 해방된 평신도 공동체

교직주의는 지도력을 지배인양 이해하는 것으로 평신도를 성직자에게 의존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교직주의는 가부장제를 전제하고 있으며 또 그 위에 세워져 있다. 류터는 그러한 교직주의의 분쇄는 교역에 대한 성서적인 이해에 기초해 있다고 밝힌다. 즉 성직은 타인들에 대한 권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들에게 권력을 주는 의미, 즉 봉사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방식의 교역은 전체 공동체에 힘을 주기 위한 것이며 교역은 공동체 안의 사람들이 타고난 각각의 독특한 재능을 끌어내도록 하며 또한 각 사람들에게 타인들을 위해서 그들의 재능을 발전시키도록 확신과 기량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직-평신도의 관계의 변화는 필연적인데 성례전적 은총은 성직특권 계급이 독점하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공동체의 생활의 기반인 것이며 공동체가 드리는 예배와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목회조직은 그 모두가 그 공동체의 기반이 되는 성령 안에서의 공동체의 생활의 자기표현인 것이다. 류터에 의하면 진정한 성직은 위계적 교회체제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조망에서 살펴보아야 하며 목회와 공동체는 하나의 상호 호혜적 관계에서 보아야 한다.

 

Ⅵ.나가는 말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의 지도력의 체제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융통성이 있으며 그 성격은 지배적인 위계질서가 아니라 섬김을 중심으로 한 평등질서였다. 이는 지도력의 권위나 기능보다는 지도력을 행사하게 되는 자의 인격과 자질을 더 문제시하는 공동체적인 기능에 관심이 집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어디에서도 예수가 사도로서 남성만을 택하였다는 언급이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력은 남성만이 자격이 있다는 등의 언급을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복음서에 나타난 여성의 사역은 예수의 메시지와 태도로 말미암아 여성들도 예수를 따르고 배우며 섬기는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그들은 남성제자들보다 훨씬 신실하게 고난의 제자직을 수행한다. 몇몇 여성들은 예수의 생애와 선교의 절정이며 의의 깊은 십자가와 부활사건의 일차적 목격자로서의 사도적 증인이었으며 부활소식의 첫 번째 선포자로서 파송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여성의 사역과 지도력은 그 동안 교회에 의해 간과되어 왔다.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의 제자로서, 예수의 메시야성과 부활이라는 복음의 사도적 증언으로서, 설교자로서, 선포의 도구로서의 여성의 역할과 위치는 실제로 무시되어 왔다. 가부장적 지배적인 사회구조는 바로 인간의 의식구조와 그에 따른 모든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종교적인 지배구조를 형성해낸다. 이러한 지배구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는 일이다.

오늘날 교회에서의 여성사역, 여성지도력 개발의 의의는 일차적으로 교회사역과 지도력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실천을 바로잡는데 기여하는 것이며 동시에 예수가 의도한 제자직과 지도력의 회복을 뜻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력은 가부장적 위계질서, 지배중심의 사역과 지도력이 아니라 섬기는 교역, 통전적인 지도력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그것은 오늘 한국교회의 기독교 사역의 갱신을 의미하며 동시에 여성해방의 실제를 뜻한다. 여성의 지도력을 소외시키거나, 여성의 교역을 배제시키는 일은 기독교 공동체의 본질과 예수의 평등사상을 왜곡시키는 일이다.

한국교회는 선교 2세기를 바라보면서 교회의 본질과 위상을 재정립하고 자기 변혁을 시도해야 하는 시점에 와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갱신을 위한 여성지도력의 중요성과 교회여성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실천이 있어야 함은 너무도 자명하다. 한국교회의 시각을 미래와 세계로의 지평으로 열어야 한다. 성직자로서 리더쉽의 능력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남녀 모두에게 부여하신 은사이다. 그러므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예수의 제자로서, 복음 전도자로서, 사역자로서, 하나님의 교역을 수행해야 한다. 이는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된 관계가 아닌 공동 목회자가 되어야 하며 아울러 교회의 제도 및 기구들도 여성과 남성이 협동하는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협동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의 복종과 섬김, 새로운 인간성을 실천하는 일이 된다.

끝으로 하나님의 새 역사, 새 질서,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기 위해서, 교회에서의 여성 지도력 개발 및 여성 성직의 허용은 조속히 해결되어야 한 중요한 과제이다. 여성은 교역의 직임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는데 대한 강력한 신학적 근거란 없다. 오히려 복음의 깊은 의미는 남자와 여자를 상호협력, 보완, 계약적 사랑과 자기 희생적 헌신의 관계 속으로 초대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 타당하며 이러한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지배 또는 굴종이라고 하는 주제에 의해서는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다. 머리와 돕는 자와 같은 영어번역의 단어는 초기 기독교 전통에서는 지배 또는 굴종이 당시의 규범이었고 오랜 후에야 그러한 오류가 개선되었다고 하는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성직에서 여자를 제외시키는 일은 초기 기독교 신앙고백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사도신경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또한 니케아 신조에도 없다. 또한 이 사항은 결코 신앙의 신조(regula fide)로 형성된 적도 없다.

남성과 여성 모두가 성례전의 생활에 전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모두에게 의도하시는 전인적 인간성을 교회에 상징하는 좋은 방법이다. 성직자의 지도력은 적임자의 자격의 범위를 보다 넓게 잡을 때 그 가운데서 나오게 된다. 목자의 이미지는 부모의 이미지로서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해당되며 때로는 여성에게서 보다 전형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의 과거 역사 가운데서 여성은 남성들만큼이나 자주 교회의 양떼들을 돌보아 왔다. 경쟁하고 지배하려는 것보다는 협력하고 양육하는 일을 하도록 훈련된 여성들은 기독교 목회의 미래에 크나큰 영광을 주게될 것이다. 하나님은 장차 여러 가지 긍정적인 면에서 교회의 교역과 풍토에 영향을 끼칠 여성 목회자들을 부르시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