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영성신학과 영성의 유형

홍성주 목사

 

 

 

1.영성, 기독교 영성, 그리고 영성신학

요즈음 신학교나 교회에서는 '영성'(Sprituality)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말을 각양각색으로 사용하여 '영성'이란 용어를 혼란시키고 있다. 이런 차제에 그 말의 의미를 고찰해 보는 것은 뜻 깊은 일이라 생각한다.

'영성'이란 말이 대두하게 된 것은, 5세기 경으로, 주로 성직자나 소도사들의 전유물로 간주되었다. 이 영성의 흐름은 카톨릭 교회를 통해 여러 모양으로 지속되어 왔다. 개신교회는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영성과 영성신학에 관심을 갖는다. 특히 요즈음 영성에 대하여 관심이 고조되는 이유는, 현대의 도시문화와 과학기술시대의 가치관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인듯 하다. 아울러, 구미 교회들과 한국 교회들의 영적인 침체와 교회 성장의 둔화도 그 한 이유이다.

우리 말로 영성은 "신령한 품성 또는 성질", 또는 "신령스럽게 총명한 품성 또는 성질, 천부의 총명",이다. 이런 설명이 영어의 "Sprituality"를 잘 대변하는지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봄으로 해명될 것이다.

카톨릭의 영성신학자 조르다 오먼(Jordan Aumann)은 "넓은 의미로, 영성은 한 사람의 행동이 유래된 태도나 정신의 바탕이 되는 어떤 종교적 또는 윤리적 가치를 의미한다. 이런 영성의 개념은 어떤 특별한 종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 우리는, 기독교 영성은 물론 선, 불교, 유대교, 이슬람 영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한편 어떤 신학자들은 '해방의 영성', '창조 영성', '지구 영성', 그리고 '생태 영성'이란 용어들을 사용함으로 영성의 수평적 차원을 확대시키고 있다. 홈즈(Urban T. Homes)는 "영성이란 인간의 관계성 형성 능력이며, 관계성을 향한 우리의 개방성이며, 전인을 포함한 우주적 인간 능력이다"라고 하였다.

지금부터는 기독교 영성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오먼에 따르면, "기독교 영성은 신앙과 자비 그리고 다른 기독교 덕목들에 의해 작동된(actuated) 내적인 은혜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다." 사실, 기독교 영성은 그리스도를 무시하거나, 떠나서는 결코 성립될 수 없는 단어이다. 그래서 오먼은 "엄격한 의미로, 유일하고 참된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그리고 그 분을 통해 삼위 하나님께 이르는 영광이다"라고 하였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이수영 교수에 따르면,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고, 그리스도 안에서 보존되고 확증되었으며, 복음 안에서 열매 맺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열려진 참 인간적 삶의 능력이다." 한 마디로 기독교 영성은 삼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역사하심에 따라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타인, 자연과 세계,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온전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초월·신비적 능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또한 '영성신학'을 정의해 보자. 오먼은 "영성신학은 신학의 일부로, 신적 계시의 진리와 개개 인간들의 종교적인 경험으로부터 시작하여 초월적인 삶의 본성을 규명하며, 그 삶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지침을 제시하며, 영성 생활의 시작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서술한다"라고 하였다. 박영만 목사는 "영성신학은 하나님의 초월적 은혜에 대한 인간의 믿음의 응답이며, 하나님·인간·자연 그리고 역사와의 관계성 속에 있는 개인이나 공동체의 기도와 삶의 영적(초월, 궁극, 전인) 변화에 대한 체험, 이론, 훈련을 다루는 신학의 한 분야"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영성신학은 그리스도의 영성과 완덕을 추구하는 한편,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삶에 관심하며 연구하는 실천신학의 한 분야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영성신학은 인간의 영적인 측면 만을 관심하지 않고, "인간의 온 삶을 관심하며 포용한다…내적인 삶이나 내적인 인간만이 아니라, 영·육을 공히 관심하며,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의 실천을 지향한다." 즉 기독교 영성신학은 인간 실존의 영·육의 차원과 수직·수평의 차원을 모두 포괄하기에 영·육 이원론을 극복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영성신학은 이원론의 지배를 받아 온, 사변적이며 이성 일변도의 전통 신학에 생명력을 부여할 것이며, 기독교 본래의 생동적이고 초월적이며 성경적인 원초적 신앙으로 인도할 것이다.

Ⅱ. 기독교 영성의 유형

미국의 듀크대학교에서 조직신학과 영성신학을 강의하고 있는 지오프레이 웨인라이트(Geoffrey Wainwright) 교수는 교회 역사상 다섯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음을 밝혔다. 그는 그의 글에서 H. Richard Niebuhr가 [Christ and Culture]에서 언급한 5가지 관계 유형을 활용하여 그의 논지를 전개하였다. 필자는 웨인라이트의 글을 주로 참조하면서, 동시에 한국적 상황과 연관지으며 필자의 견해도 첨가하였음을 밝혀둔다.

1. 문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Christ against Culture) 유형의 그리스도인

우선 이 유형에 속한 사람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라 할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이라함은 초대 교회부터 콘스탄틴의 밀라노 칙령(A.D.313) 때까지의 그리스도인을 지칭한다. 그들의 영성은 한 마디로 '순교자의 영성'이라 할 수 있다. 그 당시의 문화는 사단이 지배하는 로마제국의 폭력·억압문화였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그 문화를 수용하거나 순응할 수 없었으며, 대항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런 유형의 영성을 4세기의 수도승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국교로 인정받은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제국에 타협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광야로 나가서 생활하며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하였다. 또한 오순절운동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그들의 방언을 서방 기독교의 합리적, 유물론적 언어에 반하는 반문화적 항거로써 이해하였다. 사실, 방언은 세상의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초월적, 신비로운 언어이기에 반문화적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 첫 번째 유형의 영성을 한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을 비롯하여, 독재와 군사문화에 대항하던 그리스도인들과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던 NCC계통의 그리스도인들과 민중교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극단적으로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 예라 하겠다. 요약컨대, 이 유형의 영성인들은 그들이 속한 세상과 문화를 그리스도에 대립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그 문화를 부정하며, 항거한다. 한편, 그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그들이 속한 세상과 문화를 도피하거나(초기 수도승같이), 아니면 순교자적 정신을 가지고 예언적 사명을 감당하려고 세상의 악을 비판하고 여지없이 폭로한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문제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참여 속의 개혁을 세상과 또는 불의와의 타협으로 간주한다. 이것이 그들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2. 문화의 그리스도(The Christ of Culture) 유형의 그리스도인

밀라노 칙령 이후, 기독교는 권력과 밀착됨으로, 개종자들을 대량으로 획득하였으며 많은 재산을 확보했으나, 처음 가졌던 신앙의 순수성과 영성은 상실하였으며 그 당시 문화의 대변자 또는 주구로 전락하게 되었다. 아울러 기독교는 세상에 하나님나라가 실현된 것으로 착각한 나머지 종말론적 영성과 복음 전도와 증언 및 제자화에 뒤따르는 희생정신을 잃어 버렸으며, 세상과 문화를 변화시킬만한 목적의식과 비젼과 의욕도 상실한 채 수구적, 보수적인 종교 집단으로 전락하였다. 회개와 중생의 체험이 없는 사람들이 교회의 중책과 성직을 맡게됨으로 세속과 교회는 별 차이가 없게 되었다.

이런 유형의 영성은 오늘날의 서구 교회들과 한국 교회들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과 일부 지도자들은 일정 때부터 지금까지 문화와 세상, 특히 권력자들에게 예언의 소리를 한 번도 발하지 못한 채, 오히려 그들을 옹호하고 축복하고 대변하는 죄와 우를 범했으면서도 회개와 반성을 한 적이 없다. 이런 교회들과 지도자들은 과연 하나님의 종들인가, 아니면 사단과 세상의 하수인들인가? 진리와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의당 어둔 세상과 문화를 밝히고 부패를 방지하거나 막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못한다면, 존재 가치가 없다. 지금, 서구의 교회들에는 예언자가 없어진지 오래이다. 교회는 단지 결혼식과 장례식만 치루는 사회의 한 기관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3. 문화 위의 그리스도(Christ above Culture) 유형의 그리스도인

이 유형은 인간의 본성과 문화(또는 세상)를 긍정하는 한편, 또한 이것들은 정화되고 고양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은혜는 자연과 문화를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러 왔다." 이 유형의 영성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부활 사건을 강조한다. 그들은 세상과 문화에 오셔서 이기시고 승리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들의 예술품과 색유리에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항상 세상에 대하여 우월의식과 승리감과 권위의식을 견지한다. 그 대표는 로마 카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들이다.

군사정권이 과거 30여년간 지배하고 있을 때, 한국 개신교회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두번째 나 네번째의 영성을 붸아서 군사정권을 옹호하거나 아니면 현실에 무관심하였다. 그러나 한국 카톨릭교회는 이 세번째 영성에 걸맞는 처신을 함으로 민중뿐만 아니라 군사정권에게도 그 권위를 인정받았다. 대표적인 예로, 개신교 지도자들은 청와대의 요청대로 그곳에 뚜렷한 명분도 없이 방문했지만, 카톨릭교회의의 김 추기경등은 명분없이는 찾아가지 않았고 오히려 군사정권 담당자들이 만나 달라고 간청할 정도였다. 그 결과, 개신교의 권위와 공신력은 땅에 떨어졌지만, 카톨릭교회의 권위와 신망은 오히려 높아졌다.

중세의 교회와 세속 권력은 서로 우위를 차지하려고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하였다. 그 결과 교회가 세속 권력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것이 별로 바람직하지 못함을 깨달았다. 바람직한 것은 교회가 제도적 권위가 아니라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세상과 문화의 변혁에 이바지하여 좋은 문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4.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유형의 그리스도인

이 유형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부정하지만 '문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 유형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다. 이 유형은 이원론적 입장을 취한다. 모든 루터교도들은 율법과 복음, 진노와 은혜라는 양극을 반향하고 있다. 즉 그들은 루터의 두 왕국설에 친숙하다. 루터에 따르면, 정부는 하나님의 왼손의 역할을 하여 법과 징벌로 세상을 다스리며, 교회는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복음과 은혜를 가지고 세상을 다스린다. 이 둘은 하나님의 세상 통치 수단이다. 그런데, 이 둘 사이는 필연적인 갈등이 생긴다. 그래서 이 네 번째의 유형을 '갈등의 영성'이라고도 한다. 성서적으로, 그 영성은 로마서 7:15-25에 요약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은 계속적인 투쟁과 갈등이라는 것이다. 마틴 루터는 "기도, 명상, 그리고 유혹이 신학자를 만든다."(Prayer, meditation and temptation make the theologian)고 하였다.

이 유형의 전형적인 예는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이다. 그는 신학자요 경건한 신앙인으로 나치스의 학정에 대항하여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한 죄목으로 사형을 당했던 인물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각양각색이다. 그를 예언자를 보는가하면, 어설픈 정치적 혁명가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개인의 경건생활과 공동체의 책임의식 사이에서 갈등을 극복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린 '예언자적 영성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즉 그는 양자의 갈등 속에서, 성경이 말하는 종말론적, 묵시적 결단을 하게 됨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본 훼퍼는 성공한 사례이지만, 이 네번째 영성이 극단으로 흐르게 되면 세상과 문화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되거나, 성(聖)과 속(俗)을 가르는 이원론적 입장을 취하게 되어 사회적인 책임을 회피하고 세상과 문화를 어둠과 사단의 세력에 맡기는 형국이 된다.

오늘날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위에서 언급한 두번째와 이 네번째 유형의 영성 형태를 선호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태도가 하나님의 뜻보다는 현세적인 안녕과 무사안일한 수구적 보신주의에 근거한 것이라면 민족의 장래는 어두울 뿐이다. 과연 종교가, 특히 기독교가 비정치적이고 비현실적인 집단인가? 정교분리(政敎分離)를 들먹이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이것은 물리적인 힘이 약한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생겨난 원칙이지, 교회가 정치에 무관심해야 됨을 천명하는 법칙이 아니다. 이제는 가장 바람직한 영성의 형태인 다섯번째로 넘어가자.

5.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 유형의 그리스도인

성 어거스틴은 "우리 자신들 없이 우리를 창조하신 그 분들은 우리 자신들 없이는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을 것이다"(He who made us withiout ourselves will not save us without ourselves)라는 격언을 남긴바 있다. 존 웨슬레는 이 말을 인용하는 것을 좋아했고 또한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다섯번째 유형의 영성은 인간의 철저한 타락을 인정하면서도, 긍정적인 창조물과 화육론에 정초하고 있다. 고로, 인간의 타락은 본래적인 악이 아니라, 선한 것의 왜곡이므로 회심과 중생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시된 죽음과 부활의 전형(pattern)은 죄에 대해서는 죽고 그리스도에 의존하여 하나님을 향해 살아감으로 역사 속에서 반복될 때 인간의 삶과 문화는 변하기 시작한다.

이 유형의 영성은 성격상 성례전적이다. 이 모델은 세례와 성만찬이며, 수동성(passivity)과 활동성(activity)이 조화를 이룬다. 수동성이라함은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과 신성(Godot)을 조용하게 기다리는 것을 의미하고, 활동성은 찬년왕국을 강력히 추구하는 삶을 의미한다.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츠(G. Gutierrez)는 "역사는 거룩한 역사와 세속 역사, 두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역사, 즉 그리스도로 종결되는 역사(Christo-finalized history)만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존 웨슬레도 "사회적인 성결없이는 성결없다"(No holiness but social holiness)고 하면서, 당시 영국 사회와 문화를 복음으로 변화시키는데 진력하였고 성공적인 역사를 이루었다. "지상 교회는 적어도 최후의 하나님나라의 표상(adumbration)으로, 더 나아가 선취(anticipation)에로 부르심을 받았다. 기독교 영성은 그런 소명 속에서 형성된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성공할 수 있고(웨슬레의 경우처럼),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 기독교인과 교회는 이런 노력을 통해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 통치권이 확장되기를 다만 기대할 뿐이다.

예수님을 비롯하여 바울, 어거스틴, 존 칼빈 및 존 웨슬레 모두가 이 다섯번째 영성에 속한다. 예수님의 영성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그분의 첫 메세지에서 발견된다. 이 말씀은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죄를 회개하고, 천국에 위배된 생각과 삶과 가치관을 변화시키라는 뜻이다. 이 다섯번째 유형의 영성은 앞의 네 가지 영성의 장점을 모두 포괄하는 가장 성서적인 영성으로, 이 시대와 미래시대에도 계속 필요한 종말론적인 영성의 형태라고 생각한다.

우리 한국교회도 이제는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 유형의 영성을 지닌 교회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선교비와 대외봉사비로 예산의 50% 이상을 지출하는 변혁지향적인 교회들과 '경실련'및 '기윤실'등을 들 수 있겠다. 이렇게 문화와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려면, 우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변화되고 갱신되지 않으면 안된다. 현재와 같이,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사회의 비난과 조소거리가 되어서는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선 교회 지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의 갱신에 민첩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이미 시작되었다. 문제는 남은 사람들의 호응과 동참이다. 우리 민족과 세계 공동체의 변화와 사활은 기독교회와 신학교에 달려있고, 기독교회와 신학교의 변화와 사활은 기독교 지도자들과 기독 청년들에게 달려있고, 기독교 지도자들과 기독 청년들의 갱신과 변화는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와 이에 순응하는 예수님의 온전한 영성을 지닌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실현될 것이다.

우선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 회개하는 일에 힘써야 될 것이다. 여기서 '회개'는 존 웨슬레가 언급했던 '신자의 회개'로서 성화에 절대필요한 요소이다. 아울러 4세기 이후에 살았던 수도사들같이 '깊은 기도' 또는 '관상 기도'(Contemplative prayer: 나를 포기하고 예수님이 주도하시는 영적인 기도로, 하나님과 하나님나라를 전력 추구하는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수도사들은 처음에는 '문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 유형을 견지하며 기도와 수도 생활에만 전념했으나, 나중에는 하나님의 소명을 듣고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 유형의 영성으로 대전환을 하여 기도와 수도생활뿐만 아니라, 선교와 자선활동 및 문화와 사회변화 운동에 깊이 참여하는 '온전한 영성'(개인의 영성과 사회변화에 깊이 관여하는 사회적인 영성의 통전적 형태)의 모습을 후세에 남겨 주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나는 만큼, 이 땅과 온 세계에는 하나님의 통치권이 널리 확장되어 사랑과 정의, 자유와 평등,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가 형성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