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식탁

 

― 과학문명기(期) 새 예배를 위한 패러다임의 전환 ―

 

 

조  기  연

(서울신학대학교)

   

 

Ⅰ. 들어가는 말     

 

 

   오늘날 "과학" 혹은 "과학기술"은 인간 사회의 주거환경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인류는 이제 더 이상 과학기술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과학기술은 이제 인류의 삶에 있어서 존립기반이 되었다. 이는 21세기를 바라보는 인류가 일상생활에 있어서 과학기술에 대단히 의존하고 있다는 뜻인 동시에, 이제는 과학기술이 제공하는 관점의 세계관이 인간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21세기 과학문명의 시대는 인간사회의 모든 분야에 대해 '달라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세계관, 가치관, 우주관이 변화되어야 함은 물론 일상 생활 전반에 이르기까지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재 방향(reordering)지워질 것을 요구받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21세기 과학문명의 시대를 맞이하여 과연 기독교 예배는 이에 대해 어떠한 시각을 가져야 하며, 또 새 시대를 맞아 예배가 달라져야 한다면 또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1. 역사적 관점에서 본 예배와 과학

 

   '인류는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homo faber)라는 명제가 말해 주듯이, 인류는 언제나 과학기술과 관련을 맺어왔다고 볼 수 있다. 불을 발견한 이래로 정도에 따라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인류는 언제나 개인적인 삶과 공동체적인 삶에서 기술을 사용하여 왔다. 이 점에 있어서 인류의 모든 세대는 '기술의 세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기독교 신학자들이 과학기술과 그 영향에 대해 구체적으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중세기의 일이다. 1398년에 기록된 Nuremberg Chronicle의 저자는 중세기의 기계들을 가리켜 "이상한 작업을 실행하며 어리석어 보이는 바퀴 달린 엔진은 사탄으로부터 직접 온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1) 그런가 하면 동시대의 또 다른 문서는 하나님을 캘리퍼스(calipers)와 콤파스들로 천상의 영역을 측정하시며, 열왕기하 20장에 기록된 대로, 정교한 기계적인 시계를 재조정함으로써 히스기야 왕의 생명을 연장해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2) 이처럼 기독교가 중세기에 들어서 과학기술에 대해 구체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그 전까지의 시기와 비교해 볼 때 괄목할 만한 과학기술의 발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중세기에는 정확한 측정을 위한 도구와 제도들이 발달한 시기였다. 항해술, 시간 계산, 제조업 등의 분야에서 폭발적인 발전이 있었으며, 그 결과 더 새롭고 더 정확한 기구들이 발명되었다. 자기 나침반, 기계시계, 실전 기하학 책, 광학(안경의 발명), 그리고 건축공학 등이 발명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발명과 발전이 대성당을 짓는데 사용되었고, 교회력을 개혁하는데 기여하였다는 사실이다.3)

   특별히 중세기에 발명된 '기계시계'(mechanical clock)는 수도원과 교구교회의 예배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베네딕트 수도원의 모토는 '일하고 기도하라'(Laborare et orare)인데, 수도원 생활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일'(opus dei) 즉 성무일과(daily office)의 반복이 있었다.4) 그런데, 이러한 성무일과는 항상 제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하였다. 그래서 밤이건 낮이건 성무일과를 위한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수도원장의 중요한 책임사항 중의 하나였다.5) 기계시계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종래의 해시계나 물시계와는 달리 기계시계는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데에 있어서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였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중세기 당시의 신학자들 중에는 발명가도 있었다. 약 1330경 베네딕트 파의 성 알반스(St. Albans)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리챠드 월링포드는 두 가지의 중요한 천문학적 기구를 고안해 내었다. 하나는 '알비온'(albion)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행성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고, 또 하나는 '렉탱귤러스'(recttangulus)라고 하는 것으로서 태양과 달과 다른 행성들의 상대적인 위치를 보여주는 도구이다.6) 17세기에는 근대 자연과학의 거물들이 대부분 수도승들이었다. 당시의 거물로 꼽히는 수학자 오트레드(William Oughtred)와, 뉴턴의 스승이며 그에게 케임브리지 대학의 루카스 석좌교수직을 승계한 수학자 배로우(Isaac Barrow), 그리고 왕립학회 창립의 주역을 담당하였으며 개스터빈의 개발과 사람의 비상문제 그리고 영구기관 등에 다대한 업적을 남긴 윌킨스(John Wilkins), 박물학자이며 동식물 분류에 업적을 남긴 레이(Johm Ray), 그리고 식물의 해부(Anotomy of Plants)라는 네 권의 저서를 남긴 식물학자 그루(Nehemia Grew) 등이 모두 이에 속한다. 이들은 하나같이 당시 자연과학계의 거물들이었으며 또한 모두 성직자들이었다.7)

   과학과 예배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근세의 사례는 바로 19세기의 '성찬용 포도주스'이다. 당시 미국에서는 금주문제가 사회적으로 크게 부각되었으며, 이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금주를 엄격하게 준수하다보니 성만찬에서 포도주를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아무리 알콜 없는 성만찬을 거행하려 해도 '알콜 없는 포도주'를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루이스 파스되르(Louis Pasteur)였다. 그는 우유에서 젖산의 발효에 관한 연구를 추진하였으며, 맥주의 제조 과정에 있어서 효소가 자라고 그 결과 알콜을 만들어 낸다는 과정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1870년대 초반에 파스퇴르는 성만찬을 위한 알콜 없는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포도주스의 발효를 억제하는 연구를 시도하였으며, 그의 연구는 열심 있는 감리교도인 토마스 웰취(Thomas Bramwell Welch)에 의해 결실을 맺게 되었다. 웰취는 파스퇴르의 우유살균 기법을 포도주스에 적용하였으며 드디어 1869년 알콜 없는 포도주스를 제조하는데 성공하였다.8) 그 결과 미 연합감리교회의 1880년판 예배의식서는, "주의 만찬에서는 '구할 수 있는 한'(wherever practicable)순수하고 발효되지 않은 포도주스만을 사용하여야 한다"고 권장(recommend)하였으며, 최종적으로 1916년의 규정집(Discipline)에서는 "주의 만찬을 거행함에 있어서 순수하고 발효되지 않은 포도주스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단정적으로 규정하고 있다.9)  감리교회의 이러한 결정은 금주정신을 가진 침례교, 장로교, 그리스도의 제자교회, 회중교회 등으로 하여금 그것을 뒤따르게 만들었다.

   포도주의 저온살균법 기술을 예배에 적용한 것은 두 가지 면에서 교회와 예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나는, 이 기술의 도입으로 말미암아 미국과 영국의 개신교 진영 그리고 그들의 선교지역에서 성만찬 예식에 지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고, 또 하나는 이로 인해 교회일치 운동이 심각하게 타격을 받은 것이다. 초기 금주 운동은 예배전통들을 크게 두 진영으로 분리시켰는데, 하나는 소위 "경건주의" 진영으로서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 스칸디나비아 루터교 등이고, 또 다른 하나는 소위 "예전적"인 진영으로서 로마 카톨릭, 성공회, 그리고 독일 루터교회 등이다. 발효되지 않은 포도주의 논쟁은 정확하게 이러한 분열을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들 두 진영간 상호 성만찬 참여(Inter-Communion)의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다.10)

   지금까지 논의된 바와 같이 기독교 예배와 과학기술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상호  발전해 왔다. 어쩌면 이는 종교와 과학이 지니는 본질적 속성에 있어서 서로 닮은 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과 종교는 공히 동일한 세계관과 사실적 지식의 기반 위에 놓여 있으며,11)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추구를 지향하고 인류를 향해 이러한 약속을 제시한다는 점에 있어서 그 본질적 동기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더 나은 세상이란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고통과 좌절 등을 인간 삶의 변두리로 몰아냄으로써 진정한 인간성을 실현할 수 있는 그러한 세상을 말한다.

   물론 과학과 종교간의 차이점이 엄존하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인류는 19세기에 들어서 과학기술이 갖는 힘과 문제점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경험하게 되었다. 히로시마의 원폭투하사건, 체르노빌의 방사능 누출사건,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복제인간의 문제 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예배가 동시대 사람들에게 의미를 주는 진정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처한 세상의 과학 문명 및 문화와 부단히 대화하여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 예배의 역사가 주는 교훈이라 하겠다. 다음 장에서는 '문화화'(Inculturation)의 관점에서 예배를 조망하여 보기로 하겠다.

 

2. '문화화'의 관점에서 본 기독교 예배

 

   기독교 예배는 교회라는 제도권의 힘에 의해 형성되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그 예배공동체가 소속한 보다 큰 사회적 상황에 의해서도 형성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이는 기독교 운동이 살아남고 확장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예배의 문화화는 단지 생존을 위한 필요성 이외에도 본질적인 차원의 사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성육신 하신 것처럼 예배도 구체적으로 이 세상의 문화를 옷 입어야 한다는 대 명제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세례나 성찬식을 제정하실 때에 당시의 팔레스타인이라는 구체적인 문화적 토양 위에서 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의 문화화는 거의 절대적 명제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배의 '문화화'(inculturation)는 과연 무엇인가? 예배 문화화(liturgical inculturation)의 대가인 추풍코(Anscar J. Chungpunco) 교수는 예배의 문화화를 "예배의 본문(texts)과 의식(rites)들을 해당 지역의 문화 속으로 삽입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그 결과로서 "예배본문과 의식들은 사람들의 생각과 언어와 가치와 제의(ritual), 그리고 그들의 상징적이고 예술적인 패턴으로 용해(assimilate)된다."12) 간단히 말해서 예배가 사람들의 문화, 역사, 그리고 전통 속으로 삽입되는 것을 뜻하는데, 이는 예배와 문화가 같은 형태의 사고방식과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의식과 상징과 예술적인 형식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는 점에 있어서 서로 공유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13)

   예배의 문화화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사도 바울은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쓰인 제단을 가리키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증거하였다.14) 이는 그가 당시의 철학이라는 문화의 옷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음을 뜻한다. 기독교 공동체가 맨 처음 예배드린 곳은 그저 평범한 가정집에서였다. 그 안에서 그들은 단순하고 친밀한 분위기 속에서 '떡을 떼며' 공동체의 행위를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불과 수세기만에 교회는 휘황찬란한 바실리카식 대 성전에서 예배를 거행하였다. 이는 바실리카식 건물이 당시의 웅장한 법정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러한 건물을 통해서 기독교의 웅장함과 고귀성을 나타내고, 또한 로마 사회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이 무엇인가를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함이었다.15)

   기독교 공동체는 초기 얼마동안 성서와 함께 유대교 예배의 좋은 전통을 도입하면서 유대교와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로마에서 씌여진 클레멘스(Clemens)의 『제1고린도서』(First Corinthians) 59-61에 나오는 기도문16)과 『디다케』(Didache)에 나오는 축복기도문17)의 내용은 비록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에 맞추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 형식에 있어서는 완전히 유대교적인 것이었다.18)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점차 유대교로부터 분리하여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지려고 시도하였다. 예를 들자면 『디다케』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월요일과 목요일에 '위선자들'과 함께 금식하지 말고 그 대신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하라고 가르친다. 뿐만 아니라, 유대교인들이 하루에 세 번씩 '쉐모네 에스레'를 바치는 것과 차별하여 '주님의 기도'(The Lord's Prayer)를 바치도록 하고 있다.19) 그러나 이점에 있어서도 분명한 사실은 교회가 유대교의 전통인 금식과 기도문 그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그 형식을 유지하면서 다만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교문화 속에 살다 온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들의 언어와 그들의 예배의식을 사용하되, 다만 그 내용은 그리스도론적인 내용으로 대치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초대교회가 당대의 문화적 형식을 취하면서 그것에 그리스도론적인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는 방식을 통해 상황에 적응함으로써 '문화화'를 실천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은 복음이 날로 확장되어 가면서 대면하게 되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던 필요성 때문에 이루어진 조치였다고 보여진다.

   세례 예식에 있어서도 문화적인 요소들을 도입한 사례가 적지 않게 나타난다. 히폴리투스(Hippolytus)의 『사도전승』(Apostolic Tradition)에 의하면, 물세례에 이어 계속되는 성만찬예식에서 수세자는 빵과 포도주뿐만 아니라 우유와 꿀도 받아 마시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고 열조들에게 약속해 주신 하나님의 그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히폴리투스는 설명하고 있다.20) 이는 수세자가 세례를 통하여 이제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땅이 주는 풍성함을 맛보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유와 꿀을 마시는 의식은 원래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당시 로마인들은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가족의 한 구성원 된 것을 축하하고, 또 모든 악령으로부터 그 아기를 보호한다는 하나의 표시로서 우유와 꿀을 주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21)

   터툴리안은 세례의식에서 마귀와 세속을 끊어버리는 순서를 '포기'(renunciation)라고 표현하고 있다.22) 이는 세례를 받기 원하는 지원자가 그리스도를 섬기기로 결심하는 순간 이제는 사탄을 섬기는 일로부터 손을 떼고 사탄과의 모든 관계를 청산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수세자가 몸을 돌려 동쪽을 향해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서약을 하게 되어 있다. 수세자가 몸을 돌리는 행위를 통해서 이제 그가 그리스도께 완전히 귀의했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포기"와 "충성서약" 두 가지는 사실 기독교 안에서 생겨난 것이라기 보다는 당시 주변 세계로부터 기독교가 도입한 것이었다. 원래 '포기'라는 말은 당시의 법률용어로서 "봉사자 혹은 협조자로서의 관계를 철회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동쪽을 향해 하는 "충성서약"은 지중해의 태양종교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23) 물론 예배당을 지을 때에 동쪽을 향해서 지었던 고대의 바실리카 양식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기독교 예배가 이교문화를 수용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는 "성만찬 기도문"이다. 특히 헬레니즘 세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트무이스(Thmuis)의 세라피온(Serapion)이 쓴 성만찬 기도문(Euchologion)는 당시의 헬레니즘 세계에 살던 비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기도에서 사용하던 독특한 언어적 특성을 포함하고 있다. 엄숙한 말투라든가, 신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형용사 중에서 특히 긍정적인 단어 앞에 부정적인 접두어를 붙이는 형용사들이 그것이다. 예를 들면 "무한하다"(infinite)는 말이나, "말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하다"(ineffable), 그리고 "도저히 인식할 수 없다"(incomprehensible)와 같은 형용사들이 이런 범주에 속한다.24) 그 외에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후 4-5세기에 교황이 주관하던 제반 예식들은 당시의 로마 왕궁에서 실시되던 왕궁예식들을 모방하여 기독교적으로 변형시킨 것이며, 사제들이 예배를 집례 할 때 입었던 예복들은 원래 로마인들이 입는 외투(tunica)와 내의(paenula), 그리고 예식복(toga)과 상보(mapula) 등을 기독교적으로 수용한 것이었다.25)

   이처럼 초대교회는 당시 교회가 처해있던 주변 세계로부터 많은 요소들을 받아들여 자기의 것으로 수용하였다. 때로는 이교의 요소가 있던 자리에 그것을 없애고 기독교의 것으로 대치시키거나, 또 때로는 이교의 제의적 요소 중에서 그 형식을 그대로 받아들인 후에 그 의미를 기독교적인 내용으로 새롭게 채우는 방식이었다. 물론 교회가 이렇게 바깥 세상의 요소들을 교회의 예배의식 속으로 받아들인 이유는 그것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고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내용을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복음의 문화화는 항상 교회가 처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궁극적인 실재를 접촉하고 인지하는 방식을 통하여, 그리고 새로운 문화와의 만남을 통하여 예배의 전통을 풍부하게 하여 왔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정신은 현대에도 계승되어져야 한다. 복음의 문화화는 복음이 전파되고 신앙이 표현되는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서 중단 없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물론 예배의 문화화는 결코 인위적으로 도출되거나 조작되어서는 안되며, 교회가 처한 세계의 문화적인 상징과 제도(institution)들 안에서 자연스럽게 표현되어야 한다.26) 문화화는 아직 형성되는 과정에 있는 문화형식을 교회가 앞질러서 미리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옛날로 되돌아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오랜 세월동안 한 공동체의 생활 전반에 걸쳐 확고하게 자리잡은 가치와 전통을 중시하면서 모두가 자기들의 것이라고 긍정하는 문화적인 요소들을 교회의 신앙과 예배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27) 그렇다면 이제는 작금의 한국 교회가 당면하게 되는 현대와 미래의 문화 곧 21세기의 문화에 대해 생각해 볼 차례이다.

 

3. 21세기 정보화 사회와 예배학적 인식

 

"형제들이여, 가상공간의 주이신 예수의 첫 번째 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도마처럼 여러분의 손을 그리스도의 상처에 대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골고다 언덕까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감으로써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가상공간의 주인신 예수의 교회는 신자와 비신자가 똑같이 아주 오랜 세월동안 열망해온 것을 여러분에게 제공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나는 여러분 모두에게 매주 일요일마다, 여러분 각자의 안락하고 은밀한 가정에서, 오늘날 할 수 있는 가장 과학적이고 새로운 종교적 경험을 통해, 나를 만나러 오라고 초대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서로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듯이 매주 일요일마다 나를 만나십시오. 여러분은 산상수훈을,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배신을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마치 거기에 있는 듯이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성한 아이폰(eyephone)을 쓰고 나와 함께 갑시다. 십자가의 길을 따라 예배를 보면서 구주와 함께 고통받고, 여러분의 가슴속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육신 속으로 들어갑시다. 그런 후 나와 함께 가상 성찬식을 가지십시오. 천사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상처에서 흐르는 바로 그 피를 황금 잔에 받아다가 여러분에게 돌릴 것입니다!

단 599달러와 낮은 월별 요금으로 여러분은 주의 왕국(이나 아주 비슷한 곳)을 매주 일요일마다 방문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집은 대저택입니다. 나는 일단 그 중의 몇 곳을 보여주고 싶습니다."28)

 

   위의 인용문은 장차 수년 안에 생겨나게 될 '사이버 교회'(Cyber Church)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바야흐로 21세기를 맞게 될 인류는 '정보화 시대'의 도래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지구상의 어느 한 곳에만 해당된 이야기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사실'이다. 정보화는 이미 사회 전 영역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거대한 변화가 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1999년 현재 전 세계적으로 인터넷 가입자가 1억 5천만 명을 넘었고, 매 순간 100만개 이상의 이메일이 오가고 있으며, 웹사이트는 10억 개가 넘었다. 국내에서도 이미 네티즌 숫자가 5백만 명을 넘어섰으며, 1주일이면 5천 개가 넘는 홈페이지들이 새로 생겨나고 있다.29) 2003년에는 네티즌 인구가 1600만 명에 달해 도시 생활을 하는 웬만한 성인은 모두 인터넷을 사용할 것으로 전망된다.30) 이제 인터넷은 "초등학생의 참고서로, 젊은 남녀들이 서로 만나 사랑을 속삭이는 데이트코스로, 직장인들의 일터로,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의 놀이공간으로 실생활에 속속들이 파고들고 있다."31) 실생활에서 은행 업무 및 각종 관공서 업무 등이 온라인으로 처리된지는 이미 오래되었으며, 이제 직장인은 회사에 직접 나갈 필요 없이 집에서 컴퓨터를 통해 일하는 소위 재택(在宅)근무가 실시되고 있다. 주식투자, 각종 예매업무, 쇼핑은 물론, 대화 및 교제도 컴퓨터 통신망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제는 대학교육도 강의는 컴퓨터 화상으로 그리고 숙제는 이메일로 보내는 사이버대학이 출현하고 있다. 다가오는 21세기에는 이러한 현상이 삶의 구석구석까지 보다 더 광범위하게 퍼질 것이며, 그래픽과 전자 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사이버 공간에서의 삶이 지금보다 훨씬 더, 그리고 현실세계의 삶보다 더 현실감 있게 될 것이다. '정보화'는 이제 인간의 '문화'이며 주거환경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정보화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정보기술의 발달과 확산으로 인해 생기는 다양한 사회적 변화의 총체이다.32)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보화는 컴퓨터로 인한 정보처리 기술의 발달과 위성통신 및 광통신 등으로 이루어지는 통신망의 확산에 의해 가능해졌다. 이러한 정보화 시대의 요체는 소위 '사이버 공간'이라고 불리는 가상공간이다.33) 사이버 공간은 최첨단 컴퓨터 기술인 가상현실 기술과 통신망이 결합되어 가능하게 된 공간으로서, 이는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적 공간이 아니라 컴퓨터를 통하여 인간의 두뇌작용으로 감지되는 일종의 인지적 공간이다.34)

   또한 사이버 공간은 물리적으로 접속할 수 있는 접속기재가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다.35) 그러나 일단 이 공간 속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은 현실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36) 그 안에서는 문자 전송이나 동영상, 그리고 음성전송과 같이 데이터를 주고받는 일은 물론이요, 이러한 자료를 분배하는 일과 전자 상거래 등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또한 누구든지 사이버 공간 안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문제를 토로하고 조언을 구하며, 그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37)

   사이버 공간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사이버 공간은 기존의 텔레비젼이나 라디오처럼 일방적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쌍방향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사이버 공간은 다 대 다 통신이 가능하고 비 동시성의 특징을 갖는다. 둘째, 사이버 공간 안에서는 물리적 거리와 시간적 거리가 극복되고 전세계 어디서나 실시간으로 만나는 것이 가능하다. 과거의 이웃사촌이라는 말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으며, 이제는 시공을 초월한 이웃의 개념이 형성된다. 셋째, 사이버 공간 속의 문화는 가상의 문화, 또는 이미지의 문화이다. 이는 특히 그래픽 기술 및 인터넷의 발달과 관련되는 것으로서, 시공간 압축의 효과를 넘어서 지리적 대척점에 놓인 곳의 문물을 안방에서 감상하는 것이 가능해 졌다.38) 넷째, 컴퓨터 네트워크가 창출하는 이 사이버 공간은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공간이다. 여기에서 공간이란 결국 컴퓨터 통신을 매개로 하여 형성되는 사회관계를 뜻한다.

   한편 사이버 공간은 신학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이버 공간이 물리적 공간이 아니고 단순히 하나의 네트워크 상의 공간이라는 점이다. 사이버 공간 안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ID라고 불리는 가명을 사용하여 활동하게 되며, 그러므로 현실세계의 자아가 아닌 또 다른 자아로서 살아가게 된다. 결과적으로 가상공간 안에서 익명성은 보장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나 그로 인한 사회적 관계는 온전하고 통전적인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둘째로, 가상공간은 기계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공간이며 인간과 기계가 접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사회이다. 이러한 과학기술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인간의 기술 종속과 인간의 기계화 내지는 비인간화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셋째로, 현실 속의 사회적 공간은 물체와 정보로 구성된 데 비해서 네트워크 상의 공간에는 오직 정보만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컴퓨터의 기억장치 속으로 물체는 들어갈 수 없고 오직 비트로 바뀐 정보만이 들어갈 수 있다.39)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보가 물질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정보는 언제나 '무엇에 관한 정보'일뿐 물질이나 에너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가상현실 속에서 사람들이 실제 생활의 모든 것을 다 행하고 체험할 수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실생활에서 겪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실제적(real)이고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보로서만 그럴 뿐이다.40)

   그러므로 사이버 공간에서의 '육체 배제' 혹은 '탈신체성'은 불가피하며 이는 매우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신체성의 인식과 강조는 기독교 신학의 필수적 사항이다. 예수는 육체를 가지고 여자의 몸에서 나셨으며 몸의 고통을 경험하셨고 몸의 죽음과 부활을 이루셨다. 예수의 육체를 부인하는 가현론은 정죄되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영적인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육체가 없는 인간은 존재할 수가 없다. 육과 영은 근본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사이버 공간이 가지는 한계점은 분명하며, 21세기의 예배를 논할 때에 이점을 분명히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4.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예배 패러다임

 

   그렇다면 이러한 21세기의 과학문명과 사이버 문화의 출현은 기독교 예배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과연 기독교 예배는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한국 개신교는 가상 공간상의 교회 즉 '사이버교회'(Cyber church)의 출현에 대하여 진지하게 숙고하여야 할 이유가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사이버교회는 실제로 교회에 모여서 예배하는 것보다 훨씬 더 '편리'하고 '생동감'이 있기 때문에 한국 개신교회에 크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현대인들은 익명성을 추구한다. 현대 한국의 신자들은 대형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선호하며, 그 이유는 많은 회중 가운데 파묻혀 '조용히' 예배드리고 '조용히' 교회생활 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교회 일에 깊숙히 개입되기를 싫어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이버교회는 아주 매력적인 존재이다. 사이버 교회에서는 목사나 교회의 직분자들이 귀챦게 출석을 독려하지도 않는다. 이름도 필요 없고 오직 ID로만 통용된다. 그야말로 익명성이 확실히 보장되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이러한 교회를 선호하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 한국교회는 개인주의적 신앙형태를 가지고 있다. 교회에서는 항상 성도 개개인의 '영적 온도'만을 관심 할 뿐 '함께 예배'하고 '함께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어 나가는' 공동체적인 신앙이 약하다. 목회자들은 언제나 강조하기를, 다른 사람은 어찌하든지 '내가' 결단하고 구원받고 은혜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배에서도 오로지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중요할 뿐 '다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내가 알 바 아니다. 이러한 신앙유형에 잘 어울리는 예배가 바로 사이버 예배이다. 사이버 예배는 교회에 나갈 필요가 없다. 홀로 컴퓨터 화면 앞에 앉아서 예배드리면 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예배하는지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다. 오로지 '화면 속의 주님'과 '나'만이 있을 뿐이다.

   셋째, 현대인들은 일상생활에서 편리함을 추구한다. 집에 앉아서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온라인으로 처리'하는 편리함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예배마저도 그렇게 편리하게 '온라인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반가워할 것이다. 번거롭게 교회에 나감으로 인해 시간과 비용을 허비하기보다는 집에서 소파에 앉아서 화면을 보며 편하게 예배하는 소위 '재택(在宅) 예배'를 선호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한국교회의 예배 형태가 설교중심의 예배형태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회중이 예배 시간의 대부분을 '앉아서 설교를 듣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어차피 '설교를 듣는 것이 곧 예배'라면 굳이 예배당까지 나가서 들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질문이 가능해진다. 과연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목회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 무어라고 대답할 것인가?

   1998년 『한국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회장 이동원 목사)에서 한국 갤럽조사연구소에 의뢰해 6개월에 걸쳐 한국 개신교인의 교회 활동 및 신앙의식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1998년 10월 13일 발표된 조사에 따르면, 매체를 통해 예배드린 경험이 있는 사람이 전체 교인의 11.0%였으며, 화상을 통하여 집에서 예배드리는 것에 대해 찬성한 기독교인은 33.4%나 되었다. 이 통계는, 한국교회의 신자들이 앞으로 여건만 허락되면 화상을 통해 집에서 예배드리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욱이 이렇게 대답을 한 사람들은 남자일수록 그리고 20대 이하 연령층일수록 더 높다는 사실은 심각한 상황이다.41) 극단적으로 말하면 수년 내에 사이버교회의 출현과 함께 한국교회의 회중은 30%이상 격감할 것이며, 한국교회의 공동화 현상은 단기간 내에 급격하게 진행될 것이다. 이에 대해 시카고 근교에 있는 휘튼 대학의 커뮤니케이션과의 과장이며 빌리그래함 선교센터의 원장인 제임스 엥겔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조사에 의하면,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는 교회 예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날 교회에 가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있겠다는 사람들임이 판명되었다. 교회 건물 안에서 행해지는 예배에 참여하지 않고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약식 예배를 드리겠다는 사람이 없을 경우 텔레비전 화면의 예배와 설교를 지켜볼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결과적으로 악의적이요 기만적인 생각이 바로 텔레비전 예배이다."42)

 

   이렇게 볼 때에 현재 한국교회 예배의 구조가  사이버 시대에 취약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앉아서 듣기만 하는 예배, 그래서 '회중'을 '청중'으로 전락시키는 예배, 개인적인 신앙 형태와 개인적 예배, 소비자의 구미에 맞춰 상품을 내놓듯 자꾸만 회중의 입맛에 따라 계획되고 그러므로 점점 더 편한 쪽으로만 추구해 가는 현대 예배의 추세 등 이 모든 모습은 사이버 예배라는 '신상품'이 나올 때에는 경쟁상대가 되지 않는다. 이제 회중은 교회의 예배보다는 사이버예배로 눈길을 돌리게 될 것이고, 거기에 대해 교회는 아무런 할 말도 없고 대책도 없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렇게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에 대한 예배학적 입장과 대안은 무엇인가? 물론 이는 단순히 예배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는 통전적인 문제이며, 한국 개신교회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다. 예배뿐만 아니라 성례전적 체계나 교회의 사명과 역할에 대한 재정립, 선교 방법의 다양화 등 전반적 영역에서 변화를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학적 관점에서 대안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성찬성례전의 회복이다. 다시 말해서 성찬성례전을 매주일 거행하는 것이다. 성찬성례전 의 신학과 실천을 회복하는 일이야말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가장 실효성 있는 대안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성찬성례전은 예배의 공동체성을 회복해 준다. "예배는 공동체적인 행위"43)라는 개념은 가장 기본적인 것인데 한국교회는 이를 상실하고 있다. 기독교 예배의 출발은 안식 후 첫날에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제자들이 '모여서' '떡을 떼었던' 데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한다. 함께 떡을 떼는 행위는 사람들이 함께 모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교회로 모여야만 한다. 소위 '재택예배'가 불가능한 것이다. 초기 교회 공동체에게 있어서 예배는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이었지, 혼자서 집에서 행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모이지 않는 예배란 존재할 수 없다. 성찬성례전은 이것을 효과적으로 지탱해 주는 장치이다.

   이처럼 모임을 강조하는 것은 한편으로 과학문명의 발달과 함께 점점 더 심화되는 인간 소외를 해소해주는 효과가 있다. 지난 7월 달에 "코리아 인터넷 서바이벌게임"이라는 것이 모회사의 주관으로 열렸다. 이 게임에서 참가자들은 외부와 고립된 주거공간 안에서 100시간 동안 살면서 컴퓨터 하나만으로 의식주를 해결하고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여야만 했다. 그들은 인터넷을 통하여 밥솥도 주문하고 피자도 주문하여 훌륭하게 의식주를 해결했으며 다른 사람들과 대화도 나누었다. 이 게임을 성공적으로 마친 한 대학교수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게임 도중 눈물을 두 번씩이나 흘렸습니다...음악을 듣다가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삶이 인터넷으로 먹고사는 것만을 해결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과의 단절은 정말 큰 슬픔이었습니다.... 사람은 사람끼리 어울려 살아야 제 맛입니다."44)

 

   둘째로, 성찬성례전은 예배에서 회중의 능동적 참여를 제고해 준다. 제2차 바티칸에서 주창한 예배갱신의 핵심은 회중의 "온전하고 의식적이며 능동적인 참여"(full, conscious, active participation)라는 사실을 한국 개신교회는 주목하여야 한다.45) 사이버예배가 가진 가장 뚜렷한 취약점은 바로 회중의 수동적 참여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예배가 드려지는 장소와는 멀리 떨어진 개인의 집에서 모니터를 통해서 나오는 화면을 보고 들려오는 소리를 듣기만 해야하는 '화상예배'에는 회중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반면에 성찬성례전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교회에 '출석' 하여야만 하고 교회에 나와서도 자발적으로 앞으로 걸어나와서 떡과 잔에 참여하여야 한다. 이처럼 회중의 능동적 참여가 있는 예배가 좋은 예배이며, 회중으로 하여금 예배에 참여한 보람과 의미를 더욱 느끼게 한다.

   셋째로, 성찬성례전은 예배에서 감각의 다차원성을 확보해 준다. 기존의 한국교회 예배는 '설교를 듣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므로 대부분 청각에 의존하고 있으며, 사이버 예배는 여기에다 시각적 차원을 보태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찬성례전은 떡과 잔을 직접 자기 손으로 받아먹음으로 해서 시각과 청각 이외에도 촉각과 후각과 미각을 활용하게 된다. 중요한 사실은 회중이 예배에서 대면하고 경험하게 되는 것들이 모두 '하나님,' '그리스도의 은혜,'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등 영적인 실재(spiritual reality)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영적인 실재들을 어떻게 인간의 언어와 그림만으로 다 표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설교에서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선포'한다면 뒤따라 이어지는 성찬성례전에서는 그것을 직접 '맛보고 경험'하도록 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예배의 구조에서는 설교와 성찬성례전이 서로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가 된다.

   넷째로, 성찬성례전은 예배를 풍부하게 해 준다. 성찬성례전에는 풍부한 신학적 의미가 들어있다. 성찬성례전은 그리스도 희생의 기념과 재현이면서 동시에 새 창조의 감사이다. 또한 성찬성례전은 그리스도 부활의 축하이며, 공동체의 만찬이고, 하나님 나라의 잔치이다. 이러한 다양한 의미는 공동체의 예배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해 주며, 이는 사이버 교회가 줄 수 없는 예배의 진정한 가치이다.

   『한국 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의 조사에 의하면 최근 10년간 한국 종교인구의 증가율이 전체적으로 둔화되고 있는 가운데, 그 중에서도 개신교의 경우가 둔화율이 제일 컸으며, 또한 각 종교의 이탈률을 조사한 결과 개신교 신자의 이탈률이 66.7%로 제일 높아서 개종자 10명 가운데 7명은 개신교인이었다. 그러면서 향후 교회의 성장은 교회간의 이동에 의한 성장이지 개신교 전체적으로 보면 감소세가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46)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에 미래의 예배는 성찬성례전을 회복하고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신자들의 결석율과 이탈률을 막고 지속적인 양적 성장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매주 성례전을 실시하여야 한다. 실례로 북미대륙에서는 지난 30년 동안 설교중심의 예배를 실시하는 대부분의 개신교단들은 현저한 교세의 감소를 겪은 반면에, 매주 성례전을 시행하는 로마 천주교회 등은 꾸준히 교세가 증가하였다. 한국교회는 여러모로 미국의 교회를 따라가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앞으로 10 년 내지 20년 후에 텅 빈 예배당을 목격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매주 성례전 제도는 시급히 회복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 예배는 21세기의 과학문명과 사이버 문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47)  사이버문화를 무조건 거부할 수만은 없다. 분명한 것은 기독교 예배가 사이버 문화에 등을 돌릴 때 기독교 예배는 자칫 '게토'(ghetto)화 될 가능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사이버 시대에 하나님 나라의 선교도 설자리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예배는 사이버 문화를 껴안아야 한다.48) 교회는 사이버 공간을 하나의 가능성과 기회로 받아들여서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한다.49) 분명 사이버 공간에는 수천만 아니 수억의 이용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곳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은 아주 효과적이며 필요한 사역이다. 또한 교회의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위한 방편으로 사이버 공간을 활용하는 것도 매우 유용한 일일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일을 위하여 예산을 투자하고 소프트웨어를 제작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아울러 우주의 모든 곳에 편재해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믿고50) 그 안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Ⅱ. 나오는 말

 

 

   기독교의 역사는 말할 것도 없이 예배의 역사 또한 주변 세계와의 대화와 수용의 역사였다. 과학문명과 문화는 기독교의 진리와 예배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다가가서 의미를 제공해 주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들이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가 그러했듯이 교회는 문명과 문화를 대함에 있어서 기독교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담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그것들의 본질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적절하게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21세기는 정보화의 시대이며 사이버 문화의 시대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정보화 시대와 사이버 문화가 인류에게 주는 혜택과 폐해를 분명히 인식하여야 하며, 또한 교회와 예배에 주는 긍정적인 효과와 부정적인 효과를 올바르게 파악하여야 한다. 사이버 문화의 확대는 종교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며, 그 중에서도 한국 개신교회는 이로 인해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작금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한국교회는 기존의 '말씀 중심'의 예배로부터 '말씀과 성례전' 중심의 예배로 구조 전환을 꾀하여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사이버 문화를 껴안으며 그 효용성을 적극 활용하는 태도를 또한 견지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21세기의 복음과 예배는 21세기의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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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san J. White, Christian Worship and Technological Change, (Nashville: Abingdon        Press, 1994), 18.

 2. Ibid.

 3. Ibid., 60.

 4. 베네딕트 수도원의 겨울철 성무일과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Nocturns(2:30 A.Am),        Matins(5:00 A.M.), Prime(6:30 A.M.), Terce(8:15 A.M.), Sext(noon), None(2:15 P.M.),    Vespers(4:15 P.M.), Compline(5:00 A.M.). 성경봉독은 3:30과 5:45 A.M., 그리고 7:00      A.M.과 3:00 P.M.에 이루어졌다. White, 147.

 5. Ibid., 65.

 6. Ibid., 62.

 7.  김용준, "사람. 종교. 과학," (제 10회 한국 문화 신학회 정기 학술 발표회, 1999년 3월     20일,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 21.

 8. White, 83-84.

 9. Ibid., 85.

10. Ibid.

11. 장회익, "종교와 과학 사이의 갈등과 융합," (제 10회 한국문화신학회 정기 학술 발표회,    1999년 3월 20일,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 6.

12. Anscar J. Chupungco, Liturgical Inculturation sacramental, Religiosity, and             Catechesis, (Collegeville, Minnesota: The Liturgical Press, 1992), 30.

13. Ibid.

14. 행 17:22-29.

15. David N. Power, Worship: Culture and Theology (Washington D.C.: The Pastoral Press,    1990), 77.

16. Cyril C. Richardson, Early Christian Fathers (New York: Macmillan Publishing Company,   1970), 70-72.

17. Ibid., 175-76; James F. White, Documents of Christian Worship (Louisville, Kentucky: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2), 182-83.

18. 윤민구 26. 이러한 기도문들은 유대의 회당에서 행해지던 "18가지 축복기도문"(Shemoneh      'Esreh)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19. Richardson, 174.

20. Geoffrey J. Cumming, Hippolytus: A Text for Students with Introduction, Translation,   Commentary and Notes (Bromcote, Nottingham: Grove Books Limited, 1987), 21.

21. 윤민구, 37.

22.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과 그의 모든 천사들"에 대한 포기선언이다. Cheslyn Jones;           Geoffrey Wainwright; Edward Yarnold SJ and Paul Bradshaw, The Study of Liturgy         (London: SPCK;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2), 135.

23. Josef A. Jungmann, The Early Liturgy to the Time of Gregory the Gregory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59), 136-37.

24. 윤민구, 48.

25. Ibid., 43.

26. David N. Power, 68.

27. 윤민구, 137.

28. 홍성태, 『사이보그, 사이버컬처』, (서울: 문화과학사, 1997), 73.

29. 조선일보, 1999년. 9월. 2일, 14면.

30. 조선일보, 1999년. 7월. 17일. 12면.

31. 조선일보, 1999년. 9월. 2일. 14면.

32. 홍성태, 20.

33. '사이버'라는 용어는 대충 '인공두뇌' 내지는 '가상'이라는 듯으로 사용된다. 사이버는 사    이버네틱스라는 단어의 줄임 말로서 배의 키를 잡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던 것이     노버트 워너에 의해서 정보의 소통을 통한 조종과 통제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홍성태, 10.

34. 홍성태 12. 최인식은 사이버 공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첫째, 사이버 공간은 컴퓨터와   네트워크를 통한 커뮤니케이션 공간이다; 둘째, 사이버 공간은 시간, 거리, 국가, 영토 현   실과 같은 물리적 구조로는 존재하지 않는 컴퓨터와의 인터페이스(interface)의 영역에서만   존재하는 공간이다; 셋째, 사이버 공간은 비트(bit)와 네트(net)가 만나서 형성되는 사회적   공간이다; 넷째, 사이버 공간은 컴퓨터 미디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 내는 상황이다. 이 때 사이버 공간은 인터페이스 영역을 확정하는 기술적 수단으로   서의 가상현실과 구별된다; 다섯째, 사이버 공간은 '컴퓨터 매개 커뮤니케이션 CMC' 테크놀   로지를 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언어와 인간관계, 자료와 부와 권력이 현재화되는 개념적    공간이다; 여섯째, 사이버 공간은 수많은 사람들이 컴퓨터 게시판과 네트워크를 매개로 하   여 말과 생각을 교환하는 가상의 공동체(virtual community)이다; 일곱째, 사이버 공간은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만들어 내는 미디어 공간이며, 바로 그 기술을 매개로 한 사회적 공간   이다; 여덟째, 사이버 공간은 디지털 정보와 인간의 지각이 만나는 지점이며, 문명의 '매트   릭스'(matrix)이다; 아홉째, 사이버 공간은 기술적으로 네트워크 기술과 가상현실 기술을    매개한 것이다. 네트워크 기술은 시공을 초월한 항해를 통하여 정보교류와 상호작용 커뮤니   케이션 을 행하는 사회적 공간을 가능케 하고, 가상현실 기술은 컴퓨터 테크놀로지에 의한   공감각적인 몰입(immersion)을 조장함으로써 가상세계의 체험을 가능케 한다. 최인식, "사   이버 공간에 대한 신학적 이해," (종교개혁 기념강좌, 1998. 10. 28. 서울신학대학교 성봉   기념관), 5.

35. 사이버 공간은 두 가지 구성요소를 지니고 있는데, 하나는 물리적 요소라 할 수 있는 접속   기재와 연결망이요, 또 하나는 추상적인 요소들로서 자료 등이 이에 속한다. 접속기재는 컴   퓨터, 전화, 스크린, 전화선, 서버, 스피커, 마우스, 비디오 카드, 사운드 카드, 모뎀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자료에는 정보, 문화, 가치, 언어 등과 같은 것들이다.

36. 박충구, 『21세기 문명과 기독교 윤리』 (서울: 대한 기독교 서회, 1999), 134.

37. Ibid., 138.

38. Ibid., 14.

39. Ibid., 32.

40. Ibid., 31.

41. 『뉴 크리스챤 훼미리』, 1998. 11월호. 20-35.

42. 제임스 엥겔, 『매스컴 시대의 선교전략』, 최한구 역, (서울: 신망애 출판사, 1992), 109.

43. James F. White, Introduction to Christian Worship (Nashville: Abingdon Press, 1992),

    31-35.

44. 조선일보 1999년. 7월. 6일. 11면.

45. Annibale Bugnini, The Reform of the Liturgy 1948-1975 (Collegeville, Minnesota: The     Liturgical Press, 1990), 41.

46. 『뉴 크리스챤 훼미리』, 20-35.

47. 현대 신학자들이 기술과학에 대하여 갖는 태도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비관주의적 견   해이다. 여기에서 과학기술은 진정한 인간 생활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종교적 영적 생활   에 대하여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과학기술은 그것이 가진 독자적인 범주를 세상에 강   요하며 모든 인간 존재를 그 범주에 따라서 순응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것이 만나는 모든 사   람을 비인간화시키며 노예로 만든다. 또한 과학기술은 비인격적이기 때문에 개인의 인격과   개성을 침식한다. 과학기술은 물질적이며 상업적이기 때문에 인간으로 하여금 필요와 욕구   를 충족시키기 위한 제품을 끊임없이 생산하게 만든다.

      둘째는 기술과학과 영적 추구의 관계에 대해 낙관적인 태도이다. 기술과학은 의식주의 문   제를 향상시켰으며, 질병을 예방하고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켰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영적인   문제에 관해 보다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기술과학은 인간의 자유와 자율성의   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종교적 추구의 선택 폭이 보다 더 자율적이 되었다. 우리는 향상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통하여 지구상의 어느 곳에 거하는 사람이든지 그가 필요로 하는 내용   과 그 필요의 정도를 산정해 낼 수 있게 되었으며, 향상된 교통능력은 결핍된 것을 해소하   게 해 달라는 기도에 대한 신속한 응답이 될 수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과학기술은 통제 불   가능한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매일의 삶에 있어서 주체적으로 선택해야 할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학기술은 기독교 미래의 한 부분이며 전 세계 복음화는 궁극적   으로 과학기술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셋째는 최근에 대두되기 시작한 견해로서 과학기술에 대한 비관주의와 낙관주의의 양  극   단 사이에서 절충을 꾀하려는 견해이다. 이안 바버(Ian Bourbor)와 같은 윤리학자에 의해    구체화되었으며, 소위 '상황주의'(contextualism)라고 불린다. 이들에게 있어서 종교적 삶   과 과학기술은 인간 존재의 날실과 씨실 같은 부분들이다. 그래서 이것들이 다양한 관점에   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야 한다. 과학기술이 비록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이긴 하지만, 그   것을 사용하는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명령되고 재 방향 지워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과학기술은 인간을 파멸하는 씨앗도 될 수 있고, 또한 인   간을 변화시키는 씨앗도 될 수 있는 잠재적인 요소이다. Susan White, 23-25.

48. 최인식, 9.

49. 박충구, 161.

50. 최인식,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