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 있어서 죽음에 대한 상담

최 재 락

(서울신학대학교)


I. 서 론

 

오늘날 인간들은 과학적 정신으로 끊임없이 많은 것들을 창조하고 생산해 내고 있다. 사람들은 과거에 비하여 엄청난 문명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현대사회에서 "생산적인 인간(Productive Person)"은 하나의 이상적 모델이 되었다. 상대적으로 회생의 가능성이 없는 죽어 가는 사람은 비생산적인 인간으로 간주되어 진정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유한적 존재로써 죽는다. 인간이 경험하는 죽음의 상황은 같지 않지만,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의 죽음은 인격적인 경험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인격적 경험이란, 의미를 발견하고 품위를 갖고 죽고 싶은 욕구가 충족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죽음의 인격적 경험은 점점 어려워져 가고 있다.

그렇기에,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을 전문적으로 돕는 사람들은 진지하게 고려되어져야 할 특별한 마음가짐과 가설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전문인들은 각자 다른 견해들을 갖고 있지만, 독특하면서도 보편적이고 또한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욕구를 갖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다 현명하고 효과적으로 돕기 위하여 자신들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전문적인 통찰력을 나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의사의 경우, 죽음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유기체적이며 생물학적이다. 그는 육체적 죽음을 적으로 생각하고 생명을 유지시키도록 훈련을 받았다. 임상심리학자나 정신의학자는 환자의 마음과 감정 깊은 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는 직업상 죽음 자체에 대해서는 중립적이지만, 그가 상담하는 사람에게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목회자는 육체적 죽음에도 관여하지만 자신의 내담자가 삶의 의미를 발견하여 유한성과 관련된 생물학적 사건에 압도당하지 않도록 배려한다.

이렇게 다양한 견해는 상담자의 독특한 역할과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의사나 목회자의 예비훈련이 심리학적 통찰력에 의하여 더욱 심도 있게 되며, 목회자나 임상심리학자가 병원의 일정과 의학적 통찰력에 의하여 도움을 받을 때 더 큰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이 논문의 목적은 간 학문적인 방법을 통하여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한 상담에서 요구되는 종합적인 통찰력을 추구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 논문의 취지와 더불어 2장에서는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한 상담의 기본전제들이 서술될 것이다. 3장에서는 죽는 자를 위한 상담의 이론과 실제가 검토될 것이다. 그리고 4장에서는 죽는 자를 위한 상담에서 중시되는 종교적 가치가 인간에 대한 과학적 이해의 문제점과 더불어 탐구될 것이다. 5장에서는, 죽는 자를 위한 상담에서 목회자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전문인들 사이에 보다 창조적인 협력이 요구됨을 설명하고자 한다.

Ⅱ. 죽는 자를 위한 상담의 기본 전제들3

죽어 가는 환자는 상담자에게 특별한 기회와 위험 요소들을 제공한다. 상담자가 두려움과 불안감 때문에 환자를 피하게 되면 그의 특별한 요구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진다. 반면, 상담자가 자신을 환자와 지나치게 동일시하면 심각한 정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죽어 가는 환자와 의사소통을 하는데 있어서 어려운 점은 죽음의 주제에 대한 침묵이다. 우리는 유한성에 대하여 사회적 금기를 만들어 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 존재인데도 죽음의 의미에 대한 건전한 토론을 꺼린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두려움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죽어 가는 환자는 자신의 내적 요구는 더욱 깊어 가는 반면에 그것을 만족시켜 줄 기회는 점점 어려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죽어 가는 사람은 침묵 속에서 가족이나 공동체와의 정상적인 의사소통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가장 인간적인 접촉이 필요할 때 완전히 고립될 수 있다. 이러한 분리의 현상은 불안의 표현인데 오히려 그것은 자주 배려의 행위로써 합리화되기도 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가족 공동체와 격리된 병원과 같은 환경에서 임종을 맞게 된다. 병원은 의사나 간호원들의 영역이며, 만약 그들이 환자의 감정적 요구에 적합하게 대응하지 못할 경우 환자의 고립감은 심각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전문가들로 하여금 특별한 책임감을 느끼게 해준다.

E. 에슬러는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을 대하는데 있어서 심리치료사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죽음이 삶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라 오히려 삶의 연장이 되기 위하여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R. 버틀러 역시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은 무의식적 차원에서 삶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하므로 상담자의 역할은 환자에게 단순히 평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차원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사는 육체적 고통을 감소시킬 수 있는 자신의 역할에서 만족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심리치료사는 환자가 심리적으로 고립되지 않도록 그의 존재 전체에 관여하여야 한다. 아마, 그는 때때로 죽어 가는 환자들과 같이한 시간들이 낭비였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회복되어서 좋은 모습으로 보답한다는 약속 없이 죽음을 향해 외로운 순례의 길을 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이 깊어지면, 그는 삶과 인격의 성스러움에 대하여 믿음을 갖기가 어렵게 되며, 결과적으로 죽어 가는 환자를 돌보아야 하는 책임감으로부터 회피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죽음에 직면하는 동안 심리치료를 받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더욱이, 종교와 분리된 일반학문을 통하여 훈련받은 심리치료사들은 종교적 제의나 성례전의 치유적 기능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성례전은 말기 환자가 분리의 느낌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성례전은 말보다 깊은 언어로 환자로 하여금 신앙공동체와 관련되어 있음을 느끼도록 해준다. 심리치료사들은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말하는 수단으로써의 상징적인 종교적 행위가 갖는 중요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또한, 심리치료사가 죽어 가는 환자로 하여금 깊은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와 지도록 도울 때, 그는 환자가 식별할 만큼 육체적 건강도 좋아지고 감정적으로도 건강하게 변화한 것을 보게 된다. 심리치료사가 종교적으로 훈련된 환자를 대할 때에는, 자신의 일들이 환자로 하여금 성례전에 참석하고 고백하도록 준비시키는 과정임을 인정할 만큼 겸손해야 한다. 무의식적 죄의식 때문에 계속되는 고백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불안한 환자에게는, 심리치료사와 많은 시간을 같이 일한 뒤에 성례전에서 그가 처음으로 경험한 면죄의 은총은 극적이면서 감사한 경험이 될 것이다. 때때로 심리치료의 과정은 깊은 감정적 갈등을 드러내어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삶에 새로운 의지를 부여한다.

심리치료의 목적은 환자로 하여금 자신의 경험을 건설적으로 사용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환자들은 질병 대신에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며, 이때 그들이 제기하는 질문에는 신학적인 측면이 있다. 그들은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나?" 또는 "왜 내가 죽어야 하나?"와 같은 질문이 아니라, 오히려 "왜 나는 인간인가?", "나는 어떠한 존재였는가?",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고 묻는다. 환자는 이러한 질문을 추구하는 가운데, 현재의 고난 속에 과거와 미래가 함축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현재의 고통을 넘어서서 내적인 만족을 갖게 된다. 이렇게 환자가 시간의 한계점을 극복할 때 영혼이 삶을 주도하게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환자들은 자신의 병과 시간의 흐름에 대하여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다. 더욱이 심리치료사가 시간에 대하여 너무 의식하면 환자의 생각과 느낌에 집중해야 하는 정상적인 치유과정을 방해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환자로 하여금 우주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돕기가 어려워진다. 인간은 자신의 자아를 넘어서서 우주의 깊이를 깨달을 때 그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높은 수준으로 고양된다. 그러므로, 심리치료자는 시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환자에게 많은 것을 약속하기보다는 환자 자신이 육체적 죽음에 의해서도 파괴될 수 없는 가치를 발견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는 가끔 죽어 가는 환자가 일시적으로 의식을 되찾거나 호전될 때 예상과는 달리 의사의 노력에 감사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환자에게 있어서 의사의 노력은 경우에 따라서 한번 겪어야 할 과정을 여러 번 겪게 하는 것이 될 수 있다. 환자는 이 과정이 고통스럽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들이 다른데 써야 할 에너지를 생명을 연장시키는데 쓰도록 강요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사실, 죽음 앞에서 인간에게는 고통보다 의미와 품위, 그리고 개인적 자유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암과 투병하는 한 여인은 이같이 말했다. : "나는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그러나 죽는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혼돈과 경멸감에 대해서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나는 인간으로써 삶의 의미를 느끼며 품위를 지키면서 죽고 싶다." 그녀의 경우 자신이 지켜 왔던 가치를 끝까지 보유한 것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초인적으로 의식에 매달렸다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다.

죽음은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사건이지만, 비존재의 상태로써의 죽음과 과정으로써의 죽음에는 다른 점이 있다. 죽음의 과정에 개입하는 상담자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에 좀 더 성숙하게 직면하는 마음가짐을 갖도록 도울 수 있다. V. 프랭클은 이것을 그의 저서 From Death-Camp to Existentialism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는 죽음의 수용소에 있던 친구들이 공포에 질린 동물처럼 죽음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갖고 죽음에 직면하도록 도왔다. 그는 인간이란 살았던 것처럼 죽을 것이라고 믿었다. 불안과 공포에 억눌려 살았던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반면 내면에 평정을 갖은 사람은 평화롭게 죽을 것이다. 이것은 G. 카플란의 말대로 인간은 위기를 대응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전 존재를 연결시킨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 삶을 완성하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좌절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위기의 시간에도 자신이 지켜 왔던 가치와 의미를 실행한다. 그러나, 삶에는 때때로 실패와 좌절감이 너무 압도적일 때가 있다. 악성 종양으로 죽음 앞에서 분노를 느끼며 삶을 포기한 청년의 경우, 그는 자신이 겪는 고난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없었다. 여기서 V. 프랭클의 견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인간의 고난은 우리가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을 때에도 의미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꽃은 어느 누구도 보거나 감사하지 않을 때에도 피고 진다. 가치는 사실에 있다. 그 사실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의미 없이 창조된 것은 없다는 믿음에 의하여 인정되는 것이다. 냉혹하게 허물어진 삶도 내적인 의미를 갖고 있으며, 사람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의미의 타당성을 명상할 수 있어야 한다.

상담자가 죽음 앞에서 좌절하는 사람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중요한 의무이다. 프랭클은 심리치료자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러한 믿음이 죽는 자를 상담하는데 있어서 결핍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보통 전문가들은 자신의 느낌과 생각에 고착되어 있어서 환자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즉 믿음으로부터 오는 확신의 감정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상담자는 죽어 가는 환자가 신앙 속에서 삶의 의미와 질서를 발견하는 것은 삶의 종결이 아니라 삶의 시작임을 인식하고 자신을 이 구원적 사건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써 이해하여야 한다.

Ⅲ. 죽는 자를 위한 상담

임상적 증거에 의하면 많은 환자들이 심리치료를 받으면 회복시킬 수 있는 삶의 의지를 상실하기 때문에 예측된 시간보다 빨리 죽는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죽어 가는 환자들은 상담자보다는 그들에게 불길한 예후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말하는 의사들과 지지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인간으로써의 욕구는 전반적으로 무시당하고 있다.

우리는 환자들이 죽는 과정에서 둔화되어 대화를 하지 않으려 한다고 들어왔다. D. 케폰에 의하면, 인간은 이상한 성격과 감정에 의하여 고통받고 살았던 사람처럼 죽어가기 때문에 전과같이 접근하기 힘들며 다가오는 죽음은 그의 자아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죽는 자와 대화를 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상담가들은 케폰의 의견에 반박한다. 아마 D. 케폰의 생각은 의사가 환자와의 관계를 회피한 것에 대한 자책감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무의식적 소원일 것이다.

환자에게 심리치료가 생각보다 훨씬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사례가 여기 있다. 한 의사는 악성 대장염으로 인하여 직업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는 평소 심리학적 해결방법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수단으로 받아들였다. 상담과정에서 그가 사춘기 때 아버지가 사망했고, 그 때 그는 생명을 구하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 밝혀졌다. 그런데 사춘기에 있는 그의 아들이 죽음으로써 그는 감당하기 어려운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아들이 죽은 몇 달 후 그의 첫 증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계속 그 증상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면서 그를 괴롭혔다. 상담과정에서 그는 의사가 된다는 것의 고통은 말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처음으로 그가 느꼈던 공포와 분노에 대하여 말했고 어린 시절에 억압했던 눈물을 흘렸다. 그후 그의 증상은 사라지기 시작하여 완전히 회복되었다.

삶의 의지와 죽음의 의지 사이의 갈등에서 나타나는 요인들은 심리적이고 영적이다. 삶의 의지가 회복에 있어서 중요한 요인이라면 그 의지를 강화시키는 치유적 자원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울 때, 시간은 상대적일 수 있지만, 삶의 의미는 절대적이다. V. 프랭클에 의하면, 인간이 미래를 추구할 때만 살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특성이다. 말기 환자를 위한 상담의 목적은 삶의 의미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만약 신체적 회복이 어려우면, 상담은 죽음의 사건에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에 직면하여 인간은 과거의 삶 속에서 성취할 수 없었던 존재의 완전한 성장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죽는 자를 위한 상담에 있어서, 상담자, 의사, 목회자, 심리치료사, 환자의 가족들 모두가 공유해야 하는 중요한 목적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는 신비한 힘이 작용하고 있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삶과 죽음의 세력을 실용적인 측면에서 개념화 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들의 경우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더 살기를 원하며 이러한 열망이 질병에 대한 육체의 저항에 결정적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환자의 살려는 의지를 강화시키는데 있어서 또한 고려해야 할 것은 환자 자신의 가치들이다. 환자는 진정한 가치를 추구할 때 수반되는 자기발견과 자기수용 속에서 성숙한 존재가 된다. 이러한 자아의 성장은 시간의 흐름과는 관계가 없는 가치이다. 우리가 인간의 가치와 삶의 거룩한 특성을 믿는다면 죽음이 다가와도 우리의 궁극적 관심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심리치료사, 의사, 목사, 상담자들의 책임은 어떤 발달단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치료는 경과되는 시간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창조된 가치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삶과 죽음의 의미와 관련된 철학적 문제를 짧게 다루고자 한다. 철학적 전제 없이 치유적 가치를 논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상담가는 삶과 죽음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가져야 한다. 상담가의 견해는 치명적으로 아픈 환자들과 일할 때 결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죽음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일반적인 의학적 견해는 신중히 검토되어야 한다. 만약 상담자가 삶과 죽음의 의미의 절대적 분리를 믿으면서 환자를 대한다면 그것은 상담의 목적인 삶의 수용을 어렵게 만들 것이다. 그 때 상담자는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데 관심을 두기보다는 죽음을 막는데 에너지를 쓸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의미 있는 견해는 삶과 죽음은 의미 있는 실존의 양면이라는 것이다. 누가 진리를 위해 불의와 싸우다 죽는 순교자를 구할 것인가?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죽음을 그의 존재의 참된 의미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가 죽지 않고 산다면 그는 자신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배반하는 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희랍의 성인 Hygeia가 건강의 의미를 육체적 차원에 국한시키지 않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하게 하는 전체성(Wholeness)의 견지에서 설명한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건강의 의미는 현대 심리학자 A. 매슬로우에 의해서도 자아실현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환자가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가면, 신체적 상태가 호전되지 않거나 악화될 때에도 죽음의 공포는 점점 감소될 것이다. 치유는 죽어 가는 환자에게 거짓된 희망을 주어서는 안 된다. 치유는 육체적 회복보다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아의 해방과 확대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가끔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들이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새로 찾은 생명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문제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이 때 상담의 접근방법은 환자에게 있어서 자아의 궁극적 관심을 증진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담자 자신이 먼저 궁극적 관심을 갖고 환자의 절망에 직면해야 한다. 상담관계 속에서 환자 안에 신앙이 내재할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신앙이란 P. 틸리히가 말한 의미와 같다. : "신앙은 궁극적인 관심을 갖는 상태이다." 상담자는 환자로 하여금 성공에 대한 관심과 두려움, 그리고 불안을 극복하고 자신의 내적 발전에 관심을 갖도록 인도해야 한다. 틸리히에 의하면 신앙의 영역에 들어가는 사람은 삶의 성역에 들어가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신앙을 환자가 붙잡고 응답할 때 그는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신앙을 요구하는 환자들을 여러 명 갖는 것은 상담자에게 긴장감을 안겨 준다. 이러한 유형의 상담은 열정적인 집중과 거의 절대적인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보살핌은 상담자가 자신을 보호하려고 취하는 신중함이라던가 친절함의 성격과 다른 것이다. 상담가는 동정이 아닌 공감 속에서 환자가 마음 문을 열기 전에 자신이 먼저 망설임 없이 환자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노력 없이도 상담자와 환자는 종종 치료과정에서 협조적으로 일할 수 있지만, 그것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죽어 가는 환자에 대한 상담의 절대적 관심은 환자로 하여금 스스로 참된 자아를 발견하도록 돕는데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프리니(c. 61-114)가 말한 것처럼,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에게 좋은 교훈이 된다." 그는 이것을 재차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진실한 모습으로 즐길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은 완전한 성장이다." 환자는 이러한 의미의 가치와 경이감을 필요로 하며, 이러한 가치의 증거는 환자가 상담을 통하여 성장할 때 나타난다. 환자는 상담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훈련을 받으면서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게 된다. 이러한 자아의 추구는 상담자에게도 중요한 과제이다. 흔히 상담자는 자신의 접근방법에 지나치게 확신을 하기 때문에 환자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상담자가 자신을 알지 못할 때, 그는 환자에게 지도했던 것과 전혀 다른 가치나 생각을 행할 때가 있다. 환자는 이것을 재빨리 느끼게 되며 상담의 효과는 심각하게 감소된다.

죽어 가는 환자를 위한 상담에서 상담자는 환자가 갖고 있는 정신적 증상의 원인보다는 환자의 삶에 대한 열정을 해방시켜 주는데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정신적 증상들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는 무능력과 자기표현을 계속 억압하는 행동양태로 생각되어 진다. 매슬로우는 이것을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 "인격장애는 자신의 진실된 본성이 파괴되는 것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다." 우리는 환자를 상담할 때 환자의 정신적 병리나 죽음에 대한 준비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환자의 내적인 힘을 추구하는데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일반적인 상담방법은 환자의 인격적 약점을 찾아내려는데 시간을 많이 쓴다. 그러나, 로젠탈이 주장하는 것처럼, "죽음에 대한 환자의 두려움을 감소시키는 것은 그의 창조적인 힘을 다시 소생시키는 것이다." 많은 상담자들이 이러한 접근방법을 통하여 큰 결실을 얻었다고 믿고 있다.

Ⅳ. 죽는 자를 위한 상담에 있어서 종교적 가치

말기 환자들은 종종 자신들을 압도하는 두려움과 고립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종교에 귀의하고 싶어한다. 때때로 그들은 절망 속에서 마술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종교가 주는 위로 속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정리한다.

종교적 자원들은 환자들의 욕구를 채워 줄 수 있는데, 이것은 결코 두려움이나 불안과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죄책감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행하여지면 안 된다. 반대로, 종교적 자원은 환자들의 회복과정을 촉진시키며 내적 갈등을 해결하는데 창조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종교적 상담자는 종종 무의식적으로 죽음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과 실존적 불안을 환자에게 투사한다. 그는 환자에게 자신이 지킬 수 없는 종교적 흥정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한 삶을 보장할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 육체적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종교적으로 흥정하려는 노력은 실제적으로 환자에게 성숙함과 현실성이 요구되는 때에 마술적인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치유 팀에서 목회자는 죽어 가는 환자를 죄책감과 불안감으로부터 자유로와 지도록 돕는데 있어서 타당한 위치를 갖고 있다. 그는 환자가 진정한 자기발견과 자아실현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G. 질보르그가 지적한 것처럼, 심리치료는 발견되지 않은 자아, 즉 성서가 말하는 옛 사람을 다루는 반면 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정체성의 신비한 형태인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사람"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는 것은 자기포기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자기완성이 되는 십자가(the Cross)를 포함한다. 바울은 이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강한 끈기를 낳고 그와 같은 끈기에서 희망이 솟아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넣어 주셨기 때문입니다.(Rom 5:4-5)" 이와 같은 신앙발달은 죽어 가는 환자로 하여금 현실을 도피하지 않으면서도 질병이나 죽음과 같은 현상을 초월하여 자기 발견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러한 자기발견은 위기에 직면하여 종교 속에서 도움을 구하는 환자와 더불어 심리치료사나 목회자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너무 자주 목회자나 의사가 죽어 가는 환자는 더 이상 잠재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여 환자와의 관계를 회피하는 것을 보아 왔다. 그러나, 종교의 모험적 정신은 인간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는 각성의 시간에 활성화되는 잠재력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깊이 인식할 때 시간과 공간에 속박된 많은 생각들이 부적절한 것으로 느껴진다. 인간 존재에 대한 완전한 지식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므로 이미 영원한 것에 대한 경험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환자로 하여금 죽음이 다가올 때 자신의 존재가 갖는 고유성과 그의 존재 안에 영원한 것이 있다는 것을 느끼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은 틸리히가 말한 것처럼 존재의 근거(the ground of being)에 대한 확신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C. 융에 의하면 그의 환자들은 자신들의 기본적 욕구가 근본적으로 종교적임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을 기피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회자들이 엄격한 태도로 너무 쉽게 비판하면서 설교를 하였기 때문이다. 융은 상담과정에 있는 목회자의 훈련에 많은 진보가 있음을 최초로 인식한 사람이었다. 의사들은 한 가지 방법으로만 해결하기에는 복잡한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목회자들과 관계를 맺을 필요성을 느꼈다. 과학으로써의 의학은 인간의 전인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의학이 인간적 동기를 탐구하지 않는다면 질병의 근원을 다룰 수가 없게 되었다.

정서장애를 다룰 때 나타나는 문제 중 하나는 "무능한 통찰력(impotent insight)"이다. 환자들은 자신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볼 능력이 없어서 그것을 변화시킬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다. 그들의 행동은 그들이 삶의 의미나 목적을 발견하지 못한 사실과 직결된다. V. 프랭클은 이러한 환자들을 다루면서 실존주의적 분석의 과제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삶의 고유한 의미를 발견하여 책임감을 갖고 자신에게 적당한 일을 하도록 인도하는데 있다고 강조한다.

이와 같이 환자들을 대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심리학적 통찰력은 삶에 대한 중요한 영적 질문에 대답을 요구하는 인간의 개념에 도달해야 한다. 비종교적으로 훈련된 심리치료 방법을 오랫동안 사용한 후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어디서 힘을 얻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과 같이, 의사도 삶의 궁극적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치유체계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사실, 어떤 치유체계도 치유 받는 인간의 개념보다 더 클 수는 없다. 잘 조직되고 분류된 지식으로서의 과학조차도 부분적인 인간 경험에 국한된다. 과학이 갖고 있는 이 같은 한계는 전인적인 인간을 관찰하는데 있어서 상상력을 억압하기 쉽다. 만약 인간이 다양한 화학적 요소들로 균형 있게 조직된 존재라면, 약을 효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내적인 화학적 균형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인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치유하기 위해서 과학은 인간을 화학적 요소들의 종합체가 아닌 인격적 존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요즈음 의학은 그 자체 안에서 인간의 전인성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인간 그 자신이 이해되지 못하면 인간의 질병이나 불운한 일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과학은 인간의 삶을 전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형이상학의 영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과학자는 결국 형이상학자가 된다. 그가 "왜?"라는 질문을 계속 할 때마다 그는 결국 의미와 목적이라는 궁극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철학자와 종교적 사상가와 만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인간의 종교적 견해도 의학적 견해와 같이 부분적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 종교에 대하여 너무 윤리적이나 초자연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인간이 갖는 전체성의 견지에서 볼 때 문제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의도하는 것은 종교나 의학의 한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신체의학과 종교사이의 공동 영역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시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는 여러 측면이 있다. 의학은 그 자체의 한계를 갖고 있으면서도 연구를 통하여 우리의 삶에 고유한 빛을 던져 주고 있다. 그러나, 삶에는 각기 다른 빛을 요구하는 여러 면들이 있다. 인간과 그의 건강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위하여 이 모든 면들은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 종교적 연구방법은 육체적 증상의 치유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전체성을 산출하는 영적 조화를 어떻게 성취하느냐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인간의 영적 본질에 대한 이해가 인간의 전인 건강에 부여하는 통찰력은 엄청나다.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는 인간이 건강하게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육체적 건강은 무너질 수 있지만 자기 의식과 영적 각성은 죽음의 마지막 순간을 패배의 시간이 아닌 확실한 신앙의 표현으로 만들어 준다. 신앙은 우리가 믿는 것이라기 보다는 존재하는 것이다. 신앙의 힘은 합리적인 사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완성에 이르는 길에 있다. 성숙한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위기의 시간에 미성숙하게 의존하거나 자기 소망을 투사시키게 하지 않는다. 반대로, 성숙한 신앙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자신의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삶과 죽음의 의미에 전적으로 직면하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삶 속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 M. 부버가 말하는 "나와 너(I & Thou)"의 인격적 관계를 성취할 수 있는 심오한 능력은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앙과 사랑 안에서 꾸준히 성장한 사람에게 죽음은 더 이상 공포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늘 있었고 앞으로도 함께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의 신비함을 믿는다.

자신의 신앙을 가족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나누면서 신앙 안에서 죽는 사람은 가장 의미 있는 봉사를 한 것이다. 신앙 안에서 죽는 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이다. 육체를 다루는 의사와 영혼을 다루는 사람들이 먼저 이러한 신앙을 스스로 발견하고 환자들과 의사 소통할 때, 그들은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한 일들을 두려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이 항상 도전적인 존재의 과정 속에서 성장할 때 오히려 자신의 신앙을 시험할 수 있는 기회로 볼 것이다.

Ⅴ. 죽는 자를 위한 상담에서 목회자의 문제와 과제

죽어 가는 환자를 위한 상담에서 종교적 가치가 강조된 것처럼 그 가치를 체현해야 하는 목회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죽어 가는 환자나 그의 가족들은 자주 영적인 상담자를 원하며, 목사가 지원해 주면 안정감을 느낀다. 이것은 죽음이 다가올 때, 사람들은 육체적 차원의 안정감보다는 의미와 가치를 추구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담당의사나 직계가족이 죽어 가는 환자로 둘러싼 일에 관여하듯이, 목사도 중요한 사람이다. 그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것은 의사나 환자의 가족에게 중요하다. 그러나, 목사는 시작부터 모순된 입장에 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인간이면서 거룩한 것을 증거해야 하고 자신에게도 불가사의한 것을 간파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유한성을 의식하면서 영원불멸한 것에 대하여 말해야 하며, 죽음의 의미에 대하여 추측할 뿐 답을 갖고 있지 않을 때에도 설명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하여 목사 자신이 갖고 있는 태도는 그가 죽어 가는 환자를 대하는 태도와 관련이 깊다. 죽음에 대하여 그가 느끼는 두려움, 고립감, 불안은 그가 죽어 가는 환자와 같이 일할 때 나타난다. 실제로, 많은 목회자들이 외롭고 내버려진 말기 환자를 대할 때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문제의 주요 원인은 그들 자신이 언젠가는 버림을 받고 외롭게 죽을 것이라는 무의식적 두려움이다. 목사들이 갖고 있던 깊은 무의식적 감정이 환자의 상태와 동일시됨으로써 죽어 가는 환자와 일하는 것이 어려워진 것이다.

M. 바워스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직업을 선택할 때 동기가 있으며 어린 시절에 충격적인 죽음의 경험을 한 목사들은 목회를 하면서 죽음을 극복하려고 한다. 그들은 장례식을 계속 담당하지만 그들 자신은 결코 죽지 않는다. 계속되는 상징적인 행동은 그들에게 감정적인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그 안정감은 상징적일 뿐 죽음의 실체는 그의 역할을 혼돈스럽게 하여 그의 존재에 위협을 주고 있다.

뛰어난 설교자와 능력 있는 행정가로 알려진 K목사는 자신의 회중을 보거나 병원에 있는 신자를 방문하는데 어려움을 느꼈다. 주일에 그는 회중 위의 높은 곳에다 눈을 맞추고 매우 학문적인 설교를 하였다. 그는 신도와의 만남을 회피하였고 특히, 병원은 그에게 힘든 곳이었다. 그에게 있어 아픈 사람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의 죽음을 목격했고, 고아원에서 성장하였으며 안정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책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는 자기만의 세계를 벗어나 사람들을 만날 때 위험을 느꼈다.

C라는 목사는 특히 성만찬식을 행할 때 고통스러워했다. 심리치료를 통하여 밝혀진 것은, 그가 어렸을 때 병리학자였던 그의 아버지가 아이를 돌볼 사람을 찾지 못했을 때 어린 아들을 실험실로 자주 데리고 갔었다는 것이다. 어린 소년은 본의 아니게 자기 아버지가 많은 동물을 갖고 생체실험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어떤 살인적인 의지 같은 것을 느꼈다. 그는 아버지가 싫어졌다. 그가 목회의 길을 택했을 때 그것은 그가 두려워했던 아버지가 아니라 훌륭한 아버지 즉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아들이 희생하였음을 강조하면서 성만찬식을 행할 때는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있었던 두려움이 표출되었다. 우리는 그가 죽어 가는 환자 옆에서 성례전을 베풀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목사들이 깊은 인간적 만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쓰는 가면들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목사가 그의 가면을 의식하고 던져 버릴 때만 죽어 가는 환자와 자유롭고 개방된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의식적 행사의 가면이 있다. 목사는 형식화된 기도와 전통적인 절차를 사용함으로써 깊은 인간적 만남을 회피할 수 있다. 그는 환자의 침대 곁에 서서 진정한 관심을 표현하기보다는 "우리 짧게 기도할까요?"라고 말하는 것이 습관화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말은 환자의 대화에 대한 욕구를 차단시킴으로써 환자를 더 외롭게 만드는데 목사는 자신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느끼면서 병실을 빨리 떠난다.

둘째, 특수한 종교적 언어의 가면이 있다. 전통적으로 쓰여 왔으나 개인적 의미를 갖지 못한 언어들은 대화의 통로가 아니라 장벽이 될 때가 많다. "은총"이라던가 "구속의 힘"같은 말들은 공중예배에서는 의미가 있으나, 환자에게는 그 말들의 깊은 뜻이 전달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러한 언어는 깊은 인간적 배려가 없으면 결코 전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목사에게 있어서 그 언어들은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편한 언어들이기 때문에 그 언어의 깊은 뜻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은 제기되지 않는다.

의사에게는 죽음이 그의 직업적 역할에 도전이 되는 것처럼 목사에게는 죽음이 그의 신앙에 도전이 된다. 다행히 자신들의 생각과 감정 속에서 죽음과 잘 타협하고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어 사는 목사들이 있다. 그들은 환자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 축복된 영적 공동체 안에서 마지막 순간들을 나누고 삶과 죽음에 대하여 의미를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대하는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고 그들의 감정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는 목사는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목사이다. 그는 삶 속에서 마음의 가면을 쓰거나 방어기제를 발전시킬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환자의 침상 옆에서 몇 시간이고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말을 하면서 위로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의식적 행사조차도 장벽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의사표현을 위한 접근방법이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직업의 성격이나 관계 때문에 죽어 가는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사람들조차 죽음에 대한 문화적 반감을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문화적 반감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죽어 가는 환자와 만날 때 감당해야 하는 긴장감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의 직업을 이용한다.

오늘날의 문화를 살펴보면 젊음, 건강, 아름다움 같은 것들이 마치 최고의 선이나 되는 것처럼 강조되고 있다. 은퇴하고 나이가 들어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특별한 양로원이나 실버타운이 사회로부터 떨어져 건설되고 있다. 그러나, 젊음에 문화적 프리미엄이 붙는 것과 동시에 의학의 발달로 수명이 길어지면서 노인들이 공동체의 부분이 되었다. 이러한 분리는 건강하지 못하다. 또한 육체적 미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는데 이것은 삶의 의미와 깊이를 부정하는 경과를 갖고 온다. 이러한 풍조는 사람들로 하여금 노화현상을 더 이상 감출 수 없을 때 자신을 지탱해 줄 적합한 가치 창조를 어렵게 만든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건강이 젊음의 상징일 뿐 현명하고 건강하게 늙어 간다는 의미를 배제한다면 건강의 개념은 가치와의 관계 속에서 정의되어야 한다.

분명히, 문화적 산물이라고 생각되는 죽는 자에 대한 태도는 윤리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기에, 직업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죽어 가는 사람에게 책임감을 갖은 사람들은 문화적 성향을 다시 검토하고 삶의 철학을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그들이 이러한 책임감에 정직하게 직면할 때 문화적 조류는 좀더 건강한 방향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죽어 가는 환자와 관련된 전문인들 사이에 창조적인 대화가 일어나야 한다. 마치 의사가 환자에 대한 자신의 책임이 신체적이며 생화학적인 관심 이상의 것을 요구함을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목사도 자신의 목회를 병들게 하는 개인적인 두려움에 직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환자뿐만 아니라 그와 같이 일하는 전문인들에게도 방해가 된다. 목사나 그 외의 전문인들은 죽어 가는 환자를 위하여 공통된 과제를 설정하고 좀 더 효과적으로 협력하기 위하여 그들 자신의 두려움과 실패에 직면할 필요가 있다.

Ⅵ. 결 론

죽어 가는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과 태도는 문화적 가치에 의하여 제약을 받기 쉽다. 현대 사회에서 생산성이나 젊음, 건강에 대한 지나친 찬미는 사람들로 하여금 죽어 가는 환자에게 필요한 치유적 상담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 다가올 때 절망과 공포 그리고 고립감속에서 자신과 싸우고 있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죽어 가는 환자를 전문적으로 돕는 사람들은 환자들이 죽음을 패배의 사건으로 경험하지 않고 비존재의 위협에도 파괴될 수 없는 자신의 삶의 고유한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삶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는 죽어 가는 환자들이 삶의 의미를 상실했을 때 죽음이 예측보다 빨리 진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에게는 육체적인 증상과 정신적 증상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 그렇기에, 죽는 자를 위한 상담에서 심리학적 그리고 영적 차원들이 탐구되고 적절하게 사용될 때 상담자의 환자에 대한 책임은 좀 더 완전하게 수행될 것이다.

특히, 죽어 가는 환자를 위한 상담에서 종교적 가치는 매우 의미 있다. 일반적으로 환자들은 상담을 통하여 전보다 회복되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효과적인 상담이 언제나 육체적 죽음으로부터의 회복을 촉진시키는 것은 아니다. 상담자는 환자로 하여금 죽음이 다가와도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 속에서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과거에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죽음 속에서 발견하고 성취함으로써 존재의 완성에 이르도록 도와야 한다. 즉, 치유과정의 목적은 환자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종교적 차원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할 만큼 확대되어야 한다. 여기에 바로 치유 팀에서 목회자의 역할이 갖는 고유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죽어 가는 환자를 위한 상담이 인간 존재가 갖는 전체성이라는 특성의 견지에서 보다 심도 있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상담자의 인격적 완성이 요구된다. 다양한 상담 기술에 앞서 상담자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환자와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상담가는 환자와 그의 문제에 대하여 진실된 태도로 직면하여 기본적 신뢰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는 환자의 분노나 허세 속에 감추어진 숨은 의미와 욕구까지도 볼 수 있는 깊은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죽어 가는 환자에게 필요한 삶의 의미를 전달할 만큼 신앙적인 확신이 있어야 한다. 또한 죽어 가는 환자를 돌보는 일에 관련된 전문인들, 즉 의사, 심리치료사, 정신의학자, 목회자, 상담자 등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전문 분야가 갖는 특성과 약점을 이해하고 창조적인 대화를 함으로써 죽어 가는 환자에게 보다 인간적이고 효과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 전문가들이 이러한 책임을 완수할 때, 죽어 가는 환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패배가 아닌 삶의 완성으로써 경험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