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례와 인간

- 가정 의례 -

 

활천 1999년 1월

 

지금까지 인간에 대한 여러 정의가 있어 왔다. 호모 파버, 호모 사피엔스, 호모 에코머니쿠스 등이 그렇다. 그런데 나는 인간을 호모 리츄얼(Homo Ritual)로 부르고싶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인간은 의례(성적 의례, sexual ritual)를 통해 만들어지고, 의례를 통해 출생(출산 준비와 출산 과정, 그리고 출산 후에 따른 행위들)하고, 의례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가고, 결국은 의례를 통해 생을 마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례(Ritual 혹은 Rite)란 무엇인가? 미국 일리노이 주 에반스턴(Evanston)에 있는 웨스턴 시베리 신학대학원의 리오(Leonel L. Mitchell) 교수는 의례를, “외면적 제스추어에 의해 상징화된 내면적 실재에 대한 인간의 관계 혹은 헌신”이라고 했다. 이 말은, 인간의 몸의 동작은 상징이 되고, 그 상징 안에는 인간의 깊은 내면적 욕구와 신비한 차원이 있다는 말이다. 그는 계속하여 말한다. “우리로 하여금 우주와 우리 자신의 삶 속에 숨어있는 의미를 발견케 하는 것이 의례이다.” 결국 의례는 우리와 우주를, 우리와 우리 자신을 연결시켜주는 통로이다. 리미널 스페이스-리미렐러티 시카고 신학대학원 심리학 교수이자 에반스톤 융 연구소장인 로버트 무어(Robert Moore)는 이 통로를 ‘컨테이너‘(Container), 혹은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 또는 ‘리미넬러티’(Liminality)라고 부른다. 인간은 이 컨테이너 혹은 리미널 스페이스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삶의 실재와 신비적 차원으로 연결될 뿐 아니라, 내면의 상처를 치유받으며 다른 사람들과 피조물과도 연결된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시행하는 성만찬도 종교적 의례라 할 수 있는데, 신자들은 이 성례(聖禮)를 통하여 성삼위 하나님과 모든 성도들과 연결되는 것이다. 콤스토크(W.R. Comstock)는, “제의 곧 의례는 종교가 활동하는 면이고, 또 종교의 내용에 깊은 의미와 활력을 주는 것이다. 마치 종교를 칼에 비유한다면 제의는 칼날 부분에 해당된다”라고 했다. 그만큼 제의는 인간의 평범한 삶뿐 아니라 종교적 영역에서도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는 이 리미널 스페이스를 거의 잃어버렸다. 치료의 힘뿐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이 힘있는 의례를 형식주의 내지는 미신과 결부시켜 교회의 예배와 성도들의 삶의 자리에서 추방해버렸다. 그 결과 힘이 없는 예배, 영혼을 치유하고 일깨우는 살아 있는 경험이 없는 무감동한 예배, 나름대로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영혼들을 내면적 실재와 이어주지 못하는 힘없는 예배의 카테고리에 성도들을 묵어놓고 있다. 물론 일 년에 한 두 차례 시행하는 성만찬을 제외하고는. 로버트 무어는 그의 책 『왕, 전사, 메지션, 러브』(King, Worrior, Magician, Lover)에서 “개신교 종교개혁 운동과 계몽주의는 의례과정을 희석시켜 놓음으로써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병들게 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계속 말한다. “일단 성스럽고 삶을 변화시키는 과정으로서의 의례가 무시당하고 희석되면, 남는 것이라곤 빅터 터너(Victor Turner)가 말한 순수한 의식(意識)의 변화에 필수적인 힘을 지니지 못한 행사가 남을 뿐이다. 우리는 삶을 깊게 하고 성숙시키고 고양하는 과정을 우리 자신과 결별시킨다.” 톰 드라이버(Tom Driver)는 그의 저서 『의례의 힘』(The Magic of Ritual )에서, “의례는 인간의 운명과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다”고 했다. “의례를 잃어버리는 것은 길을 잃는 것이며, 존재의 이유와 가치를 잃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례는 갱신된 삶(renewed life)에 필수적이다. 의례가 중단된 곳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부족하지만 의례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간략하게 논의했다. 그러면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의례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 의례가 의미하는 바를 우선 구약성경의 예를 들어 살펴보겠다. 성경이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의례 구약성경에 나타난 가정 축복의례(ritual of family blessing)는 오늘 우리 시대와 가정과 교회에 중대한 의미와 도전을 주는데, 특히 가정에 대해 그렇다. 가정 축복의례는 오늘날 가정과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 해결을 위한 명쾌한 대답이다. 그러면 창세기 27:18-29 말씀을 근거로 축복의례에 대해 간략히 얘기하겠다. 더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적용을 원한다면, 게리 스몰리(Gary Smolly)가 쓴 『축복』(The Blessing)이란 책과 필자가 번역한 책 『하루에 한 번씩 자녀를 축복하라』(The Family Blessing, 두란노)와 『상처난 아버지와의 관계회복』(The Search for Lost fathering, 세복)을 참조하기 바란다. 창세기 27장은 가정 의례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얼만큼의 치유가 일어나는지에 대한 생생한 예이다.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건 우리 가정에서 자녀들이 부모로부터의 축복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녀들의 필요와 욕구를 채워주고 그들을 전인으로 성장시키려 한다면, 아버지(만일 아버지가 없다면 어머니)는 자녀를 축복하는 사역 혹은 의례를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본문의 내용은 아버지 이삭이 아들 야곱을 축복하는 내용과, 축복을 잃은 에서의 괴로운 부르짖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로, 가정 축복의례의 제1요소는 ‘의미 있는 만짐 혹은 접촉’(meaningful touch)이다(창 27:18-27). 여기서 아버지는 아들을 “만지려 하고” “만지며” “입맞춘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만짐과 접촉(스킨쉽)은 대단히 중요하다. 만짐은 자녀들을 정서적으로 강화하고 자존감(self-esteem)을 갖게 할 뿐 아니라, 자신을 긍정하고 다른 사람과 세계를 긍정하게 하는 힘을 지닌다. 또한 성인기에 들어서서도 통합된 정체감(identity)을 발달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뿐 아니라 모든 환경을 수용하게 한다. 더 나아가 만짐의 축복을 받는 동안, 육체의 치유도 일어난다. UCLA 대학의 임상연구 보고서는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베타 엔돌핀의 분비와 산소의 공급으로 인한 헤모그로빈의 수치 증가는 엄청난 치유를 가져온다(『뇌내혁명』을 참조하라). 당신에게로 어린아이들이 나아왔을 때에, 그들을 막는 제자들을 꾸중하시고 하나씩 “안고” “안수하신” 예수님의 일을 생각해 보라(막 10:13-16). 또한 문둥이들이 왔을 적에 먼저 낫게 하신 다음 만지지 않고, 먼저 “만진” 다음 말씀으로 낫게 하신 예수님의 모범을 보라(마 8:1-4). 둘째로, ‘말로써 하는 축복’이다(27 하반절).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잠언 18:21은 삶과 죽음이 혀의 권세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12:14은 사람이 입의 열매로 복록을 누린다고 말한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약 3:6). 부모가 사용하는 말이 자녀를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복되게도 하도, 저주의 삶으로 이끌기도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이삭이 아들 야곱에게 말로써 하는 축복 의례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함부로 내뱉는 말이 비수가 되어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나머지 평생 그 영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는가? 그래서 성경은, “부모들아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엡 6:4)고, 즉 말로써 상처를 입히지 말라고 하지 않는가. “너를 사랑한다”는 언어구사는 자녀들에게 인정(認定)과 안정감, 소망을 주며, 책임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한다. 그래서 혹자는 “자녀들의 감정의 그릇을 사랑으로 채워라”고 말하기도 한다. 셋째로, ‘높은 가치의 부여’이다(28절).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아들이 이런 하나님의 복을 받을 만한 가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헬라어로 “축복하다”는 말은 “유로게오”인데, 이는 가치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바보” “멍청이” “등신” 등의 말은 자녀를 간접적으로 살해하는 행위이다. 비교는 자녀를 죽인다. 자식은 부모의 연장(延長)이나 소유가 아니라 여호와의 기업이다. 자녀를 인정함으로써, 남편이나 아내를 인정하고 가치를 긍정해 줌으로써 우리 가정은 행복을 발견하고 누릴 수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넷째로, ‘위대한 미래를 그려주는 것’이다(29절). “만민이 너를 섬기고... 형제들의 주가 되고...” 백지장 같은 마음에 위대한 그림을 그려주면 닮아가기 마련이다. 나다니엘 호돈의 글, ‘큰 바위 얼굴’을 기억하길 바란다. 끝으로, ‘적극적 헌신’이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남편은 아내를 위해, 아내는 남편을 위해 서로 협력하고 헌신한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행복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축복 의례를 통해 이뤄진다. 지금까지 간략하나마 의례에 대해 그리고 그 구체적인 예에 대해 논했다. 만일 지면이 허락된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이론뿐 아니라 실제적인 사례와 임상연구 결과를 가지고 우리의 일상 생활 및 삶의 전영역, 특히 교회와 관련된 의례들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 교회 지도자, 그리고 건강한 가정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은 의례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것들을 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