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례와 인간

활천 1999년 3월

 

 

들어가는 말

지난호(1월호)에서는, 인간은 의례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는 것, 즉 인간은 의례를 통해 더욱 인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언급했다. 그리고 가정에서 행할 수 있는 의례 가운데 하나인 가정축복사역을 개괄하였다. 이번 글에서는 좀더 심층적으로 인간과 의례의 관계를 조명하려고 했다. 그런 다음 교회 예전을 다루고자 한다.

 

세계의 중심인 에덴과 예루살렘

인간에게는 엑시스 문화(Axis Mundi) 혹은 네이벌(navel)이 있어야 한다. 엑시스 문화는 ‘중심’, 네이벌은 ‘배꼽’이란 뜻이다. 인간을 흔히 우주의 중심 혹은 배꼽이라 말하는데, 진정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되려 한다면 자신의 내부에 중심(Axis Mundi)이 있을 때 가능하다. 이는 창세기와 여러 민족의 신화 혹은 제의에서 드러난다.

에덴은 우주의 중심이다. 그리고 에덴동산의 중심에는 생명나무가 서 있고 거기서 네 강이 발원하여 흐른다. 네 강은 우주의 네 모퉁이를 상징한다. 최초의 인간은 이 생명목(生命木)의 실과를 먹고서 영생할 수 있었다. 환언하면 진정한 인간, 진정한 자기가 될 수 있었다. 로버트 무어(Robert Moore)는 이를 ‘충만한 인간’이라고 했다. 그런데 타락 이후, 인간은 이 생명목에 이를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불타는 화염검으로 이 생명목에 이르는 길을 차단하였기 때문이다. 낙원과 생명목을 상실한 인간은 방황의 삶이란 굴레 속에 들어갔다. 인간이 겪는 실존적인 불안과 그에 따른 고통은 우주의 중심인 에덴과 생명목 상실에 뿌리를 두고 있고, 인간은 에덴 콤플렉스(Eden Complex)에 시달리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의 몰락 후, 다윗은 시온과 예루살렘을 성시화(聖市化)하여 하나님의 궤를 안치했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에 모심으로써 예루살렘을 세계와 우주의 ‘엑시스 문디’로 삼은 것이다. 그럴 때, 다윗은 언약궤 앞에서 벌거벗고 황홀경에 사로잡혀 춤출 수 있었다(삼하 6:13-16). 이제 인간의 영을 되살리고 풍부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생명수는 예루살렘에서 흘러내려 세계로 흐른다(사 2:1-5).

멀치아 일리아데(Mircea Eliade)는 그의 책 밧영원한 회귀의 신화방(The Myth of the eternal return)에서 “기독교인들에게 골고다는 세계의 중심이었다. 왜냐하면 골고다는 우주적 산의 정점이었고, 동시에 아담이 창조되고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세주의 피는 아담의 해골 위에 떨어졌고 십자가 발자락에 묻혀 그를 구속하였다. 골고다가 세계의 중심에 자리했다는 믿음은 서방 기독교인들의 전승에 보존되었다”고 말한다. 사실 골고다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순종의 제물 이삭을 데리고 올라간 곳, 그래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견한 곳, 마침내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사람과 그 후예를 영원히 구속한 곳, 세계의 중심이었다.

이제 잠시 눈을 돌려, 성경 밖의 현상을 보는 일이 도움이 되겠다. 여러 종교들은 나름대로의 종교현상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특이한 현상은 보편적으로 ‘우주목’의 신화들과 그것들을 둘러싼 제의들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것들에 관하여 상세히 논술할 필요는 없겠으나, 한 가지 강조할 것은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의 엑시스 문디를 찾고 있고,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보편적으로 자신의 내부에 엑시스 문디를 필요로 한다.

에덴에서 깨어진 인간은 예루살렘에서 복원될 수 있다. 법궤 앞에서 추는 다윗의 춤은 깨어짐에서 통합으로 변화된 복원된 인간의 모형이다. 영광의 주님이 가져오시는 ‘새 예루살렘’(계 21:1-4)과 생명목, 그리고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즐기는 쾌락의 모형이다. 다윗의 춤은 복원된 인간의 환희의 춤이며, ‘춤의 왕’이신 예수님의 모형이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시 30:11).

에덴과 예루살렘은 우주의 ‘엑시스 문디’로서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곳이지만 인간은 또한 자신의 내부에 ‘엑시스 문디’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엑시스 문디’를 가질 때 비로소 자신의 임재를 가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임재를 찾는 길을 의례 혹은 제의라 한다. 의례 혹은 제의는 ‘엑시스 문디’에 이르는 통과의례이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풍부하고도 다원적인 의례를 제공해야 한다.

교회는 성도들의 존재와 삶의 ‘엑세스 문디’가 되며 또 되어주어야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성도들의 존재 내부에 자기 임재를 경험하며 통전적인 삶(wholistic life)을 살게 해주어야 하므로 다원적인 의례를 제공해 주어야 할 사명을 안고 있다. 복음의 내적 의미와의 관련성 속에서의 삶,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의 삶은 ‘예전적인 삶’이라는 요소를 필요로 한다. 이것을 계란에 비유한다면, 전자는 계란의 노른자요, 후자는 계란의 흰자위와 같다. 두 가지가 공존할 때 비로소 계란은 생명력을 갖는다.

창조와 타락과 구속의 신학적 패러다임은 교회의 삶에서 오로지 케리그마를 강조해 왔다. 다시 말해 회개와 믿음, 구원 그리고 헌신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총체로 여기면서 예배와 교회의 삶을 이런 패러다임에 묶어 놓았다. 물론 이것이 소홀히 여겨지거나 차선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되지만, 이 패러다임은 예전적인 교회와 그리소도인의 삶이란 패러다임으로 보충되어야 한다고 본다. 어떤 면에서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말하고 있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짧은 지면을 통하여 앞으로 논술할 교회의 예전적인 삶의 패러다임의 이론적 기초를 놓았다. 다음 글에서는 예전의 알맹이라 할 수 있는 성찬 이론과 간략한 역사, 그리고 현대적 적용과 그것을 통한 교회와 성도의 변화된 통전적인 삶을 논하고자 한다. 최근에 라마 예식서에 대한 소개와 간단한 적용이 여러 교회에서 부분적으로 시행되고 있지만 많이 부족한 실정이다. 앞으로 다룰 내용을 통해 많은 목회자와 평신도의 성례전에 대한 안목이 달라지고, 현재 시행하고 있는 예전에 변화와 성숙이 이뤄지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