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과 반(anti)성찬

 

활천 1999년 5월


들어가는 말

지난 글에서 성찬은 우리와 하나님, 다른 형제 자매들, 그리고 자연과 결속시켜주는 가장 힘있는 의례(혹은 성례)라고 주장했다. 고통과 소외와 외로움 ― 인간성숙에 필요한 고독(solitude)과 반대 되며, 혼자 있기 두려워 아무에게나 매달리고자 하는 심리적 불안 ― 을 주는 분리 혹은 깨어짐은 마귀가 사용하는 비인간화의 수단 또는 전술이다. 성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하나님 형상의 회복) 풍성케 하기 위해, 즉 관계의 존재(the relational self)를 만 드시기 위해 오셨다(요 10:10). 그러므로 결속 혹은 연결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의 핵심이 자 성찬의 알맹이이며 그리스도교 영성의 본질이다. 성찬을 통한 온전한 결속(wholistic connectedness)은 분리와 소외와 외로움의 고통을 치유하는 전인(全人)을 위한 전거이다.

섹시즘(sexism)은 반(反)성찬 이데올로기이다

성경은 말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그리스도 예수는 인종과 성과 계급의 경계를 철폐하신다는 말 씀이다. 성경은 말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 고 …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8). 예수 그리스도는 이 방인과 성민(聖民)을 구분하는 담을 허시고, 여자와 남자의 경계를 없애시고 모두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 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 의 육체니라”(히 10:19-20). 죄 사함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은 후사들은 성, 인종, 계급차별 없이 휘장 가운데로 난 길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갈 제사장들이다. 성찬은 이 사건을 재현하는 의례과정(ritual process)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성차별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사역,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한정하고 왜곡하는 반신적 또는 모독 행위이다. 한 몸과 피에 대한 참여와 동시에 이뤄지는 성차별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성차별 (Sexism)은 반(反)성찬 이데올로기이다.

반성찬 이데올로기는 교회 안의 여성들의 한(恨)을 심화시키며 내면적으로 여성들을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에서 소외시킨다. 유교의 가치관과 전통에 의해 역사적으로 억압되어온 한국 여성들은 한의 소유자들이다. 엔드류 성 박(Andrew Sung Park)은 그의 저서 The wounded heart of God (상처입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한은 정신 신체의 고통으로서 비애, 분노, 적대감정, 그리고 무력 감을 낳는다”고 말한다. 한국 여성뿐 아니라 한국교회 여성들도 섹시즘의 망령에 희생되고 있다. 그는 몰트만(Moltman)의 “희망의 신학”(Theology of hope)을 인용하면서, 한국교회는 ‘신앙의 불가분리적 동반자’(inseparable companion of faith)라는 희망을 가질 것을 권고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지배와 피지배, 우월과 열등으로 특성화된 성의 장벽을 초월하여 신앙의 동반자 가 될 것을 희망의 실체로 제시하고 있다.

차별화 이데올로기는 건축양식으로 나타난다

미 일리노이주 에반스톤의 게렛신학대학원의 은퇴교수인 에쉬브룩(J. Ashbrook)은 그의 저서 The Brain & Belief (뇌와 신앙)에서 성차별을 위시한 모든 차별주의 이데올로기는 인간 뇌의 진화론 적 발달과 관련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는 건축형태로 나타난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본 모습을 건축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건축한 모습이다. 우리가 짓는 건축 에 의해서 우리는 비인격적인 환경을 의미가 충만한 세상으로 변형시킨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뇌가 세계를 다루는 두 가지 기본 전략을 반영하는 건축양식은 돔(the dome) 과 뾰족탑(the Spire)이다. 이 두 양식은 원형적이며 우리의 궁극적 관심의 궁극을 드러낸다. 성소 피아 사원 같은 돔 형식의 건축은 사면팔방에 들어가는 문이 있다. 이 건축은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은 포용한다. 수많은 입구는 사회의 개방성을 전달하며 인간본성의 개방적 특성을 나타낸다. 여기에 소속된 모든 사람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 참여할 수 있다. 원형 천정 중심에 모자이크 되어 있는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하나의 돔은 완전한 실재를 표현한다. 삶은 끊임없이 흐르는 과정이며, 하나님께로 상승하며 하나님과 함께 되 는 삶이다. 원형적 돔의 관계전략은 다양성과 포용성이다. 돔과 같은 정신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과의 연결성을 찾도록 한다. 그런 의미에서 비잔틴문화는 우리에게 삶의 의미의 원형적 심상을 제공한다.

그러나 에쉬브룩에 의하면, 중세의 뾰족탑 형식의 교회는 권위의 소재가 제단에 있다. 그리고 하 나님은 오로지 제단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래서 권위는 교황과 사제에게 부여되므로 평신도, 특히 여성들은 제단에 접근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가부장적 또는 권위주의적 인식론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원론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고, 이원론적 사고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걸프(gulf)을 창조한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의 연대 또는 결속은 파괴되고 만다.

섹시스트(Sexist)인 목회자는 섹시스트적 목회발상으로 목회의 발목을 잡히고 있다

성찬 집례자인 목회자 자신이 성차별주의자로서 성차별적인 목회구조를 방관 혹은 조장함으로써 전인을 지향하는 통전적인 목회를 실천하지 못하고 있고, 회중의 성차별주의적 사고 성향은 목회 자의 통전적 목회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전인을 지향하는 치료공동체(therapeutic community)인 교회는 치료보다는 차별과 억압의 심원화로 여성들의 존엄성과 가치를 떨어뜨릴 뿐 아니라 그들 의 한과 한의 고통, 즉 비애, 분개, 적대감, 무력감을 심화시켜 결국 목회적 에너지 상실이란 늪에 빠져 있다.

나가는말

우리는 모든 사람들, 특히 여성을 차별화에서 해방시킬 과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전인 목회를 위 한 큰 과제이다. 아니, 우리는 거룩한 성찬을 반(Anti)성찬 이데올로기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왜냐 하면 그 어떤 차별화든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부활에 대한 안티테제이며, 성찬에 대한 근본 적 오류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해 만물을 새롭게 통일시키시며 성찬을 통해 모든 바 운더리를 폐하시며 우리 모두를 하나로 연대시키신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완전한 연대를 창조하시 는 측면에서 그리스도 교회의 사역의 원형이자 목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