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의례

- 입사식을 위한 전거 -

활천 1999년 6월

 


들어가는 말

기독교 서클 안에 있는 우리는, ‘신화’(myth) 하면 곧 허무맹랑한 이야기 또는 쓸데없는 불경 스런 이야기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러나 깊이 숙고하면 신화를 갖지 않은 사람은 아 무도 없다. 왜냐하면 한 개인의 삶은 신화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출생과 성장과정, 교 육, 그리고 그 이전의 출생 배경과 배경의 역사 모두는 한데 어울려 한 개인의 신화를 창조한다. 신화의 상실은 곧 의미 상실이며, 삶의 의미의 상실은 신화의 상실이다.

그런데 개인의 신화는 사회적 신화와 연결되어 있고, 개인과 사회의 총체적 신화는 중대한 기능을 지닌다. 그 기능에 대해 요셉 캠벨(Joseph Campbell)은 그의 책 밧신화의 힘방(The Power of Myth)에서 말한다.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로서 심오한 원리를 통하여 중심, 또는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려는 인간정신의 욕구를 반영하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 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

인간은 신화를 창조함으로써 우주와 우주 배후를 설명하려 하고, 자신과 자신의 배후, 곧 의미를 해석하려고 하며, 자신 내부의 중심(axis mundi) 혹은 자기임재(self-presence)에 이르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화와 신화가 갖는 기능들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거기에 관심을 쏟아야 할 것으로 믿는다. 특히 개인의 내면적 갱신 혹은 변화와 전인에의 삶뿐 아니라 그 를 위한 입사식(initiation)에 관심을 갖는 통찰력 있는 목회자라면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 이라 믿는다.

신화와 의례

신화의 역사에 관하여 패리(Perry)는 그의 책 밧사방의 왕방(Lord of the Four Quarter )에서 다 음과 같이 설명한다.

“고대에는 한 사회가, 신화의 세계가 인간 공동체의 세계와 만나고 그 속에 들어가는 힘있는 초 점을 확립하는 것이 전형적인 일이었다. 이 초점은 우주론적인 체계의 중심(the cosmological system’s center)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는데, 그 체계 안의 모든 차원들은 상호 영향을 주었고 그 체계 안에서 인간은 신성에 도달하고 신성은 인간 안에 들어갔다. 이 세계들의 상호 침입의 중 심 채널은 신성한 왕(the sacred king)의 모습으로 인격화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인간과 신 사이 의 유일한 중재자였지만 이 기능은 그의 제사장적 대표자들에게 위임될 수 있었다. 왕적 아버지 (the royal father)로서의 왕은 모든 아버지 모습의 정점이었다. 역사 안에 있는 이 왕적 아버지는 백성들의 유일한 목자일 뿐 아니라 남성적 원리(the masculine principle)에 포함된 모든 특성을 그의 인격 안에 집중시키는 마술적 혹은 초자연적인 힘이 부여된 기능을 수행했다. 이 왕은 삶의 힘 그 자체의 중재자, 풍요와 생식력의 수여자, 무질서를 벌하고 순종을 격려하는 자였다. 그러므 로 그는 신적인 존재였다.”

특히 이 신적 존재의 모습은 여느 종족 집단의 제사장(the magician, 메지션)에게서 반영된다. 이 메지션은 의례를 통해 신화를 표현한다(곧 의례는 신화의 표현이다). 고대 입사식과 관련해서 말 한다면, 한 공동체의 제사장은 특정한 절차의 의례를 통해 ― 개인의 상징적 죽음과 부활 ― 정신 적 인격적으로 한 개인을 공동체에 결속(편입)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한 개인 안에 있는 그림자(shadow), 파괴적 본능, 이기심, 유아성(childishness) 등은 소멸되고, 이제부터는 삶 (livedness)과 질서(order), 그리고 창조성(creativity)의 통합적 인격으로 갱신된다. 더 이상 죽음과 파괴 본능의 지배를 받지 않고 공동체 내에서 삶의 질과 가치를 고양시키는 인간은 우주의 중심 일 뿐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중심, 곧 영적 잠재력의 핵심에 이르게 한다.

고대 여러 문명의 신화와 옛날 이야기들을 섭렵하면서 건강한 남성상의 원형을 복원하려는 로버 트 블라이(Robert Bly)는 그의 저서 밧남자만의 고독방(Iron John)에서 갱신된 남성상을 야성인 ‘철의 요한’(iron John)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가 이 책에서 던지는 메시지는 신화의 와해는 남 성상의 와해로 이어지고, 남성상의 와해는 개개인 상(像)의 와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진정한 남 성인 철의 요한은 모든 남성의 심층 안에 누워 있다. 용기를 가지고 고통과 불안이 따르는 의례를 통해 이 야성인 철의 한스를 만날 때 비로소 남성은 진정한 남성이 된다. 그리고 고통과 상징적 죽음을 거치는 의례를 이끌어 줄 진정한 아버지, 신화적 왕이 없는 가정과 사회는 불행하다.

입사의례를 상실한 불행한 시대

현대사회의 어느 구석을 살펴보아도 ― 소위 현재도 존속하고 있는 미개사회를 제외하고는 ― 개 인의 변화와 성숙의 전거인 입사의례를 행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있다고 하면(?) 신입생들을 골 탕먹이는 대학 선배들의 무분별하고 저급한 행위들, 청소년들의 폭력 서클 안에서 자행되는 가학 적 변태행위들만이 산재할 뿐이다. 이런 현상들이 왜 일어나는지 그 이유를 알기라도 하는가? 인 간 속에 내재된 기본 욕구인 신화적인 왕, ‘철의 한스’ 같은 존재가 가정과 사회에 부재하기 때 문이다. 가정과 사회, 심지어는 인간을 다루는 교회 안에서도 정당한 의례가 시행되기는커녕 관심 조차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의례’라는 말만 나와도 하잘것없는 것 혹은 거추장스런 것으로 쉽 게 치부해 버리는 거룩한 경건(?)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핵심에 놓여 있는 타고난 잠재력은 적절한 환경이 없으면 실현될 수 없다”는 위니캇 (D. Winnicott)의 말은 적절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가 말한 적절한 환경을 ‘입사를 위한 의례 과정’으로 재해석하고 싶다. 특히 청소년기에 에이지 그룹은 그 연령기에 적합한 환경 울타리와 공간이 주어져야 하는데, 그것은 통제만을 위한 울타리가 아니라 위기의 초월 또는 극복을 위한 울타리로서의 의례일 것이다.

목회자여! 신성한 왕, 메지션 혹은 철의 한스가 되라!

전인을 위한 통전적인 목회를 지향하는 목회자라면 그 누구보다도 인간의 내면과 그 내면의 욕구 를 이해하고 그것의 충족을 위한 대안을 강구하고 진지한 자세를 가지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신화 가 무엇인지,왜 인간은 신화를 필요로 하는지, 그리고 신화와 관련된 의례를 탐구하고 그것들이 주는 통찰력과 결과에 대해 겸허한 자세를 취해야 할 줄 안다. 그리고 목회자 자신이 의례를 통해 신화와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신성한 왕, 메지션 또는 철의 한스로 거듭나야(?) 한다. 왜냐하면 그 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신화를 찾는 인간들이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간략하나마 입사를 위한 의례과정을 위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다음 글에서는 구체 적인 입사의례 모델과 세례(baptism)와의 연계를 시도할 것이다. 지난번 글에서도 밝혔거니와 목 회자들은 돔(dome)형식 같은 관계전략, 곧 다양성과 개방성을 위해 문을 활짝 열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에야 목회가 시들지 않고 퇴색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글을 통해 성경적인 입 사의례과정을 개발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