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례와 내면의 성숙(1)

 

활천 1999년 10월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다. 하루는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 메리를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하는 소리를 들은 남자는 “나 존이야!”라고 대답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그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나 존이야!”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그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나 메리야!” 그때에야 비로소 문이 열렸다.

 

전인은 간격을 초월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전인(wholeness)을 지향한다. 전인은 하나님과 연합하며 이웃과 자연과 연대하는 삶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과 나 자신 사이에 간격이 없는 삶을 지향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원론은 간격을 만들어 놓았지만, 전인은 이 간격의 극복 또는 초월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그의 논문 『두 종류의 의』(Two Kinds of Righteousness)에서 말한, 신자가 믿음으로 얻는 “밖에서 온 의”(alien righteousness) 또는 “수동적 의”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얻는 “타당한 의”(proper righteousness) ― 그는 이 두 가지가 없으면 그 또는 그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했다 ― 는 자연에 대한 사랑의 차원을 빠뜨리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숙도는 그 또는 그녀의 삶에 간격이 있는가 없는가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거짓 하나님을 갖고, 거짓된 자기 체계 안에 안주하면서 마치 구원얻은 백성인 것처럼 행세한다면 이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한계 상황을 넓히기 위해 기계론적으로 요청하는 벽장 속의 하나님”(본회퍼)과 관련을 맺고 있는 현실과 그런 신앙 형태를 부추기는 여러 집회를 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슬픔과 좌절을 느끼는가? 이론적인 유신론자들은 많은데 교회 밖에 나가면 예배와 삶 사이에 간격이 있는 실천적 무신론자들이 무수하지는 않는가? 여기에는 신자도 책임이 있고, 더더욱 목회자들에게 책임이 있다.

 

묵상의례는 내면을 성숙시킨다

묵상(meditatio)은 신자의 내면을 변화시키고 성숙시키는 힘 있는 의례이다. 우리는 믿음의 선조 이삭이 ‘묵상하는 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창 24:63). 그리고 묵상을 중심으로 하는 그의 삶이 전인의 삶인 것을 알고 있다(26:12 이하 기사). 시편 1편과 예레미아 17:7-8은 묵상하는 자를 ‘복 있는 자’로 정의하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은 외면적인 물질적 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먼저 내면의 복이며 내면의 변화와 성숙이다. 그러면 내면의 변화와 성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묵상을 통해 먼저 우리 자신을 비운다. 이 비움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kenosis)과 자기 비하이다(빌 2:5-11. 초대 그리스도교의 예수 그리스도 찬송시).

로핑크는 그의 저서 밧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하셨는가방에서 교회를 ‘대조사회’(kontrastgesellshaft)라고 했다. 사회의 특징은 지배구조이지만 교회의 특징, 신자의 삶의 특징은 비움과 섬김이다.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자기 확장은 거짓 믿음이요 거짓 영성이다.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주변 세계를 재조직하려는 동기와 욕망은 거짓 자기체계이며, 그것을 위해 봉사하는 하나님 또는 이용당하는 하나님은 거짓 하나님이다. 반대로 예수님의 케노시스, 예수님의 비움을 닮는 신자는 참된 믿음, 참 영성의 소유자이며, 묵상은 자기 비움의 방법이다. 묵상은 자기를 과대 확장하고 병리적인 나르시시즘에 빠져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에 간격을 만들어내는 ‘메시야 콤플렉스’(messiah complex), 자신을 항상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두거나 우선 순위로 삼는 ‘강탈 신드롬’(usurpation syndrome)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한다. 사실 이러한 치유 또는 변화는 묵상 자체의 결과라기보다는 묵상 가운데 임재하시는 성령의 역사이다. 묵상하는 장소는 신성한 곳이며, 자기 비움으로부터 시작하여 변화와 성숙이 이루어지는 ‘컨테이너’(container) 혹은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이다. 성령은 이 스페이스를 통하여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새 창조의 사역을 행하신다.

 

묵상의례는 기계화된 영성을 고친다

따라서 묵상 의례가 없는 개인 및 신앙공동체의 영성은 쉽게 기계화된 영성이 될 수 있다. 분주함, 일, 일의 양, 그리고 봉사와 헌금의 액수가 신앙의 척도가 된 기계화된 영성은 하나님 나라와 무관하다. 케노시스 - 자기 비움이 없는 기계화된 영성은 그것이 신자 개인의 생활이든 목회이든, 하나님 나라와 무관한 병리적 나르시시즘(pathological narcissism)일 뿐이다. 그 숱한 예배, 설교, 행사가 개인의 병리적 나르시시즘과 강탈 신드롬을 강화할 뿐이라면 그것들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자기 비움으로부터 시작되는 믿음의 영성은 자기 확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는(christ-ening) 영성이며, 개인적 차원이든 공동체적 차원이든 그릇된 기계화된 영성을 고치는 힘을 지니고 있다.

 

묵상의례는 기도보다 강하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말하지만, 흔히 기도는 독백(Monologue)이거나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욕구 주장이나 강압인 것을 경험한다. 말은 많이 하지만 자신의 말을 중단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있는가? 우리가 만일 누군가와 만나서 상대편의 이야기는 일체 듣지 않고 나의 이야기만 말하고 “알아들었니?” 한다면, 그게 대화일 수 있는가? 상대편은 심한 불쾌감 내지는 모멸감을 갖고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이다. 묵상의례는 내가 말하는 대신 나를 비우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집중한다. 그래서 묵상을 ‘센터링 프레어’(centering prayer)라고 한다.

 

나가는 말

다음에 계속되는 글에서는 묵상하는 법, 묵상의 차원들 그리고 묵상의 결과들을 다룰 뿐 아니라, 묵상보다 더 깊은 관상(contemplation)에 대해 다룰 것이다. 진정한 신앙생활, 진정한 목회를 위해서는 묵상과 관상의례가 반드시 필요하다. 묵상과 관상의례는 전인으로 향하는 완전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