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례와 내면의 성숙(2)

 

활천 1999년 11월

 

 

들어가는 말

어느 그리스도교 문헌에 “태초에 침묵(silence)이 있었다”는 글이 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침묵은 결코 나태나 무능이나 정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침묵은 그 내면에 엄청난 에너지와 잠재력을 갖고 있다. 침묵하고 계시던 하나님께서 창조 계획을 수립하신 후 “말씀하심으로써”(창 1:1) 비로소 창조세계가 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독 속의 침묵

나는 간혹 홀로 있는 고독한 장소를 찾는다. “당신 자신을 발견하려거든 고독한 침묵의 장소를 찾으라”는 말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핀 산자락 어느 모퉁이나, 고스랑거리며 낙엽이 뒹구는 언덕이나 정원, 솔바람 소리 잦은 치악산 어느 골짜기를 찾아 거기 홀로 앉아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러면 자연의 소리를 통해 신의 음성이 들려온다. 토마스 머톤(Thomas Merton)은 “복음의 말씀을 듣는 귀는 어떤 내적인 고독과 침묵 속에 잠기지 않으면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밧고독 속의 명상방 p.67)고 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고독한 곳을 습관적으로 찾으셨다(눅 4:42 등).

우리는 한적한 곳, 곧 고독한 장소를 꺼려하고 회피하는 성향이 있다. 홀로 있음을 자기발견의 고독(solitude)으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외로움(aloneness)에서 도피하여 군중이나 일, 혹은 어떤 유희에 매어달리려고 한다. 그러나 남는 것은 더 깊은 허전함과 무의미성이다. 그러나 홀로 있는 고독한 곳과 광야(미드바르)는 하나님의 말씀(다바르)이 들려오는 곳이며, ‘로뎀’나무 밑은 사명을 새롭게 하는 곳(왕상 19:4)이다.

나를 발견하기 위해,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해 떠나는 내면으로의 여정(Spiritual journey)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고독한 곳에서의 침묵을 통해 우리의 영혼은 비로소 되살아난다.

 

묵상하는 법

묵상(meditatio)에는 두 차원이 있다. 한 가지는 마음에 스며드는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든지, 해변가나 조용한 숲속을 거닌다든지 뭔가 일상에서 벗어나 한가로이 자신을 비우는 것과, 영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에 자신의 마음을 여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신성한 독서인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하루 종일” 묵상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이유 때문이며(시 119:97),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묵상은 지난 글에서 밝힌 대로 기도이다. 하나님께 마음을 여는 궁극적 태도로 “하나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를 말하는 센터링 기도의 한 과정이다(이 기도는 우리의 각성을 우리 존재의 영적 차원으로 열어준다). 묵상은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서는 한 과정이다.

신성한 독서와 말씀묵상에 이어 드리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기도를 ‘오라티오’(oratio)라 하는데, 이 세 단계 전체를 ‘센터링 기도’(centering prayer)라고 한다. 센터링 기도는 내면의 침묵을 갖고서 하는 관상 기도(contemplative prayer)를 위한 준비과정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기도에서는 한 단어 혹은 한 두 구절의 기도문을 선택한다. 예를 들면 “주님,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나님, 주 그리스도시여, 아바(Abba), 아멘 등이 사용될 수 있다. 이 신성한 단어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동의의 상징이다.

 

관상에 이르는 길

컨템프라치오(contemplatio), 곧 관상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을 수납하는 것이며,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임재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을 하나님께로 열고 침묵 가운데 하나님께 애정을 드리는 기도를 하는 과정에, 우리의 의식은 끊임없이 활동하며 하나님의 임재에 이르는 것을 방해한다. 우리의 의식은 기억들, 즉 좋은 기억, 나쁜 기억, 상처입은 기억들, 온갖 상상력을 떠올리는데 이때의 상상력들 가운데 일부는 사탄이 더해주는 재료일 수 있다. 또한 주변의 소음들이 관상에 이르는 길을 방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의식의 과정에 떠오르는 기억이나 상상력, 또는 주변의 소음에 집중하거나 붙잡히지 말고, 그것들을 마치 물 위에 떠가는 나무토막처럼 흘러가도록 훈련하게 되면 우리는 의식에서 떨어질 수 있다[이것을 초연(detachment)라고 한다].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는 것들을 흘러보내면서 신성한 언어로 기도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에 이를 수 있다.

아빌라의 테레사(St. Teresa of Avila)는 그녀의 독특한 경험을 토대로 쓴 책 밧내면의 성방(Interior Castle)에서 관상에 이르는 단계를 7단계(7맨션)로 서술하고 있다.

첫째 맨션은 영혼의 위대성과 가치에 대한 명상이 이뤄지는 곳으로, 진보의 훈련이 이뤄지는 겸손의 단계이다. 둘째 맨션은 기도의 훈련이 이뤄지는 따스함과 빛이 있는 곳이다. 셋째 맨션은 모범적 삶의 단계인데, 자신의 힘과 쌓은 미덕을 신뢰할 위험이 있고, 자기 포기가 이뤄지지 않고, 사랑은 이성에 의해 지배당하는 단계이다. 넷째 맨션은 자신의 영혼의 역할이 감소되고 하나님의 역할이 증대되는 단계이다. 다섯째 맨션은 영혼이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소유당하는 곳이다. 여섯째 맨션은 미래의 신부와 약혼이 이뤄지는 곳이며 친교의 깊이와 함께 고통이 증대되는 곳이다. 마지막 일곱번째 맨션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완전히 합일되는 단계인데, 테레사는 그것을 ‘결혼’으로 묘사했다. 신성한 독서와 묵상 그리고 애정의 기도를 드리는 동안, 사탄이나 천사는 우리의 상상, 기억 안에 있는 것들을 알고 다른 자료를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신성한 기도를 하는 동안 그것들을 흘려 보내는 과정에 우리는 모든 의식 활동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 임재에 들어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안식을 누린다. 테레사가 말한 제7맨션이 바로 관상의 단계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일단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면, 천사와 마귀는 거기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비밀을 알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혼의 깊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신다. 관상의 단계에서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의식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이며, 이제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그러면 왜 관상이 필요하며 관상을 실천하는가? 관상을 하기 위한 노력은 타자로 하여금 그 또는 그녀 자신이 되게 하고, 그것 자체가 되게 하는 것이며, 경이와 새로움에 개방적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관상을 할 때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지 우리의 어떤 것을 그분에게 투사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또한 관상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을 치유하신다. 거짓 자아감, 거짓 자기체계를 고치셔서 진정한 자기가 되게 하시며, 모든 바운더리를 무너뜨리신다. 또한 우리 육체의 질병까지도 고치시고 건강하게 만드신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속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존재로 변화시키신다.

 

나가는 말

근래에 여기저기서 치유사역에 관한 세미나가 많이 열리고 있고, 치유는 많은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만일 진정한 회복과 치유가 일어난다면 그런 세미나와 집회들은 두말할 필요 없이 바람직하며 권장할 일이지만, 필자가 느끼기에는 하나의 테크닉화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필자는 모든 목회자와 평신도들에게 묵상과 관상을 권면하고 싶다. 물론 관상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훈련이 필요하지만, 일단 관상을 체험하고 나면 자신과 자신의 삶에 현저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체험하리라 믿는다.

우리는 흔히 자기가 알지 못하거나 체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폐쇄적이거나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전인에의 변화와 성숙에 이르기 위해 묵상과 관상이 기독교회 역사를 통하여 실천되어 왔음을 인지하고 수용하면서, 개방적인 마음으로 이에 관해 연구하고 적용함으로 진정한 영적 부흥이 일어나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