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적 환경과 영혼의 각성

 

활천 1999년 12월

 

 

들어가는 말

인간이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 이 중요하다. 그런데 토마스 무어(Tomas Moore)를 위시한 영성가들은 그런 삶을 영위하는 데 상징적 환경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상징적 환경 속 에서 깨어난다. 그 말이 진실이라면, 인간은 자신의 영적, 정신적, 심리적 건강을 위해 스스 로 상징적 환경을 만드는 자이며, 그 상징적 환경을 통해 자신의 건강을 만들어가는 자이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어느 면에서는 상징을 창조한 상징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원시 사회의 동굴 벽화에서 시작하여 현대의 여러 상징들 예를 들면, 교회의 십자가, 예배와 미사 에서 사용하는 성찬 등 많은 상징들은 상징에 대한 인간의 욕구와 상징을 통한 인간 영혼의 각성 내지 성숙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징적 환경이 인간의 영혼을 일 깨워주고 성숙시키는 역할을 하는가를 논의하기 이전에, 상징은 무엇이며 상징은 어떤 기능 을 하는지 논의해야 할 것이다.

 

상징이란 무엇인가

상징이란 말은 ‘함께 던진다’라는 그리스어로부터 나왔다. 상징은 두 개의 실재(reality)를 이어주며 그 둘을 하나의 새로운 통일체 속으로 이끌어 준다(좬융의 심리학과 기독교좭, p.78). 특히 칼 융(G.C. Jung)은 “상징은 어떤 내용들을 담고 있는 상(像)으로서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의 의식을 뛰어넘고 있다”고 말한다(Ibid., p.79). 결국 우리 인간은 상징을 통하여 의식 너머의 세계와 실재와 접촉하며, 이런 경험을 우리는 멀치아 일리아데가 말한 성 (The Sacred, 聖)의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상징은 하나의 다리이다. 두 세계, 의식과 무의식, 하나의 실재와 다른 실재 사이를 연결시 켜주는 다리이다. 그리고 종교에서 상징은 신과 인간, 무한하고 궁극적인 것과 유한하고 구 체적인 것을 연결시켜 준다. 상징은 분명히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뿐 아니라 삶의 방향성을 제공해 준다. 인간의 영혼은 상징적 환경 속에서 되살아난다 인간은 원천적으로 상징적인 존재이다. 즉 상징을 통해 내면의 실재에 도달하고 상징을 통 해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함으로써 전일성(wholeness) 혹은 온전함에 이르는 존재이다. 그러 므로 상징의 폐기 혹은 상징의 쇠퇴는 인간 영혼의 쇠퇴를, 상징 부활 혹은 상징의 회복은 인간 영혼의 부활과 회복을 의미한다.

유감스럽게도 개신교는 종교의 핵심인 상징을 폐기한 지 오래다. 예배에 상징이 없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예배에 상징언어가 사라짐으로써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시켜 주고, 인간 내부의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시켜 주는 예배가 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예 배의식 가운데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상징이 있는가? 수찬시에 무릎 꿇는 상징이 있는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상징 대신에 인체 공학적으로 인간을 편하게 해주는 의자가 고안,시판되며 교회들은 그것들을 기호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의 유학시절, 웨스턴 시베리 신학교의 리오 박사(Dr. Leo)의 예배학(원리와 역사)을 별 도로 수강한 적이 있었다. 강의 후, 예배에 참여하여 그 신학교에서 하는 방식대로 수찬에 앞서 손을 씻고 제단 앞에 나아가 무릎 꿇고 오른손으로 이마와 양쪽 가슴에 성부, 성자, 성 령의 표식을 하였다. 그런 다음 떡과 포도주를 받았다. 나의 경험으로는 그때만큼 가슴이 뜨겁고 뜨거운 눈물이 쏟아진 성찬이 없었다. 그야말로 영혼이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이런 개인적 경험을 통해 필자는 예배의 상징과 예배언어의 상징성을 회복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오랜 기간 천주교 신자였다가 5년 전에 우리 교회에 전입한 분 (이미 집사가 되었다)이 목사의 축도 후에 성부, 성자, 성령을 되뇌면서 손을 이마와 양쪽 가슴에 갖다 놓았다. 때마침 이 광경을 목도한 어느 분이 흥분하여 목사인 내게 항의했다. 소위 집사란 작자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란 것이었다. 나는 항의하는 신자를 설득했다. 인간이란 오랜 습관을 버리기가 힘든 존재라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의 규칙적인 행동을 되풀이할 수 있다는 것과, 또한 상징이 담고 있는 바를 부족하나마 나름대로 설명을 해드렸다. 그분은 충분히 납득을 못하면서도 고맙게도(?) 대충 그 상황을 넘겨주었다.

나는 지금 우리 개신교가 카톨릭적인 것을 모방하거나 답습하자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 개 신교회가 상징과 상징언어의 중요성과 기능을 이해하고 적용하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내면적으로 상징에 대한 깊은 욕구를 갖고 있고, 상징을 통해 현실 너머의 세계와 실재에 도달하려고 하고 있고, 상징을 통해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하여 전일성 혹은 온전함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배실은 성소(Sanctuary)가 되어야 한다.

필자가 이렇게 말하는 바를 이해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가지 개선점을 늘어놓으려 고 한다. 물론 성전 건축비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는 형편이 있겠지만, 예배실은 성소다워 야 한다. 초등학교 교실 같은 분위기, 크고 많은 창문, 강대상으로부터 시작하여 예배실 사 면을 둘러싸고 있는 대형커튼 등등. 이런 분위기는 엄숙함과 정중한 분위기를 자아낼 수 없 을 뿐더러 인간의 영혼을 일깨울 수 없다. 카톨릭교회처럼 성상 같은 것을 세우지 않더라도 (또한 세워서도 안된다), 상징과 예술을 활용하여 신비감이 감도는 상징적 환경으로서의 성 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개신교는 케류그마를 강조하는 교회이므로 그 따위 소리일랑 집어치우라고 말한다면, 그와 같은 주장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인간이 상징을 잃어버리거나 멀리하면 할수록 인간의 영혼은 메마르고 황폐해져간다는 사실이다. 외형보다는 내면에 치중할 목회적 페러다임 그 동안 우리 교회는 신자들을 그들의 내면과 연결시켜주는 일을 등한히 해왔다. 다시 말해 신자들의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 인성의 양극성의 통합(존, 센포드는 "내 안에 있는 천국"(필자 역)에서 이 점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그로 인한 의식적이고 창조적인 천국의 삶보다는 교회성장 이데올로기의 틀에 묶어서 복종과 헌신의 윤리만을 강조해왔다. 교회는 대형화 되고 발전했는지 모르지만, 신자들의 내면은 여전히 쓸쓸한 공원처럼 공허한 채 남아 있다. 천국 기쁨의 삶보다는 뭔가 채워지지 않아 복만을 빌며 간구하는 기형적인 신앙을 양산하는 일에 분주했다. 오늘의 양식을 감사하며 만족해하며 나누는 삶보다는 계속 확대하고 채우는 삶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목회의 페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외면보다는 내면을, 채움보다는 나눔을, 복종보다는 창조성을 지향하는 삶을 위한 목회적 페러다임으로 전환할 때이다. 신자들의 영혼을 깨우는 일, 그를 위해 상징적 공간과 환경을 창조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밖으로 드러난 것, 외면을 갖고서 목회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물량주의는 하루 빨리 청산되어야 한다. 나가는 말 현란한 물질 만능의 시대에 영혼을 잃어버린 영혼들, 시들어가는 자신의 영혼을 우두커니 주시하기만 하는 영혼들, 황량한 광야에서 외로움에 물든 영혼들이 있다. 우리는 그 영혼들 을 일깨우고, 그 영혼들을풍부하게 살지게 하기 위해 상징을 찾아주고, 상징언어를 찾아주어 야 한다. 상징과 상징언어는 전인에의 길에 절대적인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