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기독교 영성의 표지(3)



활천 2000년 4월


들어가는 말

지난 글에서 가부장제는 진정한 남성다움의 표지가 아니라 미성숙한 남성다움의 표지라고 지적한 바 있다. 진정한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조화와 균형이 이루어진 그리스도인의 가정과 신앙공동체 가 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의 내부에 있는 다른 성의 통 합 없이는 심리적인 성숙, 영적 성숙에 도달할 수 없다. 남성 속에 있는 여성적 요소(아니마, anima)는 남성다움을 고양시키고, 이와 마찬가지로 여성 내부의 남성적 요소(아니무스, animus)는 여성다움을 고양시킨다. 이번 글에서는 이 두 가지 관점을 가지고 전인을 지향하는 그리스도교의 영성 과정을 논하고자 한다.


아니마(anima)

남성 내부의 여성적 요소를 ‘아니마’라고 부른다. 만일 아니마가 의식되지 않고 미분화 상태에 있으면, 그 남자는 이것의 영향을 받아서 변덕스런 남자가 된다. 그리고 쉽게 분노를 폭발하는 남 성이 된다. 아니마는 모성적 ‘에로스’(eros)라고도 하는데, 관계 지향적인 특질을 지닌다. 아니 마를 인식하고 통합함으로써 비로소 남성의 영혼은 안정을 얻는다. 왜냐하면 아니마는 수용적 특 질을 지니기 때문이다.

아니무스(animus)

여성 속에 있는 남성적 특질을 ‘아니무스’라 하는데, 이를 부성적 ‘로고스’(logos)라고 부르 기도 한다. 이는 구별하고 집중하고, 인식하고, 차별하는 능력이다. 만일 여성이 이 아니무스를 인 식하고 통합하지 않으면 그녀는 완고해지고, 따지기 좋아하고, 매사를 비논리적으로 인식한다. 아 니마를 통합하지 않은 남성이 분노와 감상적인 생각에 빠진다면, 아니무스를 통합하지 않은 여성 은 불합리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아니마, 아니무스의 인식과 통합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의 ‘퍼스낼리티’ 속으로 통합하는 과정이 이 뤄지면, 남성의 경우에는 정서생활이 풍부해지고, 사랑하고 관계하는 능력이 확대되고, 느낌과 관 계가 깊어진다. 여성의 경우, 합리적인 사고와 창조적 힘이 가능해진다.

자신의 내부에 있는 아니마를 통합하지 못한 목회자의 경우, 인간관계는 쉽게 적대적인 관계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내부에서 치미는 분노를 제 아무리 감추고 위장한다 할지라도 폭발하는 화산처 럼 언젠가는 분노의 폭발로 관계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도들과의 관계는 ‘공감적 참여’가 없는 형식적이며 냉랭한 관계로 굳어질 수 있다. 이런 경우는 평신도간 의 관계에도 한 가지로 적용된다. 그녀가 교회 안의 여성지도자일 경우, 로고스적인 면의 결핍으 로 인하여 무조건 매사에 따지려 할 것이고, 남편과 목회자를 피곤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원만한 남편과 아내 관계, 가족 관계, 그리고 성도간의 친밀한 관계와 교제가 이루어지 려면, 모두의 내부에 있는 아니마와 아니무스에 대한 인식과 통합이 필요하다. 이런 면 자체를 아 예 무시하거나 부인한다면, 제 아무리 훌륭한 성도라고 자부해도 실제 그 또는 그녀의 삶은 휑하 니 뚫린 구멍처럼 큰 공동(空洞)이 있을 것이다. 너와 나의 깊은 연대 또는 연결보다는 피상적이 고 독선적인 관계의 껍질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어떻게 아니마, 아니무스를 통합할까?

칼 융은 한 개인이 온전한 자기에 이르는 과정을 ‘개성화 과정’이라고 했다. 그 과정 속에서 자 아가 거쳐야 할 과정은 ‘페르조나’의 인식과 통합, ‘그림자’의 인식과 통합, 그리고 ‘아니마 와 아니무스’의 통합이다.

메리 안 메톤(Mary Ann Matton)이 쓴 밧어느 세일즈맨의 죽음방에서, 윌리 로맨은 자신을 그의 ‘페르조나’와 동일시한 나머지 공허감에 사로잡혀 결국은 자살한다. 페르조나는 우리의 자아와 외부 세계를 연결해주는 것이지만, 페르조나가 곧 우리 자신의 본 모습은 아니다. 만일 목회자가 자아와 자신의 페르조나를 동일시하면 그는 큰 위험에 빠진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두 얼굴의 사나이는 양면의 삶에 빠져들 수 있다. 항간에 술에 탐닉한 목 회자, 재물의 덫에 걸린 목회자, 불합리한 애정관계에 빠져 목회직을 사임하거나 외국으로 도피하 는 목회자들이 속출하는 것은,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페르조나와의 동일시 결과 이다.


요즘 한국 교회는 세대교체 과정에 있다. 후임 목회자를 청빙하는 과정을 분석해 보면, 시작부터 페르조나의 덫에 걸릴 가능성이 많다. 목회자나 성도 모두 예외가 아니다. 인격이 상품화된 지는 오래이다. 학력이나 교회 사이즈 등이 청빙 조건이 되며, 소위 선보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 전시 장의 상품으로 전락하였다. 목회자들은 자신을 상품으로 만들기에 혈안이다. 진정한 자기는 페르 조나의 무덤 아래 갇혀 질식하고 있다.

페르조나는 사회생활에 필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자아와 페르조나가 동일시되면 그것은 인격의 죽 음, 자기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격의 분열, 허탈감, 무력감으로 나타나며 심하면 자살에 이 르게 된다. 또한 자아와 페르조나가 동일시되면, 자아 팽창으로 인하여 ‘거짓자아’가 형성되며, 그런 사람의 인격 특성은 심리적인 완고함 혹은 순수한 상호 반응 관계의 폐쇄에 이른다. 아이히 만(Eichman)이 그 대표적 예다. 그는 자신을 메시야로 위장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나 성도들의 정서를 아예 무시하고 일방적인 순종과 충성을 강요할 것이다.



나가는 말

다음 글에서 온전함에 이르는 과정을 계속 서술해 나갈 것이다. 여기서 이번 글을 정리하자면, 목 회자와 성도는 자아와 페르조나의 동일시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목회자, 진정 한 성도가 되려면 말이다.

동방의 거부(巨富)인 욥의 인격적 특성 가운데 한 가지는 정직이다. 내가 이해하는 정직은 자아와 페르조나의 동일시에 의한 거짓 자아를 갖는 것이 아닌, 페르조나에 대한 직면을 통한 강박적인 삶의 태도에서 벗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자신과 사람과 삶에 대한 강박적 태도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요 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