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기독교 영성의 표지(4)


활천 2000년 5월


들어가는 말

우리는 이 시대에 진정한 사랑에 굶주리고 있다. 형식적이며 거짓 사랑이 아닌 진정한 사랑을 갈 구하는 이유는 우리 인간이 관계의 존재이며 관계의 네트워크 안에서 결속을 지님으로써 온전한 자기(the Whole self)에 도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온전한 사랑의 원형에 이르는 과정

온전한 사랑의 원형인 ‘연인’에 이르기 이전의 미성숙한 모습 가운데 하나는 ‘오디푸스적 아 이’(the Odipal Child)이다. 이 아이는 자신의 성이 어머니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서 어 머니와 더욱 결속되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속된 아들의 삶에서 주변화된 인 물로 밀려나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더 가까이 가서 진정한 남성 에너지의 영향 아래로 그를 인도하고자 하지만, 이런 이상적인 상황은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

직감적이며, 관계적이며, 연결적이며, 사랑스러우며, 영적인 것이 무엇임을 보여주는 남성이 없는 오디푸스적 아이는 이 모든 정신적 특질을 무조건 여성적인 것으로만 간주한다. 이 아이는 아버지 의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눈을 통해서 이런 정신적 특질을 보기 때문에, 아버지는 결국 ‘부재’하는 아버지이다.

무어(Moore)에 의하면, 어머니를 추구하는 오디푸스적 아이는 사랑할 수 있는 연인을 그린다. 여 성적 에너지와의 역동적이며 창조적인 관계 안에서, 오디푸스적 아이 원형에 강한 영향을 입은 소 년은 연인 에너지가 지닌 놀라운 힘을 느끼기 시작한다.

밧철의 요한방(The Iron John)의 저자인 로버트 블라이(Robert Bly)는 남성의 경우에 그의 어머니 와 결속하는 데 어려움을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아버지와 결속하지도 못하고 분리하지도 못한다. 그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정서적인 면, 육체적인 면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현대 서구문화의 영성은 어머니와 결속된 오디푸스적 아이에 뿌리를 두고 있다(Moore, The Lover,14).


어머니와의 동일시의 고리를 끊지 못한 경우, 달리 표현해서 어머니와의 관계를 통해서 형성된 아 니마(Anima)를 인격에 통합하지 못한 사람의 경우, 그는 한평생 아니마에 사로잡혀서 뭇 여성들 의 꽁무니를 쫓아다닐 수 있다. 어느 한 여성과도 진정한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 여자 저 여자 품을 전전긍긍하는 사람의 경우, 그는 실상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그림자 연인’의 에너지에 사로잡혀 자신의 아니마를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의 사람으로, 다시 말해 원형적 연인의 모습으로 자기가 완성되려면, 지난번 에 언급한 그림자 통합에 뒤이어 남성의 경우에는 자신의 내부에 들어있는 아니마를 인식하고 인 격 속에 통합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는 한 여성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색정적인 남성이 되거나, 역으로 여성 혐오증에 걸릴 수도 있다.


요즈음 간간이 목회자와 성도 간의 성추문이 세간의 화제로 떠오른다. 그런 기사를 다루는 방송이 나 신문을 대하면서 “세상에 이럴 수가! ....” 하고 통탄해 하지만, 실상 그들은 자신의 아니마의 희생자들이다. 성장 과정 속에 아버지 부재를 경험했기에, 그래서 진정한 남성의 원형적 에너지에 접촉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오디푸스적 아이 원형의 강한 영향 속에 자라났기 때문 에 희생된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의 고민과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아버지란 존재가 가정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실 재로는 부재하는 아버지가 되든지, 반 아버지(half-father), 혹은 반(反)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우 리는 흔히, 연결성, 친밀감, 관계, 부드러움 등을 여성적 특질로만 간주하는데(이것은 우리의 편견 과 그에 따른 콤플렉스와 관계가 깊다) 사실은 진정한 연인 원형의 에너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식탁 친교를 통해서 이 모든 원형적 에너지를 드러내 보여 주셨다. 그분은 세리 와 창기, 그리고 기타 소외되고 주변화된 사람들을 자신과 연결시켰고, 그들과 따뜻한 사랑의 관 계를 맺으시면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차별 없는 사랑을 극적으로 나타내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간음 현장에서 붙들린 여인을 용서해 주셨다. 분노한 유대 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은 그들 역시 그들 속에 그림자 원형, 통합되지 못한 아니마, 아니무스의 그림자를 들여다보지 못한 채 돌 을 쳐들고 있었으나, 예수님은 현장에 있지 않은 남자 역시 희생자이며, 지금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여인 역시 그녀 속의 아니무스의 희생자임을 아시기에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으로 용서하 시고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 라.” 이 말씀은 곧 “너희 속에 그림자 원형이 없는 자가 돌로 쳐라”는 말씀도 될 수 있다.


남성들이여, 예수님께 사랑의 원형을 배우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원형적 남성 에너지와 원형적 여성 에너지 모두를 이끌어오신 분 이시다. 예수님은 슬플 때 우셨다. 우리의 문화는 남자는 슬플 때도 눈물을 흘려서는 안된다. 만일 눈물을 흘리면 “대장부가 울긴 왜 울어”라는 말로 억압당한다. 예수님은 즐거움을 극적으로 표 현하셨다. 가나 혼인 잔치 집에서는 잔치의 흥을 더욱 돋우시려고 물을 가지고 포도주를 만드셨 다. 우리 문화는 남자는 체신을 지켜야 한다. 조금 기분이 들떠도 “점잖지 못하게시리...”라고 핀 잔을 받는다. 이와 같은 문화는 남성들로부터 진정한 사랑의 원형의 에너지를 빼앗아간다.

연결성, 관계, 애정의 표현, 부드러움 등은 여성들만의 것이 아닌 진정한 연인의 원형적 에너지이 다. “순한 양 같은 그리스도... 도수장에 끌려가면서도 한 마디 말도 없던 양이신 그리스도...” 십 자가 형틀에서 힘없이 죽어가던 그리스도는 그의 부드러움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시키셨다.


나가는 말

진정한 목회자, 진정한 교회의 지도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리스도로부터 진정한 연인 의 원형적 에너지를 받아야(배워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단절과 소외가 깊은 오늘의 문화와 현 실, 심지어는 교회의 영성적 분위기를 연결성, 관계, 친밀성, 부드러움 등의 영성으로 쇄신할 수 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시킬 수 있는 제사장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 다. 한편으로, 우리 내부에 들어있는 ‘오디푸스적 아이’를 찾아내어 우리의 인격 속에 통합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