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기독교 영성의 표지(10)

활천 2000년 12월   

 

 

 

그 동안 부족한 글을 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활천사와 그리고 부족한 글을 읽고 격려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이제 제게 허락해 주신 한 텀(term)의 기회를 마감하면서 유대교의 메르카바(Merkhabbah) 신비주의와 아빌라의 성 테레사(St. Terresa of Avilla)의 신비적 종교체험, 그리고 칼 융(C.G. Jung)의 개성화(Individuation) 과정을 비교하는 가운데 진정한 기독교 영성의 특징을 제시하려고 한다.

복음적인 신앙체험을 심리학과 연관시켜 논의하는 것이 과연 옳으냐 하는 타당성 여부는 논의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필자의 소신으로는, 인간은 영적 존재일 뿐 아니라 동시에 정신적(Psychic) 존재이기에 인간의 영적 체험을 그/그녀의 정신세계와 연관시켜 해석하는 일은 한 인간을 통전적으로 보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단지 그렇게 하려는 시도는 심리학적 해석을 주장하거나 옹호하려는 데 있지 않고 단순히 우리의 사고와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하는 하나의 작은 시도임을 밝혀둔다.

 

메르카바 신비주의

유대교 메르카바 신비주의자들의 목표는 에스겔서 1장에 묘사된 메르카바, 즉 신의 전차(보좌)에 이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전차에 도달하기 위한 주요한 통로 혹은 방법은 묵상이었고 동기는 신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런데 메르카바에 도달하기 위해 카발리스트는 일곱 개의 천궁(天宮), 즉 일곱 헤칼로트(hekhalloth)를 통과해야 하며,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메르카바에 도달하려는 그/그녀를 유혹하거나 목표를 방해하거나 좌절시키려고 하는 악마와 악령들이 들끓기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방해와 유혹을 물리치고 메르카바에 도달하여 하나님과의 합일이 이뤄지면, 그/그녀는 이웃과 주변 세계에 대해 진정한 책임적인 존재가 되며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 안될 것은, 신비주의는 결코 현실과 동떨어져 단순히 무아경이나 황홀경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런 면이 있다 하더라도 신과의 합일은 이웃과의 구체적인 합일 또는 연대로 구체화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화 혹은 현실화의 직접적인 증거는 샬롬(shalom)의 성취이다. 샬롬은 자칫 정신적인 면에 국한되어 해석되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정신적인 면에 대한 강조는 현실적인 책임을 들어주기 때문이다. 샬롬의 근본은 책임성(responsiveness)이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동시에 책임적인 존재 - 영적, 정신적, 물질적인 면 - 가 되는 것이다.

 

아빌라의 성 테레사

아빌라의 성 테레사는 그녀의 저서 『영혼의 성』(Interior Castle)에서 그녀 자신의 독특한 신비체험을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깊은 묵상과 관상 기도(the prayer of contemplation)로 하나님과 합일의 체험에 도달한다. 그런데 그녀는 합일에 이르는 과정을 일곱 단계인 일곱 궁방(宮房)으로 묘사하며, 결혼으로 묘사되는 하나님과의 합일은 제7궁방에서 이뤄진다.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이 일곱 헤칼로트를 거쳐 메르카바에 이르는 길에 수많은 방해꾼들이 득실거리는 것처럼, 아빌라 역시 제7궁방에 이르는 길에 수많은 짐승들로 묘사되는 사탄의 세력의 방해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신의 혼신의 노력으로 하나님과 결혼하는 제7궁방에 이른다.

제1궁방에서 제3궁방에 이르는 과정의 기도는 묵상의 적극적 기도(active prayer of meditation)이며, 이 과정은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수원지의 물을 물통에 이끌어들이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다소 힘이 든다. 제4단계는 기도 생활의 전환기로서, 개인은 기도 속에서 수동적이 되며 - 관상 기도의 시초이다 - 하나님께서 영혼을 내적 평온의 상태로 이끄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제5-7궁방까지의 과정은 관상의 수동적 기도(receptive prayer of contemplation)로서, 그녀 자신의 표현으로는, 마치 물통이 수원지 안에 있는 것과 흡사하며 영혼은 영적 환희로 가득해진다. 그런데 그 어느 단계에서보다도 약혼식이 이뤄지는 제6궁방은 시련이 많다. 그래서 영이 내외적으로 시련을 겪는 이 단계를 “영혼의 어둔 밤“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마지막 제7궁방은 하나님과 합일이 이뤄지는 결혼 단계로서 결혼은 치유와 전일성(wholeness)을 표현한다.

아빌라의 성 테레사는 자기 바깥으로 나오기 위해 자기 내부의 밀실로 들어간다. 다시 말해, 그녀가 제7궁방에 들어가 하나님과 합일되는 목표는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이다. 곧 섬김과 봉사의 삶을 위해서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유대교 신비주의자인 카발리스트들의 신비 경험이나 아빌라의 신비 체험은 같은 성격과 구조를 지닌다. 우리는 카발리스트나 아빌라의 신비 체험과 융이 말하는 개성화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융의 개성화

칼 융은 의식의 중심인 자아(the ego)가 정신의 중심인 자기(the Self)에 이르는 과정을 개성화로 말한다. 그런데 이 개성화를 이루기 위해 자아는 먼저 자아와 외부 세계를 연결해 주는 페르조나(persona, 가면)를 통합해야 한다. 만일 자아가 자신을 페르조나와 동일시하면 자아 팽창(ego-inflation)의 위험이 일어난다. 한 개인이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려면 어느 정도의 페르조나가 필요하긴 해도, 그 페르조나가 자아는 아닌 것이다. 자아와 페르조나를 동일시하는 사람은 충동(compulsion)에 사로잡히게 된다.

페르조나를 통합한 개인은 다음 단계로 그림자(shadow)를 통합해야 한다. 그림자는 외부로 투사될 때는 파괴적이고 위험한 것이지만(부정적인 면이 있을 뿐 아니라 창조적인 면도 있다), 만일 그림자가 인식되고 투사가 철회되고 인격에 통합되면 그만큼 성숙된다. 반대로 그림자가 통합되지 않을 경우, 개인은 강박(obsession)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 다음으로 자아의 과제는 아니마(Anima, 남성 안의 여성 원리 혹은 여성적 원형)와 아니무스(Animus, 여성 안의 남성 원리 혹은 원형적인 남성상)를 통합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할 경우, 남자는 소심한 사람이 되고 여성의 경우 매사에 따지고 바가지를 긁는 여성이 된다. 아니마를 통합한 남자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관계 지향적이 되며, 아니무스를 통합한 여성은 활달하고 적극적인 사람이 된다.

자아가 페르조나, 그림자, 아니마/아니무스를 통합하여 자기에 도달하는 과정은 내면 세계로의 여정(spiritual journey toward inner world)이다. 진정한 자기에 도달한 사람, 즉 개성화를 이룬 사람은 온전한 인간으로 온전한 삶(authentic life)을 살 수 있다. 온전한 삶이란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이웃과 세계를 향한 조화된 삶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삶을 성취한 개인의 정체성을 ‘자아-자기-세계 축’(ego-self-world-Axis)을 지닌 자라고 말하고 싶다.

이상에서 살핀 유대교의 신비주의와 아빌라의 성 테레사, 그리고 칼 융의 개성화 과정 모두는 진정한 기독교 영성의 과정과 본질을 설명한다. 우리가 말하는 영성의 표지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음’(Imitatio Christi)은 하나님(그리스도)과의 합일에서 나 자신과의 합일(발견과 수용), 이웃과의 합일, 그리고 피조 세계와의 합일인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점에서 유대교의 메르카바 신비주의와 아빌라의 성 테레사의 신비 경험, 융의 개성화 과정은 자기 이득과 명성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적 영성 일변도의 길을 걷는 한국 교회 신자들과 교회에 빛을 던져 준다.

하나님과의 합일 혹은 진정한 자기에 도달하는 길은 묵상과 관상임을 여러 차례 언급하였지만, 이 글을 정리하는 마당에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특히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물론 성도들을 포함해서)은 조용한 시간, 고독한 장소를 찾아야 한다. 침묵(silence)과 고독(solitude), 그리고 묵상과 관상 기도로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자기의 발견과 수용, 하나님과의 합일에서 우러나는 메시지가 성도들의 영성을 갱신시키고 그들을 올바른 영성적 삶으로 이끌어 가는 힘이 있을 것이다.

물론 성경에는 그런 말씀이 없지만, 예수님의 성육신에도 얼마나 많은 사탄적 세력의 방해가 있었겠는가? 출생과 성장 과정에도 시련이 있었고,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도,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과 후에도 얼마나 많은 유혹과 방해가 있었는가? 그러나 주님은 그 모든 방해와 시련을 이기시고 성육신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았는가?

요즘 같이 바쁜 때에 조용한 시간과 장소, 침묵과 고독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묵상과 관상 기도를 하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일 중심에서 벗어나 관계 중심으로 전환하지 않는 영적 지도자와 한국 교회에 미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