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대학교 100주년기념 신학학술대회

성결신학의 과거, 오늘과 내일

         

    이신건(서울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종합토의(패널 발제)
 
 권혁승 김동 김종두 박명수 이정 조갑진 지형은 최인식  

보도자료 : 크리스천 투데이


김홍기(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

 

조 박사님께 감사한다. 한국성결교회 대표적 학자로서 성결의 교리에 대해서 아주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논하여 주셔서 감사드린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성화의 조건은 믿음이라고 강조한 “성경적 구원의 길”이란 설교 후반부에서 고아와 과부와 죄인과 가나한 사람을 돌보는 “사랑의 실천”(Works of Mercy)이 얼마나 성화에 중요한 것인가를 주장하고 있는데 그 점을 간과하고 있다. 산상수훈 강해에서 “경건의 행위”(Works of Piety)를 마 5장에서 강조하고 “사랑의 실천”(Works of Mercy)을 장고하고 있다.

또한 속회훈련에서도 지난 모임 이후 어떻게 “경건의 행위”(Works of Piety)를 힘썼는지 고백하게 하고, 지난 모임 이후 어떻게 “사랑의 실천”(Works of Mercy)을 힘썼는지 고백하게 하였다. 그것을 David Watson은 더욱 발전시켜서 Wesley Theological Seminary(워싱턴)에서 “개인적 경건의 행위”(Personal Works of Piety)로 기도생활을 어떻게 하였는지, “사회적 경건의 행위”(Social Works of Piety)로 예배를 어떻게 드렸는지, “개인적 사랑의 실천”(Personal Works of Mercy)으로 어떻게 지난 한주동안 고아와 과부와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을 돌보았는지, “사회적 사랑의 실천” (Social Works of Mercy)으로 사회정의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매주 고백하는 영성수련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웨슬리의 논문 「기독자의 완전」에서 완전은 죄악성에서 완전성결함을 받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까지 사랑하는 완전 사랑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조 박사님의 발제문에서는 사랑의 실천의 강조가 너무 약하다. 사회적 성결은 결론에서만 다루고 있고, 본론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마치 성결은 회개와 믿음으로 마음만이 성결해지는 내면적 성결(holiness of heart) 같이 느껴진다. 웨슬리의 성화 사상에서는 마음의 성결 뿐 아니라 생활의 성결(holiness of life)도 중요하다. 마음의 성결은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고, 생활의 성결은 예수님의 행동을 닮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행동을 본받기 위해서는 사회 속에서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웨슬리는 18세기 영국사회를 변화시켰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감리교사태, 장로교사태나 한기총 사태의 근본은 성화의 부재에 있다. 서울신대 9개 분야 교수들이 지난 100년간 성결교회가 사회적 성결과 사랑실천에 무관심함을 회개했다.

그래서 우리 감리교회는 성결이란 말보다 성화란 말을 더 쓰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성화속에는 성결과 사랑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면적 성결의 고백과 사회적 사랑실천의고백이 매 속회와 구역예배에서 나타나야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다. 14만 4천명을 지난 10년간 한국개신교가 잃어버렸는데, 그것을 회복하는 길이 성화운동에 있다. 또한 한국교회위기는 경제적 성결의 부재에 있다. 감리교회의 감독선거, 장로교회의 총회장선거, 한기총의 회장선거에서 그것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런데 조 박사님의 논문에서 경제적 성결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 웨슬리의 설교 “Use of Money”, “On Danger of Rich”, “Danger of Increasing Rich”, 논문 “Present Scarcity of Provisions”에서 웨슬리 말년에 청지기 의식에 입각한 경제적 성결을 외치고, 돈사랑은 성결의 방해가 됨을 주장하였는데 그것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어서 아쉽다. 돈사랑은 무신론, 우상숭배, 교만, 무절제, 악한 성질,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과 연결되어 있어서 성결의 방해가 됨을 웨슬리가 지적한 메시지는 오늘 한국 교회에도 필요한 메시지다.


박영환(서울신학대학교 선교학 교수)

 

1-1. 발제자는 신학이 목회현장에 과연 무슨 힘이 될 것인가? 라는 질문보다, 목회자들에게 “무거운 멍에”를 하나 더 만들어 주지 않았나? 라는 연민의 정을 보여주었다. 지금까지대다수의 목회자들은 목회 현장이 '신학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아도 되며', 혹은 목회 현장에는 '신학이 필요하지 않다'라고 생각하면서 목회 현장과 신학의 영역을 분리해왔다. 심지어 그들은 신학이 목회에 직접 도움을 주지 않는다거나, 목회현장에 방해거리로 여겨질 때에는 목회 현장에 도전하는 신학들과 신학자들에 대한 마녀 사냥을 하기도 했다.  이런 심각한 현실에 대해 발제자는 "뭇 매를 맞는 한이 있더라도," "정치적 눈치 보기," "될 대로 되라," "신학의 무기력"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발제자는 이런 비참한 현실을 넘어 선배 신학자들의 유지를 이어받아 그들이 이룬 업적들을 힘차게 이어가자고 역설했다.

1-2. 신학을 비신앙적 요소로 보려는 일부 근본주의이며 극단적 복음주의의 영향력 하에서 신학은 목회 현장에서 버림을 받았고, 심지어 정죄의 대상이 돼왔던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학을 정의하자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의 삶 속에 어떻게 해석되어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신학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것이며, 온 세상에 하나님의 구속사를 입증하고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것 이다.  칼 바르트는 "신학이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유리한 입장에서 변호하고, 논증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러므로 신학은 성도들에게는 그들의 삶을 조명해주는 지표가 될 뿐 아니라, 목회 현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재해석되고 이해되는 틀을 제공하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발제자는 “고민과 제언”으로 성결신학의 오늘을 미래로 상속해가자는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2. 성결신학의 오늘에 관하여 발제자는 2002년-2007년 성결교회신학연구위원회의 “성결교회신학”2)을 중심으로 내용 정리를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2-1. 성결신학의 핵심이 과연 “개신교복음주의 웨슬리안 사중복음 신학인가?”에 질문을 던지고, 그 신학의 핵심에 대한 재정리를 요구하면서 정리 작업이 필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첫째, 역사의 복잡하고 다양한 현상과 진리를 단순하게 압축함으로 혼란이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개신교복음주의, 웨슬리안, 사중복음, 이들을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는 성결신학을 정립하는 데 혼란을 주었다. 발제자는 혼란을 막기 위한 대안으로 개신교복음주의-(신학전통), 웨슬리안-(신학인물) 그리고 사중복음-(신학내용)으로 구분하면서 성결신학의 통일성과 정체성을 바로 잡자고 하였다.

  둘째, 언어의 한계성과 시대적 분류에 대한 제한적 이해로 인한 성결신학 이해의 역부족을 이유로 제시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질문은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된다: 1) 성결신학의 “개신교복음주의”는 어느 시대를 논하는 것인가? 2) 종교개혁적 복음주의, 성서적 복음주의, 경건주의 복음주의, 현대적 복음주의 범주에서 개신교란 무엇인가? 3) 또한 종교개혁 혹은 웨슬리안 시대의 개신교인가? 지금 시대의 개신교란 무엇인가?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슌더마이어(Theo Sundermeier)는 복음주의를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신복음주의, 근본적 복음주의, 고백적 복음주의, 에큐메니칼 복음주의, 오순절 복음주의, 극단적 복음주의의 6종류다.

  평자는 개신교 복음주의를 웨슬리 시대의 개신교로 정의하고자 한다. 즉 시대적 분류를 이해의 기준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분류만을 기준으로 하는 제한적 이해는  논쟁과 혼란을 지속적으로 야기할 것이다.  그러므로 발제자는 “온건한 복음주의”라는 틀에서 ‘웨슬리안 복음주의’로, “사중복음을 포함하는 웨슬리안 성결파 복음주의”라는 대안을 넘어 "온전한 구원의 신학"을 제시했다.

2) “웨슬리와 웨슬리안은 과연 전통 개신교를 그대로 계승만 했는가?”의 답은 ‘아니다’이다.

발제자는 그 이유로 웨슬리와 웨슬리 신학 사이에는 상당한 불연속성이 있으며, 한국, 미국, 영국 그리고 한국 웨슬리안 사이에서도 차이점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 증거로 발제자는 성결신학의 모체가 되는 심슨 (A. B. Simpson)의 사중복음, 카우만과 길보른에서도 웨슬리의 글이 한곳도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이것이 단지 김상준과 이명직의 사중복음에서 간접적 설명으로 된 점에 주목하면서 발제자는 성결신학이 웨슬리의 신학에 덧붙여서 김상준, 이명직의 신앙체험과 경험을 포함시킨 새로운 창조적 신학으로 도출되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그것이 만국성결연맹의 성결-오순절 운동의 사대표제(중생, 성결, 신유, 재림)이다.3) 


2-2. 성결신학의 오늘에서 본 내일의 대안

발제자는 2007년 성결교회신학연구위원회에서 제시하였던, 사중복음을 신학적 대안으로 다시 제시했다. 즉, 중생의 복음을 ‘생명신학’, 성결의 복음을 ‘사랑의 신학’, 신유의 복음을 ‘회복의 신학’으로 그리고 재림의 복음을 ‘공의의 신학’으로 제안했다.  

평자는 발제자가 제시한 사중복음을 성결신학의 정체성으로 인정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본다. 이는 사중복음은 이미 웨슬리안 신학과 개신교 복음주의를 충분히 담아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전도 표제, 사중교리 혹은 복음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해석에 대한 혼란은 있을 수 있겠지만, 발제자가 제안한 신학적 정립은 가능하다고 본다.

발제자는 조용기 목사의 오중복음으로 축복을 설명하고, 이처럼 성결신학에 추가, 통합 혹은 새로운 시도 등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발제자가 오중복음에 축복을 첨가하는 예를 들었지만, 성서적으로 문제가 있다. 평자는 오중복음의 축복은 사중복음의 재림과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에 오중복음에 대한 부분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축복은 목회영역에서 신앙생활을 '복 받기 위해 하는 것'으로 이해시켜 건전한 신앙에 대한 이해를 왜곡하고 있으며, 불건전한 영성은 구원의 수단과 메시지로부터 영혼들을 멀리하게 한다는 점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로잔신학 실무팀과 총재 더그 버드 셀은 '믿는 자들에게는 이미 물질의 부와 건강의 축복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믿음과, 긍정적 신앙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규칙적인 십일조와 헌금으로 씨를 뿌리면 하나님의 축복은 자동적으로 따라온다는 믿음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만약 오중복음으로 축복을 주장한다면 이는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까지 인간이 관여할 수 있다는 생각과 인간의 말과 행동, 의식에 의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는 믿음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가르침은  명백한 거짓이다.  


3. 성결신학의 내일에 관해 발제자는 두 가지 분류해 설명했다.

3-1. 발제자는 미래 성결신학의 인적 구성을 소개하고, 앞으로 나타날 성결신학의 배경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과 함께 할 성결신학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밝혔다.  발제자는 성결신학의 과거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조종남은 웨슬리 신학4)을 성결신학의 뿌리와 정체성으로 보았다. (2) 정진경은 목회신학-매우 포괄적이고 다양성을 수용한 신학으로 성결신학을 정의했다. (3) 발제자는 정진경의 성결신학에서 본 새로운 목회변화를 요청하는 과정에서 서울신학대학교 교수진의 신학적 다양성과 창조성에 성결신학의 미래의 가능성을 보았다.


3-2. 마지막으로 발제자는 성결신학의 핵심 신학과제로 사중복음을 다시 제시하고 있다.

발제자는 2007년에 제시된 사중복음의 ‘온전한 구원신학’5)을 새롭게 해석하여 미래의 성결신학으로 준비하고자 했다. 발제자는 사중복음에 하나를 더 추가하거나, 혹은 한 단계를 더 발전시킨다면, 성결을 넘어서, 지금 여기서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영화의 신학’을 재현하자고 주장하였다. 평자는 간혹 영화의 신학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신학으로 오해 될 수 있고, 또한 진보주의자들은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세속적 신학으로 둔갑 시킬 수 있다. 

4. 정리하면 발제자는 성결신학의 정체성을 그동안 “개신교복음주의 웨슬리안 사중복음 신학”으로 성립하였으나 (2007), 이러한 이해는 역사의 단순화로 인한 개념(정체성?)의 혼란과 부조화 그리고 언어의 이해부족과 한계로 인한 성결신학의 이해에 어려움이 있었음을 주장한다.

발제자는 성결신학의 새로운 정체성을 2007년 성결교회산학연구위원회에서 제시했던 “온전한 구원 신학”으로 제시했다. 온전한 구원 신학의 구성은 중생-생명의 신학, 성결-사랑의 신학, 신유-회복의 신학, 재림-공의신학으로 사중복음 신학의 의미를 재정립하였다.  발제자는 “성결”의 개념에 새로운 해석을 추가 한 '영화의 신학'을 제언하고 있다.

5. 평자는 발제자의 귀한 논문을 읽어가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한 노고에 감사드리며, 몇 가지 질문들을 제기함으로 본 발표에 대한 토론이 보완적 입장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1) 개신교복음주의 웨슬리안 사중복음신학이 온전한 구원의 신학으로 정립되려면 선행되어야할 연구가 무엇인가?

2) 사중복음 신학의 전개가 교리에서 복음으로, 복음에서 신학으로 전개가 어떻게 가능한가? 또한 영화의 신학을 간략하게 설명한다면?

3) 서울신학대학교 교수진의 다양성과 창조성이 차이를 넘어서 새로운 포괄적 포용성으로 나가면, 이 포용성은 새로운 성결신학 정립에 어떤 점에서 기여가 있을 것으로 보는가?

4) 사중복음 신학이 성령운동을 통한 파송, 사명 그리고 소명을 담고 있다면, 가칭 선교적 소명신학을 첨가한 성결신학이 가능한가?

6. 성결신학의 정체성과 신학적 근간을 세우기 위한 이신건 교수의 작업은 이미 1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그동안 이루어진 학문적 노력의 결과가 오늘 발표된 결과물로서 우리 눈앞에 선명하게 보여준 것은 감동이었다.

특히 발제자는 그간의 학자들의 수고로 이루어진 “개신교복음주의 웨슬리안 사중복음신학”이라는 선언을 재조명하게 만들었고, 신학자들의 정치적 눈치 보기와 주변의 뭇 매를 피하려는 학자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었다.   이제 개교 100년을 넘어서는 서울신학대학교에서 성결신학의 새로운 정립이 지금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성결신학에 대한 발표들은 발제자가 지적했듯이, 성결교회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성도들에게 읽혀지지도 않았고, 새로운 형태로 도전받지도 않았다.

2007년 발표된 성결교회의 신학도 과거의 일회성 행사로 기억되고 있다. 개교 100주년을 맞는 서울신학대학교는 2007년의 성결신학연구를 새롭게 이어가야 할 것이다.  과거 성결신학연구는 정치적 지탄과 신학적 이단논쟁의 기준을 웬만하면 넘어 서지 않으려는 의도로 인해 그저 종합선물세트처럼 보여지지 않았나하는 기우를 한다.   본 발제를 통해 성결신학에 관한 연구와 발제가 더욱 활발히 일어나기를 바라며, 여러 위험과 한계를 무릅쓰고 우리에게 도전과 용기를 준 이신건 교수께 찬사와 고마움을 전한다.   

 


패널 발제 1

 

권혁승(서울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

 

서울신대 개교 100주년을 맞아하여 성결교회 신학을 논하는 학술대회를 갖게 된 것은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교단의 신학을 연구하고 이끌어 나갈 우선적 사명과 과제가 신학대학에 있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그런 점에서 성결교회 신학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오늘을 점검하고 내일의 방향을 가늠해본다는 것은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주제로서 시의적절한 것이라 하겠다. 본 학술대회의 패널토의자로서 발제하신 두 분의 제안에 대하여 의견을 나눈 다음 서울신학대학교의 신학 발전을 위한 방안 한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1. 조종남 박사님의 발제에 관하여

조종남 박사님께서 발제하신 내용 가운데 논의의 주제로 삼고 싶은 것은 성결신학의 균형에 대한 강조이다. 조박사님께서 제시하신 신학적 균형은 완전에 대한 이해(상대적 완전과 절대적 완전)와 성화의 과정(점진적 과정과 순간적 과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칼빈주의가 완전을 온전한 완전으로만 이해한 것과는 달리 웨슬리는 ‘이 땅에서의 완전’과 ‘사후의 완전’으로 구분하였다. 또한 웨슬리는 성화를 ‘점진적인 과정’과 ‘순간적인 요소’로 나눔으로서 신학적 균형을 강조하셨다. 그런 웨슬리의 신학적 균형에도 불구하고 한국 성결교회가 점진적 과정을 간과한 채 순간적인 성결 체험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된 것은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는 웨슬리의 성화의 교리가 19세기 미국 성결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부흥회를 통하여 전수되었다는 것이다.

성결신학의 균형에 근거한 성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성화의 과정이 상승적인 것으로 성숙과 완전으로 나아가는 성장이라는 점이다. 성숙과 완전으로 나아가는 성장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요소로는 영에 대항하는 죄의 세력 이해인데, 죄의 세력에 관하여도 웨슬리는 영을 거스리는 완전 타락으로서의 죄와 구원 이후에도 죄를 지을 수 있는 인간의 연약성으로 구분하였다. 이것 역시 인간이 지닌 죄의 속성에 관한 균형 있는 접근이라고 볼 수 있다.

균형은 성서신학의 기본골격이기도 하다. 성서신학은 성서적 사고방식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둘 이상의 개념을 병치시키는 평행법적 사고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성서가 일반적이지 않고 전체와의 조화와 균형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종교개혁과 같은 극단적 상황 속에서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하여 한쪽으로의 강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다. 칼빈의 예정론이나 루터의 복음과 율법의 대치적 제시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시대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 신학적 균형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은 새로운 환경과의 타협이 아니라 바른 신학의 정립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이다. 그런 점에서 웨슬리는 종교개혁자들의 극단적 주장을 조화와 균형으로 조정하는 신학적 발전을 이루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구성 자체가 영과 육의 균형을 이루어진 존재이다. 성경은 인간을 영과 육의 결합체인 살아있는 생명체 곧 ‘네페쉬 하야’로 인식하고 있다(창 2:7). 그런 점에서 우리들이 추구할 영성은 영과 육의 균형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곧 영성은 영과 육의 조화 및 균형 유지에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 자체도 인간을 만나시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는데, 인간은 영과 육의 균형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조화와 균형 중심의 영성이해는 구원과 삶, 예배와 일상 속에서의 신앙, 개인과 공동체 등 신앙의 모든 영역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할 수 있다. 구약에서 지혜를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이신건 박사님의 발제에 관하여

이신건 박사께서 성결교회 신학의 미래를 위하여 제안하신 것 가운데 토의의 주제로 삼고 싶은 것은 성결교회의 신학을 더욱 넓혀가야 한다는 강조이다. 그런 점은 이박사님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잘 드러나 있다. “서울신학대학교의 이론신학자들이 웨슬리안 신학이라는 범주 안으로 간단히 묶을 수 없을 만큼 범위가 매우 확장되었고, 전통적인 성결신학의 테두리 안에 쉽게 가둘 수 없을 만큼 내용적으로도 풍성하게 발전했다. 이제 성결신학은 이런 신학적 자원을 토대로 하여 내일을 향해 발전하고 도약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성결신학은 과거에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워지고 있고, 새로운 창조적 종합의 수원지 안에서 힘차게 비상하려고 용틀임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박사께서는 과거의 업적에 심취하거나 오늘의 성과에 만족하지 말고 늘 새롭게 해석하고 날로 더 심원하게 확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성장을 향한 미래지향적 의지이며,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 3:16)와 맥을 같이한다.

그런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그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방법론 제시를 어떻게 할 수 있는지를 논의의 주제로 삼고 싶다. 우리는 제 자리 걸음을 하거나 한 자리에 늘 맴돌고 있을 수는 없다. 시대는 항상 새로운 방향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머뭇거리는 것만큼 시대에 뒤처지는 것이 되기도 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는 신학의 방향성이다. 곧 시대적 요청에 성결신학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이론에 머물러 있는 신학이 아니라 구체적인 프락시스(praxis)의 해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 시대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진단할 수 있는 창조적 비판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성서와 접목시킬 수 있는 성서신학적 근거를 분명하게 제시하여야 한다.

유대인의 신앙교육 강령으로 잘 알려져 있는 ‘쉐마’(신 6:4-9)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과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프락시스’로서의 균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성경구절이다. 그 가운데 ‘가르치라’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샤난’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반복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날카롭게 하다’이다. 자녀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칠 때, 반복하되 날카롭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시중복음을 비롯한 성결신학은 끊임없이 반복하여야 할 주제이다. 그러나 반복 속에 날카로움을 담아내지 못하면, 철 지난 옷을 입은 것과 같은 구태의연에 불과할 수 있다. 지금은 날카로움을 어떻게 담아내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하며 논의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는 성결신학의 재창출을 위한 거룩한 노력이 될 것이다. 유대인들이 하가다(신학)를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할라카(프락시스)에 더 큰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도 눈여겨볼 관점이다. 


3. 서울신학대학교의 신학 발전을 위한 제안

100주년을 맞이하는 서울신학대학교는 초창기에 비하면 비교 자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약적인 신학적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발전의 밝은 면 뒤에는 언제나 어두운 그늘이 숨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발전한 것이 밝은 면이라면, 신학의 학제 간의 대화가 실종된 채 독자적인 발전에 머물러 있다는 점은 어두운 그늘이다.

초창기 서울신학대학교가 성서학원으로 시작한 것은 성경을 잘 가르치는 유능한 목회자 양성을 건학이념으로 삼았음을 잘 보여준다. 100년이 지난 지금 신학 이외의 다른 학문으로의 확장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나갈 기독교지도자 양성이라는 또 다른 목표가 설정된 것도 사실이지만, 여전히 초창기의 건학이념은 서울신대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서울신학대학교 전체 공동체가 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같은 성결신학을 추구하며 유능한 목회자 양성을 목표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칸막이를 한 채 자신의 영역 연구에만 집중하여 타 신학과의 연계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는 성결신학을 창출하려면, 무엇보다도 각 분야의 신학이 한 방향으로 힘을 모아 신학적 역량을 집중시키는 과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비록 신학의 전공분야가 다르지만 모두가 하나의 방향인 성결신학으로 나아간다는 신학적 의지를 결집시킬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생각한다. 학제간의 교류는 신학의 균형감을 위하여 꼭 필요한 일이면서 동시에 시대적 흐름에 적합한 신학적 방향 성정을 전제하고 있다. 공동 목표의 방향 설정 없이 학제간의 대화는 의미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패널 발제 2 : 성결은 구호가 아니라 삶이고 생활이어야 합니다


김동운(부산 부용교회 목사)

 

미국에서 교포교회를 섬기다가 18년 동안의 미국 생활을 접고 2002년 부활주일에 현재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는 교회에 부임하였다. 부임하고 얼마 되지 않아 당시는 지역총회가 있던 때라 지역총회 주관 성결인 대회가 있었다. 당회를 하면서 지역총회 주관 성결인 대회에 교회 단위로 참석하는 일에 대해서 의논을 했다. 그때 한 유력한 장로님의 발언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이 된다. 내가 존경하는 아무개 목사님 말씀에 의하면 성결교회에 성결한 목사가 없다고 했는데 성결한 사람도 없는 그런 성결인 대회에는 무엇 때문에 참석합니까? 라고 했다. 그분이 존경하는 목사님은 교단에서 존경을 받을만한 분이고 나도 그분을 존경할만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누구보다 교단을 사랑하는 그분이 그런 발언을 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그렇다고 해서 성결교회 장로님의 입에서 나온 성결교회와 성결교회 목사에 대한 평가가 충격적이었다.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는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을 전도의 표제로 삼고 이것을 우리가 유산으로 받았을 뿐 아니라 이것을 전함에 있어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거듭난 성도가 이 땅에서 거룩한 성도로서의 삶을 사는 성결의 복음은 세월이 갈수록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복음이어서 반드시 우리가 지켜야 할 복음이요 그리고 힘써서 널리 전하여야 할 복음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몇 해 전에 한국 교회 교단 별 경쟁력을 조사한 결과보고에서 성결교회가 가장 경쟁력 있는 교단으로 발표된 바 있다. 오늘의 한국 교회가 이런저런 사건과 사고로 말미암아 권위가 추락하여 교회가 사회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회가 교회를 염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그래도 성결교회는 낫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성도의 삶에서 성결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고 있고 또 그것을 전하기를 힘쓰는 성결교회 목사나 평신도 지도자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공공연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 우리가 처한 환경과 영적인 수준이 어떤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이 된다.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성결을 강조하고 주장하는 성결교회의 지도자들에게서조차 이렇게 죄악이 가득하고 타락한 세상에서 성결은 이제 우리의 삶에서 이룰 수 없는 구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패배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배워서 아는 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중생이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의 결과인 우리 자신의 의나 경건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를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는 이를 믿는 믿음으로 되고 또한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 되는 것처럼 성결도 역시 믿음과 성령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대가 패역하여 참으로 성결한 삶을 살기가 힘든 세대라 하더라도 바로 여기에 오히려 성결의 복음이 빛을 발하고 그리고 더욱 힘있게 우리가 성결의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래 전에 신학교에서 성결을 강의 하기도 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회 강단에서 성결을 자주 설교하고 성결을 외치는 목사님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분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게 성결을 많이 말씀하고 성결을 강조하는 분이 평소의 삶에 누구보다 화를 잘 내고 또 인간관계가 나쁘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분에게 있어서 성결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해본 적이 있다.

내가 대의원으로 총회에 출입을 시작하게 되면서 듣고 보고 깨닫는 많은 것들 중에서 한 가지는 입에 총회에서 행해지는 회무를 성총회 라고 많이 말하는 사람일수록 전혀 총회 회무를 거룩하게 행사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였다. 교단 총회에서 행해지는 회무가 그분들의 말대로 성총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단 헌법이 정한 의사규정대로 행하고 그 절차나 일들을 진행해야 하고 신자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에 어긋남이 없어야 성총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하는 일을 보면 그들이 주장하는 말과 전혀 달랐다. 그러면 그들이 말하는 성총회의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거룩을 빙자해서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려고 한 것뿐이다. 이런 일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일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거룩함에 대해서 두 가지 극단을 경계해야 한다. 하나는 거룩함에 대한 자만이고 다른 하나는 거룩함에 대한 포기다. 거룩함에 대한 자만은 나는 거듭나고 성결해졌기 때문에 언제라도 거룩하다는 생각이다. 섰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처럼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을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거룩함에 대한 포기는 사람이 어떻게 거룩할 수 있어 라고 생각하고 아예 거룩은 육신을 입은 사람은 이룰 수 없다고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거듭남이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능력으로 되듯이 성결함 역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결에 대해서 자만도 하지 말고 그렇다고 포기도 하지 말고 우리 성도들의 삶에서 살아내어야만 하는 것이 성결이다. 그러므로 성결은 구호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요 생활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패널 발제 3 : 성결-이데올로기(Ideologie)인가? 환타지아(Fantasia)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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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두(대구 수성교회 목사)

 

두 분의 강의를 감명깊게 잘 들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패널(panel)로 참여한 즐거움이 큽니다. 패널로 불러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우선 패널(panel) 중 한 사람으로서 두 분의 강의내용이 보다 선명해지도록 몇 가지 clarifying question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존경하는 조종남목사님께 질문드립니다. 시간상의 제약 때문에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목사님은 성결신학의 의의 중 첫 번째로 <이 성결의 메시지는 교회의 부흥을 가져온다. 성도가 성결의 은혜를 기대할 때, 교회 부흥은 일어난다. 웨슬리는 말하기를 “설교자가 이 온전한 구원을 단순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라고 강하게 권할 때에 하나님의 일은 부흥해 갈 것이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 성결의 메시지는 교회 갱신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는 오늘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런데 2010년 제104년차 교단총회시 교단총무가 제출한 ‘정책보고서’ 중 「성결교회 교회성장 프로젝트」즉 ‘성결교단 교회성장메뉴얼’ 에 의하면 소위 “최근 교단내 ‘성장하는 125교회’를 표본으로 심층연구한 결과 ‘성결복음과 교회성장사이의 상관관계’는 주목할만한 것이 없다”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 동메뉴얼 48-49면 참조)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동 메뉴얼에는 “......앞에서 서술한대로 연구진은 ‘성장한 교회들의 특별한 성장요인’에 관하여 양적 방법인 통계연구를 통해 검증하기위하여 선행연구를 통해서 총11가지 요인에 대한 질문을 하였고 그중에서도 성결교단의 특성을 반영하여 ‘성결 및 사중복음에 관한 영역’을 추가하였다. 앞서 가설검증을 위한 통계분석에서 평균 100점 만점 중에서 70점 이상일 때 ‘성장요인으로 검증된다’고 규범적인 정의를 내리고 그에 따라 통계분석을 해 본 결과 ‘성결’에 관련된 점수는 64점에 그쳐 규범적 기준인 70점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10개의 요인들에 비해 가장 낮은 점수를 보였다.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 이유는 성장한 교회일 지라도 성결에 대한 중요성과 강조를 크게 하지 않고 있으며 성결자체를 교회의 성장요인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점을 시사한다“ 라는 결론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조목사님은 이러한 괴리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우리 성결교회가 선포하는 ‘성결’에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면 ‘성장’이라는 개념에 착오가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근본적으로 우리 교단이 지금 목을 걸고있는 ‘성장개념’과 조목사님이 주장하는 ‘성장’개념이 서로 다른 것입니까?

두 번째 질문입니다. 조목사님께서 이미 인지하고 계시듯이 이신건목사님은 성결신학의 재해석과 재창조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이목사님은 “성결교회신학의 어떤 전통이 수용되고 비판되었는지를 말하기 어렵다. 이것은 더욱 면밀하고 꼼꼼한 연구를 요구할 것이다. 다만 사중복음에 국한하여 말한다면, 중생의 복음은 ‘생명의 신학’으로, 성결의 복음은 ‘사랑의 신학’으로, 신유의 복음은 ‘회복의 신학’으로, 그리고 재림의 복음은 ‘공의의 신학’으로 계승되고 발전되어야 할 것을 성결교회신학연구위원회는 제안하였다. 여기에는 전통의 계승과 더불어 전통과의 불가피한 단절 혹은 전통의 창조적 승화의 정신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이러한 제안이 구체적인 옷을 입고 나타난 것은 바로 평신도를 위해 사중복음을 새롭게 풀이한『사중복음총서』라고 할 수 있다” 라고 적시하고 있습니다. 본인의 소견에 이신건목사님은 아무래도 성결신학의 계승과 수용보다 성결신학의 발전과 재해석의 입장을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고 사료됩니다. 이처럼 최근 교단내 성결신학자들이 주창하는 <성결신학의 계승과 수용보다 성결신학의 발전과 재해석을 중시하는 입장>에 대해 조목사님의 입장을 솔직하게 개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혹여 불편하시지는 않으신지요?

세 번째 질문입니다. 조목사님은 웨슬레신학의 주요한 특징을 <웨슬리는 그의 신학을 지성과 논리에 호소하기보다는 성경과 경험에 호소하였다. 웨슬리는 신앙 체험을 중요시했지만, 그러한 개인의 신앙체험과 아울러 교회의 전통을 존중하였다. 그러므로 웨슬리의 성결의 교리는 헨리 카터(Henry carter)가 말한 대로, “어떤 당파적인 것이거나, 원래의 복음을 왜곡한 것이거나, 또는 역사적 기독교로부터 이탈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웨슬리의 성결의 교리는 성경적 교리로서 경건한 기독교인들의 산 증거와 웨슬리 자신의 체험에 의해 확증된 교리요, 하나님께서 웨슬리와 메소디스트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에게 주신 ”위대한 유산(Grand Depositum)”이다>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웨슬리신학이  ‘지성과 논리’가 아니라 ‘성경과 경험’에 호소했다면 ‘성경과 경험’은 ‘지성과 논리’와는 어떤 관계인지 다시 한번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혹여 우리 교단의 최근 목회현장이 지나치게 ‘개교회화 혹은 개인화’하는 배경에 ‘지성과 논리’를 경시하는 신학적 입장이 놓여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지성과 논리’는 결국 ‘개별적(individual)이며 특수한(specific) 현실을 일반적(general)이며 보편적(universal) 이념’으로 창출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이신건목사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목사님은 글을 시작하면서 “다만 저의 견해가 종종 스승의 견해와 잘 맞지 않거나 심지어는 심하게 충돌할지라도, 요단강을 넘어가는 새 시대의 지도자 여호수아를 멀리서 바라보면서 지나온 삶을 마감한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심정으로 저와 젊은 세대를 격려해 주실 줄로 믿는다. 하나님은 새로운 시대에 늘 새로운 인물을 부르시고 세우신다는 사실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겠는가! (...) 목회 현장도 무한한 시장원리에 따라 날로 힘겨워지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싸움터로 변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비현실적이고 다소 몽상적으로까지 비칠지도 모를 저의 나약한 글이 목회자의 처진 어깨를 가볍게 해주기보다 오히려 무거운 멍에를 하나 더 얹어놓지는 않을까 적이 염려스럽기도 하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한다면, 이제 신학은 목회를 견인할 만큼 대단한 힘을 발휘하지 않으며, 목회 현장도 신학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훌륭하게 굴러가는 듯이 보인다”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특히 ‘비현실적이고 몽상적’이라는 표현을 주목합니다.  당연히 이러한 표현은 목사님의 논문자체를 지시하는 말일 것입니다. 하지만 목사님이 현재 다루고있는 글제가 ‘성결신학’인데 목사님은 혹시 성결이란 개념자체가 ‘무한한 시장원리에 따라 날로 힘겨워지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싸움터로 변해가고 있는 목회현장’에서 ‘비현실적이고 몽상적’이라고 여기시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이러한 열악한 현실조건에서 수행하는 ‘신학작업’자체가 ‘비현실적이고 몽상적’이라고 여기시는 것인지? 해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본인에게 성결이란 말그대로 ‘세속적인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가장 神的으로 살아야 하며(ought to), 또 그렇게 살 수 있다(can)는 생각’입니다. 성결은 소극적으로는 ‘반세속성’을 적극적으로는 ‘합신성(合神性)’을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의 존재방식과 삶의 현실을 규정하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본인에게 성결은 자칫 이데올로기이거나 부정적 의미로서의 환타지아로 투영되곤 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언젠가 교단잡지인 활천에 ‘환타지아’라는 글제로 성결이야말로 당대의 가장 위대한 환타지아이자 세상을 변혁하는 혁명적 에너지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경우 환타지아라는 개념은 플라톤류의 실재하지 않는 환상을 만드는 능력 즉 ‘모방의 모방’이 아니라 서구의 로고스중심주의(logocentrism)에 대항하는 ‘창조적 상상력’의 의미입니다. (「활천」, 2003년, 8월호 참조)> 심지어 본인은 이러한 환타지아로서의 성결이야말로 또 하나의 기독교적 유토피아 사상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성결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환타지아다>라는 본인의 주장을 이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한번 코멘트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경청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패널 발제 4 : 서울신학대학교의 신학적 정체성 확립을 위한 제언

 박명수(서울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    

 

조종남 박사님의 논문에 대하여

올해는 매우 뜻 깊은 해이다. 바로 우리 서울신대가 100년을 맞이하는 해이기 때문이다. 100주년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나갈 방향을 생각해 보게 만든다. 이런 목적을 위하여 이 학술제가 마련되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우리의 과거를 볼아 보기 위하여 우리는 조종남박사님을 통하여 웨슬리가 주장하는 성결론에 대해서 귀한 발표를 들었다. 사실 조종남박사님은 우리 모두의 스승이기 때문에 그 분의 논문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 성결교회의 신학적 뿌리는 바로 웨슬리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거를 살펴보는데 있어서 웨슬리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필자는 우리가 과거를 살펴보는 일에 있어서 두 가지를 더 고려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19세기 성결운동에 대한 연구이다. 18세기의 웨슬리는 19세기의 성결운동을 통해서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성결교회는 18세기 웨슬리가 직접 한국으로 온 것이 아니라 19세기 미국성결운동을 통해서 한국에 왔다. 한국성결교회는 19세기 성결운동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

둘째는 한국성결교회의 역사이다. 우리는 과거 백년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에 와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학교를 설립하고, 초석을 놓았던 분들의 신학이다. 1911년에 시작된 이 학교는 어떤 신학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쳤는가? 그것이 세련되었던, 그렇지 않던 간에 이 문제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우리의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초대교회와 종교개혁을 포함한 기독교의 보다 폭 넓은 전통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18세기 웨슬리와 19세기 성결운동, 그리고 20세기 우리 신앙선배들의 전통은 소중하게 연구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우리의 특색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신건교수의 발표에 대하여

또한 우리는 이신건교수를 통하여 성결신학의 오늘과 내일에 대한 발표를 들었다. 필자는 이신건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 학교의 현주소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우리 서울신대 공동체 가운데 우리의 신학에 대한 합의점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서울신대의 신학을 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몇가지 전제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는 우리 교단이 어떤 신학적인 전통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연구이다. 우리 교단의 헌법, 과거 스승들의 저서, 활천에 실린 내용들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서울신대의 신학과 성결교회의 신학이 둘로 나뉘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지난번에 우리가 이런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은 출발에 불과하다. 서울신학대학교의 신학은 단지 교수들의 신학적 기호에 의해서 좌우될 수 없고, 오히려 한국성결교회에 깊은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세계교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지금 세계 기독교는 더 이상 서구중심적이 아니다. 이제 남아프리카의 기독교가 강하게 등장하고 있고, 중국의 기독교도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다. 세계교회의 현재 모습은 진보주의의 쇠퇴와 함께 복음주의와 오순절운동의 강력한 부흥이다. 과거 복음주의와 오순절운동은 멸시받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고 있는 운동이다.

우리가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신학적인 토론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우리의 신학이 성결교회의 전통을 잘 이어 가면서 동시에 현대 사회의 흐름에 적합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다 나은 토론과 연구를 위하여

필자는 이번 대회가 백주년을 맞이하는 서울신대 학술대회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이 대회는 조직신학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주제 발표자가 다 조직신학자이다. 조직신학이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전부는 아니다. 이번 대회를 기점으로 앞으로 우리의 신학을 연구하는 본격적인 학술대회가 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위해서 몇 가지 우리가 주요하게 토론해야 할 주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성서의 권위와 비평의 문제이다. 서울신대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논쟁 가운데 하나가 역사비평을 어느 선까지 수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서울신대는 성경의 권위를 분명하게 천명하는 동시에 학문적이기를 원한다.

둘째, 서울신대의 역사적 위치의 문제이다. 서울신대는 Wesleyan Evangelical Holiness의 전통을 갖고 있다. 성결교회의 신학이 웨슬레적 기원과 19세기 성결운동적인 특징, 20세기 복음주의운동의 강조점을 갖고 있다. 이런 전통이 어떻게 개혁주의, 오순절운동, 에큐메니칼 전통과 구분되는가를 연구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특징을 알 수 없다.

셋째, 성결의 해석문제이다. 최근 사회적 성결에 대한 논의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결교회가 개인적인 성결을 강조해 왔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과거에는 그랬다. 하지만 현재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개인적 성결이 어떻게 사회과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넷째, 복음전도와 간접선교의 관계이다. 성결교회는 직접전도를 강조해온 교단이다. 그 결과 한국성결교회는 다른 교파보다도 높은 성장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최근 이런 전도에 대한 비판이 등장하고 있다. 사람들은 간접선교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가?

다섯째, 서울신학대학교 교육목적에 관해서이다. 서울신학대학은 과연 어떤 대학을 지향하는가? 서울신대는 불신자를 받아들여서 신라를 만드는 일반 미션스쿨이 아니었다. 우리는 신자를 받아들여서 기독교사역자를 양성하는 학교였다. 지금 개교 백주년을 맞이하는 서울신대를 앞으로 어떻게 나가야 하는가?

이외에도 백주년을 맞아하는 서울신대가 논의해야 할 과제들이 많이 있다. 이런 주제들 하나 하나가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너무나 중요하다. 앞으로 이런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를 바란다.

    

패널 발제 5 :  함생신학적 시각에서 보는 ‘성결신학의 공헌과 전망’

 

이정근 목사(미주 유니온 교회)

 

가. 1. (서론: 토의자 소개). 토의자는  “미주성결교회 교리적 선언”의 초안자이며 (1999년 공포하여 사용중이며, 2001년 기성총회에서 사용 승인), 예식서와 교리문답을 초안했다 (2004). <미주성결대학교>에서 2003년 3월 학기 처음으로 “성결교회 교의신학”을 강의함으로써 이 학문의 창설자가 되었으며, 편목자들이 이수할 과목의 하나로 종래에는 한국성결교회의 헌법에 따라 “웨슬레신학”으로 되어 있던 것을 “성결교회 교의신학 (웨슬레신학과 사중복음)”으로 개정하도록 제안 통과되었다. (2003년). 성결교회 신학과 교리의 특징을 “웨슬리언 사중복음주의”로 요약하여 이름 붙이도록 제안했으며, “사중복음은 전인적 구원론의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는 교육신학적 주장들(1977/1993)도 논의했다. (기독교교육신학연구논문집 상). 2009년도에는 미주성결교단 대표 표어로 “온전한 구원, 거룩한 생활 (The Full Salvation, The Holy Life)"을 사용하자는 제안을 하여 총회의 통과를 보았고 계속 사용되고 있다.

가.2. (서론: 함생적 시각). 토의자는 함생사상의 시각에서 성결신학의 공헌을 평가하고 장래 지향성을 제시하려 한다. 함생사상은 “기독교 신앙과 함생주의 문명건설”이라는 논문에서 처음으로 구체화 되었다. (반석. 2010). 이 사상은 함생신학(咸生神學, theology of combios)이 그 핵심이다. 삼위일체 하나님도 함생체(페리코레시스, 통재성), 구원도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만물의 함생, 이웃과의 함생, 원수들과의 함생으로 푼다. 그리고 교회도 공동체보다는 함생체이다. 이론과 실제도 함생적 시각에서 이해하고 있고,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발전론도 함생과정으로 이해한다. 특히 31년간 목회현장과 신학교육기관을 오고 가며 ‘신학 있는 목회’와 ‘목회 있는 신학’을 천착해온 것과 기독교교육신학의 연구결과가 함생사상으로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 앞으로 함생종교론, 함생정치론, 함생경제론, 함생문화론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나. 1. (본론: 웨슬리 신학적 기초). 한국성결교회(기성, 미성, 예성)의 교리적 기초가 웨슬리 신학이냐 사중복음이냐에 대하여 기성과 예성 사이에 강조점의 차이가 느껴진다. 그러나 한국성결교회 전체가 로마 가톨릭교회나 동방교회 신학, 칼빈주의나 루터주의를 교리적 기초로 채택할 수 없는 바에야 웨슬리언 전통을 버릴 수는 없다. 아니, 설혹 김상준, 이명직 등이 웨슬리안 전통을 성결교회 교리적 기초로 명시하지 않았더라도 토의자가 이미 “성결교회 신앙의 정통성 연구” (활천. 2003년 12월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성결교회 기본교리는, 성경→사도신경 등 에큐메니컬 고백서→어거스틴→루터와 칼빈 신학→ 영국성공회 39개조→요한 웨슬리 24개조→미국감리교회 25개조→이명직 16개조의 흐름이 명확하므로 한국성결교회가 웨슬리안 전통 위에 굳게 서 있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 또 이것이 교단신앙의 자아성(identity) 형성에 지대하게 공헌하고 있다. 특히 웨슬리신학과 웨슬리언신학이 모든 기독교전통들을 합류(conflux)시켜 창의적으로 종합(creative comprehensiveness)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편협주의(narrow_mindedness)라고 할 수 없다. 웨슬리 자신이, “1)본질적인 교리에는 일치를, 2)비본질적 교리에는 관용을, 3)모든 것에는 사랑을” 하고 제시한 에큐메니즘 지침을 따른다면 웨슬리 신학은 앞으로 더 창의적으로 종합되어야 할 기초를 넉넉히 제공하게 된다.

나.2. (성결교리의 공헌). 웨슬리신학과 사중복음이 서로 합류하여 한국성결교회 안에서 종합됨으로 성결교회가 ‘구원론이 강조된 교회’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웨슬리 신학과 웨슬리언 신학의 확실한 공헌이다. 이것은 구원론을 예정론으로 설명하는 장로교회와 한국교회 전체에  대한 공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특히 같은 웨슬리 전통을 이어받았으나 사회적 성결을 상대적으로 더 강조하는 감리교회에 대하여 세찬 도전장을 던지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웨슬리 신학에서 강조된 중생과 성결, 그리고 사중복음에서 신유로 표현된 육신과 지금 여기에서의 구원, 재림으로 표현된 구원의 완성은 칼빈주의가 제시한 구원의 도정(ordo salutis)과 대조적으로, 그리고 보완적으로 성도들의 신앙교육에 혁혁한 공헌을 해 왔다. 그와 함께 성결론의 핵심은 비록 이해하기 어렵지만 “깨끗이 산다” (교단가의 일 절)는 기독교의 윤리성 제고에 크게 공헌했다.

나.3. (성결교리의 문제점 ) 목회현장에서는 세례식, 임직식이 있을 때마다 항상 묻는 질문이 있다. “성결의 은혜를 받았느뇨?”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은 묻는 사람이나 응답하는 임직후보자나 그 정확한 대답을 확실하게 모르고 있다. 그만큼 성결신학은 의사소통에 실패하고 있다. 그 이유는 제대로 안 가르친 까닭도 있지만 그 내용이 너무 복잡한 것이 가장 큰 첫째 문제다. 가령 홀리(holy)라는 말이 ‘분리시킨다’는 뜻과 전체(whole, 혹은 holistic)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이해가 어렵고, 또 거룩은 성경적 용어이지만 영성 등에 밀려 현대적 용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설교 주제에서도 뒷전에 머무르게 된다.

 둘째는, 성결교리가 복음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교훈에는 그 근거가 매우 약하다는 점이다. 구약성경을 성결대명, 복음서를 사랑대명, 사도행전 이하를 선교대명, 이 셋을 합하여 영광대명으로 정리하여 설교하는 토의자의 고민은 그래서 생겨났다.

  셋째는 성결교리가 구원론을 강조하는 것은 좋으나 그것이 기독교 신앙과 목회 전체를 포괄하는 교리로 개발되지 못하고 있다. 가령, 예배와 성찬 등의 성례전, 임직식, 소그룹 모임, 말씀 묵상, 행정, 상담, 교육, 전도와 선교....이런 일들에 성결교리가 어떻게 적용되고 또 성결교리를 그런 장황(context)에서 어떻게 재형성해 나갈지에 대한 연구와 토론이 좀처럼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은혜 도구론 등이 도외시 되어 적응력 혹은 적실력(relevance)이 떨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성결을 너무 강조하면 교회성장에 장해요인이 된다는 주장도 있다. 성결병 곧sanctification gap이 교회성장을 방해하는 9대질병의 하나라고 한다. (Wagner, Healthy Church. 1996. 93ff). 성결신앙은 좋은 것인데 그것이 교회의 문턱을 높여 세상 사람들의 접근이 어렵다는 뜻이다. 귀담아 들어두어야 한다.

다. 1. (앞으로의 방향). 성결교리가 신학에서나 목회현장과 평신도들의 삶의 현장에서 적실력이 강화되도록 단순하고 명절하고 포괄적이 되도록 교단헌법 교리부분을 개정해야 한다. 성결을 ‘성령충만’으로만 풀든가, 제2의 은혜로만 한정하든가, 순간에 받는 은혜로만 규정하면 성경적이지도 않거니와 교육하기가 어렵다. 기독자 완전론도 상대적 완전이나 절대적 완전 등은 교회에서는 교육효과가 떨어지는 표현이다. 그래서 토의자는 “온전 지향성”이라고 푼다. (엡4:13). 눅 15장의 구원의 비유 세 가지를 포괄해야 한다.

다. 2. 성결 혹은 성화(holiness/sanctification)는 성삼위 하나님의 통재적 함생, 하나님과 인간의 함생, 인간끼리의 함생, 만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막16:15; 딤6:13), 온 우주의 함생으로 풀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결교회는 “온전한 복음에 기초한 온전한 구원과 거룩한 생활”을 강조하는 성경적이며 정통적이며, 통전적인 신앙을 가진 교회’를 지향해야 한다. 성령충만은 동시에 예수충만, 말씀충만, 믿음충만, 은혜충만, 능력충만, 지혜충만, 축복충만으로 해명되어야 하고 (엡1:23), 게다가 함생정치론, 함생경제론, 함생문화론 등으로 사회적 성결과 생태계 성결을 영혼의 성결과 똑같은 차원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 

 

패널 발제 6: 성결신학의 공헌과 전망

조갑진(서울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조 박사님은 이 논문을 통해서 웨슬리의 성결론이 우리교단에게 왜 위대한 유산인지를 밝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웨슬리의 성결 교리는 인간이 거듭난 후에도 그에게 아직도 내재적인 죄가 있어서 그 죄에서 온전히 씻겨져 하나님 앞에 완전한 (blameless) 상태에 이르게 된다. 동시에 신자가 받아야 할 능력을 받는다는 제2의 은총의 영역을 역설한다.

2. 칼빈과 루터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영과 죄의 세력과의 갈등과 싸움이 죽을 때까지 부단히 지속되며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지만, 웨슬리는 죽기 전에 이 땅에서 온전히 거룩해 질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 종교개혁자들이 알지 못했던 은혜의 영역을 제시함으로 개신교 신학에 기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3.웨슬리는 성화의 점진적인 성장과정에서 순간적인 단계 곧 온전한 성화가 있으며, 온전한 성화를 이룬 신자는 계속성장하여 마지막으로 영화의 몸으로 변화될 때에 우리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구속은 완결된다고 본다. 그래서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완전으로의 부단한 성장을 설파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4.웨슬리는 성서가 말하는 성결은 완전한 사랑, 곧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 성결의 은혜를 지속하는 비결은 순간 주를 의지하는 그리스도 중심, 주와 동행하는 삶이라고 한다. 그리고 성화는 그 상태에서 실족할 수 있으나 회복될 수 있는 은혜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순간순간 주님을 의지하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5.웨슬리는 이 성결의 은혜를 받는 비결로 회개와 믿음으로 받는다고 하면서 그러기에 간절히 기도해야 함을 강조한다. 왜 우리대학이 다양하게 이 목적을 위해 기도를 개발하고 강조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6. 성결의 은혜를 입으면 사회적인 성결로 이어진다는 것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존재하게 된다고 하면서 따라서 성결의 복음을 정확하게 전파해야 한다고 한다.

이 논문은 서울신학대학교와 교단의 정체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 실재를 지속적으로 확보해 나간다면 타교단과 차별성을 가진 경쟁력 있는 대학과 교단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아울러 사회가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부끄러운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신학을 가진 교단이라는 희망을 주고 있다. 그러나 보완되었으면 하는 점과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만국성결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경성성서학원의 초대 교장으로부터 온 존 토마스로 시작된 우리 대학교의 신학적인 기초는 분명 만국성결교회의 신학과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면에서 신학적인 논의를 출발했어야 하며 그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서 웨슬리의 성결신학이 우리교단의 신학으로 정착되었는지를 설명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2. 웨슬리의 성결론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그러나 만국성결교회로부터 가져온 우리대학의 신학적인 유산인 4중 복음의 성결은 중생을 전재하기에 신유와 재림의 복음과 아울러 동양 선교회가 추가하여 강조해 온 선교라는 부분이 앞으로 함께 연구되고 강조되어야 할 것도 언급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3.대학의 학장으로 웨슬리의 성결 신학을 주도적으로 가르치시면서 가장 강력하게 그 실재를 세우는 일에 누구보다도 노력을 기울이셨을 스승으로 어떤 노력을 기울여오셨으며 후배들에게 어떤 부분을 반드시 강화하기를 원하시는의 조언을 또한 듣고 싶다.

 

이신건 박사의 성결신학의 공헌과 전망의 논문은 어려운 주제를 풀어내기 위한 그의 수고와 고뇌를 공감한다. 그러나 다음의 몇 가지의 문제를 더 다뤄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1. 성결신학에서 정리한 "개신교복음주의 웨슬리언 사중복음신학"이란 정의에 대하여 불만족을 표시하며 수정을 제시하여 "웨슬리언 성결파 복음주의"로 또는 "온전한 구원의 신학"이라고 개명하려다가 그것마저 포기하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신학적인 유산은 "4중복음과 웨슬리신학"이라고 말하면 분명한 것 아닌가?

2.웨슬리 신학과 웨슬리언 신학사이에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는 지적을 하면서 김상준과 이명직과 심프슨 카우만 길보른같은 웨슬리언들에게서는 창의적으로 신학을 발전시켰다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는 순복음과는 달리 “온 복음”으로 부각하거나 “오중 또는 육중복음”으로 확장할 수 없는지의 질문으로 던지고 있다. 좋은 제안으로 환영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라기 보다는 연속성속에서의 창의적인 확장내지는 강조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지로 생각해 보았다.

3. 웨슬리가 온전한 구원을 추구했고 성결교회가 100년 이상 온전한 구원의 신학을 추구해왔다면 이제 우리에게 아직도 온전하지 못한 것이 무었인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온전의 그 실재를 오늘의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발전시키는 일에 얼마나 노력을 경주해 왔는지를 제시하고 그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해 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이다. 포장속에 들어있는 복음의 내용은 변할 수 없지만 변화하는 시대와 문화의 상황에서는 전달을 위해서 상황과 시대와 사람들에 맞게 변경시킬 줄 아는 유연성과 순발력을 가져야 하는 것처럼 성결복음의 축복과 4중복음의 유익에 대하여 누리고 자랑스러워하는 후예들이 많이 일어나게 해야 한다.

4. 한국과 구미전역에서 학자들이 자기의 전공분야의 학위를 하고 와서 대학에서 가르치고 발전시킨다고 하여도 4중복음과 웨슬리신학의 기초위에서 연결하고 확장함으로 앞으로 100년을 더 지나도 우리가 가진 신학과 신앙유산의 정체성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천명하지 못하고 있음이 아쉽다.

결론으로 우리에게는 신학을 계속 발전시켜야 함과 아울러서 그 신학에 따른 실재를 계승할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예컨데 "성결영성회복본부"를 신설하여 우리 대학의 비젼인 새사람 새 역사로 세계적인 명문대학을 이루자를 구체적으로 기획하고 진행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한 장로교회 대교회 목회자가 성결교회목회자 쎄미나에서 성결교회는 위대한 신앙과 신학적인 유산을 가지고서 왜 죽을 쓰고 있느냐고 도전했었다. 뼈 있는 지적이다. 우리 교수단은 기가막힌 제품을 가지고 거룩한 장사를 잘하고 있는가를 스스로 물어야 한다. 그러한 인물을 배출하는 일은 기념건물을 짓는 것과 병행하여 시급하게 시동을 걸어야 할 중대한 과제다.

 

패널 발제 7: 우리는 누구인가?  -- 오늘날 세계에서 기독교 신앙과 성결교회의 의미를 생각하며

지형은 (성락성결교회 목사)

 

1. 오늘날, 기독교 신앙은 무슨 뜻인가?

오늘날 세계에서 기독교 신앙은 밀리고 있는 듯하다. 여러 가지 상황에서 이런 현상이 분명해진다고 보인다. 얼마 전에 교황은 서구 사회가 기독교 신앙에서 이탈돼 가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프로테스탄트에서 ‘미국형’ 기독교 신앙의 위력은 옛날 같지 않다. 종합적인 면에서 미국의 국제적인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과 맞물려 있을 것이다. 지구촌에 산처럼 쌓인 문제들을 풀어갈 방향과 방법을 기독교 문화권과 교회 공동체에서 주도적으로 제시한다고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신앙은 무슨 뜻인가?

60년대에 탈종교사회를 느끼면서 많은 사람이 종교 이후 상황을 예고하고 예언했다. ‘세속 도시’에 살면서 ‘신에게 솔직히’ 말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런 발언들이 ‘현대 사회로 돌아온 신(神)’이 뚜렷해지고 초월적 영역에 대한 거대한 관심이 일면서 설득력을 잃었지만, 초월적 영역에 대한 오늘날의 관심은 아쉽게도 결코 기독교 중심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서 말하는 영성에 대한 논의들은 오늘날의 정신적 종교적 상황에 대한 주도적인 리더십의 결과가 아니라 이미 그렇게 흘러가는 상황에 뛰따라가며 숨이 차서 하는 얘기들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신앙은 무슨 뜻인가?

한국 사회 안에서 기독교 신앙과 연관된 상황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다. 한국 기독교의 두 축 가운데 하나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금권선거와 연관하여 사회 전체에서 부정적 집단의 표본으로 인식되면서 사회적 이슈가 되어 있다. 감독회장 선거와 연관해서 벌어진 감리교 사태는 벌어진지가 오랜데 아직도 해결의 길이 보이지 않고 있다.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작동되는 교단과 교회연합기관이 사법기관에서 파송된 사람에게 리더십이 맡겨진 상태다. 지금 한국 교회 전체는 부도덕한 집단으로 비쳐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뜻인가?

2. 오늘날, 성결교회는 누구인가?

성결교회에 대한 논의 가운데 많은 부분이 ‘자기 정체성’과 연결돼 있다. 자생교단에 대한 논쟁이 그렇고, 사중복음에 대한 토론이 그렇다. 신학과 신앙의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자의식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물어온 것이다. 분명하게 교파 선교로 시작된 다른 교단과 달리 교파 배경 없이 시작된 성결교회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다. 자생성에 대한 논의가 여기에 관련돼 있다. 신학적 전통이 자명한 다른 교단과는 달리 우리는 그저 선언적으로 헌법에 기록된 웨슬리와 사중복음을 갖고 있을 뿐 그 구체적인 신학적 내용과 전개가 부족했다. 사중복음에 대한 논의가 여기에 관련돼 있다.

조종남 박사의 글은 성결교회가 선언적으로 말하던 웨슬리 신학의 전통 특히 “웨슬리가 주장하던 성결의 도리”를 내용적으로 밝히며 논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서울신학대학교의 역사에서 조종남 박사가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이 점이 아닐까 한다. 서울신학대학교만이 아니라 한국 신학계 전체에서 성화론을 중심으로 웨슬리 신학을 뚜렷하게 주제화시킨 것은 성결교회의 신학적 자기 정체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종남 박사의 신학적 작업을 기점으로 교단 헌법에 선언적으로 명시된 웨슬리 신학의 내용적 논의와 전개가 본격화되었다고 보인다.

이신건 박사는 성결신학을 논하면서, 한편으론 지금까지 논의된 결과를 비평하고 다른 한편으론 앞으로 전개될 성결신학 형성의 작업 방식과 가능성을 논했다.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성결신학에서 웨슬리의 중심적 위치를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매이지 않는 신학적 작업의 필요성을 지적했다는 점이다. 300년 가까이 이어진 계몽주의적 정신사의 흐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크게 탈바꿈하는 오늘날, 신학이 세계를 해석하고 이끌어갈 가능성은 상황을 통섭적으로 통찰하고 창조적인 미래를 향하여 자기 변화를 결단하는 데 있다. 이신건 박사의 글은 이런 점에서 성결신학을 논의할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마당을 펼쳐놓았다.

3.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웨슬리를 놓을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가 누구인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웨슬리를 다 안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그를 놓칠 것이다. 웨슬리를 교회 역사적인 흐름에서 읽는 작업도 필요할 것이다. 종교개혁, 정통주의, 계몽주의, 경건주의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웨슬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살피는 게 필요하다. 회심과 성결의 체험과 선교의 열정 등 웨슬리의 삶과 신학의 중요 특징은 17-18세기에 전개된 경건주의 운동의 전형적 특징이다. 웨슬리의 회심 체험이 경건주의 3세대 지도자인 진젠도르프의 사역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웨슬리를 횡적으로 그러니까 조직신학적으로만이 아니라 교회사적인 흐름에서 종적으로 읽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성결신학을 정립해야 한다’는 명제에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성결신학이 무엇이냐는 열려 있다. 성결교회가 큰 교단에 비해 알게 모르게 소수자 의식을 갖고 교단과 신학의 정체성에 신경을 쓰는 동안 세계는 어느새 교파의 차이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상황으로 변해버렸다. 오늘날 기독교 사역의 현장에서 교파성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교파적 정체성을 의미하는 단어들은 퇴조하고 모든 분야를 아우르며 통섭하는 주제들이 중심이 되었다. 모든 것은 전(全) 지구적이며 간(間) 지구적인 상황과 연결돼 있다. 아시아발 외환위기나 뉴욕발 금융위기, 아이슬란드발 화산 폭발과 일본발 원전사고, 아이폰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은 오늘날 인류에게 이런 상황을 충분히 체험하게 했다.

신학이 다뤄온 전통적인 주제들 가운데 상당 부분이 갑자기 의미 없는 것들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지금까지는 전혀 신학에 연결되지 않았던 주제들이 갑자기 신학의 중심 주제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상황과 연관하여 위에서 말한 두 개념 곧 전(全)과 간(間)과 더불어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이 틀 바뀜 또는 구조 변이(Paradigm Shift)다. 게임으로 말하면 규칙이 바뀌는 것인데, 규칙이 바뀌면 승패에 영향을 끼치던 요소도 바뀐다. 예컨대 필름 없이도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면서 필름 산업 자체가 의미를 잃어버린다든지, 새로운 도로 하나가 뚫리면 옛날 도로변에 있던 모든 가게가 업종과 상관없이 일시에 타격을 받는다든지, 인터넷 환경과 연관하여 유튜브에 올려진 자료가 순식간에 전 세계에 퍼져 한 나라의 상황을 바꾼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전(全), 간(間), 구조 변이라는 세 가지 상황 속에서 성결교회 및 성결신학의 정체성과 연관하여 지적하고 싶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결교회를 훨씬 더 큰 틀 속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 전통이 일시에 사라질 수도 있고 새롭게 등장한 것이 큰 흐름을 형성할 수도 있는 것이 오늘날 삶의 구조다. 지나치게 과격한 말이 될까도 싶지만,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 만들어가는 것이 성결교회가 된다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보인다.

다른 하나는, 구체적으로 우리가 존재하는 한국 사회와 그 안에 있는 교회의 상황과 연관된 것인데 갱신과 개혁의 문제다. ‘한국 교회는 침몰하고 있다’는 옥한흠 목사의 발언은 벌써 오래된 일이다. 한기총과 감리교의 ‘법정 관리 상태’가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현재의 상황은 어디에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망가진 상태다. 현장 교회가 망가지고 퇴조하면 신학의 자리는 없다. 적어도 현실적으로, 신학이 목회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현장 목회 상황이 신학에 영향을 끼치는 한국적 상황에서는 특히 그렇다. 개혁되지 않으면 한국 교회의 미래는 없다.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점을 생각하면 현장 교회가 참 중요하다. 현장 교회 목회자로서 이런 자리에서 신학 쪽에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신학은 좀 더 현장 중심적이어야 한다. 신학자는 좀 더 목회적 관점을 이해해야 한다. 신학 교육은 더 치열하게 현장 교회를 섬기는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 현재 한국 교회의 상황은 한 마디로 말하면 전시 상황이며 위기 상황이다. 신학자와 신학 교육 기관의 자리는 교회 없이는 보전되지 않는다. 신학과 연관된 제도와 직책과 활동은 일반 사회적인 대학 사회의 시스템이 아니라 교회의 상황에 걸려 있다. 서울신학대학교의 전통에는 이런 점에 아주 강한 유전자가 들어있다.


패널 발제 8: 위대한 유산, 성결 교리!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

최인식(서울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성결교회 창립 100주년을 지난 2007년에 보내고, 이제 서울신학대학교 개교 100주년을 2011년에 맞이하는 뜻 깊은 순간이다. 교단신학의 산실(産室)인 신학대학의 영적 · 학문적 책임자로서 제1세대의 이명직 목사님에 이어 제2세대 신학의 문을 여신 조종남 박사님께서 이 역사적인 순간에 일생 동안 씨름해 오신 성결이라는 주제를 제3세대에게 “위대한 유산”으로 전달해 주셨다. 존 웨슬리가 가르친 성결 교리의 핵심을 탄탄한 논문 형식으로 내용적으로도 매우 요약적으로 명쾌하게 밝혀 놓으셨다. 각론의 세부항목까지 우리가 배워온 바요 또한 가르치고 있는 바라는 점에서 제3대 신학자의 한 사람으로 성결 교리의 신학적 당위성과 그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더 깊이 실감한다.

제1세대의 과제는 사중복음이었으며, 성경을 사중복음의 틀로 읽고 해석하여 설교하고, 가르치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제2세대에 속하는 조종남 박사님의 과제는 사중복음 중 핵심이 되는 성결의 교리가 웨슬리로부터 기원된 것이기에 웨슬리 신학을 소개하면서 웨슬리의 신학과 경험으로부터 성결 교리를 해석하고 신학화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 요약적 결정판을 오늘의 논문에서 본다.

성결 교리의 발전과정을 놓고 볼 때, 제1세대의 공헌은 성결을 사중복음의 틀 안에서 이해함으로써 성결의 교리가 신자의 내면적 변화의 사실로만 고착되는 것을 막아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성결이 중생과 신유와 재림과 각기 연관되게 함으로써 성결의 영성, 성결의 육체성, 성결의 역사성이 확보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이해와 전개는 비록 원초적이고 원색적인 단순함에 머물러 있었으나 성결교회 신학의 발전을 위해 움직일 수 없는 기초석이 되었다.

제2세대의 조종남 박사님은 사중복음 중에서 성결에 초점을 맞추되 그 모델을 존 웨슬리의 글과 경험에서 찾은 후 신학적으로 체계화함으로써 성결의 교리가 궁극적으로는 경험의 사실로까지 나타나도록 교회 현장에서까지 가르칠 수 있는 이론을 제공하였다. 그가 성결에 집중한 것은 이야말로 성결교회가 이어받아 키워나가야 할 가장 “위대한 유산”임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조종남 박사님의 신학적 공헌은 성결의 교리를 미국의 성결운동을 넘어 18세기 영국의 존 웨슬리에게서 찾아 사중복음의 전통을 신학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강화시켰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제3세대와 그 이후에 속한 세대들의 신학적 과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몇 가지 이전 세대의 특징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 제1세대가 성결 교리를 보다 성령론적으로 접근했다면, 조종남 박사님은 웨슬리의 성향에 따라 보다 기독론적이며 윤리적 차원에서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제1세대는 성결을 “성령세례”로 이해한 반면, 조종남 박사님은 성결을 “기독자의 완전”으로 표현하기를 선호한 듯하다. 이러한 신학적 트렌드를 미시적으로 보면 각각 따로 노는 것이요, 그래서 한 군데로 모아 놓으면 서로 간에 마찰도 발생할 수 있다는 염려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성령세례에 입각한 성결 이해는 즉시 변화하는 순간성을 강조하는 반면, 기독자의 완전에 입각한 성결 이해는 변화 과정의 점진성을 중시함으로써 서로 상반적인 입장을 갖게 된다. 이러한 예에서 보듯이 성결 교리를 다양한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나타나는 대립점들을 보다 통전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신학방법이 개발되어야 한다.

둘째, 제1세대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제2세대는 성결교회에 견실한 신학적 토대를 제공하기 위해 존 웨슬리의 신학과 그의 경험에 의존하였다. 그래서 성결교회는 감리교회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소위 “웨슬리안”이 되었다. 그래서 웨슬리를 가운데 두고 불가피하게 성결교회가 감리교회와 다른 점이 무엇인지를 밝혀야 하는 신학적 과제를 가지게 되었다. 웨슬리를 강조하면서도 감리교회와 신학적으로 연대하지 못하는 불편한 현실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존 웨슬리의 신학적 논객은 칼빈주의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과 신학적으로 상대하여 웨슬리의 신학사상을 변증하였던 자는 존 플레처였다. 칼빈주의자들과 대면하면서 웨슬리의 성서중심의 복음적 사상을 발전시킨 플레처의 신학과 그의 성결한 삶은 감리교적이기보다 오히려 성결교회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시는 열광주의가 문제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존 플레처의 성령세례 신학은 웨슬리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이 되지 않았지만, 플레처의 신학이 미국에 소개되면서 성령운동의 기폭제가 된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성결교회 제1세대가 성결을 “성령세례”라고 한 이 전통적 명제의 최초 창제자는 존 플레처였다. 뿐만 아니라 존 웨슬리에 의하면 플레처보다 더 성결한 삶을 살다간 자가 없다고 할 정도로 그의 생애는 성결의 표양(表樣)이 되었다. 그러므로 웨슬리뿐만 아니라 플레처의 신학을 재발견하여 또 다른 하나의 신학적 모델로 성결교회에 소개한다면 제1세대의 성령론적 교리 전통을 신학적으로 의미 있게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제2세대가 18세기까지만 거슬러 올라가 거기에 우리 신학의 정체성을 확립코자 했다면, 제3세대는 보다 적극적으로 종교개혁 신학과 교부 신학들과 대화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성서신학에 성결 전통의 뿌리를 내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제1세대에서는 성서의 해석학적 수단이 사중복음이었다. 제2세대에서는 웨슬리 신학이 성서를 해석하는 이성적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성서로부터 사중복음을 재해석하고, 성서로부터 웨슬리 신학을 재조명하는 성서중심의 신학을 회복해야 할 때다. 그것이 사중복음의 정신이었고, 그것이 웨슬리가 추구했던 영성이었기 때문이며, 교회가 교회 되게 하는 신학 본연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성결의 교리가 지나간 세대의 낡은 교회 전통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더욱 강력하게 선포되게 하고 거룩한 삶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독론이나 성령론적 측면에서 성결론을 전개하는 것 못지않게 거룩한 하나님을 말하는 신론적 성결 이해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성결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칼빈의 신학으로부터 배우는 바가 있다면, 신학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마무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서신학의 관점에서 성결 교리를 정립해야 한다면, 성결신학은 거룩한 아버지 하나님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성결신학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신학이요, 아버지의 거룩한 나라가 오게 하는 신학이요,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이 땅 위에 이루는 신학이어야 한다. 이러한 일에 부름 받은 자들이 먼저 거룩한 백성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특권과 책임을 느끼는 자들이 성결교회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일생동안 우리 전통의 소중함을 끝까지 지켜주시고 웨슬리를 본으로 소개해 주시기 위해 혼신을 다하신 조종남 박사님의 오늘의 옥고는 성결교회 신학의 발전사에 길이 기억될 논문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제3세대의 성결교회 신학을 리드해 나가시는 이신건 박사님의 여러 가지 비판적 성찰과 신선한 제안들 역시 구체적인 결실로 나타나게 될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