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의 페터레인 성령 세례를 회복하자

김헌곤 목사
 

지난 6월 총회에서 교단 창립 100주년을 맞아 "100만 성결인"을 결의하였다. 이 결의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웨슬리의 성령세례를 우리 모든 성결가족들이 체험하고 유지해야 한다.

웨슬리가 35세 되던 1738년 5월 24일 런던 시내의 올더스게잇 거리의 한 집회소에서 인도자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을 때 중생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 올더스게잇 체험 이전에는 "믿음이란 합리적인 어떤 근거에 동의하는 것이며 이성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었는데(1725년 7월 29일 그의 어머니에게 쓴 편지 내용에 의하면), 올더스게잇 체험 후 18일 만인 1738년 6월 11일,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란 설교에서 웨슬리는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는 "종의 믿음에서 아들의 믿음으로, 율법 아래에서 은혜 아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런 놀라운 중생의 경험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후 다시 불안과 불신앙의 여러 가지 시험이 그를 엄습하였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생활에서 특별한 변화도 없었고 설교에도 여전히 감화력이 없었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이런 가운데도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하신 성령세례와 능력을 받기 위해(행 1:4-5, 눅 24:49) 몸부림쳤다. 1738년 여름 3개월 동안 친구와 함께 독일에 모라비안 교단의 본부를 방문하여 신앙의 지도와 격려를 받았다. 그리고 1738년 10월 9일에 미국의 영적 거성인 조나단 에드워드가 쓴 좬노스 햄프톤 대부흥 운동사좭를 읽으며 큰 도전을 받았으며 더 큰 능력, 새로운 은혜를 사모하였다.

올더스게잇 체험 후 7개월 뒤인 1738년 12월 31일 송구영신예배를 런던 시내의 페터레인(Fetter Lane)에서 가졌는데, 여기에 휫필드, 매형, 동생 찰스를 포함한 7명 목사와 60여 명의 성도들이 모여 성령대망회를 가졌고 이때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

웨슬리의 1739년 1월 1일(월) 일기는 이날의 감동과 역사를 이렇게 적고 있다.

"새벽 3시경 우리가 계속 갈급하게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 위에 강하게 임재하셨다. 그 권능 아래 많은 사람들은 넘쳐흐르는 기쁨으로 울부짖었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의 현존 앞에서 깨어나자마자 한목소리로 '하나님은 우리의 주님이 되십니다' 하고 찬양을 불렀다." 이날 이후 웨슬리는 노방전도를 시작하였고, 공동묘지에서 대중집회를 인도하였으며,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며,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외치는 등, 강력한 그의 부흥사역이 시작되었다.

우리 성결가족은 웨슬리의 올더스게잇 중생의 체험과 함께 페터레인의 성령세례 체험을 절대 잊어서는 아니된다. 웨슬리는 초대교회가 보여주었듯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언제든지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들, 곧 카리스마타(Charismata)가 나타난다고 믿었다(조종남 박사). 우리가 성령충만을 받아야 성결한 삶을 살 수 있고, 성령충만을 받아야 마귀와 죄악세상을 이기며, 성령충만을 받아야 전도자의 삶을 살 수 있다. 우리는 첫 번째 은혜인 성령세례를 받고 두 번째 은혜인 성령충만을 유지해야 개인적으로 승리생활을 유지할 수 있고, 진정한 교회의 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교단의 사부였던 이명직 목사님이 1916년 26세에 아현교회 주임목사요 경성신학교 교수로 부임했는데, 그 후 활천에 쓴 글 가운데 "나는 그 당시 성결을 교리로만 알았지 체험하지 못했다. 성결치 못한 나, 부패한 심령의 나는 겉단장하기만 힘썼다"(활천 1924년 10월)고 고백하였다.

그는 1921년 이성의 유혹의 갈등 속에서 골방에 들어가 특별기도를 시작한다. "나에게 성결을 주시든지 사명을 거둬 가시든지 하옵소서!" 그렇게 몸부림치던 중 3일째가 지나 성령세례를 받았는데,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성신의 충만함을 얻고, 새로운 능력을 받았다. 이것은 태어난 후에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이명직 기념문집, 103-104).

그 다음날 그는 신학교 강의실에 들어가 자신의 체험을 말하며 유혹에서부터의 자유함을 얻었다고 선언한다. 간증을 들은 신학생들 가운데 놀라운 회개와 기도회가 계속 이어져 신학교 강의가 15일 동안 중단되었다. 어느 날은 사죄를 요청하는 편지가 200여 통이나 발송되기도 하였다. 이후로 한국교회에 놀라운 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주일날이면 오전에 개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는 초교파적으로 경성신학교에 모여서 성령대망회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 성결의 복음은 힘있게 확산되기에 이른다.

이 부흥이 2007년을 앞두고 우리 교단에 꼭 이뤄지기를 소원한다. 한국교회의 대표적 부흥운동의 기수였던 이성봉 목사도 1937년 교단총회에 참석 도중, 철야기도와 회의 때문에 지쳐, 신학교 기숙사 4층 서쪽 방에서 잠시 쉬려고 눈을 감았는데, 김익두 목사가 나타나서 오른쪽 옆구리에 안수를 받는 체험을 갖는다. 그는 자서전(『말로 못하면 죽음으로!』)에서 고백하기를 "김익두 목사님의 손이 닿자마자 '불의 폭발'이 일어났는데, 너무 뜨겁고 놀라서 화다닥 침대에 뛰어 올랐다. 꿈에서 깨어났지만 어찌나 혼이 났는지 온몸에 땀이 흐르나 심령은 매우 상쾌하였다"고 말했다.

그날 저녁 교단총회는 그를 순회부흥목사로 임명하였고, 그때부터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복음을 다이나믹하게 증거한 것이다. 박명수 박사는 이성봉 목사님 자신의 고백으로 봐서, 목사님 자신이 그 생애에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여긴다고 말한다.

이상으로 볼 때 모든 부흥운동의 기폭제는 성령세례요 성령충만이다. 1907년 한국교회의 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오순절이다(행 2:1-4). 이 부흥은 남감리교 하디 선교사가 주축이 되어 1903년에 시작하였고 1907년에 길선주 장로를 중심으로 절정을 이루었으며, 1909년에 100만 구령운동을 일으켰다.

금번 2003년 교단 총회는 2007년에 "100주년 100만 성결인"을 결의하였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도 논의하였다. 그러나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통한 부흥운동이 밑받침되지 않는 프로젝트는 허상이 되고 말 것이다. 웨슬리의 부흥운동이 페터레인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명직, 이성봉 목사님의 성결운동도 성령세례와 불세례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끝으로 시대적인 부흥운동은 인간들의 운동(movement)이 아닌 하나님의 운동이기에,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계획하시고 주도하시기에 더욱 겸손히 늦은 비의 성령을 사모하며(욜 2:23) 기도할 때, 1907년 한국교회의 대부흥이 100주년 되는 2007년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활천 2003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