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 이념과 예수의 하나님 나라

문화인류학적 고찰

조태연 박사(드류대학, 신약성서)



I. 들어가는 말

이 연구의 목적은 구약시대로부터 예수 동시대의 유대교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성결의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그 심층적인 면에까지 분석적으로 살펴본 후, 이에 대한 역사적 예수의 입장을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성결교단이 추구해야 할 성결에 대한 올바른 시대정신을 제시하는 것이다. 특히 성결 이데올로기의 심층적 분석을 위하여 이 연구는 문화인류학적 통찰을 중시할 것이다.

이 연구는 우선 성결의 역사적 맥락을 다룰 것이다. 특히 포로 귀환 이후 에스라의 종교개혁과 그 이후의 이스라엘에서 성결이 어떻게 제도화되었는가를 살피되, 바리새적 정결과 성결의 제도를 중시할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사상 및 관행과 직결되기 때문이다(제2장). 그 다음엔 이스라엘 사회문화에서 핵심적인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한 성결 이념이 어떻게 인간에게 성결을 요구하게 되는지를 매우 실제적으로 다룰 것이다(제3장). 그런 연후에 구약성서와 예수 동시대 성결의 이데올로기를 문화인류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성결 이데올로기의 심층구조를 규명하도록 시도할 것이다. 특히 그것은 장소, 시간, 그리고 사회계급의 각 차원에서 경계의 설정과 계급화를 통한 '구분'과 '분리'의 형태로 제도화되었다는 점을 설명할 것이다(제4장). 그리고 나서 이상의 장업에 기초하여 역사적 예수가 이 성결의 이데올로기를 얼만큼 수용하고 또 얼만큼 거부하였는지를 살필 것이다(제5장). 여기서는 예수의 비유, 기적 이야기, 선언문 이야기, 그리고 수난사화 등의 예수전승을 중시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물론, 전체적으로는 성결교단이 추구하는 성결의 가치가 혹시 역사적 예수께서 척결하셨던 '제도화된 성결'의 역기능을 답습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해석학적인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 연구는 (1) 성결교회가 전통적으로 주장해온 순수 심령적 성결 보다는 인간 내면적 동기의 성결을 추구하는 성결론으로 전환할 것과, (2) 사회적 성결과 문화적 성결을 주창하는 데까지 성결론의 영역을 확장할 것을 제안할 것이다.

 

II. 성결의 역사학

A. 성결의 이념체계

유대인들의 역사를 관통하는 단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사상이 있었다면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카도쉬](qadosh) 즉 성결(거룩성)이었다. 히브리 사상에서 [카도쉬]의 중심성은 포로 이후 지배적으로 '제의적 정결'(ritual purity)이라는 이념 체계로 나타난다. 에즈라는 포로 귀환 이후 유대 땅에서 일대 종교 개혁에 성공하였는데, 그 핵심 프로그램은 새로운 율법의 반포와 유대 사회 행정 조직의 재편을 통해 이룩한 '성전 국가'(temple state)의 형성이었다. 오직 제의적/제사적 정결과 관련된 것들만 모세의 오경과 동일할 뿐, 에즈라의 율법은 다른 율법이었다. 행정 조직의 재편은, 예루살렘의 유력한 사제 가계가 성전 제사의 시행 및 감독은 물론 국가적 정의 구현을 위한 권력조차도 독점하는 방향으로 이루어 졌다. 모든 유대인들이 까다로운 음식 규정 등 율법을 지키는 것도 그리고 제사를 드리는 것도, '구별된'(거룩한) 하나님을 닮은 '구별된'(거룩한) 백성으로서 정결을 지키고 또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히브리성서 여러 전통에서 인간의 성결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제사 전통의 저자들은 하나님께서 제의적 정결 즉 올바른 제사와 구별을 요구하신다고 말한다. 예언자들에게 성결은 사회 정의와 인간관계의 평등성을 뜻한다. 현인들에게 그것은 내적 통전성과 개인의 도덕적 행위의 순수성을 뜻한다. 마카비 독립운동 때의 그 폭력적 저항도 바리새파나 에세네파 등 여러 종파(정파)의 출현도, 모두가 땅과 백성의 정결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의 사회와 문화와 그리고 종교는 '성결' 곧 제의적 정결이라는 한 가지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하여 형성되어 있었다. 이 점은 그리스도교 기원에 관한 멀튼 스미드(Morton Smith)의 예리한 분석에 잘 반영되어 있다: "정결법 해석의 차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식탁교제의 끝없는 문제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그리스도교[예수운동]를 나머지의 유대교로부터 구분시키고 나아가서 초기 그리스도교의 분파를 만들게 한 가장 중요한 원인들 중 하나이다." 이렇게 유대교의 사회 세계가 성결의 이념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그것은 자신의 백성에게 성결을 유지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성결함을 나누도록 하시는 질서의 하나님 창조자의 비젼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성결은 창조의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요 우주적 섭리이기 때문이다.

B. 바리새적 정결과 식탁교제

문헌사적, 종교사적, 그리고 역사적 맥락에서 보다 분명한 사실로 입증된다. (1) 문헌사적 맥락은 바리새인들의 율법 전통에서 식탁교제가 가장 중심적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밝혀준다. 랍비 전승 가운데 가장 핵심을 이루며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샴마이 학파와 힐렐 학파에 귀속되는 법률들이다. 이들 총 341개의 개별적 율법 단화들(pericopae) 가운데 229개 이상이 바로 식탁교제에 관한 규정이다. 이들은 음식의 정결한 준비에 관한 법, 음식의 정결한 보관에 관한 법, 적법하게 농작물을 자라게 하는 법, 십일조 등등을 포함한다. 즉 그들의 율법 전통 가운데 67 %인 2/3가 바로 식탁교제에 관한 것이다. 제의적 정결에 대한 관심은 이렇게 식탁교제에 관한 규정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2) 종교사적으로, 바리새인들의 율법 전통에서 식탁교제가 갖는 제사적, 구원적 의미와 기능도 예수 운동과 바리새 회당 사이 갈등의 현장은 역시 식탁교제의 자리였음이 입증된다. 제사장들의 관심이 성전 제사를 통하여 제의적 정결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것이라면, 바리새인들은 율법 준수에 입각한 일상 생활을 통하여 정결을 얻고 지켜 나간다. 전자가 성전의 제사장이라면 후자는 이스라엘 땅의 제사장인 것이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음식을 "마치 자신이 성전의 제사장인 것처럼 정결한 상태에서" 먹어야 한다. 음식의 정결을 위한 이 바리새적 노력으로부터 유대교의 식탁교제법(dietary law)이 나왔고, 이 법은 언제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누구와 함께 먹을 수 있나를 규정하고 있다. 음식과 그 소비는 제사적 행위로 이해되고 있으며, 따라서 식탁, 부엌, 경작지 등 모두는 성전의 개념처럼 이해되고 있다. 이런 바리새 전통에서 식탁교제는 인간의 구원과 관련하여 설명된다. 랍비 문헌의 한 구절은 이렇게 읽는다: "성전이 서 있을 때 이스라엘을 구속한 것은 제단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의 식탁이 그를 구속한다"(B.Berakhoth 55a). 분명 이 구절은 유대 전쟁과 성전 파괴 이후의 것이지만, 이것은 오래 전 부터 있었던 바래새인들이 "땅의 제사장"으로서 식탁의 사건을 통하여 정결을 확보하고 유지하려 했던 전통에서부터 발전한 것이다.

(3) 이상에서 살핀 바 유대인(특히 바리새인)의 삶에서 식탁교제의 중심성은 유대민의 역사적 경험에서 온 것이다. 제사문서(P)와 에즈라 종교개혁 이후 유대 사회는 전적으로 제의적 정결이라는 종교적/문화적/신학적 이데올로기 아래 형성되었다.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Antiochus Epiphanes IV) 때에 헬레니즘화의 강요와 수용 여부를 둘러싼 정치적/종교적 격변(주전 2세기 초중엽)은 유대민의 삶 자체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특히나 안티오커스 4세가 주전 167년에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제우스의 신상을 반입하여 여호와 제사를 제우스 바알 샤마임의 제사로 바꾸고 또 새 칙령을 반포하여 그 종교 예식에 참여하도록 했을 때, 그는 유대인들에게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하였다. 이것을 먹으면 이는 헬레니즘화를 수용하고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거부하면 이는 헬레니즘화를 거부하고 순교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마카비2서 7장은 돼지고기를 거부했던 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장렬한 순교를 그리고 있다(1-42절). 어머니 앞에서 처음 여섯 아들이 차례로 죽어야 했고 막내 아들 앞에서 어머니가 순교 당해야 했으며 마침내 막내 아들조차도 처참하게 살육당해야 했던 그 끔찍한 절차와 과정 배후에는, 그렇게 순교를 당할지언정 돼지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그 어머니의 타협 없는 신앙이 자릴 잡고 있다. 유대 역사 면면을 통하여 식탁교제에서의 정결과 부정은 이렇게 말할 수 없이 깊은 상징성을 가졌으며,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죽음을 불사할 만큼 중요한 문제였다.

 

III. 성결의 윤리

성결이 경계의 설정을 의미하고 또 성결의 등급화와 계급화 위에 유대인들의 사회세계가 건설된다면, 하나님의 성결은 인간이 성결의 상태를 유지하며 살아가도록 요구한다. 성결의 이데올로기가 인간에게 어떤 윤리적 규범을 준다는 뜻이다. 히브리인들의 삶과 종교에서 [카도쉬]가 개인의 경건 생활에만 국한된 어떤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히브리 백성의 공동체 전체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어느 정도 정치적인 것이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거룩한 것과 같이(레 19:2).

"내가 거룩하니"는 성서 전체에 나타나는 하나의 후렴구와도 같다(레 11:44,45; 19:2; 20:7,26; 21:28; 벧전 1:16; 마 5:48등). 하나님의 성결은 축복도 하고 저주도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즉 세계를 질서 있게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해되었다. 이 말씀은 형식상 '하나님을 본받음'(imitatio dei)이다. 하나님의 속성과 이미지가 공동체 윤리를 결정짓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결하시니 모든 이스라엘도 성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강림하실 때 모세가 백성을 성결케 하듯,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모든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성결하게 지켜야 한다(출 19:0-12).

성결 곧 제의적 정결의 반대는 불결 곧 제의적 부정이다. 문화인류학적으로는 이를 가리켜 '오염'(tum'ah)이라 부른다. 사회적으로 오염은 또한 율법(사회법)을 위반함으로써 우주적 조화를 혼란케 하는 인간 행위에 기인하기도 한다. 종교를 연구하는 문화인류학자들은, 성서의 죄란 결국 사회적 비행(非行)으로 말미암아 우주(우주관, 조화와 질서)에 일격을 가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 행위가 윤리적이든 종교적이든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하는 것이면 말이다. "고대인들은 '죄'와 '부정'을 구분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서 모든 죄는 부정을 일으킨다."

구약성서의 레위기는 성결 뿐 아니라 오염에 대하여도 훨씬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레위기의 제사법전을 따르면 오염을 유발시키는 이들 과정은 죽음(21:1-4), 출산(12:1-5), 월경(15:19-24), 그밖에 남녀 성기를 통하여 유출되는 통제할 수 없는 배설(15:2-12, 25-27) 등을 포함한다. 즉 오염은 주로 식생활이나 성생활 같은 신체 활동 그리고 유독성 피부 질환이나 성기로부터의 배설이나 몽정(夢精)이나 또는 월경 등 통제할 수 없는 신체 활동의 두 가지를 통하여 발생한다. 제사 법전에서 가장 큰 죄는 간음, 근친상간, 호모섹스, 수음, 월경 중인 여인과의 성관계 등 성적 범죄이다(18:6-23; 20:10-21). 이들은 율법에 규정된 바 정결례를 따라 '씻어' 없애야 한다. 그래야 죄로 말미암아 붕괴된 그 우주적 질서를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결법전(레위기 17-26장)은 불법의 성관계를 제의적 오염의 근원으로 본다. 자연 여기에 연루된 사람들뿐 아니라 그들의 거룩한 땅을 더럽히는 것이 된다. 성적 관련을 규정하는 율법은 이집트인들과 가나안인들을 닮지 말라는 명령으로 시작한다. 이는 에굽 왕실의 근친상간과 가나안 토착민들의 호모섹스(창 19)를 일컬음이다. 이 경고의 심층 구조에 놓여있는 신학적 이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식생활(식탁교제)과 성생활에서 스스로를 주변 나라들로부터 '구별'하라는 것이다(레 11:46-47). [카도쉬]는 "성결"이라는 말로 번역되지만 그 문자적 의미는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구별(성별)한다"이다.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은(출 19:6) 하나님을 본받아 자신을 구별해야 한다: "너희 하나님 나 야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레 19:2). 이는 개인과 국가의 존속에 가장 중요한 생의 두 요소 즉 음식(11:44)과 성관련(19:2; 20:26)에서 제의적 정결의 엄격한 율법을 지킴으로써 가능하다.

유대사회에서 여성을 극단적으로 차별하던 원인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유대 사회와 문화 그리고 종교의 심층적 구조를 발견해야만 가능하다. 그것은 한마디로 성결 곧 제의적 정결의 신학적/종교적 이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여성들과 관련된 제의적 오염은 주로 월경으로 인한 오염 그리고 혼인법상 금지된 자와의 성관계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여성의 월경과 오염(레위기 12, 15장)은 어떠한가? 레위기 15장의 월경에 관한 제사법은, 월경 자체가 바로 부정이며 오염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듯하다. 피는 생명이고 태아에게 영양을 주는 것인데 월경은 피의 유출이기 때문이다. 여인이면 무조건 성결치 못하고 부정하다는 뜻이다. 둘째, 보다 중요한 불법의 성관계와 오염(레위기 18, 20장)은 또 어떠한가? 성결법전(레위기 17-26장)은 불법의 성관계를, 제의적 오염의 근원으로서 여기에 연루된 사람들뿐 아니라 그들의 거룩한 땅을 더럽히는 것으로 본다.

여인들에 관한 제사 법전의 율법은 남성들의 정결(성결)을 유지하기 위해 고안된 것들이다. 이스라엘 가부장 문화의 남성중심적 세계관에서 이 두 가지 오염은 여성들에 의하여 남성들에게로 전이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와는 반대로 남성이 여성을 오염시키는 경우는 없다. 남성과 사회(우주)의 오염 원인이 바로 여성이라는 것이다.

 

IV. 성결의 인류학

A. 성결의 계급화

초월과 그 속성인 거룩의 체험이 모든 부족의 종교와 문화 그리고 인간 삶에 반드시 필요한 '보편적' 현상이었다지만, 그것이 '약소국' 히브리인들에게는 남다른 경험이었고 특별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영국의 유대인 문화인류학자 매리 더글러스(Mary Dougla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의가 몸(body)의 구멍들에 대한 조바심을 표현할 때, 사회학적으로 이 조바심은 바로 정치적 문화적 소수 집단을 보호하고자 하는 관심에 해당한다. 그들의 역사를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제나 곤궁한 소수파였다. 그들의 신앙 체계는 오염, 피, 고름, 배설물, 정액 등 온통 몸과 관련된 쟁점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들의 몸의 정치(body politic)의 억압된 경계선(boundary)이 신체적 몸의 통전성, 통일성 그리고 정결성에 대한 그들의 관심에 잘 반영되어 있다 할 것이다.

약한 자들의 소수 집단에게 성결의 경험이 몸의 상징 안에서 경계선과 관련하여 더욱 예민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그리고 종교적으로나 유대인들에게 유일한 이념 체계였던 성결 이데올로기의 심층 구조에 접근하기 위하여 구약성서의 한 본문을 인용해보자. 몇 가지 통찰을 주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무론하고 살지 못하리라. 나팔을 길게 불거든 산 앞에 이를 것이니라" 하라(출 19:10-12).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보는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으로 강림한다. 신현(神顯)의 사건이다. 모세는 백성을 성결케 해야 한다. 성결을 위하여 백성들이 하여야 할 일은 무엇인가? 적극적으로는 옷을 빨고 준비해야 한다. 성결은 깨끗함이고 따라서 정결이다. 소극적으로는 신현의 장소에 대하여 접근을 삼가야 한다. 범하는 자는 정녕 죽을 것이다. 이 일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경계선)을 설정한다. 신현의 사건이 종교학적으로는 누미노제(numinous)의 경험이지만 인류학적으로는 금기(터부)의 현상인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성결의 요구는 외형상 적어도 '경계의 설정'과 '성결 상태의 유지'로 구체화된다. 이것을 범하는 모든 자들은 죽게 될 것이다.

성결은 역시 경계의 설정을 의미한다. 그것은 정결이 모든 부정한 것으로부터 '분리'(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창조의 사건에서부터 나타난다. 하나님의 창조는 근본적으로 혼돈의 상태를 질서와 조화로 바꾸어놓은 사건인데, 이는 '분리'를 통하여 발생한다. 하나님은 공간을 기본적으로 하늘, 뭍, 바다의 세 영역으로 '분리'하시고 각 영역에 사람/과 모든 동식물을 배치하였다. 제사 때 제물로 사용될 수 있는지 여부 및 인간이 먹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그 동물의 정결의 상태에 따라 구분된다. 특정 동물의 정결의 상태는 그들이 그 세 영역 중 자신의 자리에 있는지와 함께 그 동물의 규범적 습관 그리고 이동 수단에 의존한다.

동물 뿐 아니라 물건이든 공간이든 시간이든 심지어 사람이든 정결과 부정의 기준에 따라 '구별'된다. [카도쉬] 즉 성결하다는 것은 본래 "구별된," "격리된," "특별한," "성스러운," "고양된" 등을 뜻한다. 이를테면, 창세기 2장 3절을 따르면 안식일은 한 주의 모든 날과 구별되어 '특별한'(거룩한) 날이 된다. 레위기 19장 2절을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백성들과는 구별되어 성결해지도록 [케도쉼](qedoshim)의 명령을 받는다. 11장 44절은, 금지된 음식의 그 긴긴 목록조차 유일한 목적과 절정은 바로 이 백성의 [케도쉼]임을 규명한다.

성결이 갖는 "구별"의 성격은 모든 것을 정결과 부정의 이분법적 범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정결과 부정의 정도에 따라 등급화하고 계급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공간, 시간, 그리고 사람(사회 계급)에 대한 성결의 등급화와 계급화(hierarchy)는 고스란히 유대인들의 '사회 세계'(social world 또는 symbolic universe)를 구성한다.

B. 공간의 계급화

멀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일찍이 자신의 책 {성과 속. 종교의 본질}에서 "거룩한 공간과 세계의 성화"(聖化)가 세계 도처의 종족들과 종교들에서 얼마나 보편적인지를 밝혀주었다. "공간의 비균질성이라는 종교적 경험은 하나의 원초적 경험이며 세계의 창건과 동일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공간의 분리와 특정한 구역의 성화는 보편적으로 몇 가지 패턴을 보여준다:

1.지평의 돌파: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야곱의 사다리(창 28:10-19)든 유목민 아룬다 부족의 카와아와(거룩한 기둥)든 하늘 곧 초월과 맞닿아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하여 특정한 구역은 다른 모든 공간과 구별된다. 이 구역은 성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2.이행의 출구: 이 특정한 공간 안에 거주한다는 것은, 그곳이 성화되어 있는 만큼이나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조차 초월자(神)의 성품(거룩)에 참여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 안에 있어야만 존재의 이행(移行)이 발생할 수 있다.

3.세계축 상징: 그러므로 하늘과의 교섭은 기둥, 사다리, 산, 나무, 덩굴 등의 이미지로 표현되는데, 이들은 모두 세계의 축(axis mundi)과 관련된다.

4.세계의 중심: 인간의 세계는 이 우주적인 축을 둘러싸고 펼쳐지며 따라서 이 축은 '가운데'에 즉 '대지의 중앙'에 위치한다. 그것은 세계의 중심이 된다.

엘리아데의 예리한 관찰을 분석하면, 공간의 구분과 세계의 창건이 '높이'와 '중심' 두 가지를 핵심으로 하여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아득한 기원의 시간에 신(신들)이 세계를 창조한 사건의 제의적 모방이며 반복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곧 특정한 구역과 여타 구역 사이에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카오스로부터 코스모스를 창건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은 오직 '중심'에 거주하게 된다.

유대인들에게 경계의 설정과 공간의 구분은 동일한 방식으로 그러나 훨씬 더 정교한 양상으로 발생한다. 마태복음 23장 16-22절이 성결의 정도에 대한 공간의 차등화를 반영하듯, 유대인들은 모든 '공간'이 성결한 곳과 부정한 곳으로 구분된다고 믿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에 창궁 위의 물을 아래의 물과 분리시켰고, 바다를 뭍으로부터 분리시켰다.

고대 유대문헌 m.Kelim은 공간이야말로 다음과 같이 성결의 정도에 따라 열 가지로 차별화됨을 보인다:

거룩성에는 10 가지의 정도가 있다:

 

1. 이스라엘의 땅은 그 밖의 땅보다 거룩하다...

2. [이스라엘 땅의] 성을 가진 도시는 더욱더 거룩하다...

3. [예루살렘의] 성 안은 더욱더 거룩하다...

4. 성전산은 더욱더 거룩하다...

5. 담 안에는 더욱더 거룩하다...

6. 여인의 뜰은 더욱더 거룩하다...

7. 이스라엘인의 뜰은 더욱더 거룩하다...

8. 현관과 제단 사이는 더욱더 거룩하다...

9. 성소는 더욱더 거룩하다...

10. 지성소는 더욱더 거룩하다...(m.Kelim 1.6-9).

이스라엘 땅 밖은 이방인의 땅으로서 부정하다. 가장 거룩한 곳은 지성소다.

 

공간에 따른 성결의 계급화에 대한 어떤 심층구조라도 발견할 수 있는가? 공간의 차별화에 대한 어떤 원칙이라도 존재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높이'와 '중심'이다. 위로 갈수록, 바깥으로부터 중심으로 향할수록 그래서 지성소에 가까울수록 거룩하다는 점이다. 지성소야말로 하나님께서 체루빔 위에 좌정하시는 바로 그곳이다.

 C. 시간의 계급화

엘리아데를 따르면, 공간이 거룩한 곳과 세속적인 곳으로 나누이는 것처럼 시간도 거룩한 시간과 세속적인 시간으로 분리된다. 거룩한 시간은 신화적 시간 즉 태고의 원초적 시간이 축제나 다른 제의를 통해 현재화된 시간이다. 거룩한 시간은 언제나 순환적(circular)이고, 주기적(cyclic)이며, 가역적(reversible)이고, 회복가능한(recoverable) 시간이다. (1) 순환적이라 하면 그 원초적 성(聖)의 시간이 되돌아온다는 뜻이고 신화적 시간 즉 신(신들)이 활동하던 태초의 시간이 현재화된다는 뜻이다. (2) 주기적이라 하면 그 되돌아옴의 현재화가 일정한 주기를 두고 발생한다는 점이다. 계절이 규칙적으로 순환하듯, 혹은 새 해가 돌아오면 새로운 해(年)가 시작되고 새 달이 뜨면 또 새로운 한 달(月)이 시작되듯, 시간에는 나름의 질서가 있어, 시간의 순환이 규칙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3) 가역적이라 하면 오늘을 사는 현대인이 축제와 다른 제의를 통하여 그 아득한 기원의 시간 곧 태초의 거룩한 시간으로 되돌아가 신(신들)과 동시대인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4) 회복가능하다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아득한 기원의 시간으로 되돌아가 신(신들)의 사건에 참여하고 그가 행한 신화적 사건을 지금 반복할 수 있음을 뜻한다.

유대인들에게 성결의 계급구조는 공간뿐 아니라 '시간'에도 적용된다. 유대인들의 성스러운 축제에 관련한 절기를 관찰하면, 보편적인 종교문화에 대한 엘리아데의 분석과 상당부분 일치한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유대인들에게 성결의 정도에 따른 시간의 계급화가 훨씬 더 정교하게 발생함을 알 수 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낮을 밤으로부터, 노동의 날로부터 안식의 날을 분리시켰다. [제아림]('씨')에 이어 미쉬나의 두 번째 분류인 [모에드]('절기')는 다음과 같이 성스러운 시간들의 목록을 제시한다:

 

1. Shabbath & Erubin--------------------- 안식일

2. Peshaim------------------------------- 유월절

3. Yoma---------------------------------- 대속죄일

4. Sukkoth------------------------------- 초막절

5. Yom Tob------------------------------- 축제의 날들

6. Rosh ha-Shana------------------------- 신년축제

7. Taanith------------------------------- 금식의 날들

8. Megillah------------------------------ 부림절

9. Moed Katan---------------------------- 중간-축제의 날들

 

여기에는 바로 성결의 계층화가 이루어져 있다. 안식일은 하나님 당신이 안식하셨던 날이고, 따라서 창조의 시간으로 소급하므로 가장 거룩한 시간이다. 유월절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이집트로부터 이끌어내어 이스라엘을 창조하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그러므로 유월절은 안식일 다음으로 거룩하다. 그 다음에 욤키퍼(대속죄일), 숙곳, 로쉬 하샤나가 따르고 그 다음에 부림절 등 덜 거룩한 절기의 날들이 온다.

시간에 따른 성결의 계급화에 대한 어떤 심층구조라도 발견할 수 있는가? 시간의 차별화에 대한 어떤 원칙이라도 존재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원초적 순간과의 거리이다. 시간에 따른 성결의 계급구조는, 그 시간이 우주(cosmos = 조화)의 창조에 가까울수록 그래서 하나님에 가까울수록 높이 위치한다. 성결의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끝없이 경계선을 긋고 공간이든 시간이든 모든 것을 나눈다. 유대교의 '사회 세계'(우주)는 이렇게 형성되었다.

D. 인간의 계급화

공간과 시간에 나타난 정결의 등급화는 사회적으로 유대인들의 '계급구조'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사람들은 거룩함의 정도에 따라 다음과 같이 열 가지 계층 구조로 나누인다:

 

1. 제사장

2. 레위인

3. 이스라엘 사람

4. 개종자

5. 해방 노예

6. 결함이 있는 사제들

7. 성전 노예들

8. 사생아

9. 고환에 상처받은 자

10. 성기가 없는 자(t.Meg 2.7)

 

유대 사회에서 한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혈통과 율법에 대한 지식의 두 가지였다. 우선은 이 목록에서 보듯 혈통의 정결성 여부에 따라 처음 세 범주의 사람들을 이방인들로부터 구별시킨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내부에서는 혈통이 가장 순수한 사람들이 성직자로서 사회의 최상부를 형성한다. 그리고 비성직자 계층 가운데 율법의 지식이 가장 깊은 서기관들(율법학자들)과 율법을 잘 지켜 일상생활을 정결하게 지켜가는 바리새인들이 피라밋의 그 다음을 차지한다. 물론 정결의 계층 구조에서 밑바닥에 놓이는 자들은 가장 부정한 자들이다. 여기에는 혈통이 정결치 못한 자들뿐 아니라 치명적인 신체적 불구자들을 포함된다. 이렇게 거룩성(holiness)이란 온전성(wholeness) 또는 정상성(normality)을 일컫는다.

또한 사람의 계층화는 공간의 계층화와 일치한다. 한 사람의 위치는 그가 성전과 얼마나 가까우냐에 달려있다. 제사장들은 가장 거룩하다. 그들은 지성소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는 레위인들이 거룩하다. 그들은 성소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룩하다. 그들은 성전 주변에 살며 성전 뜰까지 들어가기 때문이다. 인간의 계급화는 거주의 범위 또는 접근 가능한 영역 즉 공간의 계급화와도 일치하지만, 이 양자는 무엇을 먹을 수 있는지와 관련하여 성결의 정도에 따른 음식물의 등급화와도 일치한다. 아래 그림을 보라:

 

음식 및 거주 공간에 따른 하나님과 인간의 영역

하나님

제 물

성 전

이스라엘인

정결한 동물

이스라엘 땅

이방인들

모든 동물

이스라엘 밖


제물의 부분에 따른 정결의 구분

하나님

제단에 놓인 부분

제사장

셸라밈의 가장 정결한 부분

이스라엘인

셸라밈의 다른 곳


성전 내부의 부분에 따른 정결의 구분

대제사장

지성소

대제사장, 제사장

성소

제사장, 이스라엘인

성전뜰



IV. 성결 이념에 대한 예수의 도전

'중심'과 '높이'로 귀결되는 성결의 이데올로기를 예수 같으면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께서 이루려 하셨던 하나님의 나라는 성결의 이데올로기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예수의 한 비유는 예수의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겨자씨의 비유이다: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 아래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 4:30-32).

놀라운 점은, 이 비유의 본래 형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나물보다 큰 어떤 것과 같았다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저 '작은 것'에 불과하였다는 말인가?

예수의 이 비유는 본래 에스켈 17장의 세계수(世界樹) 이미지와 여기서 영향을 받은 다니엘 4장의 우주목(宇宙木) 이미지를 배경으로 읽어야 한다. 겨자씨의 비유는 이 이미지에 대한 한 패러디(parody)이기 때문이다. 다니엘의 우주목(宇宙木) 이미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침상에서 나의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이 이러하니라.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데 고가 높더니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고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무릇 혈기 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더라(단 4:10-12).

이 이미지는, 세계의 '중심'에 서서 '높이' 자라 세계를 그 그늘로 덮는 고대 동양의 세계수 신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묵시문학적 기대 구조에서 열망되어 온 메시아 왕국을 일컬음인데, 역시 그 왕국은 '중심'과 '높이'로 표상된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에서 그 씨앗이 다 자란 결과는 무엇인가? 예수의 시상(詩想)에서 하나님의 나라란 무엇과 같은가? 그것은 작고 초라한 나무에 불과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물들보다 조금 더 큰 것이다. 겨자 나물은 다 자라도 1 m 남짓의 '작은' 키일 뿐이다. 그리고 그 씨는 뿌려지기 무섭게 '어느 곳이나' 금새 넝쿨처럼 덮어버린다. 땅의 중심에서 우아하고 수려하게 고고하고 빼어나게 자라질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아, 다 자라도 이렇게 초라하고 볼품없는 나물이 될 것이다. 더욱이 그 나물은 더 이상 세계의 중심에 있지도 않는다. 이스라엘 땅의 어느 곳에라도 하찮게 존재하면 된다. '높음'은 '낮음'으로 변하였다. '중심'이 '주변'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작고 아무렇게나 널려 있어야 나 같은 서민과 모든 자격 없는 자들이 몸 붙여 살 수 있지 않을까! '높음'의 하나님은 이렇게 '작음'의 하나님으로 바뀌었다. '낮음'의 하나님이나 혹은 '깊이'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중심'의 나라(메시아 왕국)는 결국 '주변'의 나라(하나님 나라)로 전락하였다.

성결의 이데올로기가 전통적으로 중심과 높이를 그 핵심으로 하였다면,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심으로써 성결의 이데올로기를 깨셨다는 말인가? 예수의 이러한 사상은 가르침이나 행적 등 그의 사역에서도 유사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첫째, 예수는 시간의 경계를 부수셨다. 안식일에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쳐준 이야기를 보자(막 3:1-6). 바리새인들도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노동은 허용하였다. 하지만 그 환자의 경우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그런 화급한 사정이 아니었다. 예수는 해가 지고 다음 날이 되어 고쳤어야 했다. 그러나 생명 현상을 일으키는 일이라면 안식일의 노동이라도 마다할 필요가 없다. 가장 정결한 시간으로서의 안식일이 그 본래적 의미를 상실하였다.

둘째, 시간 경계의 부숨은 마침내 신과 인간 사이의 경계를 부수고 말았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 예수는,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는 안식일조차도 그것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아들이 안식일에도 주인이 된다"(막 2:23-28). 그래서인지 하나님의 전권인 죄 사함의 권한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의 아들에게로 내려온다(막 2:1-12). 하나님은 가장 낮아져서 굶주린 자들이나 감옥에 갇힌 죄수들의 모습으로 존재한다(마 25:31-45). 예수는 이렇게 '신학함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졌기로, 성결의 이념과는 정반대로 '낮음의 인류학'을 세상에 내어놓을 수 있었다.

셋째, 예수께서는 시간의 경계 뿐 아니라 장소의 경계도 부수셨다. 위 비유에서 드러나는 바 낮음의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신학은 그를 중심에서 주변으로 내어 몰았다. 기적 이야기들에서 예수는 성전을 향하여 곧 중심을 향하여 가질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사회적' 경계의 너머로 가며(막 5:1-20, 21-43, 24-34; 7:24-30, 32-37; 8:22-26 등) 병자들의 부정한 신체와 부정의 극단인 시체를 지향한다(막 5:21-43에 있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과 야이로의 딸 이야기를 보라). 예수야말로 높음에서 낮음으로, 중심에서 주변으로 지향했다 할 것이다. 동시대의 유대인들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말이다.

수난사화에서 예수 최후의 날들에 관한 이야기는, 예수 운명의 시간에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던 휘장이 찢어졌다고 단언한다(막 15:38; 마 27:51; 눅 23:45; 베드로복음 V.19). 신의 현존과 그로 말미암는 지고한 성스러움이 한낱 커튼 조각으로 보장될 순 없었다.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와 다함이 없는 사랑이 소수의 사제적 권력 엘리뜨에 의하여 독점될 수는 없었다. 성결의 위계구조가 완전히 혁파되었다!

넷째, 예수는 시간과 장소의 경계 뿐 아니라 사람의 경계 곧 인간 계급과 사회구조를 부쉈다. 높음의 야훼를 종교적 이미지의 핵심으로 설정하는 사회에서는 피라밋의 위계 구조가 필연이라면, 이렇게 '낮음'의 하나님을 설정할 때에는 그 공동체가 평등적 구조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낮음의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상징은 '배타성이' 아니라 공동체를 '개방'과 '포용'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예수가 "죄인들과 세리들의 친구"가 되고(눅 7:34) 따라서 예수의 식탁이 많은 "죄인들과 세리들"로 가득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막 2:13-17).

물론 높음에서 낮음으로 그리고 중심에서 주변으로의 이동은 유대인들의 종교적/문화적/사회적/정치적 이데올로기였던 [카도쉬]의 극복을 통하여 가능하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러한 정결 체계 안에 존재하시지 않는다. 반대로 하나님은 가장 부정한 자들의 삶 안에 사시고, 그의 존재 양식은 '초월'이 아닌 '세속'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진리란 위로부터의 '계시'가 아니라 언제나 아래의 일상에 '내재'되어 있는 그 무엇이다. 그래서 예수의 육성과 체취를 가장 많이 보존한 예수의 비유들이야말로 한결같이 자연 현상과 평균적 인간의 일상사만을 재료 삼아 그 찬연한 신학을 연출한다.

 

V. 나가는 말

구약성서 시대의 히브리인들이나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은 성결을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민족의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유대인들의 성결은 경계의 설정과 분리 그리고 차별화를 통하여 모든 것들을 등급화하고 계급화함으로써 획득 및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편에서 볼 때에 거룩한 '시간'을 폐하였고, 부정한 '장소'로 향하였으며, 성결한 사람이 아니라 부정한 '사람들'과 교제하였다. 물론 부정은 성결의 상태와 대립 명제로만 존재하였다.

예수께서 이 성결 이데올로기를 부순 것은 분명하다. 성결의 이데올로기는 일단 제도화된 이후에 많은 역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구약성서와 유대교의 성결 이데올로기를 부수고만 실현될 수 있었다. 전통과 관행, 상식과 통념, 그리고 교리와 제도는 결코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였다. 제도화된 성결에 대하여는 안중에도 없었던 예수에게는 오히려 인간 내면의 상태가 문제였다(막 7:1-23):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막 7:15-16).

만일 성결교회의 성결론이 "(1) 전통적으로 레위기 19장 2절의 "너희는 거룩하라, 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거룩한 것과 같이"의 명령을 기초로 하여, (2) 로마서 7-8장에 있는 바울의 실존적인 고뇌와 투쟁을 모범(script)으로 하는 신학"이라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이와 다르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결교회가 추구하는 성결은 어떠한 성결인가? 예수께서 폐기하신 성결인가, 아니면 예수께서 추구하신 바 구약성서와 유대교의 성결 제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나라인가? 그리하여 이 연구는 다음의 두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성결교회가 전통적으로 주장해온 순수 심령적 성결 보다는 인간 내면적 동기의 성결을 추구하는 성결론으로 전환함이 역사적 예수의 의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막 7:15-16). 둘째, 사회적/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분명 인간 환경은 향락과 퇴폐로 오염되어 있는 이 때에, 오히려 사회적 성결과 문화적 성결을 주창하는 것이 현대인들에게는 더욱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