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윤리를 위한 정초

한기채 목사
(
중앙교회)

 

 1. 들어가는 말

우리 나라는 지난 연말 외환위기로 인하여 국가부도 직전까지 가는 불행을 맞았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아서 국가부도사태는 간신히 면했지만 이번 경제위기는 많은 고통과 더불어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경제위기를 맞게 된데는 지속된 경상수지 적자, 대외신인도의 하락, 국제 경쟁력의 하락, 정경유착, 관치금융, 정치 사회부패, 기업윤리 부재 등 한국 경제의 총체적 부실에 1차적인 원인이 있지만 과소비, 퇴폐문화, 거짓, 오만, 부패, 책임회피, 이기주의 등 문화, 윤리적 실패 그리고 신앙적 거룩함과 순결의 실종, 영적 타락에도 기인하고 있다. 그러므로 외환위기는 경제위기에서 촉발되었고, 경제위기는 문화와 도덕의 위기에서, 다시 도덕적 위기는 영적인 위기에서 왔다고 믿어진다. 이렇게 우리는 총체적인 위기를 당하고 있다. 지금의 위기는 몇몇 경제 정책을 실행한다고 쉽게 해소될 일이 아니다. 문제를 만든 패러다임(경제성장위주의 삶의 방식)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지금까지 살아 왔던 생활 방식을 과감히 개혁하고 새시대를 향한 새로운 윤리적, 영적 패러다임이 요구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18세기에 영국이 사회적, 경제적, 도덕적 위기 상황에서 혁명에 의하지 않고서도 어떻게 사회 개혁을 이루었는가를 웨슬레의 성결 운동에서 찾아 볼 필요가 있다. 웨슬레의 사회변혁 운동은 철저히 신앙적인 자각에서 일어난 영적인 운동이였다. 영적, 도덕적 운동인 성결윤리의 확립이 오늘의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1930년대 미국이 경제공항으로 한창 어려울 때 신앙인들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운동을 일으켜 신앙부흥과 더불어 도덕회복 그리고 경제적 안정을 함께 가져 왔던 것을 교훈 삼아야 한다.

국민의식 계몽, 가치관의 재정립, 상실된 덕목의 회복 등 철학적 윤리에 기반을 둔 시민운동도 어느 정도는 실효를 거둘수 있으나 철학적 윤리만으로는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그 한계는 철학적 윤리가 기반하고 있는 가정들이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철학적 윤리는 인간의 내적 선함을 가정한다. 그리고 지식과 덕이 상호연관되어 있다고 가정하므로 선이 무엇인지 알기만 하면 행한다고 한다. "내가 해야 한다"가 "내가 할 수 있다"를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가정한다. 이것은 인본주의적일 뿐 아니라 인간본성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의 소산이다. 인간성에 대한 현실적인 이해에 기초한 기독교 윤리가 전면에 나설 때가 된 것 같다.

맥킨타이어는 현대 사회의 도덕적 상황을 윤리적 바벨의 위기 상황으로 진단한다. 현대 사회는 상이한 가치관으로 균열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주장들이 어떤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각 주장의 전제들이 전혀 다른 규범적 또는 가치평가적 개념을 사용하며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맥킨타이어는 이러한 원인을 계몽주의 이후의 지배적인 윤리학의 패러다임인 흄학파, 칸트학파, 자유주의학파에서 찾았다. 칸트의 전통에 서 있는 규범윤리는 실제 삶의 관심에서 유리되고, 도덕적 행위와 행위자의 관계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도덕의 자율성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어떤 도덕 이성주의도 있을 수 없다고 맥킨타이어는 확신한다. 어떤 윤리 규범도 사람-시간-장소의 상호관계를 떠나서는 논의가 불가능하다. 규범윤리는 인간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에 대한 인식과 윤리적 결단이 시행되는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적절하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이것은 도덕적 행위자의 문제와 행동에 대한 콘텍스트 문제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므로 맥킨타이어는 적절한 도덕적 논의는 목적론적이며, 관계를 중시하는 이야기적인 성격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한다. 계몽주의 윤리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맥킨타이어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덕 윤리 전통에서 발견하였다. 이렇게 맥킨타이어를 비롯한 최근 미국의 윤리적 경향이 원칙과 규범 중심의 윤리에서 덕 중심의 윤리로 관심이 옮겨지고 있다. 도덕에서 행위와 결단을 강조하던 윤리적 경향이 도덕 행위자 자신에 대한 강조점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윤리에서 철학적 방법론을 사용하던 이론적 연구에서 경험을 중시하는 이야기 방법론으로 점차 모습이 달라지고 있다. 맥킨타이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윤리를 재발견함과 더불어 덕윤리 전통에 서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 조나단 에드워드, 요한 웨슬레 등이 최근 스텐리 하워바스 등의 기독교윤리학자들에 의해 심도 깊게 거론되고 있다. 하워바스는 전통적인 의무론적 윤리가 세 가지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 우리의 도덕적 경험의 본성을 왜곡하였다고 하였다. 즉, "첫째는 특정한 결정이나 불명확한 입장을 부당하게 강조했고, 둘째는 도덕적 개념의 중요성과 그것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인지 능력을 제공하는가를 설명하는데 실패했고, 그리고 셋째는 도덕적 행위자를 그들의 관심으로부터 분리시켰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개신교 윤리가 명령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면서도 사람의 성품 형성에는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웨슬레의 중요성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의 감성적인 면에 대한 강조와 기독자 완전에서 윤리적인 강조 등이다. 그는 도덕 규범이나 결정보다는 도덕적 행위자의 자아에 대해 우선적인 관심을 보이며, 완전을 향한 목적론적인 접근 방식을 보여 준다. 필자는 자연주의에 기반을 둔 철학적 윤리나 계몽주의의 주류를 형성한 의무론적 윤리 사상의 어려운 점들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윤리로서 웨슬레의 윤리사상에 근거하여 현재 우리의 상황을 감안한 성결윤리를 제안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덕 윤리 전통에 서 있는 웨슬레의 윤리 기조를 살펴보고 보완 발전시키는 데 주안점을 둔다. 특별히 기독자 완전에 대한 웨슬레의 신학에 기초하여 성결윤리를 세우기 위한 하나의 단서를 찾는 기초적인 작업을 하고자 한다.


2. 은총의 윤리

웨슬레는 인간의 본성은 전적으로 타락하였으며, 이런 타락은 원죄의 결과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의로워질 수 있다는 점에서 종교개혁자들과 의견을 같이 한다. 선행은 구원의 결과이지 구원의 필수 조건은 아니다. 자연적인 인간은 신적인 빛을 가지지 못하며 어둠 속에 산다. 자연적인 덕은 어거스틴이 말한대로 기껏해야 "찬란한 악덕"(splendid vices)이다. 웨슬레는 자연적 인간이 선행에 대해 무능력하다고 규정하므로서 외견상 보편 타당한 윤리를 위한 근거를 저버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해결책으로 선행은총론을 제시한다.

선행은총은 타락의 어두움 속에 갇혀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시는 과정의 시작이다. 선행은총은 타락한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와 양심의 활동(도덕적 생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신앙생활)을 회복시키는 힘이다. 죄의 영향력은 하나님의 자연적 형상, 정치적 형상, 도덕적 형상 모두에 미쳐 왜곡시키고, 타락시키고, 특별히 도덕적 형상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는데 선행은총으로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을 회복시키기 시작하는 것이다. 선행은총은 죽은 도덕적 양심의 감각을 되살려 자기 자신의 마음, 생활, 기질, 사고, 발언, 행동 중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분별하게 한다. 인간의 윤리적 감각과 선택의 자유를 회복시키는 이 선행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나면서 부터 주어지고, 이로 인하여 인간은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여 하나님 곁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의 회복은 그리스도 구속의 보편적 효력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행은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인간이 의지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선과 악의 행위가 졀정되므로 인간은 도덕적 존재이며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적인 존재가 된다. 이는 펠라기우스가 인간의 훼손되지 않은 자연적 능력이나,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담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가 전적으로 파괴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웨슬레는 인간과 하나님의 창조-타락-구속의 관계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 영혼에 대한 은혜의 영향력을 강조한다. 은혜는 사람이나 세계를 변화시키는 실제적인 능력이다. 은혜를 강조하므로 인간은 죄된 삶을 떠나 새롭게 태어나 내적으로 자신을 변화시킬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웨슬레는 인간본성에 대해선 비관주의를 보이나 은총에 대해선 낙관주의를 표명하며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의 타락을 능히 치유할 수 있는 은총의 승리를 말한다. 기독자 완전의 교리는 웨슬레의 은혜의 주권에 대한 강력한 증언이다. 구원론이 인간론에 선행하여 하나님의 완전이 인간의 불안전을 극복한다. 웨슬레는 인간의 불가능성보다는 하나님의 가능성, 인간의 두려움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았다. 이렇게 웨슬레는 인간본성을 현실적으로 이해하면서도 은총의 낙관주의를 통하여 강한 윤리의식과 도덕적 행위를 자극하였다. "윤리는 하나님의 은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선행적 은총 때문에 모든 사람은 도덕적 행동을 할 수 있고 도덕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다. 도덕은 은총의 결과이며 또 상세한 표현이다. 양심은 선행적 은총의 능력의 반영이다." 은혜는 성결을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성결을 위한 능력을 제공해 준다. 이로서 윤리적인 삶은 은총의 실천적인 결과로 나타나는 생활로 볼 수 있다. 성결윤리는 은총과 윤리의 유기적인 관계를 강조하므로 적극적이고 행동적인 윤리를 지향하며, 신앙과 윤리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신앙의 생활화를 한층 강화하는 역동적인 윤리가 되어야 한다. 성결윤리는 하나님의 은총에 그 출발점을 둔다.


3. 경험의 윤리

1738년 5월 24일 웨슬레의 올더스게이트 체험은 그의 구원관 뿐만 아니라 윤리사상에 있어서도 일대 전환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이 때 경험한 내적 체험은 성령의 역사로 자기 변화를 현실 생활에서 보게 된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진실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내적 활동의 체험이 필수불가결하다. 이 점은 분명 웨슬레의 올더스게이트 이전의 그의 윤리(어머니 수잔나와 스승들에게 배운)와 다른 것이었다. 그 전에는 윤리적인 삶이 구원을 얻기 위한 갈망에서 나온 것으로 다분히 카톨릭적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웨슬레 윤리에서의 중요한 성경구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에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주로 웨슬레의 사회윤리적 모토로 강조하는데, 그 보다 먼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말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구원행위 즉 신앙경험이 우선해야 윤리가 가능하다.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출애굽 구원의 사건이 십계명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계명을 주실 때마다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 사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다"(출20:1-20)라는 말씀을 125번 반복하여 언급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의 역사가 먼저 나오고 그것을 경험한 자들에게 은혜에 감사하는 응답으로서의 도덕적인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체험하였으므로 행하는 것이다. 신앙의 역사(구원)가 먼저이고 사랑의 역사(선행)가 뒤따르는 것이다. 웨슬레는 올더스케이트에서 윤리에 있어서 우선 순위의 변화를 경험한 것이다. 즉 사랑(선행)으로 형성되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형성되는 사랑으로 순서가 변한 것이다. 이렇게 웨슬레는 신자들 생활의 도덕적 변화에 있어서 신자의 체험을 중요시한다. 그리고 믿음의 진실한 체험은 도덕적인 변화와 선행을 수반한다. 올더스게이트에서 웨슬레는 "새로운 감정의 솟구치는 힘"(the expulsive power of a new affection)을 경험하였다. 이러한 신앙적인 경험의 힘(사랑)이 윤리적인 삶으로 연결된다.

웨슬레가 활동하던 18세기는 경험론적인 사유가 지배적이었고, 도덕적 선택은 개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감정의 강렬함에 따라 설명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웨슬레도 예외는 아니었다. 웨슬레 신학의 4대 규범은 영국 국교회의 삼중권위인 성서, 전통, 이성에다가 경건주의 전통에서 배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오는 내적 체험을 추가한 것이다. 이로서 이론적인 신앙(fides quae creditur)에서 실존론적 신앙(fides qua creditur)으로, 즉, 모든 명목상의 전통 기독교인("The Almost Christian") 대신에 "마음의 종교"("heart religion")를 주창하게 되었다. 웨슬레는 죽은 신학과 죽은 의식 대신 종교는 생명력이 넘치며 역동적인 경험이라고 주장했다. 복음적인 진리를 성령과 경험적 사고로 재발견하고, 성령의 활동과 증거를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중요한 본질로 취급하였다. 물론 웨슬레는 성서를 원초적 자료로 하고 이성과 전통과 경험을 성서에 기초하여 해석했지만 양심과 의지에 호소하는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경험의 윤리적 기초를 이해하였다.

웨슬레의 윤리는 순수 이성보다는 의지와 감정을 강조하였고 개인의 삶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하나님의 능력의 실재성을 믿었다. 도덕철학에서 경험론은 선택과 행위에 있어서 감정을 강조하는데 웨슬레는(조나단 에드워드와 함께) 하나님에 대한 체험의 견지에서 은혜의 신학을 인간의 경험론에 통합시킨다. 웨슬레는 도덕 결정의 특별한 규범이나 방식보다 신앙적 경험을 중요시 하였다. 웨슬레에게 경험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사랑의 능력의 증거이다. 웨슬레 성결론에도 기독자의 경험의 측면이 분명하게 나와 있다. 성화의 신학의 경험적 기초는 영적 감각을 통해 얻어진 경험의 즉각성과 활동성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거룩한 삶을 살도록 강권하는 것이 이 땅에서의 진정한 완전의 가능성이다. 이렇게 얻어진 영적 경험은 간증을 통하여 남에게 전달될 수 있고, 간접적이나마 이렇게 증언된 이야기를 통하여 신앙적인 경험을 나누면서 윤리적인 공감대를 넓힐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화자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중요한 경험"으로 넘어간다. 가장 좋은 청중의 반응은 자기 개인의 경험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통하여 역시 "중요한 경험"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의식은 나누고 듣는 이야기에서 합류하게 된다. 도덕적 성숙을 위해서는 우리의 이야기와 성서의 이야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하여 우리의 성품을 성서의 이야기에 일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웨슬레는 신앙의 위인들의 전기나 체험들을 우리가 따라야 할 삶의 모범으로 제시하곤 했는데 이것이 기독교 윤리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런 삶의 이야기들은 가치, 성품, 도덕적 이상을 전달해 주며 삶에 있어서의 실제적인 도덕적 예지를 제공하며 행위를 유도하는 가치관을 심어 줄 수 있다. 신앙적인 체험은 기독자의 삶에 있어서 "가공되지 않은 원료"이다. 그러므로 성결윤리는 체험을 전해주는 신앙전기나 간증을 통하여 동감하고 동참하는 윤리를 전개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 방법을 활용한 성결윤리는 삶의 구체적인 부분에 파고들면서 보편성을 띠는 실제적인 윤리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다.


4. 성품 윤리

최근 구미의 철학자들과 기독교 윤리학자들 사이에는 덕 윤리와 이야기 윤리에 대한 많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논의의 초점은 도덕적 행위나 결단보다는 행위자의 성품에 관한 것이다. 다시말해 행위자 중심(agent-centered)의 성품윤리(ethics of character)이다. 성품윤리는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 "내가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가?"를 먼저 묻는다. 하워바스는 행위 결정 도덕론자들(decision-making moralists)이 행위자가 먼저 윤리적인 사람이 되는 것 없이, 윤리적인 행위를 하라고 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하워바스는 웨슬레를 도덕적인 삶에 있어서의 성품의 중요성을 지적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웨슬레에게는 기독자 됨의 경험이 기독자 윤리의 출발점이다. 칭의의 생활화가 곧 윤리였다. 웨슬레에게 신앙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적인 승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성취하신 성품이다. 이렇게 도덕적 행위자 자신의 종교적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웨슬레의 윤리는 성품윤리이다. 그는 자신의 편지에서 "선행은 의인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의로워지기 전에는 어떤 선행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윤리보다 신앙이 우선한다. 즉, "됨"의 윤리(Being ethic)가 "함"의 윤리(Doing ethic)보다 선행한다. 웨슬레는 어떤 특별한 규범적인 선택이나 도덕 결정 방법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의 윤리는 행위 중심의 윤리가 아니라 행위자 중심의 윤리이다. 행위 중심의 윤리는 행위의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데 주된 관심을 두는데, 이런 행위 중심의 윤리로는 행동의 동기를 바로 평가하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다. 그리고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아는 것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일치하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반면 행위자 중심의 윤리는 행위의 원천, 동기의 질, 성품, 덕을 중시한다. 이런 성품윤리는 규범보다는 목적, 덕, 성격유형, 삶의 스타일, 동기체계를 물으면서 행위자 자신의 품성 개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이런 덕 윤리 관점에서 웨슬레의 윤리를 살펴보면 최근의 사회윤리 일변도의 웨슬레 윤리 해석을 상당 부분 보완해 줄 수 있다.

웨슬레는 1783년에 행한 그의 설교 "자녀의 교육에 대하여"에서 감성 교육의 중요성을 피력하고 있다. 어린 자녀들이 자신의 형제 자매뿐 아니라 동물들에게 까지도 자비롭고, 사랑스럽고, 친절하게 대하도록 성품교육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웨슬레에게는 개인 성품의 변화가 도덕문제의 열쇠였다. 변화된 성품은 개인생활에 있어서 행동방식이나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서 변화를 가져오고, 이런 개인의 도덕적 혁신은 사회의 갱신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그는 믿었다. 거짓, 불의, 무자비함, 교만, 편파성, 진노, 복수, 냉정함, 위선과 다툼으로부터 정결해지고 신앙의 복종을 통하여 유발되는 새로운 태도, 즉 친절, 동정, 용서, 자비, 침착, 온유와 근면이 모든 행복과 평화를 가져 온다고 하였다. 개인의 덕스러운 성품이 사회를 폭넓게 개혁시킨다. 내적인 변화가 즉각적으로 외적 행위의 변화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변화시키는 역사가 실재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웨슬레가 이렇게 내적인 것을 강조하는 것은 외적인 것보다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적변화가 외적변화를 만들기 때문이다. 신앙과 선한 행위의 뒤집힐 수 없는 순서 그리고 신앙이 내포하고 있는 선한 행위의 필연성을 말하는 것이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열리는 이치와 같다. 그리고 전략적인 면에서 보면 웨슬레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위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내적 변화를 먼저 강조했다고도 볼 수 있다. 외적인 변화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내적 변화를 강조한 것은 결코 아니다. 웨슬레는 내적완전과 외적훈련을 모두 강조한다. 성결한 삶의 기초로서 은혜에 의한 회심을 강조하였다. 도덕생활에 있어서 성령의 특징적인 활동은 마음의 깨끗함, 온전함, 거룩함, 사랑함 등의 성품에 나타난다. 웨슬레의 성결은 외부적인 법에 일치하는 삶이 아니라 내적인 법에 자원하여 즐겁게 따르는 생활이다. 웨슬레의 성결은 이렇게 도덕적인 삶에 있어서의 성품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명령"과 "순종"을 강조하는 타입의 윤리는 의인의 교리에 기초하고 있는 데 비해 성화의 교리에 근거한 웨슬레의 윤리는 "품성과 성장"을 강조한다. "행동하는 방식" 이전에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이런 관심은 성품 형성의 윤리일 수 밖에 없고, 이것이 성결윤리의 한 특색이다.


5. 성장의 윤리

인간 본성의 죄는 중생으로 끝나지 않는다. 기독자의 삶은 신자 안에 존재하는 죄에 대한 계속되는 싸움이다. 웨슬레는 사람이 회심한 다음 연속적으로 따라오는 모든 기독교인들을 위한 정상적인 경험으로서의 전적인 성화와 완전을 동일시 했다. 그것은 무지, 실수, 결점,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웨슬레에게 "기독자의 완전"이라는 말은 자연인 상태의 인간이 흠이 없고 순수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인간이 지성을 사용하거나 도덕적 훈련을 통해서 완전해 질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웨슬레의 "완전"이란 말은 perfectus가 아니라 클레몬트나 초기 동방 교회의 teleios에서 온 것으로 "완전"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를 담고 있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완전은 믿음을 통하여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서 "실현된" 그러나 "끝난 상태는 아닌"의 복합적인 의미이다. "완전"은 두 개의 능력이 결합되어 있는데,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능력과 죄를 의도적으로 범하지 않는 능력이다. 기독교인들은 완전해 질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이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죄를 범하지 않을"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웨슬레는 "죄없는 완전"은 비성서적이라고 거듭 거부하였다. 이런 면에서 이 땅에서 절대적인 완전은 있을 수 없다.

기독자의 완전은 하나의 과정으로 은혜안에서 믿는 자의 성장을 위한 동기로서의 기대이다. 그것은 한 번에 얻어지거나, 한번 얻으면 다시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다. 웨슬레는 기독자의 완전은 의도에서 순수하고, 모든 삶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모든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것처럼 걷고, 모든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생활이라고 정의한다.

루터나 칼빈에게 "완전에 대한 복음의 명령"인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는 종말에 실현 가능한 요구이다. 다른 한편 카톨릭 전통에서는 성화를 "의인"(justification)에 내재되어 있는 본래적인 의와 관련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이해들은 이 세상에서의 "완전"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다. 칼빈과 루터에게 "완전"은 약속이요 저 세상에서 실현 가능하지만, 웨슬레에게는 현실 생활에서 가능한 것으로 이 세상을 위한 것이다. 만약 완전의 목적론적인 목표가 역사 밖에 있으면 윤리적 감각이 단절된다. 역사 안에 있을 때만 윤리적 역동성은 내적, 외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웨슬레는 "대망의 윤리"가 아니라 "실현의 윤리"를 가르쳤다. 웨슬레는 "완전"은 죽을 때에 얻어진다는 개혁자들의 교리를 "성결안에서 자라는 개념"으로 대치시켰다. 의인의 윤리는 정적주의, 도덕적 무관심, 무도덕주의, 거룩함에 대한 열정의 결핍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루터가 정적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믿음만을 집중적으로 설교한 결과 도덕적 성숙이나 선행을 포함한 거룩한 생활에 대한 도덕적 자극을 주지 못한 듯이 보인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신실하게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구원의 은혜와 성결케 하는 은혜, 그리고 사랑의 삶을 위한 은혜가 주어진다. 인간은 은혜를 떠나서는 거룩해 질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대속에 계속적으로 의존하지 않아도 될 만큼 결코 거룩해질 수 없다. 거룩함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안에서만 유지되는 것이다. 웨슬레는 자유의지와 이 세상 삶에 있어서의 완전의 가능성에 강조점을 둔다. 웨슬레의 전적인 관심은 성화를 향한 것이었다. 그는 도덕적인 삶에 있어서의 계속적인 훈련을 강조했다. 웨슬레는 종교개혁자들의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급격한 회심과 카톨릭의 경건의 훈련을 통한 점진적인 변화를 종합한다. 이것을 조오지 셀은 "웨슬레의 기독교 윤리는 개신교의 은혜의 윤리와 카톨릭의 성결의 윤리의 원초적이고 유일한 종합이다"라고 말했다.

웨슬레에게 성화의 즉각성과 점진성 사이의 이중적인 강조점은 지속되었다. 그는 사람들의 간증을 통하여 성화의 순간적인 체험의 경향을 확신하면서도, 계속되는 성장과 매순간마다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꾸준히 강조했다. 웨슬레에게 기독자의 완전은 점진적인 성결 운동속에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순간적인 경험이다. 웨슬레가 신자들을 독려할 때 사용한 "은혜안에서 자람," "매일 매일 나아짐," "꾸준히 계속됨," "믿음으로 믿음에 이름," "제자됨"이란 말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삶의 점진적인 성장을 강조하면 개인적인 거룩함에만 지나치게 몰두하는 경향을 방지할 수 있다. 완전은 여러 단계 또는 "수많은 정도"의 차이를 지니며, 사람들에게 "더 높은 정도의 성결"을 추구하도록 요청되었다. 만일 성화의 순간적인 체험만을 강조하면 윤리적인 면이 약화되며, 웨슬레 사상의 목적론적인 성격이 사라지면서 성화를 "사랑에 있어서의 완전"이라기 보다는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초기의 성화와 구별이 모호하게 된다. 성결윤리를 위해서는 사랑안에서의 성장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강조하는 성화의 과정적 성격을 부각시켜야 한다. 물론 즉각성을 인정하지 않는 점진적인 성장의 개념은 하나님의 은혜를 훼손하여 성결의 기초 자체를 허문다. 그러므로 외형상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결에 대한 "순간"과 "과정"의 성격이 동시에 고려되면서 성결윤리를 위해서는 성장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성결윤리는 두가지 방향으로 진행된다. 외적으로 은혜안에서 점진적인 성장 그리고 내적으로 욕망, 욕심 등의 죄된 동기를 죽이는 습관을 점진적으로 형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평생을 두고 계속된다. 빌립보서 3장 12절에 나타난 대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이다. 성결은 사랑안에서 점진적으로 계속되는 갱신과 성장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은 점점 성결로 나아간다. 이러한 일면을 웨슬레의 점진적 신인협조의 성결사상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성결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은혜의 선물이지 인간의 성취가 아니다.

웨슬레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으로 성결과 완전을 제시한 것은 윤리적인 강점을 지닌다. 그러나 웨슬레가 "완전"을 말할 때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계속적인 성장의 필요성을 언급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완전"이란 말은 완결된 의미를 전달하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의 완전을 윤리에 효과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성장"에 주안점을 둘 필요성이 있다. 그러므로 성결윤리를 더욱 현대적인 개념으로 보편화시키기 위해서는 "완전"이란 말에 "성숙함"(maturing), "온전함"(wholeness), 성결함(holiness)이라는 의미들을 보완하여 웨슬레의 목적론적인 구조 안에서 "성장"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현실적이다.


6. 사랑의 윤리

제임스 거스타프슨은 개혁자들의 윤리를 "의인의 윤리"라고 하고 웨슬레의 윤리는 "성화의 윤리"라고 구별하고 있다. 루터의 "의인의 윤리"는 믿음과 의인을 강조하는 "믿음의 행동주의"이지만 웨슬레의 "성화의 윤리"는 사랑과 성결을 강조한 "사랑의 행동주의"이다. 중생하므로 얻어지는 "의로움"에 대하여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참여하는 것이지 인간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웨슬레는 의로움은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경험의 하나의 실체"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살아 있는 인격적인 관계를 통하여 주어진 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간의 마음, 동기, 뜻 모두를 변화시켜 인간 행위의 기초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아가페 사랑을 전달하는 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어 "활동적인 사랑"(active love)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루터가 로마서에 기반을 두고 그의 신학을 전개했다면 웨슬레는 산상수훈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피력하고 있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산상수훈은 하늘에서 장차 펼쳐질 삶의 청사진이 아니라 지상에서 살아야 될 윤리였다. 라인홀드 니버는 웨슬레와 같이 사랑의 계명이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종교개혁자들의 인간이해에 서서 "불가능한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으로서 사랑을 언급한다. 산상수훈은 하나의 윤리적인 이상으로 개인에게는 "근사치적"으로 가능할 지 모르나 사회에서는 집단의 이기주의 때문에 불가능한 윤리라고 니버는 말한다. 그러나 웨슬레는 인간의 죄를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불가능성보다는 하나님의 가능성을 본다. 선행은총은 하나님의 법을 보고 깨달을 수 있는 눈을 열어 주고, 성화의 은혜는 그 법을 완수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물론 웨슬레에게 있어서 사랑은 믿음에서 나온다. 믿음은 사랑에 대하여 도구적(instrumental)이고 사랑, 선행, 성결이 목적(teleios)이다. 믿음은 행동할 수 있는 힘을 사랑에게 공급하고, 대신 믿음은 사랑으로부터 성장하는 데 필요한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사랑"은 웨슬레의 완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사항이다. 웨슬레는 "무엇이 기독자의 완전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영혼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순수한 사랑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 말과 행동이다."

인간을 향해 내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을 가능케한다. 웨슬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기초로서 선재적인 하나님의 활동을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의 활동적인 역할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웨슬레가 이해하기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진정한 지식과 친밀한 교제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만남의 기초이다. 웨슬레에게 사랑은 사랑받는 자를 신뢰하는데 기초하고 있다. 사랑은 "마음을 다하고" "모든 애정을 다한 것"을 말하며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이끈다. 하나님을 향한 웨슬레의 사랑은 에로스를 포함한다. 기독교인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인간의 모든 능력을 다하여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인간의 전인적인 참여가 있다. 개인의 마음, 열정, 도덕적 본성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데 연합되어 표현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역동적인 힘으로서 불처럼 죄의 불순물을 태운다. "사랑은 죄를 내 쫓는다." 사랑은 정결케하는 전 과정을 진행하며 모든 성결의 뿌리이다.

기독자의 사랑이나 성결은 웨슬레의 개인윤리의 핵심일뿐 아니라 사회윤리의 기초이며 사회적 관심에 있어서 원동력이다. 웨슬레는 하나님의 나라를 영적인 것이나 교회 안에서만 실현되는 것으로 말하지 않고, 세상의 실제적인 삶에서 발견되며 구체적인 역사의 영역 안에서 경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내재적인 면과 외적인 면이 있듯이 성결도 내적성결과 외적성결의 두 면을 가지고 있다. 내적성결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며, 외적성결은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성결은 내적이면서도 외적인 것이며,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 역사적이다. 성결한 삶은 도덕적 책임을 근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회적이 아닌 종교를 알지 못하며, 사회적 성결 아닌 성결을 알지 못한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기독자 완전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 이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회적인 종교이며 곧 성결은 사회적 성결이라는 말이다. 웨슬레에게 신생이나 성화는 사회적인 사건이다. 모라비안의 타세계성이나 신비주의의 내재성과는 다르다. 기독자의 완전은 개인주의적 경건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가 필수적이다. 성결은 영적 신비주의가 아니라 보이는 세상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되어 나타나는 변화이다. 개인의 변화가 사회의 변화로 그리고 전 우주의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다. 이렇게 성결의 지평을 개인에서 사회로, 그리고 우주의 새로운 창조로까지 확대하였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웨슬레 사회 윤리의 중심 원칙이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사랑 또는 성결한 삶은 선행의 삶이다. 사랑, 선행, 성결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개인적인 차원뿐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도 포괄한다. 웨슬레는 두 종류의 선행을 논하면서 "경건의 일"(work of piety)로서 기도, 성만찬, 성서읽기, 금식 등 개인적 활동과 "자비의 일"(works of mercy)로서 구제, 문병, 감옥면회, 심방 등 사회적 활동의 사회윤리가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사랑은 웨슬레 윤리를 구성하고 있는 기독자의 중심 덕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과 사회적인 차원을 결합시키는 복합된 원리이다. 사랑으로 충만한 상태가 성결이다. 그리고 성결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삶의 요소요 중심이다. 하나님 안에만 완전한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고 행복을 가져 온다. 하나님의 완전에 대한 명상은 기독자의 행복을 계속적으로 증진시킨다. 참된 성결은 인권, 생명, 자유, 해방, 행복을 포괄한다.

웨슬레의 이러한 입장은 리차드 니버에 의하면 "변혁자"(transfomalist)의 윤리로서 사회윤리는 개인윤리의 확장된 적용이며, 사회변화는 개인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는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웨슬레는 인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개인주의적 인간관을 극복하지 못했으며 인간 삶의 구조적인 성격을 이해하는데 미흡한 점이 있다. 원인은 웨슬레가 죄의 뿌리를 사회적 요인보다는 인간의 의지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를 나누어 보는 라인홀드 니버의 사회윤리적 시각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도덕적 성숙의 문제도 소홀히 취급해서는 안된다. 사회적 도덕성의 진보는 사회적 방법과 아울러 개인의 윤리적 성찰 및 도덕성 함양이 수반되어야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웨슬레가 현대 사회에 적합한 기준들을 제시하는 데는 미진할지라도 성결윤리를 위한 기본적인 토대는 충분히 마련했다고 본다. 성결윤리는 웨슬레의 관계론적인 기본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사회 상황에 대한 좀 더 현실적인 분석과 비판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개인의 성결한 삶과 더불어 사회적 성결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7. 성령의 윤리

웨슬레의 윤리를 신학적 견지에서 분류한다면 삼위일체적 접근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삼위일체적 윤리는 신중심적(theocentric) 창조의 윤리, 기독론중심적(Christocentric) 모방과 화해의 윤리, 그리고 성령론적(pneumatological) 역동적 변혁의 윤리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중의 어떤 한 입장만을 과도하게 강조하면 균형잡힌 윤리를 할 수 없으며, 바른 윤리는 삼위일체적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전제를 세울 수 있다. 대체적으로 카톨릭은 신중심적 윤리로 창조주 하나님 교리에 입각하여 자연법과 양심에 특별한 강조점을 보여 주었고, 종교 개혁자들은 기독론중심적 윤리로 고난, 대속, 의인(Justification), 화해 등을 강조했다. 이 두가지 윤리적 경향을 보완하고 종합하는 의미에서 웨슬레는 성령의 윤리를 도입하고 있다. 이것은 "성령의 일원론"(unitarianism of the Spirit)처럼 성령만을 내세우는 입장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성령의 윤리는 상호 보완적인 윤리로서 삼위일체내의 관계의 완전성을 유지하면서 존재론적 윤리와 기독론적 윤리를 통합하는 윤리이다. 힌슨은 웨슬레의 성령의 윤리를 설명하면서, 웨슬레의 윤리가 담고 있는 삼위일체적 요소를 분석해 주는데, 하나님의 윤리(존재론적)를 창조의 윤리, 하나님의 형상, 타락, 양심, 역사로 나누어 설명하고, 기독론적 윤리를 은혜, 구원(화해), 모방으로 설명한다. 그러면서 웨슬레의 성령의 윤리의 특징적인 면을 보여 주고 있다. 사실 윤리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를 웨슬레만큼 강조한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성령이 신자의 윤리적인 삶에 있어서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내내 관심하였다. 우리는 웨슬레 성령의 윤리의 단면을 이미 앞에서 여러번 볼 수 있었다. 웨슬레가 강조하는 체험이나 성화의 과정은 성령의 능력과 역사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웨슬레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인간이 놀랍게 변화될 수 있다는 인간관을 가지고 있다. 그는 성령을 기독자의 도덕적 삶에 있어서 성화시키는 분으로 이해한다. 성령이 어떻게 그 영향력 안에 있는 자들을 변화시켰는지를 여러번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면서 부터 성령의 능력과 훈련 아래 인간 행동의 근본이 놓인다. 윤리적 규범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완전을 추구하는 실천에 강조를 두고 있다. 성령은 매일 생활에 있어서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활동에 적합한 행동의 길잡이를 구체적으로 제공해 준다.

웨슬레에게 기독교 윤리는 "성령 안에서의 생활"(성령의 열매를 맺는 생활)인데, 이 성령의 윤리는 내재적으로는 의도의 순수성, 마음의 깨끗함, 온전함, 거룩함으로 나타나고, 실천적으로는 성령의 역동적인 능력으로 개인의 변화와 사회의 변혁, 해방, 자유 등을 가져온다. 먼저 성령의 내적 역사는 동기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선행은 성령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데 성령은 동기를 순수하게 만든다. 성령은 윤리에 있어서 동기 부여자이다.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속에 도덕적 현존(moral presence)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윤리를 행할 수 있는 능력도 공급한다. 종교개혁적 전통에서 때때로 발견되는 윤리적 패배주의나 윤리적 무기력증은 성령의 역동적인 역사의 실천적인 능력을 받아들임으로 극복할 수 있다. 성령의 윤리는 변혁자의 윤리로서 인간 경험의 개인적인 차원과 사회적인 차원에 있어서 변혁시키고, 치유하고, 창조하고, 개조한다.

기독교윤리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교회가 도덕적 갱신의 대행자가 될 것을 선언한다. 성령의 공동체인 변화받은 교회가 사회에서 변혁하는 공동체가 되어 해방하고 자유케하는 역사를 일으킬 수 있다. 이것이 기독교 사회윤리의 기초가 될 수 있다. 성령은 이렇게 창조하고, 성화시키고, 해방하며, 역동적으로 역사한다. 성결윤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자신이 먼저 변화하며,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사랑을 실천하므로 자신의 생활과 사회를 변혁시키는 성령의 윤리이다.


8. 나가는 말

이상에서 필자는 성결윤리의 기초를 형성하는 여러 가지 특징적인 요소들을 웨슬레의 사상에서 살펴 보았다. 물론 각각의 요소들은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중복 또는 보완하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성결윤리는 성결에 대한 개념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선택된 소수의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저 세상에서나 가능한 이상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선행 은총에 기초하여 기독자 생활에 있어서의 가시적인 윤리의 가능성을 확장하고, 인간의 불가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통한 실천적인 성결의 길을 제시한다. 성결윤리는 인간이해에 있어서 죄의 본성뿐 아니라 은혜의 효용성을 말하므로 더욱 "기독교 현실주의적"이며, 윤리적 지향성의 결함을 실천적 성결의 방향으로 극복하는 희망적인 윤리이다. 성결윤리는 구원론을 칭의에서 더 나아가 성화로까지 확대하므로 윤리적인 삶을 촉구하는 강점이 있다. 성결윤리의 윤리적 동인은 체험적 변화에서 시작되며 성령을 통한 하나님과의 계속되는 관계속에서 내재하시며 인격적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개인의 생활과 사회적 변화에 역동적으로 적용하는 변혁의 윤리이다. 성결윤리는 믿음과 행위를 일치시키고 통합하는 윤리적 믿음, 즉 신앙의 생활화에 역점을 둔다. 도덕적인 생활에 있어서의 계속되는 훈련, 덕성을 개발하기 위한 성품교육, 목적과 더불어 과정과 수단의 정당성에 주안점을 둔다. 그리고 성결윤리는 삼위일체적윤리를 지향하여 창조와 화해와 성화를 역동적으로 연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18세기 영국에서의 웨슬레의 성결운동은 당시 영국의 사회적인 문제들을 극복하는데 원동력이 되었으며, 19세기 영국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과 미국의 사회복음 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물론 웨슬레는 중산층의 윤리의식이 반영된 점진적인 사회변화를 추구했지만, 사회를 위한 성결운동으로 노예제도 폐지 운동, 국민의 참정권 확대 지지, 감옥제도의 인간화, 인권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형법의 개정 촉구, 노동조합운동 입법화, 병원선교, 동물보호(자연보호), YMCA운동, 아동학대 방지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경제적 문제는 좀 더 과격하였는데 "가난의 원인이 단순히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가난과 실업은 불평등의 결과라고 지적하고, 일자리 제공과 물가 안정 촉구 그리고 사유재산의 철저한 "사회적 책임성"을 강조하였다. 직업에 있어서의 소명의식과 노사관계의 윤리 그리고 물질에 대한 청지기 정신을 강조하여 이웃에 대한 관심과 나눔의 삶을 권장하였다.

오늘 우리의 위기 상황은 공(公)을 사유화하는 사회풍토와 물질중심의 가치관이 만들어낸 도덕적, 영적 위기이다. 여기에서 성결한 삶을 위한 성결윤리의 확립은 경건, 절제, 거룩성 회복 등 개인의 도덕적, 영적 변화로부터 시작하여 사회악을 일소하는 사회 변혁으로 이어지는 도덕적, 영적 재무장 운동이 될 수 있다. 한국 교회는 성결운동을 주도함으로서 실추되었던 사회적 신인도를 회복하고 사회변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 때를 위하여 교회가 부름받은 것이 아닌가? 성결윤리에 대한 실천적인 방법에 대한 연구는 다음 과제로 남긴다. 성결윤리는 인간의 생명을 중시하는 생명윤리, 함께 더불어 살고자 하는 상생(相生)윤리, 자연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생태윤리를 지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