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의 체험,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박훈용 목사
(
전주교회)

 

 

들어가는 말

“중생하고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였습니까?”

목사 안수식, 장로 장립식, 권사 취임식, 집사 안수식 때 집례자가 임직 대상자들에게 묻는 질문이다. 이때 임직자들은 일반적으로 얼버무리기도 하고, 어떤 임직식에서는 임직자들이 당황하여 대답을 못하니 집례자가 다시 다그쳐 물어 임직자들로 하여금 마지못해 대답을 하게 한다. 각종 임직식에서 왜 이런 질문을 하도록 총회에서 발행한 예식서에 규정해 놓고 있는가? 성결의 체험은 우리 교단의 정체성이요 임직자들의 자격 기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임직자들이 성결의 은혜 체험과는 상관없이 임직을 받는다.

실제로 설문을 통해서 몇 교회 임직자들의 성결의 은혜 체험 여부를 조사해 본 결과, 실질적으로 대부분의 임직자들이 성결의 복음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고, 성결의 은혜 체험을 못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말을 통계로 내본 적이 있다.

이것은 교단의 전반적인 흐름이다. 교단 정체성에 위기가 온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누구의 탓으로 돌릴 문제도 아니다. 우리는 다 같이 그 동안 교단의 정체성에 위기를 가져온 과거의 오류를 솔직하게 시인하고 회개해야 할 것이다.

 

성결의 은혜 체험

성결의 은혜 체험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 교단의 변경할 수 없고, 약화시켜서도 안되는 정체성이다. 요즘 성결교회의 정체성을, 성결의 체험을 배제한 성결의 삶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야기하고, 성결 운동도 그런 방향으로 전개하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심히 위험스런 발상이다. 성결의 체험 없이 어떻게 성결한 삶과 성결 운동이 가능하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성결은 성결의 모조품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일 것이며, 그 성결 운동은 세속적인 도덕 운동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성결의 삶과 성결의 운동은 성결의 은혜 체험이 선행 조건이요, 성결의 체험이 있고서야 비로소 성결한 삶이 가능하고 성령의 힘을 얻을 것이다.

성결의 은혜 체험은 개인적이어서 본인이 확실히 안다. 그것은 성령께서 내적으로 증거하시고 자기 영이 더불어 그 증거에 응답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적인 체험이다. 또 성결의 체험은 외적으로 열매를 맺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안다.

성결은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은혜라고 강조한 우리 교단은 초기에 교계로부터 분리주의, 바리새파 등으로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이는 다분히 열광주의적인 오해의 소지를 가지고 성결 체험 운동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 교단은 초기부터 성결의 은혜 체험 운동이 건전하게 전개되어야 할 필요성과 조심성 때문에 열광주의, 혹은 신비주의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 전통은 지켜져야 한다.

성결의 은혜가 체험인 것은 성결의 은혜가 성령세례이기 때문이다. 교단 헌법 제6조 2항에서는 전도표제로서의 성결을 “ ...이는 신자가 받을 성령세례를 가리킴이니...”라고 하였다. 성결은 곧 성령세례라는 것이다.

왜 성결의 은혜가 성령세례인가? 신자가 중생만 하면 자기 스스로 지은 자범죄에서 용서받고 원죄의 죄책(형벌)에서는 면제받으나 원죄의 부패성, 즉 원죄의 타락성 혹은 죄성에서는 아직 해방을 받지 못한다. 신자가 중생을 하면 의를 행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러나 세상과 죄가 싫지 않아 유혹이 오면 또 넘어질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생만 하고 성결하지 못한 자의 두 마음이다.

바울은 이 두 마음 때문에 내적으로 고민하고 갈등하였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2-25).

이 두 마음이 있는 사람은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그래서 늘 내적인 투쟁을 경험하면서 갈등 속에서 살아간다. 이런 갈등 속에 있는 신자가 성령세례를 받으면 원죄의 부패성을 씻음받아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성결은 성령세례를 통하여 원죄의 타락성을 씻음받는 은혜이다. 그래서 성결의 은혜는 성령세례요, 성령세례가 곧 성결인 것이다. 삼위 일체의 입장에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성결을 명하셨고(레 11:44),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중생한 신자의 심령 속에 남아 있는 타락성, 즉 원죄의 쓴 뿌리를 씻어 정결케 하신다(살후 2:13, 히 9:14).

그리하여 야고보서 4:8에서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하였다. 의를 추구하는 마음과 함께 세상과 죄도 싫지 않아 유혹을 받으면 곧 넘어질 가능성이 있는 타락성이 공존하는 두 마음은 중생한 자의 마음으로서 성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은 성령의 정결케 하시는 능력으로 타락성을 씻어 내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경우를 보자. 그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주님께 확실한 신앙고백을 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그의 신앙고백은 베드로가 벌써 중생의 은혜를 받았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는 주님이 재판 받으시는 법정에서는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고, 주님 부활하신 후로는 주님이 주신 사명을 저버리고 옛날 어장으로 다시 돌아가버리는 잘못을 범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마가 요한 다락방에서 성령세례를 받고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고는 사람이 달라졌다. 목숨을 내놓고 주님을 증거했으며 마침내 주님을 위해 순교까지 하지 않았는가.

베드로는 중생하고도 성결하지 못하여 그 속에 있는 타락성 때문에 그런 잘못을 범했지만,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고는 원죄의 타락성을 씻음받아 심령이 주님을 위한 순수한 마음, 성결한 마음으로 새로워져 순교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교단은 초기부터 중생한 자는 반드시 성령세례를 통한 성결의 은혜를 체험해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

 

타신학과의 비교

여기서 타신학과의 비교가 필요할 것 같다. 우선 칼빈 신학과 비교해 보자. 칼빈 신학은 중생과 더불어 성령세례를 동시에 받는다고 주장하고, 그때부터 신자는 점점 성화되어 가다가 죽으면 영화될 뿐 신자가 살아서는 절대로 성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 교단은 하나님의 말씀과 웨슬리의 신앙 체험을 근거로 중생한 자가 제2차로 성령세례를 받아, 살아서도 원죄의 부패성까지 정결케 씻음받는 성결의 은혜를 체험한다고 주장한다.

요한 웨슬리는 올더스게잇의 모라비안 집회소에서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 후 1739년 1월 1일 피터 레인 집회소에서 성령의 세례, 즉 성결의 은혜를 제2차로 다시 체험하였던 것이다.

다음은 성령세례를 강조하는 타신학과도 비교해 보자. 성령세례를 강조하는 신학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뉘어진다. 첫째,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는 오순절파, 둘째,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는 케직(keswick)파, 셋째, 성령의 정결케 하시는 은혜를 강조하는 성결파이다.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는 오순절파는 성령의 은사를 방언으로 말하고,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는 케직파는 그 뿌리가 칼빈주의이기 때문에 성령세례를 받았을지라도 원죄의 부패성이 남아 있으나 성령의 능력으로 그 부패성을 눌러 죄의 세력을 이기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결파는 성령세례를 받으면 성령의 정결케 하시는 은혜로 원죄의 타락성에서 정결케 되어 성결한 삶을 산다고 주장한다.

우리 교단이 바로 성결파에 속한다. 그렇다고 우리 교단이 성령의 은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성령의 은사로는 방언보다는 신유의 은사를 더 강조하고 있고, 성령의 능력 또한 부정하지 않는데, 그 능력은 하나님께 봉사하고 이웃을 섬기는 사랑의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나오는 말

우리 교단은 성결의 은혜가 성령세례라고 믿기 때문에 체험을 강조한다. 성령은 체험하는 영이요 성결 또한 체험하는 은혜라는 것이다. 성령의 체험, 즉 성결의 은혜는 성경 말씀을 확인하는 역할을 하기에 대단히 중요하다. 그 말은 체험을 통하여 성경의 진리가 살아 있는 권위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요한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신자의 체험과 연관시키려 했고, 교회의 교리나 신학까지도 체험으로 옮겨지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셀(G.C. Cell)은 요한 웨슬리의 경험 신학을 평하기를 “죽은 신학과 죽은 의식에 대하여 종교를 경험이라는 방향으로 전 기독교를 돌려놓아 종교를 생명력 있고, 창조적이며, 영광스런 실재가 되게 했다”고 말하였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 교단은 초기부터 성결의 은혜 체험을 하게 하기 위하여 성별회를 운영하였다. 이 집회는 부흥회나 일반 예배와 그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성결의 은혜를 체험한 목사가 설교하고, 성결의 은혜를 체험한 신자가 간증하고, 성결의 은혜를 갈망하며 뜨겁게 찬송하고 기도하며 진행했고, 집회가 끝나고서는 성결의 은혜를 체험한 신자의 수를 파악한 것으로 자료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성별회는 6. 25 이후 자취를 감추었던 바, 그 이유는 진행 방안의 빈곤과 순서의 단조로움에 있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이제 우리 교단은 이전의 단점을 보완한 성별회를 재흥시켜야 한다.

마가 요한 다락방의 모임은 그 자체가 성별회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말씀을 붙잡고 전혀 기도에 힘썼던 것이다. 디모데전서 4:5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말씀하고 있다.

말씀과 기도가 살아 있는 마가 요한의 다락방 모임 같은 성별회를 현대 감각에 맞게 다시금 재흥시키고 성령세례를 통한 성결 체험 운동을 교단적으로 일으켜, 무너져내린 우리 교단의 정체성을 다시 세우고 그 확고한 정체성을 등대로 하여 성결의 빛을 온 세계에 널리 비추어야 할 것이다.

 <활천 2000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