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과 함생주의 문명 건설    
(Christian Faith and Civilization of Combiosism)

 

이정근 목사

 

 1. 살아남아야 한다

인류에게 전체에게 가장 근본적이며 가장 절실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길게 논의할 것도 없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이다.

이것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게 될 가장 근본적인 과제가 되어 있다. 그것이 아니고 다른 것들이 가장 절실한 과제라는 주장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꺼풀을 벗기고 또 벗겨 내면 그것은 바로 살아남는 일이 바로 궁극적 과제(the ultimate task)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질병이 왜 무서운가? 사람의 생존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식량 부족이 왜 문제인가? 굻어 죽게 되기 때문이다. 전쟁을 왜 하는가? 혹은 하지 말아야만 하는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하여서는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들과 싸워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혹은 전쟁으로 인하여 오히려 생존이 끝장나기 때문이다. 생태계 파괴가 왜 문제인가? 그것은 결국 인류의 자살행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핵무기를 왜 완전히 폐기시키려 하는가? 더 대답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은 모든 사회제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제도가 생겨난 근본을 따져 묻는다면 그 모든 것은 바로 인류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근본적 과제에서 비롯된다. 가령 혈연을 기초로 한 가족제도는 그 목적이 무엇인가? 살아남기 위함이다. 이것은 참혹한 전쟁을 겪고 피난살이를 했던 사람들이 가장 절실하게 체험하지 않았는가?

학교라는 제도는 왜 생겨났는가? 학부모들이 왜 자녀 교육에 그처럼 많은 돈과 에너지를 쏟아 부으면서도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갈수록 극성을 부리는가? 교육은 근본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도구로 시작되었다. 가령 정글 속에 살고 있는 원시인들이 자녀들에게 활을 만들고, 돌을 던지고, 짐승을 사냥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살아남기 위함이다.

국가의 기원은 무엇일까? 국가의 목적이 국민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키며, 재산을 보호하며, 국리민복을 도모한다는 등의 여럿이 있지만 그것은 한 마디로 인류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다. 가령 중국 삼국지나 헬라 문명에 나오는 성곽도시들을 생각할 때 이것은 너무나도 명백하게 증명된다. 성곽을 쌓는 이유는 곧 중국의 만리장성에서 웅변적으로 밝혀지고 있는 것처럼 외적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자는 것이 근본 목적이다.

발견이나 발명은 또 어떤가? 비행기가 발명된 원인은 사람이 새처럼 날개를 가지면 더욱 생존하는 일에 유익하기 때문 아닐까? 전화와 같은 통신수단은 또 어떤가? 로버트나 컴퓨터의 발명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인쇄술의 발명,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출현 역시 인류를 보다 더 살아남게 하려는 것이 그 확연한 목적 아닌가?

학문에는 목적이 없다는 사람들도 있다. 굳이 목적이 있다면 학문 그 자체일 뿐이라고 한다. 이것은 예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순수예술은 다른 것의 목적이나 수단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런가? 설혹 목적은 아니라 해도 그런 것들이 인류의 삶의 의미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인류가 모두 멸망하고 나면 미술작품이나 음악작품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경제제도나 금융제도는 또 어떨까? 경제제도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인류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것임이 더욱 명백하다. 자유 시장 경제냐 아니면 국가통제경제냐의 문제도 어느 것이 인류의 경제문제를 더 잘 해결해서 먹고, 입고, 살아가게 하겠느냐는 데 핵심목적이 있다. 그리고 물물교환 경제에서 화폐경제로 발전하게 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정치제도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왕정체제도 있고, 집단지도체제도 있다. 민주주의 대의 정치도 있고 직접 민주주의도 있다. 일당독재도 있고 복수정당에 의한 정치도 있다. 어느 것이 더 좋은 것이냐를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다. 어떻게 하면 국민 모두가 살아남아야 하고 더 행복하게 살아가게 할 수 있겠느냐는 데 있다.

 

2.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

인류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궁극적 과제는 개인적 차원에서 가장 명절하게 나타난다. 가령 정당방위에 의한 살인은 처벌을 받지 아니한다. 왜 그런가? 내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을 죽여야만 했다면 그것은 “살아남아야 하는 최우선 법칙”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당방위는 인류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인권적 원칙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당방위 사례에 있어서도 “내가 살기 위하여 너는 죽어야 한다”는 것보다는 “나도 살고 너도 사는 길”이 있다면 그것을 찾아내어야 한다. 그것은 상대편의 생명도 내 생명과 똑같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상대편은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특히 시대가 갈수록 혼자만 살려고 아등바등 하면 모두가 죽게 되고 함께 살려고 하면 개인도 살아남게 되는 시대로 바뀌어 가고 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4:12).

이 성경말씀은 한 사람일 경우보다는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경우가, 그리고 그것보다는 세 사람이 함께 사는 경우가 생존하기에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므로 살아남아야 하되 온 인류가 살아남아야 한다. 어떤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다른 생명을 죽여야만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되도록 너도 살고 나도 살아야 하고 특별히 ‘우리 모두’가 살아남는 문명을 건설해야 한다.

거듭 말한다. 사람은 살아남아야 한다. 모두가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 인간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차대한 과업이다.

 

3. 살려야 할 문명이 죽이는 데 쓰였다

우리는 노벨상의 내력을 대체로 알고 있다. 알프레드 노벨(Alfred Bernhard Nobel, 1833-1896)은 스웨덴의 과학자였다. 그는 1866년에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함으로 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허지만 자신의 발명품이 인간의 생명을 죽이는 곳에 사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 그의 큰 번민이었다. 그래서 그의 모든 재산을 노벨상 재단에 기부함으로써 노벨상이 탄생되었다. 대부분의 지성인들이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래서 노벨상은 6개 부문 곧 물리학, 화학, 의학, 경제학, 문학, 그리고 세계평화 분야에 뛰어나게 공헌한 사람들을 찾아 노벨상을 수여하게 되었다. 특히 그들의 업적이 인류의 생명을 살리고 증진시키는 일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노벨상의 정신이다. 그래서 다른 다섯 개 부문에서의 노벨상도 큰 값을 쳐 주거니와 그 가운데서도 평화상을 가장 영예롭게 평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노벨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인류문명의 발전은 거꾸로 인류의 생명을 대량학살하는 일에 사용되어 왔다. 가령 같은 전쟁이라도 칼과 활을 주요 무기로 쓰던 시절에는 죽는 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총이 생겨나게 되니 더 많은 생명이 손실되었고 다이나마이트 같은 폭탄이 생겨나면서 생명을 파괴하는 일이 점점 더 대량화되어 갔다. 폭탄은 수류탄에서 원자탄이 되고 수소탄이 되더니 이제는 핵폭탄이 되었다. 총만 해도 소총에서 대포가 되고 대포에서 대륙간 유도탄으로 개발되었다. 운송수단만 해도 수레에서 마차로, 마차에서 자동차로, 자동차에서 비행기로, 이제는 비행기에서 우주선으로 발전했지만 이것들이 언제 어떻게 온 인류의 생명을 궤멸시킬는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가령 세계제1차대전(1914-1918)에는 5년 동안의 전투에서 사망자 수가 약 1천만 명이었지만 세계제2차대전(1939-1945)에는 7년 전투에서 5천 5백 만명이라는 엄청나게 많은 생명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인류문명의 발전이 인간생명을 대량으로 그것도 참혹하게 파괴시키는 일은 사상의 발전에서도 볼 수 있다. 세계제2차대전은 물론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소위 주축국들이 일으킨 전쟁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최대 원흉은 말할 것도 없이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이다.

히틀러는 역사를 “인종간의 생존투쟁사”로 보았다. 그리하여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주창하게 되었고 다른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인종들은 이 지구 위에서 말끔하게 청소해 버리려 했다. 말하자면 인종청소(racial cleansing)였다. 그리하여 유태인을 6백만 명이나 잔인하게 죽여 없앴고 그 밖에 집시들과 동성애자들도 모두 쓸어버리려 했다. 한 사람의 잘못된 역사관이 얼마나 처참한 생명파괴사건을 일으키게 되는가를 확실하게 가르쳐 주는 사례라 하겠다.

그것보다 더 한 것이 공산주의 혁명이다. 잘 아는 바처럼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19세기에 나타난 것이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의 유물론 사상이다. 이 두 사람이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 1848)를 발표하면서 시작된 공산주의 혁명은 그것이 피압박 인민의 생명을 증진시킨다는 명분을 앞세웠지만 결국 혁명과정에서 1 억 명에 가까운 인간생명을 파괴하였다는 통계이다.

우리 코리언의 역사를 분석해 보더라도 공산주의 혁명 과정에서 죽은 코리언들의 규모가 가장 큰 살인사건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남북전쟁(1950-1953) 기간에만도 부상자나 이산가족, 또 재산피해는 그만 두고 죽은 사람만 2백 만 명이 넘고 이북에서 공산주의 하다가 굶어죽은 사람들을 합하면 능히 4백 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가 있다.

이 같은 역사를 생각하면 인류의 문명이 발전된다는 것이 결국은 ‘자살한 꾀’를 짜내는 일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도 혼자 죽은 것이 아니라 동반 자살 곧 함께 죽으려는 꾀일 뿐이다. 그래서 20세기 대표적 철학자로 불리는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은 “과연 인류에게 장래가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졌다. 특히 컴퓨터가 크게 발전된 오늘이고 보면 누구 하나가 컴퓨터 조작을 통하여 핵무기를 폭발시킬 수도 있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이 단순한 기우만은 아니게 되었다.

생태계의 파괴도 마찬가지이다. 인류의 복지를 위하여 경제개발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이런 일로 인하여 자연이 파괴되었고 이제는 그것이 결국 부메랑 효과를 불러와 인류 전체가 죽음에 직면하게 되었다. 과학적 지식이 부족하여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나 흔히 말하는 오존층 파괴, 공기오염, 물 오염, 온도의 상승, 동식물과 삼림의 파괴....이런 것들이 인류 전체를 괴멸시킬 위협 요인으로 꼽히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만 해도 경제발전을 위한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유시장경제를 핵심으로 하는 이 자본주의가 본래는 기독교 특히 청교도 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 자본주의와 기독교 신앙이 분리되자 자본주의는 인간의 생명을 학대하는 폭력으로 전락해 가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문제는 어떤가? 종교는 어느 것이든지 인류의 구원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이제는 종교가 온 인류의 목숨을 전멸시킬 수도 있다는 공포심이 지구 전체를 휩쓸고 있다. 특히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발생한 비행기 테러 이후 모든 인류는 종교전쟁으로 인하여 온 인류의 멸망이 갑작스럽게 나타날 수도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것을 미리 예견한 것이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의 문명충돌론(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 1996)이다. 이 세계 마지막 전쟁은 결국 종교권(기독교, 이슬람, 유교, 힌두교) 사이에서 벌어질 것이라는 예견이다.

이 같은 종교권의 충돌은 이제 연구실에서만 갇혀 있는 이론이 아니다. 우리 눈앞에 곧 나타날 현재적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우선 이슬람권에서는 한국을 제1선교지로 결정하고 막강한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다는 소식이다. 석유 팔아 번 돈을 타고 이슬람교가 물밀듯 밀려오고 있다.

한국인들은 원래 종교성이 강한 민족이다. 그래서 종교적으로 말한다면 불교가 들어 왔고, 도교가 들어 왔고, 유교가 들어 왔고, 기독교가 들어 왔다. 그냥 들어만 온 것이 아니다. 사뭇 국교 수준이다. 기독교도 일세기 만에 그 영향력에 있어서 국교 수준에 도달했다.

이런 추세라면 종교학적으로 예견할 때 이슬람교도 들불처럼 번져 나갈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이슬람교는 다른 종교에 대하여 전투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는 데 있다.

그런데 그들의 목표는 신정국가 건설이다. 이슬람의 최종 목표는 국가권력을 점령하는 데 있다. 이것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만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시아파건 수니파이건 모두 이슬람법에 의하여 국가를 통치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런 까닭에 21세기가 다 가기 전에 한반도에서 종교 전쟁으로 한강물이 피로 변할는지도 모른다. 다른 종교 예를 들면 불교도 그렇고, 천주교와 개신교도 순교적 믿음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에 이슬람 앞에서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거니와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사랑하자는 것이 종교의 기본정신이고 근본정신인데 종교 때문에 인류가 모두 시체로 변한대서야 이런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4. 함생주의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인류문명을 통째로 바꾸는 작업을 해야 한다. 문명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뜻이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문명의 패러다임(paradigm)을 바꾸어야 한다. ‘함께 죽는 문명’에서 ‘함께 사는 문명’ 곧 함생주의 문명으로 바꾸어야 한다.

함생주의(咸生主義, combiosism)란 이 논설문의 필자가 새로 창안해 낸 용어이며 사상이다. ‘함께 살자는 주의’라는 뜻이다. 쉽게 공생주의(共生主義)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공산주의와 발음이 비슷하여 함생주의라고 쓰게 되었다. 특히 ‘함‘은 함께라는 순수 한국말이기도 하고 중국한자의 ’다‘ 혹은 ’골고루‘라는 뜻을 가진 함(咸)의 뜻이기도 하다. 한국말에서 ’함고(咸告)하다‘는 말이 있는데 ’모두 낱낱이 보고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끝까지 살아남는다는 뜻을 함유하고 있다.

컴바이어시즘(combiosism)도 새로 창안해 낸 말이다. 영어사전에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서로 도우며 사는 공생관계를 말할 때 심비오시스(symbiosis)라는 명사와 심비오트(symbiote)라는 낱말이 있다. ‘sym'은 심포지엄이라는 말에서 보듯 ’함께‘라는 뜻이고 ’bios'는 희랍말로 생명이라는 뜻이다. 지금 영어에 ‘bio'로 남아 있어 생물학(biology), 생화학(biochemistry) 같은 말의 접두어로 쓰인다. 따라서 공생주의(symbiosism)이라는 말도 생각하여 보았으나 지금은 ’함께‘라는 뜻이라면 컴(com-)을 많이 사용하므로 함생주의 곧 컴바이오시즘(combiosism)이라고 이름 짓게 되었다.

‘비오스’(bios)는 성경에 나오는 헬라말로 몸, 생명, 재산을 뜻한다. 몸을 뜻하는 헬라말에는 이것 말고도 더 있다. ‘사르크스’도 있고 ‘소마’라는 말도 있다. 그것들은 각각 기본의미는 같으면서도 정서적 의미가 다르다. 그 가운데 ‘비오스’는 ‘살다’는 뜻이 매우 강하다. 살기 위하여 필요한 도구가 곧 재산이라는 말로 풀린다. ‘비오스’의 동사형 ‘비오오’는 ‘살아간다’는 뜻을 가졌다.

그리고 이 ‘비오스’라는 말이 재산이란 뜻으로 쓰인 경우는,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재산(눅15: 12,13), 그리고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눅21:4)라는 말씀에서 생활비가 바로 그것들이다. 그러니까 탕자였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생명을 내 놓으라고 협박했다는 뜻이고, 과부는 생명 전체를 헌금함에 넣었다는 뜻이다.

함생주의는 상생주의와 같으면서도 다른 차원을 가지고 있다. 상생(相生)은 두 사람이나 두 생물 사이에 서로 서로 도우며 산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나와 너’는 상생할 수 있지만 바로 ‘나와 너’가 야합함으로 ‘그와 그들’을 죽일 수도 있다는 점에 이 용어의 한계가 있다.

 

5. 함생주의 문명의 건설

이제 인류의 문명은 그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함께 사는 문명이 되도록 해야 한다. 함생주의 문명 건설의 움직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가족제도에서 족장제도로, 족장 제도에서 부족국가로, 부족국가에서 왕정체제로, 그리고 민족국가로, 거기에서 다시 다인종국가가 되고, 이제는 세계정부 건설 운동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일종의 함생주의 문명 건설의 과정이다.

특히 세계제1차대전을 통하여 인류 공멸의 위기를 느낀 선각적 지도자들이 국제연맹을 조직했던 것이나 세계제2차대전이 끝나고 국제연합(The United Nations)을 조직하여 지금에 이른 것은 함생주의 문명 건설의 좋은 시도들이다.

국가라는 것이 실상 민족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함생정신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오히려 국가지상주의가 ‘너도 죽고 나도 죽자’의 함사주의(咸死主義, comthanatism) 문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 비극을 극복하기 위하여 국제기구를 조직했으나 아직도 이것이 인류문명 전체를 함생주의에 기초한 것으로 건설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특히 현대에 살고 있는 인류를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요소가 늘어 가면 늘어갔지 전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가령 인류의 전멸을 가져올 수 있는 요인들이 무엇들인가 생각해 보자.

1)전쟁, 2)지진, 화산, 해일, 홍수, 가뭄 같은 자연재해, 3)전염병, 4)기후 변화, 5)생태계 오염, 6)공기 오염, 7)물 요염이나 물 부족, 8)인종청소 전쟁, 9)종교간의 전쟁, 10)핵무기.... 이것 말고도 몇 가지가 더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최근 온 인류가 몰사 당할 수 있는 이 같은 함사주의 문명의 패러다임을 어서 어서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함생주의 문명을 건설해 나아가는 일이 너무도 긴박하고 너무도 중차대하다. 지금 모든 인류는 언제 폭발할지 모를 핵무기를 베개 삼아 태평하게 잠을 자고 있는 형국은 아닐까?

그래도 이 같은 국제기구를 통하여 무기와 군대를 축소시키는 운동도 일어나고 또 환경보존을 위한 협약도 체결하게 되었으니 느리기는 하지만 매우 좋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긴급하기 때문에 거듭 말한다. 이제 온 인류는 문명의 모든 양상에 있어서 이 같은 함생주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남을 수 있는 문명을 건설하는 일에 목숨을 걸고 큰 결단을 하고 이런 결단을 실천에 옮길 지혜와 힘을 더욱 모아야 하겠다.

 

6. 함생주의 신앙이라야 한다

앞서도 제기했지만 함생주의 사상은 종교 특히 그 가운데서도 기독교가 그 튼튼한 터전을 제공하고 있다. 기독교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큰 요소가 있는데 그것들을 살펴보면 기독교가 얼마나 함생주의 정신에 철저한가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기독교를 구성하는 요인이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시다. 어느 종교이건 최고 숭배의 신이 있게 마련이다. 그 가운데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 혹은 일체삼위의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고, 성자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처럼 같은 몸을 입으시고 이 땅 위에 사셨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피조물 가운데서도 활동하시지만 특히 우리 몸 안에서 사역하신다. 이처럼 기독교의 하나님은 온 우주를 만드셨고 소유하고 계시고 특히 관리하고 계신다.

특히 기독교의 하나님은 모든 살아 있는 것과 생명이 없는 것의 창조주이시다. 특히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시므로 생명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시는 것을 그 분의 사역으로 삼으신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하는 말씀대로이다. (요6:68).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셨을 때에 무척이나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을 함생체 하나님(Community of God)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존재양식을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헬라말)로 이해한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서 한 위격이 계신 곳에는 다른 위격도 함께 계신다는 해석이다. 성령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동시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이 함께 계신데 이는 삼위 하나님께서 서로 연결되어(interconnected) 있으시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차원에서 함생체이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하신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온전하신 사람”(verus Deus, verus homo)이라고 전통적으로 신앙고백을 해 왔다. 그 뜻이 무엇인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예수와 그리스도 곧 온전하신 인간으로서의 예수와 온전하신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가 함생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걸 임마누엘(마1:23)로 풀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기독교의 큰 요소 둘째는 사람이다. 사람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특별한 존재이다. 어떤 종교는 인간이나 동물 혹은 식물이 모두 똑같은 생명체라고 생각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생명의 우선순위를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하나님보다는 못하고 동식물이 생명을 가졌다고 하나 그 우선순위가 사람만은 못하다는 것을 믿는다.

그런데 하나님만 있고 사람이 없다면 기독교의 체계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이 중요하다. 개인으로도 중요하고 집합적으로도 중요하다.

그런데 사람의 궁극적 목적이 살아남는 것이라는 점을 이미 앞에서 설명했다. 특히 사람은 영원히 살고 싶은 것을 가장 궁극적 과제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을 극복하려는 것이 모든 사람의 최대 과제란 뜻이다. 심지어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도 실상은 살고 싶다는 절박한 부르짖음일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독교가 전파하는 내용을 복음 곧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인다. 어떻게든 살아남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육신을 살리기 위하여 무슨 일이라도 해내듯이 영혼을 살리는 길이 있다면 그걸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인간의 숨김없는 모습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개인적 차원과 함께 사회적 차원이 있다. 인간은 홀로 서지만 동시에 함께 서야만 한다. 그래서 사회적(혹은 정치적) 동물이라 했다. ‘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있고 ‘너’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내가 살기 위하여 너는 죽어야 한다’고 외친다. 기독교를 구성하고 있는 큰 요소의 세 번째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이다. 그것을 전통적 믿음에서는 ‘구원’(salvation)으로 표현해 왔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행16:31).

물론 구원이라는 말은 매우 포괄적 언어이다. 그 말 안에는 여러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해방, 속죄, 사죄, 관계회복, 중생(거듭남), 칭의, 성화(성결화), 화해, 사랑, 양자됨....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원은 바로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뜻한다.

큰 요소의 네 번째는 성경이다. 성경에는 죽음의 이야기도 많다. 이집트 왕 바로는 이스라엘 여자가 아기를 낳으면 나일 강에 던져 죽이라고 명령했고 그래서 많은 아기들이 물고기 밥이 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하나님은 이집트 왕과 모든 가문의 첫 아들을 일제히 죽여 버리셨다. 그리고 여리고 성을 점령하여 모든 사람을 다 죽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서로 전쟁해서 죽이는 경우가 많았고 하나님의 명령으로 죽이는 경우도 여러 번이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 같은 대량살륙행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는지 많이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신약성경 특히 복음서에 와서 풀린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을 살리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선택하신 것은 실로 기독교가 함생주의 신앙을 핵심으로 하고 있는 것을 만천하에 선언하는 결정적 행동이었다. 지나간 세대와 오고 오는 세대의 온 인류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스스로의 생명을 십자가 제단의 제물로 바치신 것은 정말 찬송가 가사처럼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요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함생주의를 핵심 교훈으로 삼는다. 이것을 예수님은 섬기는 지도력(servant leadership)으로도 가르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11:45).

예수님은 지도자를 두 가지로 나누셨다. 하나는 지배하는 지도자(dominating leader)이고 다른 하나는 섬기는 지도자(serving leader)이다. 이방인들이나 이 세상 임금들은 지배하는 지도자로 백성이나 추종자들을 관리하지만 예수님은 섬기는 지도자로 오셔서 모범을 보여 주셨다. 따라서 지배하는 지도자는 자기가 살기 위하여 추종자들을 학대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언제든 죽일 수도 있는 지도자들이다. 허지만 섬기는 지도자들은 추종자들을 살리기 위하여 헌신하되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스스로를 속량의 제물로 삼기도 한다. 즉 다른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희생시킨다는 뜻이다.

기독교를 구성하는 큰 요소로서 마지막 다섯 번째의 것은 교회이다. 교회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체로 세 가지로 대답할 수 있다. 특히 삼위일체 하나님과 대응이 되는 대답들이다. 성부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Family of God), 하나님의 자녀(Children of God), 혹은 하나님의 백성(People of God)라 한다. 성자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는 그리스도의 몸(Body of Christ), 혹은 그리스도의 신부(The Bride of Christ)이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고 교회는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신부는 신랑과 한 몸이므로 교회는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도 한다. (엡 5:20-30, 골1:18). 성령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교회는 성령의 집(Temple of the Spirit)라고 할 수 있다. (고전3:16).

앞서 이미 여러 번 언급한 것과 같이 하나님은 살리시기를 기뻐하신다. 성경 전체의 주제가 무엇이냐에 주장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은 구원하신다”는 것에 합의하고 있다. 누구를 구원하시느냐 혹은 우선적으로 구원하시느냐에는 여러 의견이 있다. 그러나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우선적인 계획으로 합의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을 유일한 조건으로 삼아서....

그러므로 교회 곧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집인 교회에 주어진 궁극적 사명은 무엇인가? 그것 역시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다. 교회에게 주어진 5대 사명으로, 1)예배하는 일, 2)교육하는 일, 3)전도/선교하는 일, 4)봉사하는 일, 5)친교하는 일로 합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사명의 궁극적 목적은 함생주의에 있다. 하나님과 인간들이 함생하고 인간과 인간이 함생한다. 그리고 용서받은 죄인과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살려 주는 관계가 된다.

함생주의 사상은 20세기에는 교회일치운동으로도 나타나 있다.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시옵소서” (요17:11) 하고 간절히 기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 곧 교회의 머리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는 것이 곧 에큐메니컬 운동이다. 그래서 이 운동은 곧 함생주의 운동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사탄들이 하려는 일은 무엇인가? 사탄은 헬라말로는 아볼루온이라 하고 히브리 말로는 아바돈이라 한다. (계9:11). 이는 ‘파괴자’라는 뜻이다. 사탄이 하는 일은 생명을 파괴하는 일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처럼 그리고 가룟 유다처럼 목매어 자살하게 한 것처럼....

 

7. 참 살 길 여기 있다

이제 기독교는 21세기 이후에 더욱 더 힘차게 펴나가야 하는 운동이 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6:10)라고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셨는데 이는 바로 모든 생명을 살리라고 하는 거룩한 사명이다.

기독교가 중세 이후 이단들을 처형한다는 명분으로 사람의 생명을 적지 않게 죽이는 일에 방관했거나 주도한 경우가 있었다. 이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붙여 인간이 행한 범죄행위들이다.

이제부터 기독교는 살리는 종교가 되어야 한다.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했으나 마지막 아담 곧 예수 그리스도는 살리는 영이 되셨다고 성경은 말씀했다. (고전15:45). 기독교는 온 인류가 살아남도록 하는 일을 주도해야 한다. 살리는 것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은 실상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드러내 준다. 허지만 부분적으로 드러낼 뿐이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엘리야가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위대한 인물들과 예수님과는 차원이 다른 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구약의 영웅들은 사람을 많이 죽이는데 직접 혹은 간접으로 관련된다.

가령, 아브라함도 군사를 사용하여 적들과 싸웠고 모세는 이집트 사람을 죽여 모래 속에 묻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가? 다윗도 많은 사람을 죽였기에 피를 많이 흘렸고, 엘리야도 바알신/아세라신 제사장들을 850명이나 학살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과연 누구를 죽였는가? 아니, 어디 한 사람이라도 죽일 생각을 하셨던가? 예수님이 죽이신다면 그 대상은 헤롯대왕, 배신자 유다, 빌라도, 제사장, 로마군병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은 아무도 죽이지 않으셨다. 아니 오히려 살리셨다. 병든 자를 살리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고, 가난한 자를 살리셨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살리셨고, 민족의 배신자요 세무서장인 삭개오를 살리셨다. 그리고 원수들까지 살리실 계획으로 그들의 죄가 용서받도록 기도하셨다.

그런데 기독교가 예수 스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잘못 이해함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이단들과 마녀로 추정된 여자들과 이슬람교도들과....그리고 히틀러가 수많은 유태인을 학살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정말 참 살길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참 죽을 길로 뒤바뀐 일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기독교가 제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것을 살려야 한다. 끝까지 살려야 한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와의 관계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문제도 이제는 대답이 나와 있다.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에 해답이 있다. 비록 다른 종교들에게 구원이 없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불교인, 힌두교인, 이슬람인들을 위하여서도 그 값진 생명을 십자가 위에서 희생시키셨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특히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못 얻느냐는 문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을 뿐이라는 것에도 유의해야 한다. 다른 종교들도 기독교를 간접적으로 증거하고 있다는 점, 예수님은 다른 종교인들의 구원을 위하여서도 십자가 위에서 생살을 찢고 뜨거운 피를 흘리셨다는 점에도 생각을 보내야 한다.

그러나 참 살 길은 오직 기독교에만 있다는 것을 확실히 선포해야 한다. 우리들이 전파하는 것은 바로 “참 살 길 여기 있다”라고 만천하에 강력하게 외치는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 살려야 한다. 모두를 살려야 한다. 끝까지 살려야 한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기독학생 동문회 회지 '반석'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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