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생사상과 삶의 기본 이해

    나의 신학을 말한다
 (서울대학교 기독교 총동문회 회지 <서광> 기고논문)

 

이정근 목사

    

□ ‘함생주의’ 용어의 탄생

 ‘신학 있는 목회, 목회 있는 신학’을 다짐하며 목회현장과 신학대학 사이를 시계추처럼 분주히 오고 간 것이 30년을 훌쩍 넘었다. 신학교육 현장이라면 나에게는 신학도로서 오랜 세월을 보냈고, 교수생활과 행정직도 계속 수행했다. 서울신학대학교에서 출발하여 월드미션대학교, 아주사퍼시픽대학교(해리 안스테드 서울대 초대총장이 이 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미주성결대학교, 풀러신학대학원 등에서 전담 혹은 반담으로 강의를 해 왔다. 교수과목들도 다양했다. 교양국어, 대학한문, 신학영어, 신약헬라어, 기독교교육학, 교육과정론, 목회학, 실천신학개론, 설교학, 조직신학, 로마서연구, 성결교회 교의신학, 목회현장론, 영성목회 분야 박사논문 지도교수 등이었다. 특정화된 전공분야에 집중하지 못했다는 취약점이 있으나 여러 기초학문을 섭렵한 장점도 있다.  

목회는 평신도 생활을 중학교 2학년 때 시작했다. “(그의)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2)는 말씀 앞에서 거듭났다. 그런 다음 평신도의 여러 직분 특히 장로의 직분까지 거쳐 목사로 부르심을 받았다. 목사로 부르심 받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내 이름을 부르시고 “내가 너를 목사로 불렀다”는 우레 같은 음성을 들었다. 그로 인하여 국어교육과 교수로 진출할 기회를 버리고 목사의 길로 들어섰다.

 여러 학교에서 공부했다. 모교에서는 국어교육학으로 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신학은  서울신학대학교, 미국 애즈베리신학교, 남침례회신학교, 죠지팍스신학대학원, 풀러신학대학원, 그리고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에서 여러 해 동안 신학이론들과 씨름했다.

목회는 남캘리포니아에서 전도사로서 코비나성결교회를 개척함으로 시작했다. 이어서 두 번째로 유니온교회를 개척했다. “예수님처럼, 꼭 예수님처럼”이라는 표어 형식으로 사명선언을 삼았고 좀 더 구체화된 목표로는 “생산능력이 있는 자립교회”를 내세웠다. 그로부터 1세대 곧 30년을 담임목회 한 뒤에 은퇴했다. 처음에 독일계 루터교회당 한 구석에서 시작하여 자체 성전을 마련했고 두 번째 성전은 4천 평 대지 위에 1천명이 사용할 수 있는 시설도 확보했다.

그런데 문제는 신학 이론과 목회 실천을 아우를 수 있는 만통열쇠(master key)가 될 용어를 찾지 못하고 아직도 헤매고 있던 때였다. 모색 기간이 너무 길었다. 그런데 2009년 8월 31일 새벽기도회 인도 후  강대상 뒤에 엎드려 개인기도시간을 가졌다. 베드로에게 주셨던 ‘하늘나라 열쇠들’을 내게도 주시도록 간곡히 기도했다. 그 순간 “함생주의”(咸生主義)라는 말이 갑자기 섬광처럼 내 머리 속을 스쳐갔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온 인류 문명을 새롭게 이끌어갈 실천과 이론의 만통열쇠를 선물을 받았다. 너무도 기뻤다. 새벽기도 마치는 대로 목양실로 돌아와 평소의 습관대로 카드에 ‘함생주의’라 제목을 쓰고 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언어에는 생각을 명료화시키는 기능이 있다.


□생명의 절대적 가치가 단서

사범대학 입학 때부터 인간생명의 중요성을 뼈 속에 깊이 새겨야만 했다. 자격증이라는 것이 본래 ‘인간 생명’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것, 그 대표적인 것이 교사, 의사, 변호사, 운전사 등이라는 의식을 철저화했다. 특히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끊임없이 넘나들어야 하는 해방과 한국전쟁, 4.19 데모에서도 죽음의 공포에 가득 찬 극적 체험들을 거쳤고, 군대생활에서는 ‘사람 죽이는 기술 연마’에 매진하기도 했다. 나의 세대가 살아온 시대에는 한반도 전체가 아우슈비츠 죽음의 수용소였다.

목회전선에 뛰어들면서 생명 관리에 더욱 몰입했다. 생물학적 생명과 함께 영적 생명을 목양해야 하는 소명에 충실해야만 했다. 특히 <베를린한인교회 연합집회>를 슈바이처 기념교회당에서 인도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생명 경외 사상’에 나 자신이 흡수되어 갔다. 슈바이처야 말로 몸병 고치는 의사이면서 영혼과 의사였고, 특히 문명의 질병을 고치는 의사였다.

소박하게 말해서 온 인류의 최대 관심사는 ‘살아남음’(survival)이라고 정리했다. 개인적 차원, 영적 차원, 그리고 집합적 차원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한동안 ‘살아남음의 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동력이 생기지 않았다. 이 용어 자체가 죄악의 핵심인 이기주의를 부추기는 측면이 있어 십자가의 신학을 담기에는 부족한 그릇이었다. 다일주의(multiunism)라는 용어도 실험했다. 별로였다. 공생주의(symbiosism)에는 공산주의 악몽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그 symbiosis를 상생(相生)이라 번역하여 상생신학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상생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점은 있으나 그것이 전체를 죽이는 야합일 수도 있다는 점에 한계가 있다. 예수님 처형 때에도 여러 이해단체들이 상생 야합했다. 그래서 combiosism이란 용어를 창출해 냈다. 함생(咸生)도 국어사전이나 중국어 사전에 없는 용어이듯이 그것도 영어사전에 없다. 그리고 symbiosis가 헬라말로만 합성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combios는 라틴말 cum(함께)과 희랍말 bios(생명)의 융합이어서 함생의 핵심을 더 잘 드러내는 면이 있다. 마치 함생이 ‘함께 사는 것’이라는 순수한 한국말이지만 한문글자로도 咸生인 것과 같다.

함생사상은 글자 그대로 함께 살아남는 것을 핵심으로 삼는다. 함생은 ‘생명에 모든 것을 건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함생사상은 조금 더 풀면 네 가지로 요약된다. 1) 생명 특히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과 증진시키는 것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 2) 인간은 철저히 개인인 동시에 철저히 사회적 존재로서 사회적 개인(social individual)이요 개인적 사회인으로 이해한다. 소설 <삼총사>의 한 구절인 One for all, all for one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3) 기독교의 삼위일체 혹은 일체삼위 신관은 그 절대자가 본질적으로 함생적 존재임을 계시한다. 4) 인간과 만물은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만 하는 수직적 함생의 대상이며 또한 이웃이나 원수와도 함께 사랑해야 하는 수평적 함생의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창1:26)의 핵심적 내용이다.

그런 기본적 명제들을 결정한 뒤에 쓴 논설문이 바로 “기독교 신앙과 함생주의 문명 건설”이었다. 2010년 3월에 서울대 사범대 기독학생동문회가 발간한 <반석>에 게재되었다. 그리고 그 책 출판기념회에서 간략하게 요약발표한 뒤에 회원들과 함께 토론했다. 

 그런 뒤에 로스앤젤레스 소재 미주성결대학교가 개최한 <성결 포럼>에서 “함생주의 신학을 말한다”는 논문을 발제했다. <반석>에 게재된 것이 인류문명사의 시각에서 정리한 논설문이라면 포럼에서 발제한 것은 신학의 방법론에 따라서 정리한 내용이었다. 계시론, 신론, 기독론, 성령론, 인간론, 죄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으로 된 이론신학의 체계를 따라서 함생신학을 풀어 나갔다. 이에 대하여 논평자였던 류기종 박사는, “한국적 신학의 훌륭한 가치가 있다”고 했으며 민종기 박사는  “보편신학이 될 수 있는 인자를 잘 갖추었다”고 평가했다. 기독교 언론들과 일반언론들도 적극적으로 보도했다. 이어서 연구자가 소속된 성결교단의 기관지 <활천>에 “함생주의 신학 이해” (2010년 4월호), “교회는 거룩한 함생체입니다” (11월호)를 각각 논설과 설교 형태로 발표했다.

그러나 함생신학은 목회현장에서 생성된 신학사상이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였다. 영혼 구원 특별히 생명구원을 제일의 과제로 삼은 것이 목회였고, 그것을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성도들과 함께 해내어야 하는 협생적 작업이었다. 한 가지 더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심지어 기독교의 적대자들과도 함께 이루어 가야 하는 것이 목회라는 점이다. 무신론이나 타종교와의 관계 정립도 고민스러운 문제의 하나였지만 큰 틀에서 풀어갔다. 그래서 쓴 글이 “삼위일체 신론과 함생목회론”이라는 논설문으로 <월간 목회>가 게재했다. (2013년 12월호). 삼위일체 신론은 전통적으로는 경세적으로 접근해 왔으나 근래에는 ‘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내재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데 기초하여 목회현장을 새롭게 형성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이종성. 삼위일체론 참조). 그리고 지금도 <함생목회론을 말한다>는 별도 저서를 준비하여 가고 있다.

한 가지 더 언급해야 할 것은 2014년 6월에 발표한 <코리안의 노래>이다. 그 가사를 글쓴이가 지었는데 남한과 북조선 그리고 해외에 사는 모든 코리언들이 오고 오는 세대에 함께 부를 노래로 했다. 우리 코리안들을 무궁화, 진달래, 민들레로 은유해서 지은 것으로, “짓밟히고 짓밟혀도 다시 피어나 사나운 온 세상에 희망, 사랑, 평화를 심는 일꾼”이 되도록 격려한 내용이다. 애국가를 생산해낸 한국교회의 모범을 따라 기독교의 가치관을 고스란히 담은 노래이다. 코리안 민족 전체를 함생체가 되게 하는 일을 기독교가 선도해야 한다는 모범사례도 됨직 하고, 건강한 민족주의로에 방향정립을 암시하는 가사라는 점도 있다.

 

□ 함생주의 사상과 삶의 기본 이해

 사상을 표현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소크라테스나 파스칼처럼 단편적 금언으로도 위대한 사상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그래서 2014년 2월 28일에 <함생주의 사상과 삶의 기본 이해>(Basic Understanding On Combiosism In Its Thought And Life)라는 문서로 정리했다. 여기에서는 그 핵심만 소개한다.

1. 우주 만물과 인간의 창조주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본질적 생명을 공유하고 있는 함생체 하나님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이 함생하도록 지으셨으며 함생체적 통치를 행하신다. 

2.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육신이 신비하게 연합되신 분으로 온전하신 하나님과 온전하신 인간의 함생체이심을 믿는다. 그 안에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함께 계시며 또한 모든 피조물 특히 모든 인간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살아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도 모든 피조물 안에 사시는 것이 바로 정상적인 창조질서라고 이해한다. 이 진리는 수직적 함생과 수평적 함생의 상징인 십자가로 넉넉히 확인된다.

3. 성령 하나님은 특히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부여하며, 되살려내며, 계속 유지하도록 하며, 생명을 파괴하는 악령을 제어하고, 특히 인간을 범죄에서 해방시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함생적 사역을 적극 수행하고 계심을 확인한다.

4. 하나님의 뜻이 직접적으로는 기독교가 공인해온 신구약 성경에 가장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믿는다. 또한 성경은 성삼위 하나님의 주도와 수많은 사람들과 피조물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인한다.

5.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을 믿는다. 따라서 사람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함생체요 성삼위 하나님에게는 자신을 희생하여 구원할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요, 자기 자신에게는 절대적 가치이며, 다른 사람과는 사회적 개인이며, 다른 피조물과 관련해서는 자연적 개체임을 확인한다. 

6. 우리는 하나님과 함생체 되기를 거부하고 다른 생명을 파괴하는 것을 죄악의 핵심으로 이해한다. 

7.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함생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구원의 길임을 믿는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믿음이 함생작용을 통하여 성취되며 그 작용과정은 매우 다양한 것으로 확인한다.

8. 생명은 살아 있어 성장, 확장, 변화, 번식, 행동, 환경 적응하는 특징을 가진 내적 실체를 보이는 것으로 이해하며, 반대로 이런 특징을 갖추지 못한 사물을 죽음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생명이 있으니 곧 창조주와 사랑의 함생체가 된 생명임을 확인한다.

9.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분의 형상이 회복된 사람들로 구성된 거룩한 사랑의 함생체가 교회임을 믿는다. 교회는 곧 하나님 나라의 형상이 회복되어져가는 함생체요, 온 우주에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키는 책임적 함생체여야 함을 확인한다.  

10.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생체 된 행복을 먼저 체험한 까닭에 솔선수범하여 다른 사람과 피조물에게 그 같은 혜택이 가도록 생명을 나누어 주는 것이 최고의 윤리표준임을 믿는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함생체로부터의 자유를 확장하도록 힘써야 하면서도 함생체를 위하여 그 자유를 사용하는 책임이 있음을 확인한다.


□인류문명을 함생 패러다임으로 바꿔야

 마지막 두 항목은 기독교의 울타리를 넘어 인류 문명 전체를 살려야 한다는 사명과 방향을 담았다. 곧 함생문명론의 요약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요한계시록에 집중적으로 표현된 종말론은 교회나 기독교 신자 개인들의 관심사만은 아니다. 온 인류의 역사의 방향, 그리고 온 우주의 최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11. 온 인류의 문명과 문화 특히 국가제도와 세계 기구들이 함생문명 건설을 위하여 매진해 나가야 할 것을 촉구한다. 지구 마을은 온 인류와 생명을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손쉽게 파괴할 수 있는 무기와 요건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자각하고 생명파괴 문명을 생명 건설문명으로 바꾸는 일에 앞장 서야할 일꾼의 사명이 있음을 확인한다. 우리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수많은 생명을 멸절시키고 학대해온 인류역사와 기독교 문명에 대하여 심원한 수치를 느끼며 회개한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과의 반 함생적 삶을 살고 기독교 신자들의 생명을 죽이고 위협할 경우라도 우리는 그들의 원수로서 보복하기보다는 그들의 친구로서 협력하고 깨우치는 것이 더 큰 사명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삶임을 확인하고 전심력을 기울여 이를 실행하도록 확인한다. 전쟁과 경쟁이 삶의 불가피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나 결코 악용되지 말아야 하며, 가능한 한 극소화되어야 하며, 평화와 협력의 큰 틀 안에서 생명을 더 많이 살리기 위한 도구로서만 허용되어야 한다.

12. 하나님의 대속적 사랑을 기축으로 하는 하나님의 나라 곧 온전한 함생의 나라가 완성될 것을 믿는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가 함생적 작용과 반함생적 작용의 끊임없는 갈등과 격렬한 투쟁으로 계속되어가는 과정에서 함생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함생이 온전하게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는 창조주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것 또한 피조물과의 사랑적 함생을 통하여 완성될 것을 확신한다.

이처럼 함생적 생각은 목회현장에서 시작된 것이어서 함생목회론에서 그 실마리(clue)를 발견했다.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의 이론적 체계로는 함생신학으로 정리해 가고 있다. 그리고 인류의 현재와 장래 문명이 생명을 살리고 증진시키는 패러다임으로 바꾸기 위하여 함생문명론을 말하게 된다. 그 같은 문명건설을 위한 기초적 이론의 체계적 구축을 위하여 함생사상론을 전개하여 가고 있다.

함생문명론을 조금 더 전개한다면 이것을 인류 문명의 모든 분야와 연결지을 수 있다. 함생 국가론, 함생 정치론, 함생 경제론, 함생 교육론, 함생 가정론, 함생 통일론, 함생 회사경영론, 함생 지도자론, 함생 부부론, 함생 군사론, 함생 예술론, 함생 스포츠론, 함생 종교론, 기독교 안에서도 물론 함생 예배론, 함생 전도/선교론, 함생 기도론, 함생 설교론, 함생교육론, 함생친교론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과업이 눈앞에 전개된다. 우선 함생통일론만 해도 남한과 북조선 간에 새로운 접근을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남북의 국민/인민은 물론 기득권층들도 서로 상생하는 통일정책을 펴나가고 이것은 온 지구국가에도 유익을 줄 수 있는 함생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에서 통일을 성취하여 나가야 한다.

그러나 우선 이 지구 전체에서 인간의 생명을 마구잡이로 죽여 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을까. 반함생적 문명 말이다. 아니, 함사주의(咸死主義, conthanatism) 문명이다. 전쟁과, 지진, 화산, 해일, 홍수, 가뭄 같은 자연재해, 전염병, 기후 변화, 생태계 오염, 공기 오염, 물 요염이나 물 부족, 인종청소, 종교간의 충돌, 가공할 핵무기, 공산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는 1억명의 생명을 몰살시켰다는 통계이다. 더 있다. 민족우월주의, 자살과 교통사고, 악한 독재자들, 자본주의 폭력, 인간의 증오심 이런 것들이 얼마나 인간의 생명을 학대하고 죽이는가. 이런 점에서는 종교는 한 술 더 뜬다. 종교를 배경으로 하는 증오심은 인간의 씨를 송두리째 말리게 될 수도 있는 수준이다. 기독교도 그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따라서 기독교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큰 믿음’을 어서 속히 회복해야 한다. 그 십자가 가르침으로 인류의 문명을 함께 죽는 체제에서 함께 살리는 체제로 바꾸어 가도록 선도해야 하지 않을까.

함생목회론이 앞으로 제2의 종교개혁을 가져와야 한다. 행위구원에서 믿음구원으로의 중심추 이동이 제일의 개혁이라면 이 두 가지를 창의적으로 종합하여 한 차원 더 지양 혹은 승화시킨 ‘사랑구원론’이 그 다음이 된다. 이 사랑구원론은 현대와 미래의 세계가 우리 기독교에게 세차게 강요하고 있는 것을 더 이상 외면할 수가 없다. 아니,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목회대명’으로 읽어야 한다. 루터와 칼뱅 등의 기독교의 개혁이 문명의 패러다임을 통째로 바꾼 사건인 것처럼 사랑 구원론 곧 함생적 구원론이 또 한 번 인류문명의 방향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축구 구경 함께 가실래요?

 독자들께서 여기까지 읽으시느라고 참 수고 많으셨다. 추상적, 논리적, 명제적, 그리고 절제된 언어가 진리를 명쾌하게 설명하는 측면은 있지만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다. 가슴은 여전히 허전하고 또 행동으로 실천되는 동력도 필요하다.

 아무튼 그래서 복잡한 해골도 식힐 겸 축구 구경이나 함께 가자고 권고한다. 특히 누구나 경기가 열리기도 전에 흥분하는 한일국가대표전 축구구경 말이다. 왜 흥분할까. 적개심 때문이다. 삶은 곧 전쟁이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쟁이다. 용호상박 정말 용과 호랑이의 싸움이다. 그래서 어느 나라들인가 축구전쟁이 국가전쟁으로 발전했었다든가. 한국과 일본도 그럴 개연성이 충분하다.

 그러나 축구는 싸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협력도 있다. 축구경기에 협력이라니 무슨 소리냐고 꾸중할지 모른다. 두 팀이 담합한다면 그건 사기축구 아닌가. 그러니까 그런 뜻은 아니다. 만약 한 팀은 호랑이 급인데 다른 팀은 고양이 수준이라면 구경꾼이 얼마나 될까. 아니, 상대 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축구를 잘하는 팀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외팀만 가지고 경기가 성립될까. 그런 점에서 축구팀은 숙적일수록 작은 틀에서는 죽기살기로 싸워야 하지만 큰 틀에서는 서로 협력체제인 셈 아닌가. 협력(cooperation)의 큰 틀 안에서 경쟁(competition)을 하는 패러다임으로 인류 문명이 바뀌어야 한다.

축구는 사람들이 선수도 되고 구경꾼도 된다. 그래서 경기 중에 상대편 선수에게 폭행을 하거나 죽여 버리면 절대로 안 된다. 그런 사고가 종종 있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이다. 그래서 그런 범죄자에게는 엄격하게 징계한다. 이 팀이나 저 팀이나 공통적인 것은 결국 생명을 살리려고 축구를 할 뿐이다.

한 가지 더 있다. 축구는 공이 있어야 경기를 할 수 있다. 그 공은 90분 혹은 120분 동안 이 놈 저 놈에게 발길질 당하고 내내 두드려 맞는다. 허지만 경기가 끝난 뒤에 공에게 무슨 보상이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는가.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하는 이도 없다. 그 공이 낡아서 못쓰게 되었다고 공동묘지에 안장시키지도 않으며 아무런 의식 없이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뿐이다.

그런데 그 공이 바로 예수님, 십자가에 목숨을 바친 희생양 예수님은 아니실까. 그 시각에서 축구 전체를 다시 재구성한다면 어떨까. 그 시각에서 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다시 본다면 어떨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그 같은 축구공의 인생을 자원할 수 있을까. 숙적간의 전쟁을 함생구조로 확 바꾸는 그 공의 사명 말이다.

 

(본 논문이 게재될 <서광>이 신학전문지가 아니므로 비교적 평이하게 논술했으며 출처와 참고문헌을 생략했음).

  

필자: 본회 회목. 국어교육과 학부와 대학원 졸업. LA 소재 유니온교회 원로목사. 미주성결대 초대명예총장. Fuller신학대학원 논문지도교수. 저서: <기독교교육신학 연구논문집> 3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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