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운동의 영성

초대교회의 재현과 변형

  

방성규 박사
(한영신학대학교, 기독교영성연구소)

 

서론: 초대교회, 영성, 성결운동  : 1.성결운동의 태생적 배경

2.성결운동 영성의 특징  :  결론: 반성과 전망

 

 

서 론: 초대교회, 영성, 성결운동

이 논문은 궁극적으로 성결운동이 가졌던 영성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는 데 있다. 살펴보는 과정에서 초대교회라는 개념을 넣어서 이해의 폭을 넓히려고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보면, 어떤 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두 가지 요소가 항존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이런 시대적 요청의 지향점이다. 이 지향점은 그 시대의 상황적 요청에 응하면서도 이 요청을 추구함으로써 만들고 도달하고 싶은 이상적 세계를 말한다. 그리고 이 이상적 세계는 역사와 무관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이상적으로 생각되어졌던 것의 재현 또는 오늘 역사에 맞춘 변형을 말한다.

모든 기독교운동의 역사에서 되돌아 가야할 이상향은 성서의 세계이며 역사적인 용어로는 초대교회가 된다. 성결운동도 예외가 아니다. 스티븐 웨어(Steven Ware)는 성결운동과 원시주의(primitivism; 원시공동체의 이상을 찾자는 사상) 혹은 회복주의(restorationism; 원시공동체로 되돌아가자는 사상)를 연관시키면서, 이 회복주의란 "역사에서 삶의 타락 이전의 황금시대로 되돌아감으로써, 즉 이전시대로 되돌아감으로써 역사를 부인하거나 역사적 실존의 연속성을 부인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즉 성결운동은 바로 이전시대를 부인하면서 더 이전시대(초대사도교회)로 되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단지 이 운동이 일어났던 시대적 상황에 대한 분석이나 역사적 전개과정의 기술에 그친다면, 하나의 단면만 보는 셈이 된다. 웨어가 생각하는 것처럼 성결운동이 초대교회만 바라보고 바로 직전의 역사를 부정하는 데서 온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초대교회를 이상향으로 보았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결운동을 초대교회가 가졌던 이상과 현실과 연관지어 연구하는 것은 성결운동의 역사를 더 폭넓게 이해하는 길이며, 핵심에 더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다.

이 글은 초대교회와 성결운동을 연결하는 하나의 일관된 논지를 갖고 있지 않다. 초대교회를 기술하거나 초대교회의 특징을 규정하는 것만으로도 주어진 분량을 넘어서는 것이 되어서, 별도의 항목을 만들어 초대교회를 논하지 않는다. 단지 강연이란 성격에 맞추어 성결운동을 설명하고 그 특징을 논의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초대교회에 대한 언급을 하고자 한다. 부제에 초대교회의 재현과 변형으로 붙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제주제마다 재현이 되었는지 아니면 변형이 되었는지 등의 연구는 전혀 하지 않았다. 단지 초대교회로의 복귀가 단순하게 과거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변형이란 용어를 사용하였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로 복귀하고자 하는 일반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뜻으로 재현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 글을 전개하면서 선결해야 할 과제는 '영성'의 이해이다. 오늘날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사실 영성이란 용어의 정의가 통일되어 있지 못하다. 특히 개신교 내에서 경건이라는 말이 있는데, 왜 굳이 영성이란 말을 써야하는가 하는 반론도 있다. 하워드 L. 라이스(Howard L. Rice)는 이런 질문을 제기하면서, 경건이란 말의 본래의 뜻은 현재 쓰고 있는 영성과 다름 없으나, 역사를 통해서 각인된 인상은 "편협하게 판단적이며 독선적"이었기 때문에 영성이란 용어를 쓰고 있다고 설명한다. 사실 경건과 영성이란 말이 상호교환적으로 쓰일 수 있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영성이란 말을 쓰는 이유는 영성이란 말에는 경건이란 말이 담지 못하고 있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영성이란 단어에는 특정한 형태의 반복화라는 개념이 더 들어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영성을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 배타적인 영적 관계를 통해 얻게 되는 신앙적 삶의 특정한 태도나 행동을 형성하는 정신 구조"로 정의한다. 다시 말해 특정한 형태 또는 구조의 하나님 경험이 특정한 형태의 삶의 모습 또는 구조를 보인다는 것이다. 즉 특정한 형식의 하나님 경험이 있으며, 이런 경험은 삶에 대한 특정한 형식의 해석적 세계관을 형성케 하고, 특정한 형태의 실천적 삶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성결운동의 영성이란 말은 성결운동만이 특징적으로 가지고/가르치고 있는 하나님 경험을 통해 성결운동만이 가진 특정적인 삶의 모습이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한가지 더 강조해야 할 것은 특정한 형태의 하나님 경험은 특정한 형태의 영적훈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즉 성결운동에서 강조하는 형태로 신앙의 훈련을 하면, 성결운동이 얻고자 하는 형태의 하나님 경험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순절적으로 훈련하면 오순절의 영성을 얻는다는 것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한 특정한 형태의 영적훈련을 반복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데 있어서 그 특정한 형태로 하게 되고 이 때 안정감을 갖는다. 예를 들어, 장로교에서 말씀을 지적으로 훈련받아 온 교인은 오순절 방식의 성령경험을 불편해 하거나 심지어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성서를 묵상함으로써 얻는 하나님 경험방식에는 안정감과 만족을 느낀다. 이런 이해의 바탕에서 성결운동의 영성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이 운동에 있었던 사람들이 가졌던 하나님 경험의 틀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노력이 됨과 동시에 묵시적으로 오늘과 내일을 위해 지시적이며 제안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영성을 말할 때, 유한한 인간의 인위적인 조작이 무한한 성령을 마음대로 조정(manipulate)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전적인 능동성에 비해 인간의 전적인 수동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단지 유한한 인간은 유한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한한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할 수 있고 접촉할 수 있으나, 유한한 인간은 자기의식과 감각 그리고 경험의 세계에서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영적성장이라든가 영성형성(spiritual formation)은 하나님 경험에 대한 자기의 실존적 경험의 깊이를 만들어내자는 노력일 뿐 아니라, 가능하다면 범위(spectrum)도 넓혀보자는 시도이다. 즉 다른 사람이 선호하는 방식의 하나님 경험을 공유하도록 노력하자는 것이다. 즉 영성을 이해한다는 말은 자기 존재의 신적 경험을 확인하는 작업이면서 다른 경험의 가능성에 자기를 노출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런 면에서 혹 영성훈련을 마치 인위적인 조작으로 하나님의 경험을 우려 짜내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은 불식되어야 한다. 인간의 능동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경험의 방식이 하나의 정적으로 고착된 구조(structure)이거나 틀(paradigm)이 아니라 보다 역동적이며(dynamic), 융통성이 있으며(flexible), 활력적인(vital)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결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이 운동의 영적훈련이 추구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험할 때, 가장 역동적이 되며 활력적이 된다. 이런 면에서 성결운동의 영성이란 성결운동이라고 정의된 형식과 구조의 하나님 경험이 삶의 독특한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고찰하고자 한다.

 

Ⅰ. 성결운동의 태생적 배경

성결운동은 19세기 말에 영국과 미국에서 특징적으로 성결을 강조했던 범 개신교 내의 운동으로 현재도 지속되고 있는 운동이다. 이 운동의 역사적 기원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동시다발적인 여러 갈래의 지류들이 있으나, 무엇보다도 웨슬리의 성결에 대한 강조에서 촉발되었음을 먼저 강조되어야 한다. 웨슬리의 성결에 대한 강조가 감리교를 태동케 했고, 이 감리교 운동이 미국의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면서 감리교가 아닌 성결운동을 태동케 하였다.

웨슬리의 온전한 성화에 대한 관심의 고조는 영미권에서 19세기에 들어와 여러 방면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성화, 성결, 완전이란 용어들은 성서에서 시작되어서 기독교 역사 전체를 꿰뚫을 수 있는 중요한 용어이다. 19세기에는 19세기 판(version)으로 나타난 것이다. 범 성결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감리교가 먼저 지도적인 위치에 있다가, 이내 이 운동은 독립해서 갈라지게 되었다. 19세기 말에는 특히 미국에 여러 가지 성결운동이 번창하였다. 고상한 삶(higher-life) 운동, 챨스 피니(Charles Finney)와 아사 메이한(Asa Mahan)을 중심으로 한 오벌린 완전주의에서 파생한 성결운동, 뉴잉글랜드 신학계열의 성결운동, 팔머의 제단신학, 전천년설을 주창하는 세대주의자들의 성결운동 등 그 종류가 다양하였다. 박명수 교수의 근대 복음주의 성결론은 웨슬리 성결을 기본으로 하는 성결운동 내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상세히 잘 설명하고 있다.

성결에 대한 강조는 루터에 의해 시작된 개신교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다 근원적으로 성서로, 초대교회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루터가 중세교회와의 투쟁에서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한 중생을 되찾았다면, 웨슬리는 루터가 미처 강조하지 못한 성령에 의한 온전한 성결을 찾았다. 웨슬리가 되찾은 성결은 초대교회의 신학과 삶을 특징지어주는 주제였다. 성결은 성서가 근본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주제이기 때문에 사실 모든 시대마다 이 주제와 씨름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초대교회가 이 씨름에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피터 브라운(Peter Brown)은 고대로마 말기의 그레꼬-로만 사회에 대한 역사를 분석하면서, 이 시대를 지배했던 시대정신(mentalité)으로 성인전(hagiograhpy)에 기술된 "거룩"이란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런 배경적 정신세계가 있었기 때문에 초대교회의 신화(神化, deification)가 대부분 신학의 신학적 주제(theological motif)가 되며, 성결한 삶이 윤리적 대명령(ethical imperative)이 될 수 있었다. 초대교회가 다종교/문화의 경쟁적 상황에서 로마 사회를 얻을 수 있었던 성공의 요인을 성결과 연결시키는 학자들이 있다. 이 학자들에 의하면 초대교회가 성결을 추구한 것이 시대를 얻게된 근본적 동인이었다. 성결은 많은 신학적 주제 가운데 부수적인 주제가 아니라 모든 시대를 지배했던 주제였다.

성결운동이 강조하던 초대교회로의 회복은 초대교회가 성결을 통해 사람과 시대를 얻었던 것처럼 다시 성결의 증진을 통해 시대를 얻자는 노력이었다. 이 관심은 19세기 말의 미국의 역사적 정황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간주되었다. 시민전쟁으로 인한 파괴로부터의 재건과 새로운 세계 건설은 시대적 상황의 요구였다. 노예제도를 타파하고 기독교 문화가 중심이 된 성숙한 시대를 꿈꾸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이 시대는 "의사 황금기"였음을 알게 되었다. 19세기 말에 급속한 이민자의 증가는 다종교/문화의 상황을 맞게 되었고, 특히 신학대학의 학문적 성향은 기독교의 변증론에서 세속 학문으로 전환을 하게 되었다. "완전"을 이룬다는 종교적 신념이 정치 문화의 상황에서 과연 가능하겠는가 하는 근본적 질문을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일생을 통해 얻게 되는 점진적 완전이 기독교적 완전을 추구하지 않는 (오히려 역행하는) 문화와 정치에서 과연 얼마나 증진될 수 있는지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이런 의구심은 1776년에 미국 개신교 내에서 불과 2.5%를 차지했지만 1850년에는 무려 34.2%로 가장 큰 교단으로 성장한 감리교 내에서 촉발되었다. 이 수치의 의미는 이 성결운동이 단순하게 어느 한 특정 소수 교단 내의 운동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웨슬리의 그리스도의 완전의 개념이 점진적이면서도 순간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이미 이런 논쟁은 예견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보았듯이, 19세기 말의 성결운동은 단지 감리교 내의 운동이 아니라 교파를 넘어서 일어난 범교단적인 운동이었다. 하지만 그 주도적 역할은 감리교가 하였다. 많은 감독들이 이 운동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새로 신설한 두류 신학원(Derew Seminary)이나 시라큐스 대학교(Syracuse University)의 총장들도 마찬가지로 이 운동을 지지하였다.

"성결캠프집회"에서 시작되어 구체화된 이 운동은 곧 초교파적인 운동이 되었다. 1870년대에서 1880년대 사이에 성결운동을 지지, 홍보하는 간행물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1887년에는 67회의 전국규모의 캠프집회를 하였으며, 현장에서 전적으로 성결운동을 펼치는 전담 전도자들이 1888년에는 206명 있었다. 1892년에는 354회의 전국규모 또는 지역규모의 집회가 있었으며, 이 때 전담 전도자들이 304명이 있었음이 공식적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 운동이 초교파적인 유대를 유지하면서 전개되다가, 1890년대부터는 각 교단으로부터의 지원이 끊기거나 거절되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이런 상황이 된 것은 무엇보다 지도력의 혼선 때문으로 보인다. 각 교단의 지도자들은 이 운동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벗어나 교회 밖의 운동으로, 또는 교인들을 교회 밖으로 끌어내는 운동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1890년대부터 감리교 감독들은 이 운동을 "분파적"(sectarian)으로 간주하기 시작하였고, 1894년 총회(The General Conference)는 이 고민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였다: "우리는 새로운 상황을 맞고 있다. 복음 전도자들은 수적으로 수십, 수백 명이 되고 그 성장 속도도 빠르다.... [그들의] 모든 행동들이 지명이나 감독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성결운동은 이런 비판에 대해 "모든 성결 기독교인들은 맘몬(mammon)화된 감리교에서 나오라"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후 점차적으로 성결운동은 전국적인 조직력을 잃게 되었다. 단일 지도력의 부재현상이 빚어지고, 이로 인해 이 운동은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닌 교단으로 분산하여 성장하는 형편이 되었다. 비록 이념적으로는 같은 운동을 하면서도 조직적으로는 서로 다르게 되었고, 피할 수없이 공유하는 이념 내에서도 차이를 드러내게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시작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한 운동에 묶여 소리내지 못했던 차이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기존의 교단으로 되돌아가든지, 아니면 웨슬리의 성결론에 기초한 성결운동을 고수하는 교단이 되든지(the Church of Nazarine, Pilgrim Holiness Church - 후에 Wesleyan Holiness Church로 병합, Christian Mission Alliance 등), 아니면 오순절적 능력에 초점을 맞춘 교단이 되었다(Assembly of God, Church of God in Christ, Church of God in Cleveland, Tennessee 등). 많은 면에서 입장이 같았던 근본주의자들(fundamentalists)과의 분명한 갈림도 보게 되었다. "성결"이란 통일된 목소리에 불구하고 이 운동은 이후 각 교단의 특색에 따라 강조점을 달리하며 성장해 오고 있다. 이 글은 이 가운데 특별히 웨슬리 성결론에 기초해 성결운동을 펼치는 그룹의 영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성결운동 영성의 특징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마다 성서의 가르침인 성결을 추구하나, 그 방법은 여러 가지로 다르다. 신학적 전통이 다른 교단마다 성화에 대한 이해를 달리한다. 이미 지적했듯이, 성결운동 내에도 서로 입장의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이 글은 성결운동 영성의 특징을 살펴보면서 다른 교단이나 동일운동 내의 다른 그룹과의 차이점을 찾아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이런 세밀한 작업보다는 성결운동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모습을 찾으려고 하였다. 필요하다면, 차이점은 그때그때 기술할 것이다.

첫째로, 성결운동의 영성은 성령의 세례에 의한 성결을 주장한다. 시대마다 성결을 주장했어도 성결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 그 방법에서는 차이가 있다. 웨슬리의 성결론에 기초한 성결운동은 무엇보다도 성결은 성령의 사역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해 중생한 다음 인간적인 노력으로 성화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점에 성령의 은혜에 의해 온전에 이른다는 주장이다. 성화를 인간의 자력적인 노력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결은 전적으로 성령의 은혜이다. 이런 점에서 터틀(Robert G. Tuttle)은 웨슬리의 신비적 경향을 "성령의 능력에 의한 '봉사의 신비주의'"라고 설명한다: "그[웨슬리]는 고난받는 자들을 향하여 사랑과 동정을 베푸는 신비주의적 윤리를 존경하였으며, 그의 영[성령]이 우리들과 함께 계시고, ... 능력을 주시고 거룩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일치하는 생활의 성결을 존중하였다." 이는 분명 범개신교의 전통인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에 갈라서게 된 오순절운동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능력과 은사를 부여하였지 성결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 입장을 달리하였다.

둘째, 성령의 역사는 인간에게 카리스마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성결운동은 감리교와 오순절의 중간에 위치한다. 점진적인 성화를 주장하는 감리교는 성령의 은혜는 사람의 인격과 교육에 의존하기 쉬운 반면, 후에 갈라서게 된 오순절운동은 성령의 은혜를 카리스마적인 은사와 능력으로 해석하였다. 가령 사도행전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해석할 때, 성령의 역사를 온전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과 방언과 은사가 나타난 능력으로 보는 관점 사이에서, 성결운동은 인간적인 점진의 단계를 인정하지만 어느 시점에 성령의 카리스마적 임재를 강조하면서도 또한 이 임재가 반드시 은사를 수반한 능력이 아닐 수도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능력을 강조하는 운동과의 차이는 신유에 관한 입장에서도 분명해진다. 오순절 계열의 운동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신유가 이미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에게 육체적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보았다. 반면, 전국캠프집회의 첫 번째 의장이었던 인스킵(John Inskip), 컬리스와 치유사역을 같이했던 맥도널드(William McDonald), 스틸(Daniel Steele) 등은 신앙의 은혜와 신앙의 은사를 구별하여, 카리스마적 성령의 역사가 은사보다는 성결한 삶에 있음을 강조하여 성결운동을 지지하였다.

셋째,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는 인간적인 방식은 부흥운동의 방식이었다. 점진적인 교육과 훈련을 통한 방식보다는 부흥회의 설교와 기도를 통한 방식이었다. 이 부흥회의 방식은 감정에 호소하며, 청중의 결단을 촉구한다. 성결운동의 일차적 성령 체험 방식은 문학적 활동이나 신학적 반성을 통한 것도 아니고, 육체적 고행을 통한 금욕주의적 방식도 아니며, 사제의 중보에 의한 방식도 아니었다. 카리스마적인 설교자의 설교에 감정적으로 응답하는 것이었다. 설교자는 대중적 스타였다. 설교자는 사제처럼 중재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 개인의 감정에 호소한다. 이 점에서는 종교개혁시대에 성서적 인문주의자들이 중세기의 신학방법론인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논리와 증명의 방식을 거부하고 중세기 이전의 초대교회로 되돌아가자는 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 이들 인문주의자들은 논리학 대신에 수사학을 선호하였고, 키케로의 수사학적 방법론이 신학연구의 방법론으로 심도있게 논의되었다. 수사학적 방법론의 특징은 화자(話者)가 진리를 정의하고 논증하는 것이 아니라 청자(聽者)에게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결국 궁극적으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최종 결정은 청자에게 달려있다. 이런 인문주의자들의 노력에 의해 종교개혁자들이 대학을 접수해서 교과과정을 논리학 대신에 설교학으로 바꾼 것은 다시 한번 종교개혁이 초대교회로 되돌아가자는 이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넷째, 성결운동의 영성은 대중적인 방식으로 형성된다. 학문적인 깊이가 전제되거나 이를 추구하는 운동이라기보다는 대중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영성이었다. 대중들이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운동이었다. 사실 성결운동 지도자들의 교육 배경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1880년 중부와 일리노이주 연회에 속한 지도자들에 대한 연구에서 오블링거(Carl Oblinger)는 다음의 사실을 밝혀주었다. 성결운동에 속한 지도자 38명 가운데 6%만이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졌고, 55%는 전혀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반면 이 운동에 연관되지 않은 지도자 100명 가운데 59%가 대학과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또한 경제적인 면에서, 250 에이커 이상을 소유한 지도자가 성결운동에서는 3%인 반면, 연관되지 않은 지도자는 36%를 차지한다. 타이슨(John Tyson)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감리교의 "복음적 경제학"의 실패 원인이 감리교인들의 경제적 성공이 실패의 일차적 원인이었다는 지적은 시사해주는 의미가 크다. 초대교회의 성공의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의 실천이었다는 점에서 성결운동의 지도자가 지적이나 경제적 엘리트가 아닌 대중들이었다는 점은 맥이 상통한다.

대중적인 지도자 가운데 여성들의 위치도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뵈베 팔머(Pheobe Palmer) 여사가 가장 활발하게 성결운동에 참여하였다. 자기 집에서 거의 60년간 "성결 향상을 위한 수요 모임"을 인도하였고, 성결운동을 홍보하는 잡지 <성결의 안내>(Guide to Holiness)의 편집인으로, 그리고 미전역과 유럽을 순회하는 전도자로 사역을 하였다. 케스윅 운동에 지도자로 참여한 한나 스미쓰(Hannah Whitall Smith)와 구세군 창시자 윌리암 부스의 아내 케더린 부스(Catherine Booth)의 활동도 두드러졌다. 비록 전국적인 유명도를 못 얻었다해도 각 캠프 기도회에 여성들이 인도자로 나서거나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850년대에 다른 교단으로부터 성결운동이 여성 지도자들을 세우는 것을 비난받기 시작하였다. 또한 성결운동은 여성을 위한 사회운동도 함께 벌였다. 그들은 매춘에 연루되어 있는 여성들을 구제하는 일을 하기 위해 1834년 "여성도덕개혁협회"(Female Moral Reform Society)를 형성하여 전국적으로 550개의 지부를 세웠다. 초대교회에서 여성사역자들이 비록 제도적으로 감독이나 장로가 되는 조직적 권리는 못얻었다해도, 여선지자와 여집사로 실질적으로 성령의 사역을 지도하고 안내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마찬가지로 성결운동의 여성들도 수적으로 조직의 앞장에 선 사람은 많지 않아도 실질적인 역할은 대단하였다.

성결운동이 대중들의 호응을 받게 된 역사적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해치(Nathan O. Hatch)가 잘 지적해 주었듯이, 정치적 민주주의 이상과 관련이 있다. 해치는 미국의 기독교가 조직의 질, 성직자의 신분이나 지적 삶의 힘에 의하기보다는 "민주적이거나 대중적인 지향"(Democratic or populist orientation)에 중심적인 원동력이 있다고 보았다. 성직자는 유럽식으로 국가의 공무원 신분이나 귀족의 신분이 아니며 오히려 민주적인 지도자상이었다는 설명이다. 대중에 의한 민주주의의 이념이 성결운동과 잘 부합되었다는 설명이다.

다섯 번째, 성결운동의 영성은 직접성으로 형성되었다. 대중성이란 체계화되고 조직화된 상하의 서열적 구조가 아니라 한 개인이 직접 위와 연결할 수 있는 구조이다. 중간적 매개자 없이 스타와 관중이 만나는 구조이다. 성결운동은 신앙의 체험을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체험할 것을 강조하였다. 지금 이 순간에 "느끼도록"(felt) 강조하였다. 게스퍼 강 캠프집회(Gasper River camp meeting)에서 한 소녀는 이렇게 체험을 간증한다. "오 그가 원하시네, 그가 원하시네 - 그가 오시네, 그가 오시네 - 오 보배로운 그리스도 그가 - 그를 보고 있는 이 충만함 - 오 그를 보고 있는 이 아름다움 - 왜 이전에는 믿지 못했던가! 왜 이전에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오지 않았을까, 그리스도가 이토록 나를 구원하시기 원하시는데."

직접성이란 개인적 하나님 체험을 의미한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가 종교의 정의를 신이라고 생각되는 존재와의 관계성에 만들어지는 느낌(feelings), 행위(acts), 그리고 독립된 한 개인으로 하게 되는 체험(experiences)이라고 정의하듯이, 개인적 하나님 체험이란 종교의 깊이를 설명하는 핵심이다. 이런 면에서 리차드 포스터(Richard J. Foster)의 성결운동에 대한 이해는 바르지 못하다. 그는 성결을 추구하는 전통을 훈련(discipline)에 강조점을 두는 것으로만 보았지, 한 개인의 깊은 하나님 경험을 보지 못하였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성결의 증진을 위한 조직이나 인도자들도 하나님과 개인들 사이의 중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홍보를 위한 것이었다.

이런 직접성은 상대적으로 전통적인 교리나 해석의 영향을 덜 받게 하였다. 보편적이어야 할 신학적 전통이 어느 특정한 문화에서 파생한 경우가 많은데, 성결운동은 이 점에서 고착된 전통을 강요하지 않았다. 직접적인 하나님 경험은 자기문화 안에서 새로운 신앙세계를 열게 해주었다. 아프리카 계열의 미국인들은 이 성결운동을 받아들여 자기문화 안에서 신앙적 정형을 형성하고, 째즈 음악과 불루스를 혼합한 복음송의 음악적 장르를 만들어내었다. 초대교회가 이미 시작부터 문화적/언어적 전통에 따라 교회를 각기 세워가면서도 기독교의 통일성을 잃지 않은 것처럼, 성결운동은 교단으로 고착되기 이전에는 성결의 복음을 전하는 것말고는 다른 문화적 강요를 하지 않았다.

여섯 번째, 성결운동의 영성이 가지는 특징은 선교지향적이었다. 성결운동은 교구 관리나 행정 조직 관리보다는 선교에 보다 많은 정열을 쏟아내었다. 개신교 내에 선교지향적이지 않은 교단은 없지만, 특히 성결운동의 선교적 열정은 기동성과 융통성의 특징을 지닌다. 이미 웨슬리가 순회 전도자(circuit riders)를 두어 기동성과 융통성을 확보하여 감리교 운동을 확대하고 북미 대륙에 자기 생전에 선교지를 만들었던 것처럼, 성결운동의 지도자들은 성결의 증진을 위하여 선교의 전략을 교회와 연관은 맺으면서도 교회의 조직과는 별도로 독립적이고 모험적이고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선교를 지향하였다. 가능한 한 교단적인 간섭으로 인해 기동성과 융통성을 제한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원칙 하에서 윌리암 테일러(William Taylor)는 1862-1866년 사이 영국, 호주, 인도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선교 여행을 다녔다. 이런 성결운동의 선교적 노력의 결과로 한국에 성결교회도 가능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성결운동이나 오순절 운동이 제 3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선교의 열정을 보이며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미 1988년 보고서에 의하면 제3세계 개신교 내에서는 성결/오순절 계열의 교회가 양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 선교의 열정이야말로 초대교회가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실천하였던 관심사였다.

일곱 번째, 성결운동은 사회 개혁적인 삶을 강조하였다. 대중들을 위한 운동이기 때문에 사회의 기저층(基底層)을 위한 사회개혁프로그램에도 관심을 두었다. 즉 성결의 체험의 결과가 개인의 윤리적 삶의 변화뿐만 아니라 사회의 변화에서도 나타났다. 인종문제, 직업훈련원 설립 등의 도시빈민 문제, 절제운동, 여성인권 문제 등의 사회개혁 프로그램에 성결운동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기존의 교단들이 이미 상류층 내지 중산층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었다면, 성결운동은 기저층의 삶의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부자들의 권리를 유지하는 데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신앙의 정서가 아니라 세상을 개혁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다가가는 영성이었다.

 

결 론: 반성과 전망

성결운동은 한 세기의 시대적 상황에서 나와 시대적 상황의 변화 때문에 소멸되어서는 안될 운동이다. 성령의 세례에 의해 개인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서 변화하여 사회의 개혁에 이르도록 지속적으로 성결의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 이 성결의 복음이 지속적으로 전파되기 위해서는 우선 종교적 체험이 특히 강조되어야 한다. 성결운동의 영성의 특징 중의 하나인 감정에의 호소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연구하고 이를 선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많은 학자들에 의해 보편적 합리주의에 의한 근대 세계의 종말이 선포되고, 탈근대화 세계의 기본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근대 세계가 인간의 이성이 기본이 되어 모든 것을 판단했다면, 탈근대화 세계에서는 이성이 그 지배적 힘을 잃거나 제한될 것은 분명하다. 여러 곳에서 아직은 정의되거나 정리되지 못했지만, 조심스럽게 감성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대두되고 있다. 하나님 경험의 방식에 있어서 직접성과 감정을 도구로 삼는 성결운동에 관련된 사람들이 앞으로의 탈근대화 세계를 위해 풀어내 주어야 할 과제이며, 공헌이다.

성결운동이 남겨 놓은 숙제에 대한 반성도 필요하다. 초대교회가 새로운 인간상으로 로마 사회를 얻었듯이, 성결운동이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해야 한다. 성결운동이 과거 지향적인 판단 기준으로 게토(getto)화 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분명 성결운동은 성령의 체험에 의해 성결한 사람이 되고 성결한 삶에 이르는 결과를 보여야 하는데, 이 점에서 분명하지가 않다. 성결의 강조가 삶의 실천적 보기가 아니라 교리적 강조에 끝나고 만다면, 이는 분명 원래 성결운동의 취지가 아니다. 초대교회가 궁극적으로 로마 사회를 얻은 것이 그들의 실천적 삶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초대교회로 되돌아가자는 운동도 실천적 삶에서 승부를 지어야할 것이다. 성결운동이 단지 술 담배 안하는 사람 정도로 그쳐서는 안된다. 보다 적극적인 사회의 윤리적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특정한 형태의 하나님 경험이 특정한 형태의 삶의 방식을 만드는 것이 영성이라면, 과연 성결운동의 영성에서 나오는 삶의 특징은 무엇인가? 성결한 삶이 아니겠는가? 민족 문화 안에서, 그리고 새로 시작한 세기에 이 성결한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성결운동이 극복해야 할 신학적 어려움은 교육과 문화와의 연관성 문제이다. 성결운동의 영성이 대중성을 근간으로 이루어졌음이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오늘 우리 현실에서 이 대중성을 어떻게 교육과 문화의 성숙과 결합할 수 있는가를 깊이 있게 연구하여야 한다. 교육이 영적훈련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육이 지적인 엘리트 중심의 신앙 형태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성결의 깊이를 풀어내야 한다. 리처드 테일러(Richard Taylor)는 왜 성결운동이 쇠퇴했는지 이유를 설명하면서, 성결을 말하는 설교자들이 성경에 대한 주석적 작업이 너무 빈약했고, 또 성결의 용어들에 대한 깊은 신학적 이해 없이 앵무새처럼 기계적으로 반복했기 때문이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결운동을 이해함 없이 이루어지는 지적인 학문연구의 위험성도 아울러 지적하고 있다. 이런 지적에 참으로 어떻게 신학적 정교함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이 경험을 간증하는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온 힘을 기울여 풀어내야 한다. 초대교회의 성공이 지식인들의 침묵의 동의를 얻어냈고, 기독교가 새로운 학문의 세계를 열어 새로운 세계를 형성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형편에 기독교 영성을 교리적인 가르침에 부합하여 삶을 형성하려는 시도"라고 설명하는 사람들이나, 개념주의(conceptualism)와 지성주의(intellectualism)의 차이를 내는 사람들의 지혜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또 하나 해결해야할 과제는 체험의 직접성과 권위의 문제이다. 지식사회에서 지식이 권위를 가진다면, 신앙의 공동체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 경험이 권위를 가지게 되어 있다. 대중들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게 하면서도 조직이 활성화될 수 있는 열린 조직을 어떻게 형성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하나의 교단구조가 된 성결운동이 풀어내야 할 과제가 된다.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제5회 영익기념강좌 발제(200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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