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은 그저 문패일 뿐인가?

임종수 목사
(
큰나무교회 원로목사)

 

"얼룩진 문서(文書)들이 많은 사람을 미혹했다. 돈과 그 소문, 루머와 루머가 사람들의 시야를 어지럽혔고, 사람이 사람을 서로 헐뜯으며 대적하니 많은 사람들의 심사(心思)가 아예 무뎌질 지경이었다."

종말의 모습으로 표현해 본 이것은 우리 성결교회가 지난 총회에서 그려낸 부끄러운 선거풍속도이다. 총회가 열리기까지 소위 괴문서가 난무했고, 그 괴문서에 대한 해명광고가 우리의 공인매체에 게재되는 아이러니가 우리의 판단을 어지럽혔다.

오늘의 세상을 보자. 정치, 기업, 관, 학계 할 것 없이 사회가 온통 얼룩이투성이다. 우리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계 역시 그 위상이 바닥을 맴돈다. 오죽하면 기독교의 교단대표를 제비뽑기로 세우고, 금권(金權)에 대처하는 최선책이었다는 주장들을 하겠는가. 그러나 시대가 어두우면 그만큼 그 시대는 깨끗함에 목말라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성결'은 오늘의 교회가 거침없이 내세우고 주장하고 보여주어야 할 주제가 된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제 몸을 가누기도 힘겨운 처지가 되고 말았으니…. 한국 교회는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우리 한국교회는 보편적으로 거룩한 주일, 거룩한 강단을 강조했다. 심지어는 흡사 구약성서의 ‘지성소’처럼 구별하려 들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일상의 삶, 생활의 경건은 놓치는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또 우리는 구원을 강조했고, 자연히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그 신앙을 업그레이드하는 데는 미미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뿌리는 분명하고 잎은 무성한데 열매가 부실한 신앙이 수두룩하게 된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람이 어찌 온전할 수 있는가'며 체념하는 데 익숙하다. 그리고

저들은 흔히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핑계를 댄다. 그러나 그 말씀은 오히려 깨어 기도하며 구별된 삶에 도전할 것을 촉구하신 말씀이 아니던가. 원죄(原罪) 문제도 자칫 사탄의 계략(trick)에 걸려 체념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보는데 그 또한 회개 그리고 은혜를 구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성경의 명제인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로 삶의 표제를 삼게 하자. 더욱이 우리 성결교회는 '전적타락론'자들이 아니다. 2차적 은총 '성결'-'성령세례'를 체험한 교회이다.

물론 '믿음'에 의한 '구원의 도리'로 무장시키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믿음은 분명 구원의 열쇠이다. 그러나 그 삶이 없이 인식에만 취해 있는 그런 기계적인 믿음은 구원의 착각일 수 있다. 영지(靈知)의 구원을 내세우며 육신은 여전히 방종의 자리에 버려둔 영지주의자들과 얼마나 다르겠는가. 교회는 또 하나의 영지주의(Neo-Gnosticism)를 양산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도 있다.

우리 교단의 이름은 '성결'이다. 벌써 몇 년째 "성결의 빛을 온 누리에" 그런 투의 표어를 내걸고, 또 '성결한 삶'을 가르친다. 그러나 사심과 사욕으로 얼룩지고 그래서 혐오스럽기만 한 교회정치속내는 뉘게도 뒤져 보이지 않으니…. '성결'은 그저 문패일 뿐인가. 그래서 문패에 그럴싸한 표어로 적당히 꾸미면 다인가. 진정, 성결의 빛으로 시대를 리드하는 일은 요원할까? 18세기 웨슬리의 메서디즘(Methodism) 부흥운동이 영국의 혼란과 위기에 바탕을 둔 것이었음에 주목하자.

우리의 '성결'은 오늘을 위해 준비된 그릇이어야 한다. 이는 또 궁극적 교회성장의 방편이 되기도 할 것이다.


한국성결신문(제387호, 2002.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