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교회 백주년,

사회적 성화의 구체적인 실현을 위하여

 

박찬희 목사
(
기둥교회)

 

  들어가는 말

성결교회 100주년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우리 성결교회는 지난 100년을 점검함과 동시에 다가올 100년을 준비하고 있다. 성결교회 100년은 성결교회 헌법이 명시하고 있는 바, 요한 웨슬리와 초시대 감리교회의 신앙과 실천을 이어받아 왔고 그 유산을 이어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과연 요한 웨슬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실천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웨슬리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활천』의 이번 특집에서도 좋은 필진에 의해 다루어지고 있으며, 많은 부분에서 정리되어오고 있다. 이 글은 그 연장선상에서 100주년을 향한 적극적 의미에서의 성결(혹은 사회적 성화)을 간단하게나마 웨슬리의 구체적 활동모습을 통해 살펴봄으로써 그 당위성을 찾아보려 한다.

18세기 영국을 살려낸 웨슬리의 부흥운동 성격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비록 그들의 부흥운동 전체를 꿰뚫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라 할지라도 "문화는 종교의 형태요, 종교는 문화의 내용"이라는 틸리히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이해는 단편적으로 흐를 여지가 많은 것이다. 마치 18세기 영국교회가 노예제도에 대하여 가졌던 잘못된 관점처럼 관념적이고 초월적인 것에만 머물게 된다면 이는 [18세기 영국의 부흥운동]을 고찰함에 있어서 분명 전체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모든 사상운동과 혁명과 종교운동은 반드시 그 사회의 기본 토대들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종교)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8세기의 위대한 부흥운동은 당시의 정황이 이끌어 낸 필연적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18세기는 부흥운동의 때가 무르익은 시기였다. 혼란스럽고 급격한 사회변화 속에서 정치적으로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했던 청교도들의 공화정이 지나치게 철저하고 엄한 도덕주의를 강요했기 때문에, 왕정복구 후에는 오히려 그것에 대한 반동으로 극도의 문란하고 부도덕한 모습이 나타났으며, 사상적으로는 이신론과 계몽주의가 지배적인 사상이 되어 인간의 이성을 과대평가하며 종교적 가치를 거부하고 신앙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사회적으로는 산업혁명의 여파로 빈곤층의 등장, 실업, 유아들의 노동과 급증하는 유아 사망, 음주/도박/스포츠의 과격화 등이 도를 넘었으며, 종교적으로는 교회가 부패하여 성직자들은 권력가와 부호들과 결탁하여 민중의 삶을 외면했고 교회자체는 뜨거운 종교적 열정을 상실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위대한 전환기를 준비하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다. 하나님은 인간이 선 자리 끝으로부터 새로운 시대를 몰고 올 웅대한 역사를 준비하셨다. 극도로 부패한 영국에서 일어난 새로운 물결은 인간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것이었다. 웨슬리 형제들과 메도디스트들의 부흥운동은 한마디로 영국과 유럽, 나아가 세계를 바꿔 놓은 '무혈혁명'이었다. 이것은 인간 그 자신의 내면을 개조시키는 것 뿐 아니라 인간 삶의 외면까지도 관심을 가지며 개혁해 나가간 중대한 사건이었다.

 

18세기 영국의 전반적 상황

18세기 중반과 그 이후는 역사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프랑스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 사상적으로는 이신론, 그리고 메도디스트들에 의한 교회의 개혁과 부흥운동이라는 정치, 경제, 사상의 변화가 급격히 이뤄진 시기였다. 영국은 이런 18세기의 급류 한가운데에 있었다. 이런 시기에 정치/사회/경제/종교의 모든 면은 타락과 방종, 피폐의 늪 속에 있었다.

런던 타임지(The Times of London)에 의원직 판매가 광고되기도 했으며, 의원직의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기도 했다. 체스터필드(Chesterfield) 경은 자기 아들을 위해 2,500 파운드라는 저가로 하원 의원직을 사려다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대지주들에 의한 토지 사유화로 인해 농민들이 땅을 잃고 대도시로 몰려들어 도시빈민층을 형성하였다. 이들 도시 빈민들은 높은 유아 사망률, 공중 위생의 불량, 콜레라의 만연으로 피폐된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노동시장에서 저임금에 시달렸는데, 심지어 5세 전후의 어린이들조차 고용되었고 당시 광부들은 하루에 약 1실링(shilling)을 받으며 하루도 쉬는 날 없이 1주일 내내 하루에 16내지 17시간씩 노예처럼 일했다.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증기기관과 면직산업의 기계적인 작업 도구들이 발명되어 무수한 가내공장들의 손노동이 기계노동으로 대체되면서 실업자의 숫자는 더욱 늘게 되었다. 6세에서 21세의 여성 노동자들이 상반신 나체로 네발 가진 동물처럼 석탄 바스켓을 운반하였다. 한 여인은 갱 안에서 두 아기들을 낳기도 했다. 또한 4세에서 13세 이하의 남녀 아동들이 석탄 광부일에 고용되어 하루 11시간 이상 14시간까지 아니 그 이상도 노동을 강요당했다. 산업노동자들의 3분의 1이 5세에서 8세의 소년과 소녀들이었으며 맨체스터의 전체 노동인구의 8분의 1인 1만 5천명이 지하실에 살았다. 그들의 주거환경은 어둡고 답답하고 병들기 쉬운 환경이어서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이 리버풀(Liverpool)은 15세, 맨체스터는 17세, 볼튼(Bolton)은 18세였고 리즈(Leeds)에서는 극빈자들의 평균 수명이 오히려 노동자들의 22세보다 훨씬 더 많은 49세였다. 18세기의 사법제도에서 소송절차는 불분명했고 집행은 참혹했으며 교도소의 내부 상태는 열악하였다. 국회는 사형죄에 해당되는 범죄 목록을 18세기 동안 무려 200개 이상으로 확대시켰다. 집 토끼를 쏜 자, 교량을 훼손한 자, 묘목을 뽑아 내버린 자나 5실링을 훔친 자 등의 경미한 죄인들도 교수형에 처할 수 있었다. 간수들은 알코올과 마약을 팔았으며 매춘행위를 허용하기도 했다. 유명한 수인들은 돈을 받고 관중들에게 구경을 시키기도 했다. 사형 집행에 있어서의 잔혹함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한 죄수를 형장까지 동행해 주었던 메도디스트 설교자인 테일러(Thomas Taylor)의 목격담은 이를 잘 드러내 준다. 최종적인 형 집행이 행해지기에 앞서 마치 푸주간 주인이 큰 식칼로 갈비 조각들을 잘라 내듯이 형 집행인들이 큰 도끼로 사형수의 오른팔을 잘라 냈다고 한다. 특히 반역죄를 지은 자에게는 형 집행인들이 잔인한 방법으로 최대한 죽음을 지연시켜 온갖 고초 속에 서서히 죽게 하여 고통의 무게를 더하게 했다. 어떤 경우에는 발가벗겨 어두운 방에 가두고 그의 가슴에 무거운 돌이나 쇠덩이를 올려놓아 죽게 하기도 했다. 남편을 살해한 여인들과 반역죄를 지은 여인들이 법에 의해 화형을 당한 일도 있었다. 18세기의 사회적 문제들 중에서 노예문제는 최악의 비인간적이고 불의한 문제였으며 또 그만큼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했다. 유아 사망률도 극히 높아, 8세기 초 모든 계층에서 출생한 어린이 4명 중 3명이 15세 이전에 죽었다. 74.5%의 사망률이었다. 서민의 자녀들 대다수는 어떠한 정규적인 학교 교육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대중교육을 위한 설비가 거의 없었다는 점과 가난한 집 아이들은 가능하면 빨리 돈을 벌어야지 학교에서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8세기 사회 상황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 주는 것은 음주와 도박 그리고 잔인한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의회의원들이 술에 취해 국정 업무를 계속할 수 없었기에 의회가 일찍 휴회되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결혼식은 가능하면 계약 당사자들이 맑은 정신으로 엄숙히 식을 올릴 수 있게 하기 위해 아침에 행해졌다고 한다. 심지어 성직자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같다. 체스터(Chester)의 감독에게 꾸지람을 들은 어떤 국교회 목사는 교회 예배의무 중에는 결코 술취한 일이 없다는 주장으로 자신을 변호했다고 한다. 브래디가 기술한 바, 당시의 음주량의 증가는 가히 놀랄만하다. 상대적으로 알콜 도수가 낮은 맥주를 대신하여 독주인 위스키가 점차로 영국인들의 일상음료처럼 되어갔다. 브래디가 묘사한 바에 따르면, 1684년도에 527,000 갤론이었던 영국의 위스키 류 생산량이 1750년에 와서는 11,000,000 갤론이라는 극대의 수치에 이르렀다. 정부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독주 매매를 금지시키기 위해 1736년과 1743년에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효력이 없었다. 18세기 영국 사회는 도박이 만연하였던 사회악의 터전이었다. 도박은 전국적인 광증이 되어 상하 양원은 도박가들로 가득 찼고 런던의 클럽들은 거의가 도박 소굴이었다. 마운트포드(Mountford) 경처럼 도박에서 막대한 돈을 잃고 자살한 사람도 생겨났고 여자들도 거기에 빠져들었다. 수상의 딸인 펠햄(Pelham)은 도박 중독자로 소문난 대표자였다. 도박은 18세기 초반 정부에 의해 조장되기도 했는데 국가 복권추첨을 통해 웨스터민스터 다리 건설(1736)이나 영국 박물관 건립(1753)의 재원을 마련키도 했던 것이다. 이 시대의 스포츠는 공격적이고, 격정적이며 위험했고, 잔인하고, 도박성이 현저했다. 사람들은 곰과 황소 그리고 오소리 괴롭히기와 투계를 즐겼다. 곤봉 경기와 권투 역시 인기 있는 스포츠였다. 곤봉경기는 곤봉으로 상대방의 머리에서 먼저 피를 흘리게 한 경기자가 그 한 판 승부의 승자가 되는 것이었다. 복싱경기는 노골적인 살육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권투장갑도 끼지 않은 채 보호장치도 없이 시합에 임했던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해악에 대해 당시의 교회는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가? 기독교인이 된 노예들은 그들의 기독교인 소유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런던의 식민지 담당 감독은 1727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독교의 신앙이 주는 자유는 죄와 사탄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러나 이들의 외적인 지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언제나 그런 상태에 있었듯이 그렇게 전혀 변화가 없다. 그들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그들의 외적인 지위에 변화가 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들의 생각은 노예제도를 신적인 세계질서의 한 요소로 본 것이었다. 몇몇 영국 국교인들은 회심한 노예들을 해방하였다가 감독으로부터 책망을 받기까지 했다. 비록 와버튼 감독과 몇몇 목사들이 반대했지만 국교회의 공식적인 견해는 노예제도를 문제삼지 않는 것이었다. 많은 감독들은 공로보다는 정치적인 연줄에 의해 그들의 지위를 획득했다. 이러한 성직 정치의 가장 분명한 타락의 표시는 주로 서임권, 성직록 겸임 및 성직자 비 거주 문제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대주교와 고위 성직자들은 왕과 같은 생활을 즐겼고 과음과 사냥을 즐기는 많은 교구 목사들은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과도한 생계비를 챙겼으나, 다수의 가난한 성직자들은 연간 20~60 파운드의 수입으로 살아야 했다. 이런 불균형의 결과, 대주교들의 연간 평균 수입은 국교회 성직자 절반이 넘는 가난한 성직자들의 평균 수입의 200배가 넘었다고 한다.

앞서 살펴본 것이 정치/사회적 배경이라면 사상적 배경으로는 이신론(Deism)을 들 수 있다. 영국에서 이신론(Deism)은 이성으로 종교를 재해석하고 성서의 특수계시를 부인하며 종교의 보편성을 주장하였다.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였지만 세계의 운행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시계가 제조업자의 간섭없이 작동하는 것처럼 역사는 하나님의 간섭없이 인간에 의해 전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신론의 사고는 영국교회가 메시지를 잃고 현재에 안주하게 된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교회는 점차 이신론의 영향을 받아 사회의 소금 역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하게 퇴화되었으며 형식적이 되어갔다. 그리하여 종교는 지적 토론의 문제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그로 인해 정열이나 영적인 체험은 냉각되고 마비되었으며 창조주를 향한 영혼의 서정적인 격발인 기도는 열광주의로 불리워졌고 냉정한 이성이 삶의 충분한 안내자로 공표 되었다. 이신론적인 합리주의의 세련된 표면 그 아래에서 영적인 샘물은 고갈되고 있었던 것이다.

 

18세기의 요한 웨슬리, 그는 무엇을 했는가?

18세기 웨슬리의 부흥운동이 중요한 점은 그 신앙적 계승과 발전에서뿐만 아니라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신앙이 사회적 열매로 나타났다는데 있다. 웨슬리는 비록 사회개혁자는 아니었지만 신앙의 외연으로서 맺어지는 사회적 열매들을 전제하여볼 때, 그의 메시지와 활동은 사회적 영역으로 크게 확대될 수 있었다.

웨슬리의 사역은 사회 전반에 걸쳐 놀라운 영향을 끼쳤다. 주일 학교를 일으킨 원동력이 되었고, 군대와 대학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시약소를 세웠고, 정치적인 부패에 저항하여 싸웠으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구제고용을 시행하였으며, 참정권의 개혁, 노동자의 권익 옹호, 노예매매에 대한 저항, 감옥의 개선 등에서 많은 개혁을 이끌어냈다.

웨슬리는 활동 후기(1770이후)부터 노예제도에 대하여 뚜렷이 반대하며 공개적인 저항을 하였는데, 일찍이 죠지아 사역 중에 본 'white slavery'라고 불리는 식민지 인디언 노예매매는 웨슬리에게 대단히 큰 충격이었다. 그는 노예제도에 대해 타협 없이 반대했다. 그 연장 선상에서 웨슬리는 1760년에 노예 소유주와 두 명의 노예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 노예 소유주는 서인도제도(west indies)에서의 최초 감리교도가 되었으며 웨슬리의 사역과 부흥운동이 확산되는데 효율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웨슬리는 1774년 [노예제도에 대한 생각]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하면서 노예폐지 운동의 전면에 나선다. 그는 이 책에서 노예제도의 역사를 개관하고(1), 노예들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밝히고(2), 노예 소유주들의 비인간적인 행위를 고발하며(4), 노예 매매의 부도덕성을 지적하고(5), 관계자들에게 노예제도 폐지를 호소(6)하였다. 이와 함께 설교와 기도회를 열어 노예폐지운동의 기운을 확산시켰다.

웨슬리는 1738년 9월 이후 9개월 동안에만 런던, 브리스톨, 옥스퍼드에 있는 교도소에 67회 이상 방문하여 설교하였고, 80세가 넘어서도 그 일을 계속했다. 그는 1778년 연회에서 교도소 방문을 설교자들의 의무로 규정하기도 했다. 수감자에게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고, 병을 간호했으며, 석방을 위한 탄원서를 제출하고 적군 포로들을 위한 구호활동을 전개했다. John Howard는 웨슬리가 수감자들을 위하여 50,000마일 이상이나 여행하였으며, 정부의 지원도 뿌리치고 그의 사재를 30,000파운드나 냈을 뿐 아니라 그의 시간과 재능과 재산과 그리고 그의 전부를 그들을 위하여 내어 주었다고 말하였다.

18세기 노동환경 개선에 있어서 웨슬리와 메도디스트들이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웨슬리의 속회조직이 노동조합으로 연결되고 그 구성원들이 메도디스트 지도자 혹은 그 출신이었다. 메도디스트들의 내면적 뜨거움은 사회적 역할로 전이되었으며 1800-1850년의 정치운동에 메도디스트들의 속회와 속회운동의 영향력이 미치었다. 초기 노동조합은 속회구조와 똑같이 12명의 회원과 1명의 지도자로 이루어졌다. 노동자들이 매주 기부하는 1페니의 금액은 그들의 정치적 자유와 보편적 자유 획득을 위한 목적에 사용되었다. 이 노동조합은 노동속회(working-class)로 불려졌다. 실제로 광부 노동운동 런던 모임의 대표 12명 중 9명이 메도디스트 설교가들이었으며 시애튼 딜라발 탄광(Seaton Delaval Colliery) 파업의 지도자는 모두 메도디스트 지역 설교가들이었다. 메도디스트 설교가들은 파업을 위해 연설하기도 하였고, 파업의 성공을 위해 파업기간동안 100-400명을 길에 모아놓고 혹은 탄광골짜기 예배당에서 매주 1회 기도회를 가졌다. 또한 그들은 매일 저녁 식사 후 갱 안에서 설교와 기도 중심의 기도 모임을 가지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감리교의 속회 조직 운영을 본받아 매주 1페니씩을 갹출하여 조합기금을 충당하기도 했다.

18세기의 웨슬리를 뒤이은 메도디스트들은 격동과 전환의 시대에 구체적으로 사회현실에 참여함으로써 처음에는 어려움을 당하고 신도들의 숫자가 줄어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1800년의 교인 수보다 1850년의 교인수가 여섯 배로 증가하였다. 웨슬리와 그 후예들의 부흥운동은 신앙 내면의 부흥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사회적 행위로서 구체화되었을 때에 그들의 운동은 영국 사회를 변화시킨 것은 물론 메도디스트 운동의 거대한 확산을 가져올 수 있었다.

 

100주년 그 후의 성결교회를 위하여

이 글은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 사상의 빛 아래서 그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100주년을 보내고 또한 맞게 될 성결교회 안에서 웨슬리의 정신이 어떻게 이어져야 하며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는데 의의가 있다.

웨슬리의 구체적인 사회참여의 모습은 비록 목회자로서의 한정된 범위 내에서 이뤄진 것이었지만 기독교의 내면적 체험주의를 극복하고 대 사회적 활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웨슬리는 산상수훈을 중요한 설교본문으로 사용하였다. 그의 설교 152편중 무려 13편이 산상수훈 해설인데 그는 산상수훈 강해에서 사회적 성화개념과 지상의 하나님 나라 실현을 아주 강하게 주장하였다. 웨슬리는 종교의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그것을 위해 구체적으로 헌신했다. 이것은 인간 이성이 실패한 자리에서 울려난 하나님 역사 시작의 종소리였다. 18세기 영국은 인간의 전인적인 그리고 인간 삶 전체에 걸친 새로운 개조의 시기를 향해 놓인 다리였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시작이었다.

얼마 전 갤럽에서 '2004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을 조사하여 발표하였다. 참으로 충격적인 것은 기독교 인구가 전 인구의 1/4이라는 찬란한 영광을 자랑하는 동안 사람들의 마음이 점차 교회를 떠나갔다는 점이다. 발표된 바에 의하면 20년 전에 비해 기독교적 성향이 10% 정도 감소했으며, 개종 전의 종교가 개신교라고 답한 사람이 절반(45.5%)이나 될 정도로 교회에서의 이탈이 증가하고 있다. 이는 교회 스스로도 떠나가는 성도들을 붙잡지 못하고 있음을 이번 조사 결과가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비종교인을 대상으로 가장 호감을 느끼는 종교가 무엇인지를 물어본 결과, 개신교라고 답한 비율이 12.3%로 가장 낮았다.

이러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중요한 원인들 중 하나는 교회의 대사회적 관계와 책임적 행위 그리고 교회 자신의 그것들에 대한 인식의 결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오늘의 교회는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하여 가고 있는 것이다. 복음이 문화와 사회의 수레에 얹혀지지 않음으로써 복음의 횡보는 오히려 더뎌지고 교회에 대한 인식은 더욱 비관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사회적 관계 안에서 그 영향력을 잃어 가는 이유는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에 지나치게 안주되어 있는 것에 기인한다. 교회와 교인이 개인주의를 극복하지 못할 때 공동체로서의 사회 안에서 그 존재는 빛을 잃게 된다. 신앙의 본질은 내면적이지만 신앙의 증거는 사회적이어야 한다. 웨슬리는 "사회적 성화 아닌 성화를 모른다"고 말하며 "사회적 종교 아닌 기독교를 모른다"고 말한 바 있다.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여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삶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것은 '행함'이라는 윤리적 요구에 대한 응답이다. 웨슬리의 완전개념은 이웃 혹은 사회 안에서의 관계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이 믿음을 낳은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역사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지게 된 믿음이 사랑 안에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웨슬리의 야고보서 2장 22절 주석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그는 "행위는 믿음에게 생명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믿음은 행위를 낳는다. 그리고 믿음은 행위에 의하여 온전케 된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고독한 종교는 그리스도의 복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고독한 크리스천은 자비롭게 될 수가 없고, 또한 모든 기회를 활용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는 일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100주년을 맞는 성결교회, 다가올 100주년에는 웨슬리의 적극적인 사회적 성화의 걸음을 뒤쫓을 수는 없을까? 근래에 이에 대한 많은 논의들이 있음으로 해서 기대를 가지고 100주년을 바라볼 수 있음이 기쁘다. 사회적 신앙은 개인의 영적 신앙을 재는 바로미터다.

<이 글은 활천 2005년 8월호에 수록된 글로서

지면의 제약으로 수록하지 못한 부분이 포함된 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