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중복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조예연 목사
(
반여제일교회)

 

나는 요즘 설교하기가 두렵다. 젊은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세대차이를 느끼기 때문이다. 한번은 설교하면서 내 딴에는 즐거운 유머라고 생각되는 얘기를 했는데, 반응은 너무나 썰렁했다.세대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말이 통하지 않는다. 말이 통하지 않는데 웅변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설교가 무슨 감동을 줄 수 있겠는가?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교리를 가르치며 신학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의 사중복음은 장로교 신학의 뿌리인 칼빈의 5대교리보다 월등하고 완전한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칼빈의 신학에서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에게만 주어지는 은혜인데, 이 하나님의 선택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아무리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고,잘 믿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 아니면 반드시 버림을 받아 지옥으로 떨어지고, 지금은 아무리 타락하고 방탕한 죄인이라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아 천국에 가게 된다는 것 아닌가?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주일학교시절부터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라고 믿었고, 1965년 2월 28일 새벽기도 시간에 구원의 확증과 성령세례를 받았으며,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목사가 되고 36년을 목회했으며, 지금은 주님의 재림의 날을 기다리다가 천국에 갈 것이라고 확신하는데,이것이 착각이며 불확실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우리 주님은 온 인류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셨으며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신다(롬 10:12-13).

이렇듯 칼빈의 신학이 구원관에서 불안하고 회의적이라면 우리의 사중복음은 확신이 넘치고 능력이 있으며 그리스도의 구원을 삶에서 누릴뿐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희망의 복음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나 가르침이 이 세상에서 가장 능력이 있고 완전한 복음이라는 것을 확신하며 성결교인이 된 것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고 이 복음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가르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사중복음은 대체로 이명직 목사님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다.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성결교회적이고, 여기에서 벗어나면 성결교회적이 아니어서 징계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그분이 살아계시던 시대의 전후에는 그분의 신앙이나 학문이 가장 옳았고, 충분하다고 공감하였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일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 따라서 사중복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이해는 가능하며 시도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얼마 전 총회 교육국에서는 그 일환으로 중생은 생명으로, 성결은 사랑으로, 신유는 회복으로, 재림은 정의로 이해하기 위한 토론이 있었던 것은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참으로 잘 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한번은 장로교회에 다니는 여동생이 나에게 물었다. "오빠, 우리교회 목사님이 성경공부 시간에 성결교회는 신학이 없다고 하던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이 황당한 질문을 받고 나는 얼른 사중복음이 우리의 신학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사중복음의 신학적 체계가 좀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얼버무린 적이 있다. 나는 우리의 위대한 전통이며 자랑인 우리의 신앙은 이제 신학적 체계를 갖추어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좀 더 포괄적이며 적극적 의미로 확대하여 체계화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고 현대적 일상의 언어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고, 복음을 확산시킬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중복음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던 것을 적어보려고 한다.

 

중생은 '새로남'이라고 하면 어떨까
중생의 사전적 의미는 '거듭남, 다시 태어남'이다 .주님은 요한복음 3:3에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따라서 중생은 천국시민의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런 의미에서 중생은 '새로남'의 복음이다.

교단 헌법에 "중생은 곧 영으로 나는 일이니 신비에 속한 영적 변화이며 ... 성령의 역사로 새 생명을 얻어 그 사람의 심령과 인격 전체에 근본적 일대 변혁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는 진실로 천국복음이다"라고 정의하였다.간추려 보면 중생은 영의 변화와 인격의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영의 변화란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의 보혜사 성령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믿어지고 의존되어서 순종하는 사람으로의 변화를 말할 것이다.이런 의미에서라면 중생은 확신의 복음이다.

그러면 인격의 변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대개 인격의 요소를 지,정,의 세 가지라고 한다.그런데 중생은 이 세 가지의 변화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상의 삶에서 생각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변하고, 감정이 하나님과 같은 감정으로 변하고, 의지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으로 변하는 것이 중생이다. 그래서 불신앙의 사람이 신앙의 사람이 되고,부정적인 사람이 긍정적인 사람이 되며, 과거지향적인 사람이 미래지향적인 사람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생은 회심과 변화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결은 '능력의 복음'이라고 하면 어떨까
교단헌법 제18조에서 성결은 "이 은혜는 원죄에서 정결하게 씻음과 그 사람을 성별하여 하나님을 봉사하기에 현저한 능력을 주심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성결은 영과 인격의 깨끗함이며, 봉사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성결은 능력의 복음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면에서의 성결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소극적인 면에서 죄의 유혹을 받더라도 영과 인격을 깨끗하게 유지하여 나가는 것이며, 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봉사의 능력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성결을 소극적인 면에서의 성결 즉 죄의 유혹을 받더라도 영과 인격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강조해왔다. 물론 소극적 의미에서의 성결도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좀더 적극적 의미의 성결이 강조되도록 그 폭을 넓혀야 한다. 즉 선의 실천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봉사와 섬김이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이 세상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라고 하셨다. 그리고 바울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소금이 부패와 싸우듯이 성결한 성도가 악과 싸워서 이기고, 빛이 어두움을 추방하듯이 성결한 성도가 악의 세력을 추방하는 능력을 갖도록 성결의 강조점은 좀 더 그 폭을 넓게 해야 한다.

 

신유는 '회복의 복음'이라고 하면 어떨까
예로부터 한국의 3대교단이라고 불리는 성결교회,감리교회,장로교회 중에서 신유를 강조한 교회는 성결교회가 유일하다. 따라서 신유야말로 성결교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특징을 발전시키지 못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교단헌법에는 신유를 "이는 신자가 하나님의 보호로 항상 건강하게 지내는 것과 또는 병들었을 때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나음을 얻는 것을 가리킴이니"라고 정의하였다. 이와 같이 신유는 건강한 삶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건강한 삶을 해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질병이다. 헌법에는 이 질병이 생기거든 하나님께 기도하여 고침을 받고 나음을 얻으라고 했다. 그래서 건강한 삶을 회복하라고 했다.

우리의 건강한 삶을 해치는 것은 육체의 질병만은 아니다. 우리가 고침을 받아야 하는 것은 육체만이 아니다. 이 시대는 육체의 질병보다 더 심각한 문제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마음의 상처나 정신적 장애도 고침을 받고 회복되어야 한다. 그리고 가족간의 갈등으로 상처 입은 우리의 가정도 고침받고 회복되어야 한다. 또 이웃과의 갈등 때문에 상처 입은 우리의 사회도 치유받고 회복되어야 한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기적인 욕심을 극복하지 못하여 평화를 잃어버린 세계 인류도 그 상처를 치유받고 회복되어야 한다.

고침 받고 회복되어야 하는 곳은 또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구환경이다. 이 지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이다. 그래서 인간을 관리자로 세우시고 잘 관리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인간은 이 조화로운 아름다운 환경을 무참히 짓밟고 파괴했다. 하여 이 지구는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기 직전이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지구환경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재림은 '희망의 복음'이라고 하면 어떨까
우리 성결교회는 재림신앙 때문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수난과 핍박을 받았다. 심지어는 재림신앙 때문에 일제에 의해 교단이 강제로 해산되기까지 했다. 고로 재림신앙은 우리의 표상이다.

이제 우리가 그 동안 목숨을 걸고 지켜온 재림신앙이 무엇인지,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어떻게 믿어왔는지 살펴보자. 교단헌법 제6조 4항을 보면 "구약성경의 예언의 중심이 그리스도의 수육탄생이라면 신약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라 할 수 있나니 우리는 공중재림과 지상재림을 믿는다." "재림은 신앙생활의 요소이며 소망이요 경성이 된다"로 되어 있고, 또 교단헌법 제20조(재림)에는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시던 그 몸대로 다시 오시는 일이니, 천년시대 이전에 이루어짐을 믿으며 생각지 않을 때에 주께서 공중에 오셔서 교인을 영접하실 때 구원받은 교인들은 휴거되어 어린양 혼인잔치에 참여한 후 심판의 주께서 교인들과 함께 지상에 강림하심으로 거짓 그리스도가 멸망하고 천년왕국을 건설한다"라고 되어 있다.

우리의 헌법은 우리 주님의 재림의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나며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이 세상은 어떻게 심판을 받는지에 대하여 상세하게 명시해 줌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날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한다. 그러나 이 희망은 어느 정도는 막연하고 불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희망하는 그 날이 언제 올지 알 수 없거니와 또 그날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도 그날이 되어 보아야 정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재림에 대한 로드맵은 성경을 읽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그래서 교단마다 서로 다른 재림관을 주장하지만 어느 주장이 옳고,어느 주장은 잘못되었다고 말하기가 어려워서,서로 다름을 알면서도 이단으로 정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심을 믿되, 때와 장소,그리고 그 날에 대한 막연한 기대보다는 오히려 그날에 합당한 성결한 사람이 되는 데에 더욱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재림은 미래를 위한 복음임과 동시에 현재의 삶의 승리의 원동력이 되는 복음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희망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상에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여 온 인류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세상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그것은 오직 우리 주님이 오셔서 다스려 주셔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도 주님이 다스리시는 새로운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재림신앙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닌 주님의 다스림 속에서의 현재적 삶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신약성경에는 주님을 영접하고 그 다스리심을 받은 사람들이 어떠한 은혜를 받았는지에 대한 수많은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지금도 영으로 오시는 주님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 영접하여 다스리시도록 하는 것을 재림신앙의 한 부분으로 인정한다면, 실존주의적이며 이원론적이기는 하더라도 주님의 오심과 영접에 대한 믿음과 삶이 더욱 주님의 다스림 속에 있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사중복음은 우리의 자랑이자 정체성이다. 다시 말하면 사중복음적 신앙을 가진 사람이 성결교인답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중복음의 내용은 세대나 계층에 따라 거기에 맞도록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교육과 전승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 위대한 사중복음을 하루 속히 신학화해서 조직신학의 한 분야로 꽃을 피우게 해야 한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 성결가족들은 더 큰 자부심을 갖게 될 것이고, 교회의 부흥도 촉진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활천 2006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