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하스 운동과 성결교회의 과제

img1.gif

정삼열 목사

 

요즘 마케팅 분야의 주요한 화두는 단연 웰빙이다. 아무리 우수한 제품을 개발하였다 하더라도 그 핵심컨셉에 웰빙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는 크게 어필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웰빙의 사전적 의미는 행복, 안녕, 복지, 복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바쁜 일상과 인스턴트 식품, 그리고 과도한 스트레스가 누적되는 환경에서 육체적, 정신적 건강의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삶의 유형이나 문화를 통틀어 일컫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선진국에서는 웰빙보다는 로하스 운동이 각광받고 있다. 미국 내추럴 마케팅연구소에서 처음 이 말을 사용했는데,로하스란 말은 건강과 지속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Lifestyle of Health and Sustainability)의 약자로, '나 혼자 잘먹고 잘살기' 식의 개인주의적 성향과 안녕을 추구하는 웰빙을 넘어선, 친환경적이고 합리적인 소비패턴을 지향하는 문화환경을 말한다.

로하스는 건강한 삶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웰빙과 비슷하지만, 개인적인 웰빙에서 사회 전체를 생각하는 사회적인 웰빙을 지향하는 라이프스타일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따라서 이제까지의 웰빙이 명품 지향과 같은 물질적 만족에 충실한 보보스(bobos)중심의 잘먹고 잘살자를 모토로 삼았다면, 로하스는 현재의 너가 아닌 미래의 너도 고려하여, 한계에 이른 지구환경을 보호하자는 데 가치를 두는 운동인 것이다.

그렇다면 웰빙(well-being),즉 만족할 만한 존재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또한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로하스를 어떻게 정의 내릴 것이며, 백주년을 앞둔 우리 교단이 로하스의 정신을 살리는 측면에서 실천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무엇이겠는가?

첫째, 한국교회, 특히 성결교단은 무엇보다도 이원론적 신앙을 극복해야 한다.

교회와 사회,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영적 생활과 육신적 생활 ,신앙과 정치 등으로 나누는 이원론적인 신앙을 극복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 사회와 세계를 부정하고 도피하는 이원론의 신앙을 극복하여 한국사회와 세계에 희망을 주는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생명은 그리스도가 과거에 행한 업적의 결과나 미래에 완성될 그의 업적의 기대만이 아니라,현재에 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생생한 현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헤르만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는 현존(being)을 자존(self-existence)적 개념으로 여겨 웰빙(Well-being)대신 웰미닝(well-meaning)이라고 해야 하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무엇인가를 잘먹고 잘사는 경제적인 부를 누리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스 큉(Hans Küng)도 기독교 세계관은 처음부터 단순한 지식체계의 성립보다는 삶 한가운데서의 실천을 목적으로 해왔고,세계를 위하여 존재하는 교회가 세계사의 변화 속에서 그 근원적 본질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은 부동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응성에 있다고 피력한 바가 있다. 그런데 보수 색채가 강한 교단일수록 이원론적 사고에 얽매어 세속적인 일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는데, 성결교단도 개인의 구원을 중시한 보수적인 신앙에 치중하다 보니 사회적인 일에 비교적 등 한시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창립 100년을 맞이하는 성결교단의 인지도가 구세군이나 기타 군소교단에도 미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한국성결교회가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폐쇄적인 사고에서 탈피하는 노력이 있어야 하며, 세상을 향하여 적극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 기독교 신앙과 윤리가 고작 주초(酒草)를 금하고 제사 안 지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마땅히 그리스도적 가치를 공동체 안에서 실현하려는 노력이 우리의 당면과제일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의 세계는 바로 교회가 사명을 수행해야 할 장소요 시간이다. 따라서 교회는 이 세계의 새로운 시간과 장소에서 이론상으로나 실천상으로나 현실적응을 회피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현실적응이 교회의 존재기반인 그리스도 복음에 근거하지 않으면, 그것은 유행의 추종이요 시세의 편승일 것이다.

둘째, 교회의 비만이 심화되는 상황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한국의 모든 대형교회들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대형교회로서 말씀을 올바르게 전파하고, 성례전과 치리를 바르게 시행하며, 평신도에 대한 철저한 제자훈련을 통하여 성경적인 교회를 이룩하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는 방법론에 있어 세속적, 인위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대형화시키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시도해왔다.

이는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나 맥가브랜(Donald A.McGavran)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런 염원은 교회의 본질에 대한 목회자들의 인식에 많은 변화를 주게 되었고, 교회의 본질적이며 영적인 면보다는 외형적이며 형식적인 면에 더 많은 강조를 두게 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초대형 교회가 등장했으며, 이러한 한국교회의 대형화는 결국 상업주의와 실용주의 철학의 산물로 한국 초기교회의 순수했던 모습과 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올바른 교회의 본질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이러한 교회의 외형주의는 필연적으로 개교회주의를 양산했고, 주님의 교회로서 보편성과 통일성 그리고 우주적인 참된 교회를 추구하지 않고,  오직 유형적(有形的) 교회로서 지교회의 외형적 성장이 최우선적 목표가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렇게 성장한 교회들이 자신들이 하나의 큰 독자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길 때, 기존의 교회법을 어기고 비상식적이며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움직이게 한다. 이런 사상에는 교회의 종말론적이며 보편적 교회관이 사라지게 된다.

한마디로 교회의 비대화(肥大化)는 교회 공동체의 해체를 가속화시키고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할 우려가 크다. 현실적으로 목회현장에서 느끼는 정서는 주변의 교회들을 같은 주님의 공동체로 포용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경쟁상대로 인식하며 적대시하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다. 이것은 장차 교회의 통일성과 협력을 파괴시키는 원인이 될 것이라는 자성의 소리가 높다. 한마디로 '주님의 교회' 라는 공동체 의식에 적신호가 켜진지 이미 오래되었다는 말이다.

지금 사회 일각에서는 로하스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사회 전체를 건강하게 만들자는 자성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최근 마이너스 성장과 둔화라는 복병을 만나 점점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심각한 형극인데도,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나 그 괴리감을 좁히려는 노력이 요원한 실정이다. 한국교회가 비만에서 벗어나려면 부도덕한 과소비를 획기적으로 줄여야 한다. 현재 한국교회는 막대한 헌금을 남용하고 있다는 세인들의 질타를 받고 있다.

이제 교회는 자신만의 성장을 추구하는 웰빙 차원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생각하는 로하스 운동으로 확산시켜 지속가능한 라이프스타일의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대형교회들은 자립이 요원한 개척교회를 그대로 방치한다든가, 이미 젊은이들이 대를 이을 수있는 메리트(merit)가 없어 이농이 가속화된 농촌교회의 피폐된 현실을 외면하던 소비적 교회구조와 제도를 과감하게 개혁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 사회적 논점이 되고 있는 로하스 운동은 초대교회의 유무상통(有無相通)과도 연관되며, 자기만의 행복 추구가 아니라 공동체의 지속적인 발전과 다음 세대를 위해 제도나 문화형태까지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성결교단도 시급하게 소모적인 교회의 체질을 개선하여 초대교회의 원형을 회복하는 일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요즘 각급 관공서나 학교 등지에서는 담장 없애기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높은 담장을 헐고 녹지 휴식공간을 조성하는 열린 교정 만들기 운동, 푸른 숲 조성과 공공기관 담장 없애기 운동, 쌈지공원 조성,  건축물 옥상녹화, 주차장 주변 녹지환 경, 꽃이 있는 특화거리, 주택가 주차난 완화를 위해 자기 집 대문이나 담장을 헐고 주택 내에 주차장을 만드는 등 로하스적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교회만은 높은 담장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에서는 웰빙이나 로하스를 구상하고 있는 데 반하여 아직도 교회는 열악한 환경 속에 방치된 삶을 살고 있는 동역자들을 향한 대책이 미미한 상태이며,  돌봄과 나눔에 대하여 인색하고,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 마련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된다. 초대교회의 성령강림 사건은 모든 공동체를 유기적인 관계로 묶어 유무상통하도록 만들었다. 자기만의 행복추구가 아니라 공동체의 지속적인 발전과 아울러 다음 세대를 진지하게 고려한다는 로하스 운동도 알고 보면 이 카테고리 안에 있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백주년을 맞이하는 성결교회는 개교회주의를 탈피함은 물론이거니와,세상은 등져야 할 대상이 아니라 변화시켜야 할 대상이라는 적극성을 가지고, 비대해지는 교회를 적절하게 다이어트하여 건강을 유지하도록 하는 일이 급선무가 아니겠는가?

 <활천 2006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