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결교회 조직신학의 역사적 흐름

 


이신건

 

 

제1세대 신학자

성결교회에서 최초로 나온 조직신학적 저서는 김상준(1881-1933년)의 <사중교리, 1921년>라고 할 수 있다. 정빈과 함께 성결교회를 세운 자로서 성결교회에서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던 그는 무교동 교회에서 목회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서학원에서 교수로 가르치기도 하였다. 사중교리에 깊이 심취한 그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의 핵심진리를 전하기 위해 자신에게 사중교리를 가르쳐 준 선생들보다 먼저 <사중교리>라는 책을 출판하였고, 이를 성서학원의 교재로 사용하였다.

이 책은 김상준이 평양 형무소에서 1년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 일본에서 자신을 가르친 카우만, 나까다, 박스톤의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자신의 입장에서 구상하고 정리하여 내놓은 성결교회의 최초의 조직신학적 저서이다. 이 책을 통하여 김상준은 정신적 혼미 중에 방황하는 신자들에게 진리의 방향성을 제시하려고 하였으며, 아울러 신자들의 영혼을 지도할 목회자들에게 신학적 체계를 제공하려고 하였다. 이는 성결교회가 한국 땅에 개척되어 자리를 잡은 지 15년만의 일이었다. <사중교리>는 비단 성결교인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든 기독교인들에게도 귀중한 신학적 유산이다.

 

 

 김상준을 이어서 한국성결교회의 교회적, 신학적 기초를 가장 견고하게 확립한 자는 이명직(1890-1973년)이다. 그는 오랫동안 성서학원의 학장직을 역임하면서 신학을 가르쳤다. 그가 남긴 수많은 저서들 중에서 조직신학적으로 의미심장한 것을 들라면, <기독교의 사대복음>, <그리스도교의 대강령>, <신학대강>이 있다. 앞의 두 저서는 다른 책을 인용하거나 그런 책들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쓴 책으로서 이명직의 신학적 입장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두 저서는 조직신학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지 않는다.

그 반면에 <신학대강>은 그가 남긴 가장 방대하고 체계적인 조직신학적 저서로서 한국성결교회의 조직신학의 역사에서 기념비적 위치를 차지한다. 물론 이 책은 신학생을 위한 조직신학 교과서로 씌어진 것이므로 성결교회의 신학적 특징을 애써 부각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 책이 갖고 있는 특별한 의미를 들라면, 이명직 나름대로 기존의 신학체계를 소화하여 우리에게 소개하여 주었다는 점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과거의 일반적인 신학 입장들을 무조건 받아들이기보다는 개신교 복음주의적 관점에 이들을 적절히 소화하여 우리의 것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자칫 사중복음이나 성결론에 치중할 수 있는 신학적 협소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성결교회의 신학을 확장하고 발전시키는 일을 위해서도 중요한 전거와 자료로도 이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신학대강>은 성결교회 조직신학의 출발점과 전제로서 앞으로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으리라고 여겨진다.

 

 

 이명직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신학자로서 우리는 또한 김응조(1896-1991년)를 들 수 있다. 문서 선교사(生命之光 발행인)와 순회 부흥사로서, 그리고 성결대학의 설립자로서 활동하였던 그는 신학자로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그는 평생 동안 41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보수주의적 시각에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강해한 총 24권의 <성서대강해>이다. 그가 쓴 조직신학적 저서로서 우리는 <성서적 정통신학, 1969년>, <사중복음 교리, 1985년>를 들 수 있다. <성서적 정통신학>의 서문에서 그는 성서를 중심한 순수한 진리 입장에서 정통신학을 쓴다고 말하였듯이, 그는 자신의 신학적 진술의 방법을 철저히 성서의 절대 권위를 전제로 삼아 성서에서 출발하여 성서로 귀결되는 방법을 택하였다. 그리고 그는 성경을 시종일관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제2세대 신학자

 성결교회 제1세대 신학자들은 일본에서 신학을 배우거나 독특한 체험을 한 자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대부분 일본 동경성서학원의 가르침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자들이었다. 물론 동경 성서학원에서 그들을 가르친 자들 중에는 일본인만이 아니라 미국과 영국 선교사도 다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도 여전히 미국인과 영국인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직접 미국이나 영국으로 건너가 신학을 배운 적은 없었다. 그 반면에 성결교회 제2세대에 속한 인물들은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그리고 집중적으로 신학을 배운 자들이었다는 점에서 제1세대의 신학자들과는 현저한 차이점을 갖는다. 이리하여 그들은 이전 세대의 신학자들보다 더 폭넓게 세계의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성결교회의 신학 발전에 더 큰 공헌을 할 수 있었다.  

 

 그들 중에서 먼저 손꼽을 수 있는 신학자는 정진경이다. 1948년에 서울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아주사 대학과 에즈베리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하고 돌아와 모교에서 15년 동안 주로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신학교에서 그는 매우 진보적인 교수로 통했다. 그것은 신학 논조 때문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열려 있는 그의 자세 때문이었다. 하지만 목회에 대한 소명과 이론을 목회와 접목할 필요성 때문에 그는 교수직을 내내려놓고 은퇴할 때까지 신촌교회에서 목회하였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신학은 목회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의 첫 저서 <신학과 목회, 1977년>도 바로 신촌교회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출간되었다. 그 중의 많은 부분이 그 이전에 씌어졌다는 사실을 고려한다고 해도, 이 책도 상당히 실용적으로 쉽게 씌어졌다는 점에서 이미 목회 현장과의 관련성을 중시했다고 볼 수 있다. 정진경에 의하면 신학은 인간의 삶에 적용되어야 하고, 목회는 사회 현실과 역사 현장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는 칼 바르트(K. Barth)의 입장에 따라 신학을 "교회의 기능"으로 본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도 바로 "교회를 위한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신학과 교회의 심각한 괴리 현상을 비판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써 왔다.  

그의 신학은 "창조적 다원성을 지향하는 신학"이었다. 신학과 목회의 괴리를 지적한 정진경은 다른 한편으로 신학의 양극화를 한국 신학의 위기라고 생각한다. 자유주의적 진보주의와 근본주의 또는 보수주의 사이에서 그는 자신의 독특성을 포기하지 않고 심화해 나가는 태도를 존중한다. 그는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의 양극단을 배제하고 양극단 사이의 중용 혹은 통전을 추구한다. 물론 그도 웨슬리안처럼 한국성결교회가 웨슬리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는 통전적 신학의 입장 위에서 지난 시절의 성결교회의 협소한 신학 입장을 반성하길 원한다. 지난날 성결교회는 직접적인 전도, 개인 전도에만 역점을 둔 나머지 기독교 진리를 내면화하고 개인주의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실제적인 삶 전체와는 유리된 수직적인 신앙만을 형성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역사의식의 빈곤을 가져왔고, 사회진출의 기회를 놓쳤거나 약화시켰고, 따라서 사회에 대한 윤리적인 책임을 소홀히 했다. 개인구원, 직접전도에만 치우친 나머지 우리 교단은 '사중복음'이란 귀한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늘날 대형교단에 비하여 질적으로 뒤떨어진 이유를 겸손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정진경은 성결교회의 신학을 닫혀 있거나 완결된 것으로 보지 않고, 미래의 과제를 위해 열려 있을 것을 제언한다. 성결교회는 과감하고 폭넓게 학문의 다양성을 수용하여 그 속에서 우리 성결교회의 정체성을 새롭게 부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정진경이 성결교회로부터 출발하여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신학을 주창하고 그런 신학을 폭넓게 전개했다면, 조종남은 세계의 신학을 배우고 돌아와 성결교회의 신학을 새롭게 정립하고 발전시키는 일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서울신학교와 숭실대학(철학과)를 졸업한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 에즈베리 신학교와 에모리 대학교에서 신학을 배웠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국내의 여러 학술단체를 위해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복음주의협의회와 세계복음화 로잔 운동을 위해서도 활동했다. 이와 같은 활동의 결과로 조종남도 현장(설교, 전도)과 연결되지 않는 신학을 죽은 신학이라고 보며, 산 신학은 선교의 도장에서 개진되고 활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에즈버리 신학교를 거쳐 에모리 대학교에서 케논(Canon)을 위시하여 4명의 요한 웨슬레 신학자들로부터 웨슬리의 신학을 배우고 웨슬리에 관해 박사 학위 논문을 쓰고 돌아온 그는 그 누구보다 더 열렬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웨슬리의 신학을 강조한다. 그의 신학은 웨슬리의 신학접근 방법을 틀로 삼는다. 물론 그의 신학 방법과 입장을 정리하는 데는 많은 현대 신학자들의 영향과 도전도 받았지만,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웨슬리였다. 조종남이 자신의 신학적 특징이라고 소개한 것(성경에 근거를 두는 신학, 거룩한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신학, 선교적 신학, 신앙체험이 따라야 하는 신학)도 실로 웨슬리의 신학 입장 위에 굳건히 서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종남의 신학적 공헌은 무엇보다도 제1세대의 신학자들이 구호로만 강조하던 웨슬리 신학을 본격적으로 가르친 사실에 있다. 실로 제1세대의 신학자들은 "옛날 웨슬리" 혹은 "초순시대 감리교회"라는 말은 사용하였지만, 웨슬리 혹은 초기 감리교의 문헌들을 접한 적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글 속에는 웨슬리 혹은 초기 감리교회의 글들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19세기 말의 미국성결운동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전수받은 가르침을 웨슬리의 신학과 동일시했다. 더욱이 특히 이명직의 신학사상에는 유교적 혹은 한국의 토속적 종교 사상도 반영되어 나온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조종남은 제1세대가 구호로 주창하였던 웨슬리 신학의 진수를 제대로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웨슬리의 신학을 재발견함으로써 성결교회 신학이 자신의 정체성과 발전을 위한 확고한 신학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는 점도 조종남의 공헌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가 가르친 웨슬리 신학은 제1세대 신학자들의 가르침을 받았던 다수의 목사들과 신학적인 갈등을 낳았다. 전통적 신학과의 갈등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조종남은 "웨슬리 신학과 사중복음"을 종합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조종남은 웨슬리의 신학 외에도 특히 로잔 언약(The Lausanne Covenant)을 소상히 소개하려고 노력하였다. 로잔 언약은 과거에 복음주의자들이 등한히 여겨온 사회적 책임을 회개하고, 전도와 함께 사회적 책임도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임무의 하나라고 천명하였다. 이로써 그 동안 사회 참여에 미온적이었던 성결교회는 이를 통해 새로운 신학적, 실천적 자극을 받았다는 사실도 조종남이 끼친 중요한 공헌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제3세대 신학자

 제3세대 신학자들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성결교회의 조직신학자들은 비교적 두터운 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이전 세대와는 달리 미국만이 아니라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신학을 배우고 돌아왔다. 그런 만큼 그들의 신학적 관심도 폭넓고 다양할 뿐만 아니라, 이전의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과 놀라운 발전을 보여준다.  

 조종남의 가르침을 받고 그의 지도 아래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한 한영태는 웨슬리의 신학을 충실하게 계승하려고 노력하는 학자들 중의 하나다. 그는 오랫동안 "웨슬리 신학"을 집중적으로 가르쳐 왔으며, 그의 박사학위 논문도 바로 웨슬리에 관한 것이었다. 웨슬리 신학을 위해 그가 기여한 점은 웨슬리의 신학을 조직신학의 주제별로 정리한 책 <웨슬레의 조직신학, 1995년>을 펴낸 사실에 있다. 웨슬리의 신학은 주로 설교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논리적인 정리가 필요하고, 지금까지 소개된 책들은 대부분 특징적인 주제들만을 취급하였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여 씌어진 이 책은 웨슬리의 신학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준다.

  하지만 한영태의 주된 관심은 "성결론"에 더욱 천착하려는 데 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삼위일체와 성결, 1992년>과 <그리스도인의 성결, 1995년>이다. 그는 "이 땅에 성결이라는 신앙과 신학의 거목을 착근시켜 준 선배 신앙인들의 업적에 이어서, 이제 밑둥치를 형성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가득 차 있다. 이와 같은 저서들을 통해 그는 "성결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기를" 기대하고, "앞으로 성결이라는 나무의 줄기와 가지가 왕성하게 뻗어나고, 크고 알찬 열매가 풍성히 맺히기를 희망한다." 지금까지의 그의 연구는 바로 이러한 기대와 희망에 모범적으로 부응하려는 노력의 결실이다. 다만 그는 전통적 요소를 그대로 수용하려는 입장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는다. 이는 전통적인 성결론의 약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려는 그의 노력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그는 한편으로는 전통의 희석화와 자유주의를 경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주의의 수구성과 폐쇄성을 극복하기를 원한다.

 

 

 미국 두루 대학에서 "슐라이에르마허의 신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와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목창균은 자신의 신앙과 학문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로서 김응조와 황성택, 그리고 그의 어머니(홍정희)를 든다. 그런 점에서 그는 그 누구보다도 더 뜨겁게 성결교회의 전통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의 입장에 의하면 성결교회 신학을 정립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위부터 아래로 접근하는 것으로서 종교개혁 신학, 알미니안주의, 웨슬리주의, 19세기 성결운동의 맥을 따라 성결교회 신앙체험으로 내려오는 길이 있고, 다른 하나는 아래로부터 위로 접근하는 것으로서 성결교회의 신앙체험으로부터 시작하여 성결교회 신학 노선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두 방법은 상호보완적인 것이다. 지금까지 성결교회 신학에 대한 연구는 전자에 치중했지만, 앞으로는 지난 100년의 성결교회 신앙체험과 전통을 소중한 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

  물론 그도 성결교회의 신학이 웨슬리의 신학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의하면 웨슬리는 체계적인 신학을 제시하지 않았으며, 그에 대한 이해와 해석도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결교회의 신학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18세기의 웨슬리와 19세기의 미국 성결운동에 대한 심층적 연구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성결교회의 전통을 오늘의 상황 혹은 현대의 도전 속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전통을 바탕으로 현대의 자극을 받아들여 새로운 창조 작업을 해야 한다. 신학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창균은 성결교회의 전통을 현대적인 도전 앞에 세우려고 한다. 이러한 노력은 현대신학의 다양한 주제들에 관해 폭넓게 연구하여 출판한 <현대신학 논쟁, 1995년>, <종말론 논쟁, 1998년>, <현대 복음주의, 2005년>와 같은 저서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영국 아버딘 대학교에서 칼 바르트의 신학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전성용은 한편으로는 웨슬리의 전통 안에 서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교회의 부흥을 인도했던 성령운동의 신학적 특성을 더욱 발전시키기를 원한다. 그의 신학적인 관심은 성령론적 신학을 지향하고 있다. 그가 성령론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그의 개인적인 신앙의 형성이 성령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지만, 또한 한국교회의 발전에 성령운동이 크게 영향을 끼쳤고, 더 나아가서 20세기에 일어난 오순절 운동에 대해 신학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이유는 칼 바르트의 기독론적 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성령신학이 요청되고 있기 때문이다. 박사학위논문을 토대로 하여 씌어진 <세례론. 칼 바르트의 성령론적 세례론>은 바로 이러한 관심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전성용은 바르트의 신학과 성결교회의 신학을 함께 연구하는 중에 이 둘을 비교함으로써 성결교회의 신학의 심화와 발전에 이바지하기를 원한다. 그에 의하면 개신교회는 21세기의 시대 상황에 맞는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을 창출해야 한다. 바울의 신학이나 루터의 신학이 지나치게 신앙일변도를 지향한 것으로 해석된 것이 깊이 반성되어야 하며, 신앙과 행위를 포괄하는 제3의 신학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 가능성을 그는 바로 "성화론"에서 찾기를 원하고, 이를 위해 바르트의 신학과 진지하게 대화한다. 조직신학을 위한 전성용의 특별한 공헌을 들라면, 이명직의 <신학대강> 다음으로 그가 조직신학에 관한 개론서 <기독교 신학개론, 1987년>을 썼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비록 교회 교사를 위해 씌어진 작은 분량(141쪽)의 책이지만, 이 책은 조직신학을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 훌륭한 교과서의 역할을 한다.  

 

 

 독일 튀빙엔 대학에서 "칼 바르트의 교회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온 이신건은 성결교회의 전통 안에서 자랐음을 고백하면서, 분명히 이를 자신의 신학적 유산으로 삼는다. 비록 그의 신학적 사유 속에는 바르트와 몰트만과 같은 여러 현대 신학자들의 영향이 강하게 자리를 잡고 있지만, 온전한 구원을 향한 열망, 창조적 종합의 정신, 성서와 전통과 경험과 이성을 조화시키려는 웨슬리의 신학으로부터도 늘 자극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이기를 원한다. 이는 그가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후부터 모든 것을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려고 노력한 사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의 저서 <하나님의 나라와 이데올로기, 1990년> <하나님 나라의 윤리, 1991년>, <하나님 나라의 지평 위에 있는 신학과 교회, 1998년>는 바로 그러한 관심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조직신학을 위한 이신건의 독특한 기여를 들라면, 전통적인 가부장적 신학과 여성신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을 제시한 사실을 들 수 있다. 그가 쓴 <어린이 신학, 하나님을 어린이로 생각하기, 1997년>라는 책은 신학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어린이 신학은 실존-역사-자연과 남성-여성-어린이를 아우르는 통전적인 신학이기를 원하며, 또한 성결교회의 신학과의 접목도 지향한다. 이신건의 또 다른 기여는 성결교회에서 세 번째로 조직신학에 관한 개론서를 썼다는 사실이다. <조직신학입문, 1992년>은 신학생을 위한 교재로, <평신도 눈높이 신학, 1997년>는 평신도에게 교리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성결교회의 신학을 위한 이신건의 공헌은 그가 1995년에 설립한 "성결신학연구소"의 활동상을 통해 잘 드러난다. 이 연구소를 통해 그는 불분명해진 성결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 보편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한다. 성결신학연구소를 통해 그는 새로운 문명의 도래 앞에서 성결교회의 신학적 정체성 확립 못지않게 그 보편성을 폭넓게 확보하길 원한다. 급변하는 시대적 변화와 다양한 신학적 도전 앞에서 그는 성결교회가 어떤 결단을 내리고 어떤 방향으로 신학적 발전을 도모해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지금까지 그는 <성결신학, 1995년>,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 1998년>, <성결교회 신학의 역사와 특징, 2000년> 등을 펴냈다.

 

독일 베를린 신학대학교에서 "노자와 틸리히"를 비교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돌아온 최인식의 학문적 관심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한국의 신학사상을 발굴하여 학문적으로 다듬어 소개하는 것이다. 그는 성결교회사와 한국교회사에 나타나는 주요 인물들(유영모, 이용도, 함석헌 등)의 신학적 의의를 밝히려고 한다. 둘째는 폴 틸리히의 신학을 바르게 소개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틸리히 주 저서들을 정확하게 번역하는 작업이 필요함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 셋째는 문화신학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것, 즉 종교문화, 다원주의 정신문화, 멀티미디어 대중문화를 신학적으로 바르게 접근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그의 노력은 <다원주의 시대의 교회와 신학, 1996년>, <미래교회와 미래신학, 1997년>, <서양종교철학, 1998>, <예수, 그리고 사이버 세계, 2002년>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최근에 그는 뉴 미디어를 현대 문화신학을 논하기 위해 반드시 요청되는 중요한 주제로 삼고 있다. 그에 의하면 세계는 선형적 세계 이해를 탈피해서 비선형적 접근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새 술을 담아낼 수 있는 새 부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를 최인식은 '미(美)의 신학'이라고 부르고, '미'의 하나님을 그리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

 

 

독일 보훔 대학에서 "칼 바르트의 유비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온 황덕형은 현대신학의 다양성을 설명하면서도 자신의 신앙체험에서 얻어진 계시사건을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계시의 체험을 이해하는 방법론적 숙고를 통하여 성결의 신학이 가지고 있는 함축적 의미를 온전하게 밝히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성결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밝히는 것은 하나님의 타자성 안에 있는 은총의 지평을 더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성결신학을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이 모든 것보다 먼저 분명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황덕형은 성결에서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적 조건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려고 한다. 이를 황덕형은 "하나님의 타자성의 은총의 신학"이라고 정의한다.

황덕형의 쌍둥이 형제인 황돈형도 독일 보훔 대학에서 "칼 바르트"를 연구하고 돌아왔다. 그는 최인식과 유사하게 현대신학의 다양한 사유들, 특히 토착화와 탈현대이후의 신학적 가능성을 복음주의의 관점에서 이해하여, 그것을 성결신학의 자원으로 삼기 위해서 노력한다. 거기에는 한국적 전통과 사이버 문화 등 다양한 지평이 등장한다.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최인식이 주로 문화신학적 관심에서 그 문화 존재의 내재적 의미를 밝히는 것에 치중하는 반면, 황돈형은 그 문화적 존재가 마땅히 드러내야 하지만 드러내지 못하는 그 계시적 타자성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상직

정용섭

정성민

양 정

박문수
     
이석규
img5.gif
오성현
img6.gif

박영식

김대식 

 

앞에서 소개한 성결교회의 조신학자들 외에도 상당히 많은 조직신학들이 속속 배출되었다. 미국 시카고 신학대학교에서 "화이트헤드의 상징론"을 연구하고 돌아와, 한국교회의 갱신과 종교대화, 문화신학 등에 관한 논문을 발표해 온 이상직을 위시하여, 독일 뮌스터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계명대학교에서 "판넨베르크의 계시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인문학적 성서 읽기를 시도하며, 한국교회의 유명한 설교를 비평하는 작업을 끈질기게 시도하는 정용섭, 그리고 미국 두루 신학대학교에서 "틸리히의 비존재와 바르트의 무성"을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와,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기독교를 변증하려고 노력하는 정성민, 영국 킹스 칼리지에서 "웨슬리의 신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와, 한국 성결교회의 신학 발전에 기여하려는 양 정, 아시아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웨슬리"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역시 성결교회의 신학 발전에 나름대로 기여하려는 박문수, 독일 뮌헨 대학교에서 "요한 밥티스트 메츠"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새로운 신학 활동을 전개하는 석규,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바르트와 슐라이어마허와"를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성결교회의 신학 정립과 한국신학의 발전에 기여하려는 오성현, 독일 베텔 신학대학교에서 "종교대화"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와, 성결교회의 신학 정립과 종교 간의 대화에 기여하려는 박영식, 대구 가톨릭 대학교에서 "환경신학과 영성신학"에 관한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사중복음을 생태영성적 관점에서 조명하는 글을 활천(活泉)에 발표하면서 나름대로 성결교회 신학의 발전에 기여하려는 김대식 등이 지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여성 조직신학자로는 "여성 목회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천영숙과 "폴 틸리히의 교회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장혜선이 있다.   

성결교회는 지금 과거에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신학의 르네상스를 경험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하고 다채로운 신학자들의 활동이 성결교회와 한국교회, 나아가 세계교회를 위해 장차 어떤 열매를, 그리고 얼마나 풍성하게 맺을지는 전적으로 우리 모두의 관심과 협력에 달려 있다.

* 최근에 박사학위를 받고 활동하는 성결교회 신진 조직신학자로는 윤창용, 오성욱, 박영범, 장기영, 안희철, 김찬홍 등이 있다.이들의 왕성한 활동을 기대해 본다. 성결교회 신학의 미래는 그들의 두 어깨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천영숙

장혜선
img8.gif
윤창용

오성욱 
 
박영범
img2.gif
장기영

안희철

김찬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