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ain, 하나님 나라 운동

인구 센스서에 대한 종교학적 진단

이길용(독일 마부르크 대학, 신학박사)

 

“1300만에서 860만. 급격하지는 않지만 지속적인 하락세. 지난 10년간 감소한 교인수가 대략 15만 명.”통계청에서 발표한 2005년도 인구센서스 조사 결과 중 개신교에 해당하는 항목이다. 이 수치들은 지금 한국의 개신교가 적잖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단지 신도 숫자의 하락이 한국교회가 지금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나타낸다고 손쉽게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지속적인 성장 둔화에는 분명 일정한 사회적 의미가 담겨있고, 마땅히 이 의미는 우리의 세밀한 주의 속에 제대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 1300에서 860으로의 하락이라는 자극적인 표제에 너무 안절부절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각 교단별로 보고되는 숫자의 총합이 1000만을 넘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교회에서 행해지는 정확하지 못한 교인 수 계산 습관은 교회의 자체 통계에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도 수 부풀리기는 개신교만의 일도 아니다. 각 종단별로 제출하는 신도 숫자의 총합이 전체 인구를 훌쩍 넘어선다는 웃지 못 할 사실은 종교인 수 통계에 끼어 있는 거품의 규모를 어느 정도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보다 정확한 교인들의 구성 비율을 알기 위해서는 공적인 정부 기관의 통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인구센서스 조사에서는 개신교의 숫자는 지난 수십 년간 계속 800만 대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1300만이라는 숫자는 자체 내의 숫자였을 뿐 공적인 의미는 그만큼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겸허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번 통계 결과를 놓고 한국 개신교가 좀 더 당혹스럽게, 혹은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는 부분은 가톨릭의 눈에 띠는 성장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번 조사 결과 한국의 가톨릭 신자는 줄잡아 510여 만에 이르고 있음이 밝혀졌다(물론 이 수치는 정부의 인구센서스 조사 결과 나온 것이다. 여전히 가톨릭 자체 내에서는 250여만의 신도수를 통계로 제시한다. 개신교와는 달리 가톨릭에서의 신도들 숫자에 대한 측정은 좀 엄격한 편이다. 가톨릭에서는 일정 기간의 신자 교육을 마치고 영세를 받은 이들을 통계로 치는 것에 반해, 인구센서스 조사에서 나온 수치는 스스로 가톨릭 신자라 생각하는 이들을 통계에 넣은 결과이다). 한쪽이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에 있는 반면 가파른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는 다른 편의 경우를 살펴보면, 우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개신교와 가톨릭이 보여준 선교 정책과 대사회 이미지 관리가 어떠했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그리스도교 계열의 두 종단이 그동안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를 살펴본다면 통계청이 발표한 숫자들의 의미를 좀더 세밀하게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통계의 결과를 받아든 한국교회는 우선 그 결과의 의미를 신중하게 분석하고 논의하는 자세를 보이기 전에, 벌써부터 성급한 대책 마련에 부산을 떨고 있다. 여전히 성과주의에 급급한 우리들의 정서 때문인가? 그리고 나오는 대책들의 대부분은 이미지 개선이나 요즘 어느 정도 효과(?)를 얻고 있는 복지정책의 확충 등으로 국한된다. 예를 들어 늘어나는 노년층을 염두에 두고 이들을 위한 선교 정책을 개발해야 하느니, 혹은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교회로서 좀더 긍정적인 이미지를 쌓기 위해 복지관 건립을 비롯한 사회선교에 투자해야 한다느니, 혹은 기도 외에는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느니 등등. 통계 결과가 던지는 서슬 퍼런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읽고 이해하기도 전에 한국 교회는 섣부른 대책과 대안 제시로 부산하다. 하지만 약을 처방하기 전에 반드시 ‘진단’이 필요하다.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제대로 짚어내야 무엇이 적절한 대책이 될 수 있는지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한국교회에게는 종교학자의 훈수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한국교회, 거룩함이 상실되다

종교학자인 필자의 눈에는 지금 한국 개신교가 겪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 너무도 또렷이 보인다. 그것은 바로 ‘세속화’다. 물론 교회는 필자의 이 진단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잡아뗀다 할지라도 한국 개신교는 지금 너무도 세속화되어 있다. 평소 교회가 주장하고 선포하는 것과는 달리, 지금 한국교회는 그들 세상의 견고한 세계관으로 꽁꽁 무장한 천박한 ‘괴물’이 되어버렸고, 또 더욱 그렇게 되어가는 중이다.

세속화되었다는 것은 교회를 교회되게끔 하는 그 무엇을 교회가 잃어버렸거나 혹은 잃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거룩함의 상실’ 혹은 ‘거룩함의 퇴색’이다. 색 바랜 거룩함으로 인해 교회는 이제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구조와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종교학에서는 ‘거룩함’ 혹은 ‘성스러움’은 종교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로 본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교회 안에서는 이처럼 종교의 가장 본질적 요소라 할 수 있는 거룩함이 묽어지기 시작했다. 그 대신 교회의 종교성을 채운 것은 천박한 자본으로 무장한 세속의 논리였다. 본질이 사라진 공간에 세상의 맘몬이 가득 가득 채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당연히 교세의 쇠락으로 결론나기 십상이다.

거룩하고 성스러운 체험이 빠져있는 교회에서 과연 사람들은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성스러움이 빠져나간 교회는 인간관계와 연줄, 교인 수 등을 이용해 장사하려는 사람, 또 몰려있는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명예나 권력을 유지하려는 정치꾼들, 사람들을 통해 지속적인 이익을 남기려 하는 사람들만이 난무하게 된다. 결국 이는 더욱 빨리 교회의 세속화를 조장하게 될 것이며, 끝에 가서는 결국 교회의 생명과 힘이 말라버리는 그림만이 남게 될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거룩한 영성이 말라버린 교회에 이제 ‘교리적 배타’만이 남아 있다. 교회는 이미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 날 선 강력한 독선으로 무장하여 한국 개신교의 사회적 이미지를 계속 내리막길로 치닫게 한다. 한마디로 지금 한국 개신교는 총체적 난국이다. 어떻게 단발성 치료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도 않는 깊은 파국에 빠져있다.

반면 가톨릭의 경우는 1962년에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시작으로 서서히 새로운 세기의 선교 방법을 모색해 왔다. 나름대로 신비적 요소 혹은 성스러움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대사회적으로 포용성과 개방성을 모토로 한 선교 정책을 유지하는 혜안을 발휘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독특성과 배타성은 유지하면서도 타문화와 종교에 대한 여유를 정서적으로, 논리적으로, 학문적으로 쌓아가기 시작했다. 아주 간단한 것이긴 하지만 우리는 석가탄일에 가톨릭이 사찰로 보내는 화한을 생각해 보자. 이것이 가지는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결코 가볍게 지나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웃 문화와 종교들에 대한 가톨릭의 이해는 구호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가톨릭 계열의 종합대학에 종교학과가 지속적으로 설치되었고, 또 적지 않은 수의 가톨릭 성직자들이 이웃 종교의 전문가로 양성되었다. 이미 우리는 신문지상을 통해 한국의 대표적인 불교대학인 동국대에서 가톨릭 사제가 학위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다. 그 외에도 다양한 문화 전통에 대한 전문가와 해석가들을 키워내며 대사회적 이미지 제고에 많은 공을 들인 것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바로 그러한 작업의 결과는 종교를 갖길 원하는 이들에게 가톨릭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고, 결국 이는 실제적인 교세 성장으로 나타났다. 물론 우리가 그동안 한국 가톨릭이 보여주었던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사회를 향해서 꾸준히 투자했던 노력과 방법들은 지금 위기를 마주하고 있는 한국교회로서는 좋은 선례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성스러움의 탈환운동

이번 통계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부분은 90년대 이후 꾸준히 종교인의 숫자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의 종교적 욕구는 줄어들지 않는데, 지금 한국 개신교는 그러한 사람들의 종교적 욕구를 채워주기에는 무언가 2%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지금 개신교가 이 위기(?) 상황을 타파하길 원한다면 보이기 위한 외부 사업과 이벤트, 혹은 정서에 치중한 프로그램에만 안주할 것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 서서히 사라져간 ‘성스러움’부터 회복하는 운동에 더욱 치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스러움의 탈환 운동’이야 말로 예수께서 작심하셨던 ‘하나님 나라 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성스러움의 회복, 혹은 성결의 회복을 우리는 또 도덕의 잣대로 이해하려 한다. 성결하면 맨 먼저 우리는 도덕적으로 흠 없고, 깨끗한 삶을 떠올린다. 하지만 제대로 된 성결, 혹은 거룩함이란 그런 상황적 도덕의 잣대에만 구속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참된 성결, 혹은 거룩함은 도덕을 넘어선 곳에 있다. 실상 거룩함이란 하나님의 속성이며 본질이 아니던가! 이런 점에서 작금 한국 개신교에 가장 필요한 덕목은 바로 ‘하나님 나라 운동’의 리바이벌이다.

이미 알고 있듯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이란 존재를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알아야만, 아니 각자의 실존 속에서 진정으로 그분을 체험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몰라서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기에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조차 그 하나님을 느낄 수 없다면, 도대체 사람들은 어디에서 하나님을 실감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절절한 체험과 감동 없이 율법만으로 행위의 장벽을 쌓아올린 바리새파 사람들을 꾸짖으셨다. 이런 예수님의 태도를 우리는 지금 심각하게 돌이켜봐야 할 것이다.

신앙은 절대자와의 ‘만남’이지, 절대자에 대한 ‘암기’는 아니다. 지금까지 과연 한국교회는 무엇에 더 치중하고 있었는가, 절대자와의 만남이었는가, 아니면 그분에 대한 암기였던가? 교회 내에서 사라져버린, 혹은 묽어진 이 절대자, 창조주, 하나님과의 만남이 결국 한국교회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때 성스러움을 ‘느끼며’ 거룩함을 ‘체험’한다. 그리고 이 ‘본질 체험’, ‘존재 체험’, ‘하나님 체험’이야 말로 세상이 줄 수 없는 교회만의 무기이다. 다시 한번 꼼꼼히 지금 한국교회 내에 팽배해 있는 흐름을 되새겨보라. 우리는 교회 안에서 과연 무엇을 찾고, 무엇을 강조하고, 무엇을 자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안에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한 강조가 없다면 이미 그 교회는 양적 쇠락만이 아니라, 질적으로도 타락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예수께서 평생 웅변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재건이지, 또 다른 수량적 가치관에 치우친 교회 성장 프로그램을 돌릴 때는 아닌 것이다. 

<활천 2006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