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묵상>

파루시아 (parousia)

 

김종두 목사(대수 수성교회)

 

집 근처 용지봉 산행 중 정상 부근 기도바위에 앉아 평소처럼 짧은 묵상에 들었습니다. 묵상 중에 5~6세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를  봅니다.

그 아이는 반질거리는 조그만 바위에 앉아 마을로 향한 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이의 손에는 감꽃이 들려 있습니다.

초가집 뒷마당에 심어진 감나무에서는 바람에 날린 감꽃이 눈송이처럼 흩날리고 있습니다. 아이는 감꽃을 먹기도 하고 반지, 목걸이도 만들며 혼자 놉니다. 그러다가 심심해지면 그 바위에 올라가 길쪽을 바라보곤 합니다.

점심 때쯤이면 이모가 그 길을 따라 물동이를 이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 길로 학교 간 두 누나와 형이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일찍 과수댁이 되어 두 딸을 데리고 살던 이모는 젊은 날에 이미 한쪽 눈을 실명했습니다. 이모는 박 씨 아저씨네 토마토 비닐하우스에서 온종일 일을 했습니다.

이모는 점심시간에 잠깐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다시 밭으로 나가곤 했습니다. 이모는 마을 공동우물에서 물동이로 길어온 시원한 물과 보리밥과 된장으로 점심상을 차리곤 했습니다.

엄마는 어린 두 아들을 이모에게 맡기고 돈벌러 떠났습니다. 그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니 한낮 그 무료한 시간에는 그 아이를 바라보는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그 아이는 그저 그 바위 위에 홀로 버려져 있었습니다. 마치 이 세상에서 부재한 것처럼. 그런데 주님께서 묵상 중인 나를 깊이 감동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때 이미 너를 보았다(파루시).”

과학과 철학의 차이를 단적으로 말한다면 과학은 철두철미하게 주관(Subject)을 배제하고 철학은 객관(Object)을 배제하는 인식의 틀입니다. 이 말은 결국 철학은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을 정체성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은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에서 플라톤을 거쳐 현대실존주의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의 아포리아이지만 또한 가장 위대한 발견이기도 합니다.

근대 서양철학사에서 이 문제를 재발견한 사람은 데카르트입니다. 그는 방법적 회의라는 길(Methodeㆍmeta+hodos)을 통해 저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를 찾아냅니다.

데카르트에게 ‘cogito’는 모든 사유의 시원인 ‘아르키메데스의 점’이고 ‘사유하는 나’이자 근대성의 근본원리인 ‘주체이며 자아’입니다. 하지만 cogito라는 개념이 co+agito(agitare, agere)의 합성어(결합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cogito는 말 그대로 co(함께)+agito(움직이다, 가동시키다)라는 뜻입니다. 데카르트에게 ‘사유하는 나’와 함께 ‘사유하는 자’는 ‘신(神)’ 곧 하나님입니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신(神)’의 임재(臨在ㆍparousia)가 곧 사유의 본성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회는 파루시아를 마라나타(marana-tha)와 함께 종말론적 상징어로 사용해 왔습니다. 마라나타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는 성도(聖徒)의 자세를 지시하는 말이라면 파루시아는 재림하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지시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파루시아(parousia)라는 말은 par(a)+ousia 곧 헬라어 전치사 para와 실체, 본질, 속성을 뜻하는 ousia의 합성어이고 원래적 의미는 말 그대로 “실체 혹은 본질로부터” 곧 임재(臨在)입니다.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이라는 철학의 정체성으로 보면 파루시아(parousia)는 ‘ousia인 나 자신이 내게 임재’하는 것이고 ‘자신이 스스로 (절대)정신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헤겔은 그의 정신현상학에서 “절대가 이미 우리에게 와 있지 않다면 혹은 와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절대를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또 그는 “내안에 철학하는 사람은 절대정신”이라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기독교회는 ousia를 하나님(그리스도)으로 이해합니다. “ousia이신 하나님(그리스도)이 우리 곁에 임재하심.” 그것이 parousia이고 성탄이며 또 재림입니다.

2014년 대림(강)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림절(待臨節)은 그리스도의 ‘오심(臨·降)’을 기다리는 절기 곧 파루시아(parousia)의 시간입니다.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는 당연히 종말론적 오심일 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거룩한 임재여야 합니다.

 (한국성결신문 974호 / 2014년 12월 3일)

<김종두/도서출판 세줄/366원>

 또 ‘총회비 1억의 가치를 총회가 되돌려 주거나 그 이상의 가치를 창출해 주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교단의 에너지를 집중해야 하는 행사, 그 후의 결과가 필연적으로 교단 운영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행사를 정책하고 실행할 때는 더 근본적이며 전방위적 통찰이 필요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사실 그의 목소리는 ‘날 것 그대로’이다. 솔직하고 꾸밈없이 내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더 심한 욕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는 저자의 말과 달리 그의 글에는 애정이 느껴진다. 그것은 그가 교단을 아끼고 교단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말이 진리와 현실참여의 문제를 말함에 있어서 상황 속에서 실용성과 논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알고 계산하고 말하기보다 근원적인 영역에서 진리와 옳고 그름을 이야기 하고 있어서다.

그의 글은 어렵다. 신학을 공부했지만 철학으로 학위를 받고 철학과 논리학 강사를 역임한 그의 이력을 생각 안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글 상당수는 본지와 ‘활천’, ‘기독교사상’, 인터넷 ‘성결광장’ 등 일반 대중이 접할 수 있는 매체에 실려 있었다는 점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독자의 사랑을 받은 이유는 솔직한 그의 말과 표현에 있기 때문이다.

70여 편의 글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김종두 목사는 “비록 못생기고 못난 글들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들의 삶과 신앙의 여정에서 이름 없는 이정표가 되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면서 불평 없이 함께 해준 가족과 성도들에게 감사를 돌렸다.

대구에서 목회하고 있는 김종두 목사(수성교회)가 목회현장에서의 단상과 교단을 위한 발언들을 모아 ‘이정표(里程標)’라는 칼럼집을 출간했다.  

칼럼집은 6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 ‘교회와 나’에는 입교와 신학생 시절 등 자신의 신앙 간증을 담았으며 2부와 3부는 목회 현장과 삶의 현장에서 드는 단상과 생각들, 4부에는 교단총회 참관기와 주요 행사 등에 대한 생각을 담은 ‘교단에 대한 발언들’을, 5부는 정용섭 목사의 설교비평에 관한 글, 6부에는 인터넷 ‘성결광장’ 대화 등을 담았다.

김 목사는 교단에 대한 글에서 ‘패거리를 기반한 분파주의적 세력다툼’을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관행들을 비인간적인 것으로 못견뎌하고 그것에 대해 분노하기’도 하며 ‘목표와 과제, 과업 지향적’ 정책이 아니라 ‘인간중심, 신앙 중심’ 정책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