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

정상운 박사(성결대학교)


I. 여는 말

한국 성결교회는 올해로 창립 90주년을 맞이했다. 10년 뒤에는 교단 창립 한 세기를 갖게 되는 이 시점까지 한국 성결교회는 뚜렷한 신학적 정체성을 분명히 정립하여 제시하지 못했다. 물론, 그 동안 신학적 정립에 대한 노력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 초부터 웨슬레(Wesley)신학에 대한 연구를 기점으로 해서 성결 교단신학을 웨슬레 신학과의 접맥을 통하여 학문적으로 새롭게 조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 작업은 한국 성결교회의 통전적인 신학정리 작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 성결교회가 18세기 웨슬레 부흥운동의 신학적인 맥락과 관련될 뿐만 아니라 19세기 말 미국교회라는 역사적 정황 속에서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의 일환으로 형성된 선교 단체들의 영향 가운데 20세기초에 동양선교회가 설립되고, 동양선교회의 교리적 강조가 그대로 초기 한국 성결교회에 전수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성결교회가 개척 초기로부터 지금까지 교단적 판별성으로 강조하였던 사중복음(四重福音)이라고 불린 온전한 복음(Full Gospel)의 교리적 입장에서 웨슬레 신학을 비교하여 분석하면 웨슬레 신학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학적 차이들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미 1989년 [교수논문집](성결대 제18집)의 "성결교회성 회복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을 통하여 한국 성결교회 신학, 곧 웨슬레 신학이라는 신학적 인식에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19세기 성결운동에 대한 지속적이고, 구체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제언하였다.


Ⅱ. 요한 웨슬레(John Wesley) 신학과 사중복음

성결교회는 초기(1921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성결사상을 강조해 왔다. 따라서, 성결은 사중복음의 핵심이며, 성결교회의 신학의 핵심으로 성결을 체험하고 전하고, 생활하는 교단이 성결교회로 인식되었다. 그러면 성결교회는 어떤 교단이며, 그 신학은 어떤 계통인가? 이에 대해 한국 성결교회는 예성이나 기성 할 것 없이 양자 모두 웨슬레(J. Wesley)의 복음주의 운동에서 시작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조종남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웨슬레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결교회의 신학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복음주의 신학과 호흡을 같이 한다. 헌법 제 1장 제 6조에 의하면 성결교회의 기초교리는 기독교 개신교파가 일반적으로 믿고있는 복음주의이다. 따라서 우리 성결교회는 넓게 말하면 개신교회의 복음주의의 신학이요, 보다 구체적으로는 웨슬레신학에 서 있는 것이다.

성결교회가 동양선교회가 복음전도관에서 기성교단으로 경화된 지 4년 뒤인 1925년에 간행된 [東洋宣敎會 聖潔敎會 敎理及 條例]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본 단체에서 주창하는 교리는 새로 만든 별교리가 아니오. 오직 옛날 웨슬레씨와 감리회의 초 시대 성도들이 주창하는 교리, 즉 하나님의 단순한 근본적 진리니라. 이 진리를 동양 천지에도 널리 전하여야 되겠다는 창립자들의 열렬한 주의하에서 본 단체가 조직되어 옛날 감리회 창립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받아 그대로 행하는 중이니라. 하나이라도 새로 만든 것이 아니고 全혀 성경중에 있는 진리 즉, 최초 감리회에서 주장하는 진리 그것뿐인데 웨슬레씨의 주장하던 진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나니라.

이러한 내용은 이명직 목사의 글에도 별 차이 없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즉, 이명직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직 감리교회 개조인 요한 웨슬레를 니어 니러나 곧 초시대 감리교회와 같이 중생,성결,신유,재림의 복음을 고죠하며 미신자에게는 진격적으로 전도하야 뎌들을 바른 길노 인도하고저 함이니, 곳 우리의 교리나 정신이 순초시대 감리교회로 인정해야 틀림이 없을지니라.

이같은 내용은 1933년 [臨時約法]이나 1936년, 1945년 그리고 해방 이후의 [헌법]에서도 그대로 전수되어 강조되어 왔다. 따라서, 한국 성결교회가 온전한 성화를 강조하는 웨슬레에게서 그 신학적 유산을 물려받고 있고, 성결교회의 신학은 복음주의 적인 웨슬레 신학이라고 결론지음에 무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조종남교수의 주장은 한국 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에 대한 설명으로 지금까지 폭넓게 받아들여져 왔다. 그는 성결교회의 신학의 특징으로 웨슬레신학의 특징을 말하며 ① 성서적인 기독교, ② 만인을 위한 복음, ③ 은총만으로의 구원, ④ 모든 죄에서의 구원, ⑤ 체험을 강조하는 신학(성령의 증거), ⑥ 세계를 위한 강조 등 여섯 가지의 웨슬레신학의 강조점을 말하였다.

그러나 최근 1980년 후반에 들어와서 과거의 웨슬레신학 일변도에서 벗어나 성결교회의 신학은 19세기 말 성결운동을 거쳐 전래된 신학임이 주장되고 있다. 이같은 변화는 과거와는 달리 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이 18세기 요한 웨슬레뿐만 아니라 19세기말 미국의 성결운동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정황에서 기인하였기 때문이라는 인식에서 온 것이다. 즉, 성결교회가 믿는 교리와 신조는 기독교 개신교파가 공통으로 믿는 복음주의로서 복음적인 웨슬레안이지만 협의적인 의미에 있어서, 웨슬레안 성결운동의 성결신학(초기 웨슬레안)으로 감리교 교리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성결교회의 신학은 교회사적인 면에서 볼 때 웨슬레(J. Wesley)와 신학적 맥을 함께 공유하지만 현재의 웨슬레 신학과는 접근방법(발전과정)이 상반되는 차이가 있다. 성결교회와 감리교회의 차이점이 있다면, 성결교, 즉 동양선교회의 16개 신조(1925)와 감리교의 25개 신조(Wesleyan Revision to Twenty-five Articles, 1784)를 비교해보면 분명히 나타난다.

조종남교수는 수년 전에 "웨슬레신학과 성결교회"라는 글을 몇차례에 걸쳐 [活泉]에 게재하면서 성결교회의 신학적 유산에 대해서는 논한 적이 있었다. 4회에 걸친 논단에서 사중복음과 웨슬레신학을 관련시켜 사중복음에 대한 강조는 웨슬레신학과의 체계 안에서 발전시켜야 됨을 천명하고 있다. 조종남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전도표제로서의 사중복음과 웨슬레신학을 관련시켜서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사중복음에 대한 강조는 웨슬레신학과의 만남에서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성결교회 교역자들은 중생을 설교하면서 웨슬레의 중생의 체험을 외쳤고, 성결을 말할 때 웨슬레의 성결의 교리를 가르쳤다. 사실 사중복음을 강조하는 전도집회는 체험을 강조하는 웨슬레신학을 밀접하게 반영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성결교회의 부흥집회가 건전한 운동으로 지속될 수 있었던 것도 웨슬레신학에 근거한 체험을 말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둘째, 사중복음은 웨슬레신학의 체계 속에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사중복음은 전도의 표제이다. 이것이 성결교회의 신학전반을 포괄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사중복음, 곧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교리를 웨슬레신학의 체계 속에서, 특히 웨슬레의 구원론의 테두리 안에 전개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주장은 웨슬레부흥운동의 역사적인 맥락에서 살펴볼 때는 별 무리가 없는 논리의 전개처럼 생각되나 한국성결교회의 역사적인 형성과정에서 조명해 볼 때는 문제점들이 야기된다. 만일 한국성결교회가 성결교회의 신학과 교리를 웨슬레신학으로 국한시켜 거기에서만 일체의 신학적 유산과 방향을 찾고, 웨슬레 신학체계 속에 모든 다른 여타의 것, 무엇보다도 성결교회를 성결교회로서 규정짓게 하는 사중복음까지 그대로 편승시켜 수용, 발전시킨다면 거기에는 많은 문제점을 유발시키게 한다. 단적으로 말해, "한국성결교회가 웨슬레신학의 전통적 유산을 그대로 전승한 감리교와 다른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성결교인과 감리교인을 구분하는 그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교단정체성 상실에 대한 문제점을 담은 물음이 필연적으로 야기된다.

웨슬레신학의 체계 속에 사중복음을 편입시켜 전개시키고자 하는 신학적인 작업은 1960년대에 들어와서 잠시 움을 트다가 그 작업은 1972년 서울신학대학교수 논문집인 [神學과 宣敎] 창간호를 통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神學과 宣敎] 제 1집 창간사의 "敎會를 素地로 하지 않은 神學은 空虛하며, 神學이 없는 敎會는 健實할 수 없다"는 말을 절대 명제로 삼아 그동안 웨슬레 신학적 전통을 기반으로하여 모든 것을 그 속에 포괄시키고 수용하는 신학방법론이 주로 기성(基聖)을 중심으로하여 진행되었다.

그러나 웨슬레 신학체계 속에서 사중복음을 포함시켜 전개하려는 이러한 노력들은 그것에 대한 반등으로 한국감리교회와는 그 출발부터 다른 역사적 특수성과 내용을 가진 성결교회를 상대적으로 감리교회와 별 다를바 없는 신감리교회(Neo- Methodist Church)로 만들게 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웨슬레 신학체계 속에서의 사중복음의 전개라는 신학적인 도식은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단지 웨슬레신학의 체계와 시각에서만 사중복음을 조명하고자 하는 사중복음의 역사적 특수성을 배제시키는 단편적인 시각에 불과하다는 비판적 지적을 면할 수가 없다.

웨슬레신학의 체계 속에서의 사중복음의 전개는 '현 성결교회 교역자들이 웨슬레신학에 입각하여 목회사역을 수행하고 있느냐, 라는 현실적인 물음과, 웨슬레신학이 전도표제라기 보다는 완전한 구원의 복음인 사중복음을, 특별히 재림론과 신유론을 포괄할 정도로 사중복음이 표방하는 전반적인 교리내용을 수용하고 있느냐, 라는 물음에 자명하고도 명쾌한 답을 주어야 한다. 웨슬레 신학체계 속에서 사중복음을 전개시키고 형성하려는 지금까지의 신학적인 시도는 먼저 지나간 초기 동양선교회와 성결교회사의 역사적 검증의 관문을 거쳐야 한다. 이것은 90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성결교회사, 더 나아가서는 1901년 동경에서 중앙복음전도관과 성서학원으로 출발하고 1905년에 새롭게 발족한 동양선교회의 신학적이며 역사적인 검증을 거치지 않을 때에는 그 어떠한 신학형성의 시도나 모색도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웨슬레 신학체계 속에서의 사중복음 전개라는 시도는 지금까지 한국성결교회가 타교단과는 다르게 고유한 우리만의 특성으로 자타로부터 인식되어온 성결교회의 신학적이며 신앙적인 전통적 유산들이 이러한 시도에 있어서는 간과(看過)되어 버리거나 다가오는 역사 속에 사장(死藏)되어 버리고 말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이 발견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초기 한국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의 교리 및 신조를 그대로 전수 받았다. 따라서 동양선교회, 즉 초기 한국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을 규명하기 위해 동양선교회에 영향을 끼친 만국성결연맹과 기도동맹(International Holiness Union and Prayer League)과 기독교 연합선교회(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의 신학적 연관성을 사중복음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19세기 말 성결운동의 직접적 반영으로 나타난 것이 20세기 초 동양선교회였기 때문이다.


Ⅲ. 동양선교회와 만국 성결연맹과 기도동맹

1. 동양선교회의 형성에 있어서 만국성결연맹과 기도동맹

만국성결연맹과 기도동맹과 동양선교회의 관계는 처음 동양선교회가 1901년에 동경에서 시작할 때부터 관련되었다. 카우만(Cowman)은 1900년 9월 7일 감리교 외국선교부에 선교사 지원을 하였을 때 거기에 대해 결정적인 확답이 주어지지 않자 신시내티(Cincinnati)에 있는 냅(Knapp)의 성서학원을 방문하였다. 여기서 그는 냅의 신앙사역을 통해 신앙선교에 대한 도전과 성서학원의 운영에 대해 영향을 받았고, 무엇보다도 주목할 일은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만국성결연맹과 기도동맹 지도자들에게 간단한 예식을 통해 목사안수를 받았다. 1901년 1월 시카고(Chicago)에서 가진 안수식에는 만국성결연맹과 기도동맹의 지도자급인 세쓰 리스(Seth C. Rees)와 그의 아들 바이론(Byron), 그리고 마틴 웰스(Martin Wells), 냅(Knapp), 또한 촬스 스톨커(Charles Stalker) 등이 참석하였고, 그들은 두 부부에게 목사안수를 베풀었다.

이로써 카우만부부는 훗날 필그림 성결교회에서 안수받은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만국사도성결연맹(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Union, 약칭하여 I.A.H.U.)의 안수받은 목사들 명단과 필그림성결교회 외국 선교사 명단에는 카우만과 그의 부인의 이름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선교부의 지시 아래 있지 않았다. 그들은 만국성결연맹의 감독과 지도 아래 있지 않고 독립적인 선교사역을 위해 1901년 2월 1일 아침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를 떠났다. 킬보른도 1902년 만국사도성결연맹으로부터 안수를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선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독립적인 선교사역을 위해 초교파적으로 동양선교회가 출발하였어도, 초기에 있어서 재정적인 도움을 만국성결연맹과 또한 이것과 밀접한 관련을 맺은 [부흥사]지를 통해서 받았다. 만국성결연맹이 동양선교회의 초기 재정적 운영과 자립에 도움을 준 것을 다음의 킬보른의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을 떠나기 전에 카우만부부는 만국사도성결연맹과 [하나님의 부흥사](God's Revivalist)의 편집자인 냅(M. W. Knapp) 형제와 친교를 맺었다. 그와 그의 친분 있는 동맹의 구성원들은 특별히 일본 사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기도와 자발적인 헌금은 어떤 다른 사람들보다 우리를 도왔다. 얼마 후에 만국사도성결연맹에 의해 선교부가 구성되었고, 우리들은 일본에서 그들을 대표하게 되었다. 오늘날 이 사역은 미국과 대영제국 모든 성결단체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수천의 귀한 영혼들은 오늘의 일본을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이 사역은 모든 성결운동이 추천하는 단체(child)가 되었다.

만국성결연맹은 동양선교회 초기 설립과정에서 [부흥사](The Revivalist)를 통해 동양선교회를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공헌을 남겼다. 또한, 냅(Knapp)이 세운 하나님의 성서학원생들이 동양선교회 선교사로 지원하여, 1910년부터 1917년까지 진행되어온 지방전도운동에 10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1926년 킬보른에 이어서 경성 성서학원장이 된 우드(Harry Wood)와 또한 헤인즈(Paul E. Haines)같은 선교사들이 그 가운데 속한 사람들이었다.


2. 만국성결연맹과 기도동맹이 받은 기독교연합선교회(기독교인과 선교사동맹, C.M.& A.)의 영향

19세기를 전후로 하여 미국감리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이루어 18세기말에 시작되어 1세기도 채 넘기 전인 19세기말에는 미국 내의 주요한 대교단의 하나로까지 성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칼빈주의의 주요사상인 계약, 선택,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는 세대주의 종말론을 배격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전국성결연합회를 형성한 냅(M. W. Knapp)과 퀘이커파 성결부흥사 출신의 리스(Seth C. Rees)를 중심으로 결성된 만국성결연맹과 기도동맹은 비록 전체적인 비율에 있어서는 소수의 위치를 차지하나,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심프슨(A. B. Simpson)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였다.

리스(Seth Cook Rees, 1854-1933)는 냅(Martin Wells Knapp, 1853-1901)과 함께 만국성결연맹 및 기도동맹(I.H.U.P.L.)의 공동설립자로서 초기 기초석을 놓았다. 이 연맹은 어떤 면에 있어서는 급진적인 내용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특별히 신유와 예수의 전천년재림에 대한 것이었다. 리스는 냅과는 달리 그리스도인과 선교사동맹의 심프슨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는 사중복음으로 성결과 선교에 대해 분기시켰던 그리스도인과 선교사동맹의 설립자인 심프슨의 예찬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1888년 미시간의 래이진 밸리(Raisin Velley)에서 목회를 할 동안에 그리스도인과 선교사동맹의 미시건 협조처(Michigan Auxiliary)의 회장으로서 봉사하였다.

성화된 장로교인으로서 심프슨이 성화에 대해 케스윅(Keswick)입장으로 기우는 동안 심프슨과 리스 사이에서는 사상과 열정에 있어서 특이할만한 유사성이 보였다. 그들은 둘 다 세계복음화를 그리스도인의 더 높은 삶을 효과적으로 설교한 사람들이었고, 그리스도의 전천년재림과 신유에 대해 큰 강조점을 두었다. 1897년 연맹이 조직되자 리스(S. C. Rees)는 회장이 되었고, 냅(M. W. Knapp)은 부회장이 되었다. 따라서 만국성결연맹과 기도동맹의 초기역사에서 리스가 차지하는 영향은 냅에 못지 않게 컸고, 이것은 그리스도이과 선교사동맹의 심프슨과의 사상적으로 일치되는 전천년설과 신유사상이 만국성결연맹과 기도동맹에 자연스럽게 수용되는 것에 커다란 영향을 나타냈다. 실제로, 1900년 만국성결연맹과 기도동맹의 개정헌법에서 전국성결협회의 반대로 삭제된 사중복음이 1901년 냅의 소천과 함께 리스의 영향으로 바로 복원되어 1902년 헌법에 다시 추가되었다. 1902년 만국성결연맹 및 기도동맹의 헌법(Constitution and by-Laws of the 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Union)은 사중복음의 내용을 복원시켰다.


3. 동양선교회와 만국성결연맹과 기도동맹과의 신학적 관계

동양선교회의 기원과 목적(1925년)은 1897년도의 만국성결연맹과 기도동맹의 [헌장](Constitution and By-Laws of the International Holiness Union and Prayer League)과 1902년도의 만국사도성결연맹의 [헌장](Constitution and By-Laws of the 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Union), 그리고 1905년도의 만국사도성결연맹과 교회의 [헌장](Manual of the 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Union and Churches)과 1914년도의 만국사도성결교회의 [헌장](Manual of The 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Church)을 비교하면 앞서 살펴본 동양선교회의 16개 신조뿐만 아니라, 동양선교회의 설립목적도 만국사도성결연맹과 동일한 설립노선을 견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필그림(Pilgrim) 성결교회라 불리운 초기 만국성결연맹과 기도동맹(1897)은 만국사도성결연맹(1902)으로, 이후에 만국사도성결연맹과 교회(1905)로, 그리고 만국사도성결교회(1914)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설립목적이 다소 확장되거나 축소되어 1914년 헌장의 다섯 조항의 목적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보였다. 특별히 만국성결연맹과 기도동맹이 만국사도성결교회로 변천되어 내려오는 과정에서 몇가지 특징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만국성결연맹과 기도동맹은 초기 1897년의 헌법에서 그 성격에 대해 교회적인 조직이 아닌 기독교 신자들의 형제애적인 연합으로 기성교회 조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 가운데 심오한 영적생활을 고양시키고자하여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즉, 새로운 교단조직이 아닌 신자들의 영적 생활증진, 즉 성결을 위한 단체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1900년 초기의 명칭 개정과 함께 1910년대로 넘어가면서 기성교회 조직의 형태로 바뀌어 나갔다. 1905년에는 '기도동맹'이란 말이 빠지고, '교회'란 말이 삽입되고 동시에 '사도적'이란 말이 첨가되었다. 이것은 교회조직의 형태는 받아들이되, 기성교회와는 다른 새로운 조직, 즉 신약성서에 나타난바 원시 사도교회의 환원 내지 회복을 설립목적으로 지향함을 보여준다. 따라서 만국사도성결연맹은 기존 교회의 교권주의를 배격한 기성교회를 갱신하는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추구하고 있다. 만국사도성결연맹(1902)과 만국사도성결연맹과 교회(1905)의 헌법은 만국성결연맹이 사도들과 초대교회가 예시한 대로 성서적 성결과 세계선교가 온전한 복음(Full Gospel)의 가르침에 필수적인 것으로 믿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크고 주요한 목적이 죄인의 회심과 신자들의 성화에 있다 하더라도 신약성서의 주제인 신유와 전천년적인 그리스도의 재림, 세계선교를 그들의 중요 강조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동양선교회는 만국사도성결연맹의 목적을 그대로 채택하여, 만국사도성결연맹의 설립목적을 그대로 표방하는 교리적 종속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단지 차이가 있다면 만국사도성결연맹을 동양선교회로 바꾼 것뿐이다. 만국사도성결연맹은 18세기 웨슬레의 성화론과 다르게 성결(성화)은 성령의 능력 즉, 성령세례로 이루어진다는 19세기 말 웨슬레안 성결론을 주장하였는데 만국사도성결연맹의 특징이 동양선교회 또한 동경성서학원의 주요한 강조점으로 일치되고 있다. 1914년 만국사도성결연맹 및 교회의 헌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성결을 정의하고 있다:

온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세례이다. 이것은 순간적 경험(instantaneous experience)이며, 신앙에 의해 받는다. 모든 죄로부터 정결케 하며, 그 사람을 성별하고, 부르신 뜻을 완수하기 위한 능력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동양선교회가 만국사도성결연맹의 설립목적에서처럼 신학사상에 있어서도 모두 만국사도성결연맹의 신조를 그대로 표방하고 있지는 않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1925년경에 동양선교회의 교리신조는 16조항으로 구성되었는데, 1910년 만국사도성결연맹과 교회의 헌장에는 동양선교회보다 한 개 조항이 많은 신앙신조 17조로 나타난다. 제16조 세례(Baptism)에서 만국성결연맹과 교회는 "수세의 방법에 대해 어떤 확정된 방법을 강요할 수 없고, 유아세례를 교회에서 계속 유지해야 할 것"으로 언급하였다.

그러나 동양선교회는 제12조 세례(Baptism)에서 세례의 형식은 성경에 따라 침수례(Immersion)를 행하여 함을 말하는 차이점을 보이고 있고, 유아세례를 받아들이고 있지 않는 한국성결교회와의 판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같은 동양선교회의 교리적 강조점은 초기 한국성결교회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Ⅳ. 동양선교회와 기독교 연합선교회(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동양선교회와 기독교 연합선교회와의 관계는 앞서 살펴본 만국성결교회보다 그 비중이 작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기관의 상호관계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동양선교회는 19세기 말 성결운동의 영향을 만국성결교회뿐만 아니라, 성결운동의 하나로 분류되는 기독교 연합선교회로 부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양선교회를 만국성결교회와의 관계로만 보려는 시도나, 이와 달리 기독교 연합선교회와의 관계로만 보려는 단편적인 시각은 동양선교회의 신학적 유산에 대한 총체적인 바른 평가가 아니다. 단적으로, 동양선교회가 표방하는 16개 신앙신조는 멀리는 웨슬레안 25개 신조(1784년)를 그리고, 가까이는 만국성결교회 신조(1914년)를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표방하고 있지 않는 다른 부분들도 있기 때문이다.


1. 심프슨(A. B. Simpson)과 기독교 연합선교회

알버트 심프슨(Albert B. Simpson)은 1843년 12월 15일에 카나다의 프린스 에드워드(Prince Edward) 섬의 베이뷰(Bayview)에서 태어났다. 제임스 심프슨(James Simpson)의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난 심프슨(A. B. Simpson)은 유아 때부터 장로교회의 장로인 부친의 가르침에 따라 청교도적인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고, 죤 게디(John Geddie)로부터 유아세례를 받았다.

심프슨은 목회를 위해 공부하려고 토론토(Toronto)의 낙스(Knox) 대학에 입학하여 1866에 졸업하였다. 그는 대학시절에 유아들은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유아세례 옹호와 또한 세례는 침수례가 아닌 관수례의 약례를 받아야 한다는 논문을 썼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심프슨은 토론토에 사는 마가렛 헨리(Margaret L. Henry)와 결혼하였고, 캐나다(Canada)에서 두 번째로 큰 낙스(Knox) 장로교회의 목회자로 부임하여 8년간 사역 중에 큰 교회부흥을 일으켰다. 그러나, 캐나다(Canada)의 추운 기후로 인해 그의 건강이 약화되자, 주위의 권면에 따라 켄터키(Kentucky)주의 루이빌(Louisville)에 있는 체스트너트 가(Chestnut Street) 장로교회로 그의 사역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곳에서의 목회는 1874년에 시작되어 6년간 계속되었다. 미국에서의 목회사역기간에 그는 신학교 시절에 배웠던 엄격하고 폐쇄적인 구조의 몇 가지 칼빈주의적인 가르침에 대하여 재고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을 갈망하며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중에 전국을 누비며 대 캠페인을 벌이던 복음전도팀 휘틀(Major Whittle)과 그의 복음송 가수인 블리스(R. P. Bliss)를 만나 교제하게 되었다. 이들과의 만남 이후 심프슨은 처음으로 종교적 각성과 함께 대중전도를 지향하게 되었다. 심프슨은 루이빌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 지역의 소외된 자들의 대중전도의 필요성을 인지할 뿐만 아니라 세계선교에 대한 비젼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는 이곳에서 성결의 체험을 가졌는데, 그는 죄의 시각에 대한 또 다른 깊은 경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성결케 시켜 주는 분으로 믿음으로써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때는 중생을 경험한지 15년이 되는 해이었다.

이후 그는 1880년에 뉴욕으로부터 초청이 왔다. 버챠드(Burchard)박사가 '13번가 교회(Thirteenth Street Church)'를 사직하자, 그 교회 제직들은 심프슨(A. B. Simpson)을 그의 후임자로 확신하여 그를 청빙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뉴욕에 와서 The Gospel in All Lands라는 선교잡지를 출간하였다.

뉴욕에서의 목회사역에도 불구하고 직접 심프슨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소외된 대중들이었다. 그는 대중복음전도를 위해서는 전통적인 틀에서 탈피하여 신앙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함을 깨닫고, 2년 후에 자진하여 사임하였다. 심프슨이 '13번가 교회'를 사직한 배경은 몇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소외되고 버림받은 빈민층 대중에 대한 복음전도의 책임감의 발동이었다. 둘째는, 올드 오챠드(Old Orchard)의 신유의 경험이었다. 토져(A. W. Tozer)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심프슨이 '13번가 장로교회'의 목사직(Pastorate)과 장로교단을 떠나게 된 것은 첫째로 몇 달전의 신유의 경험과 또 다른 하나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침수례에 의한 세례의 교리를 받아들였고 유아세례를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심프슨은 칼빈주의 목회자로서 전과 다르게 신유체험의 강조와 약례 대신 침수례를 주장할 뿐더러,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자신의 행동이 장로교회 교리와 상충되고 대중 복음 전도의 개인적 염원도 교회 제직들과 마찰을 일으키게 될 것을 직감하였다. 결국 1881년 11월 7일에 13번가 장로교회를 사임하였다. 사임 후 몇 주일이 지난 뒤 심프슨은 17명의 창단멤버를 가지고 모임을 조직하고, 44번가 가까이 8번가 동쪽에 위치한 건물에 정착하였는데, 이것이 복음성막(Gospel Tabernacle)의 출발로 이후에 그리스도인과 선교사동맹(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으로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동양선교회 형성에 미친 기독교인과 선교사동맹의 영향

심프슨은 1882년에 성서훈련원(Bible Training School)을 창설하여 후에 나약(Nyack)으로 옮겼는데 이것은 북미 최초의 성서학교였다. 이 성서학교는 심프슨의 선교비젼에서 나온 획기적인 일로서 세계선교를 위한 평신도훈련을 주목적으로 세워졌다. 따라서 성서훈련원은 학력이 다소 떨어지는 복음전파에 대한 선교적 열정이 있는 평신도들을 선발하여 성경에 대한 철저한 교육을 시킨 후에 선교사로 활동하게 하였다. 그는 세계복음화를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시켰다. 주의 재림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는 세계선교 사역의 완수로 생각했다.

따라서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을 받아들인 심프슨은 임박한 종말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은 그로 하여금 전세계에 황급히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선교열정으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기존교파와 달리 기성교인의 확보나 현지 토착교회의 설립방법보다는 선교의 목적을 오로지 직접적인 복음전파 하는 일에 우선을 두었다. 이러한 생각은 심프슨으로 하여금 새로운 교파설립보다는 세계선교에 주력하게 되었고, 그의 주된 사역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전천년 재림을 설교하는 것으로 연관되어졌다. 또한 그는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의 선교원리에 영향을 받아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다'라는 신앙선교(Faith Mission)의 원칙 아래 기독교인 동맹(Christian Alliance)과 복음주의 선교사 동맹(Evangelical Missionary Alliance)을 설립하였다. 신앙선교라는 신앙원칙은 심프슨(A. B. Simpson)의 생애에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도 주었다. 동양선교회도 만국성결교회뿐만 아니라 심프슨의 선교회를 통해서도 그들이 초교파적 노선에 서서 채택하였다. 신앙선교라는 선교원리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것은 동양선교회의 카우만이 심프슨을 통해서 처음으로 신앙선교의 동기와 비젼을 갖게 되었고, 냅(M. W. Knapp)을 통해서는 그것이 실행되도록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과 선교사동맹(C. & M. A.) 와 동양선교회(O. M. S.)와의 관계, 즉 심프슨과 카우만의 최초의 관계는 1894년 시카고(Chicago)의 무디교회(Moody Church)에서 열렸던 선교대회에서 찾을 수 있다. 선교대회의 주 강사는 그리스도인과 선교사동맹(C. & M. A.)의 설립자인 심프슨이었다. 선교 사명자에 대한 초청의 시간에서 카우만 두 부부는 사명의 부름을 받고 선교사로서 헌신할 것을 결단하였다.

3. 동양선교회와 기독교연합선교회와의 신학적 관계

'온전한 복음'이라는 용어는 오순절운동에서 특징적으로 쓰여지는 용어로서 북미 오순절 협회(Pentecostal Fellowship of North America)의 광범위한 교리선언 속에서 일부분이 침잠되어 있는 테마군을 말한다. 구원, 성화(성령세례), 신유, 재림이라는 사중유형의 4가지 테마가 19세기말 성결-오순절운동에서 유래된 교회들로부터 다소간 신학적 차이를 나타내면서도 '온전한 복음(Full Gospel or Whole Gospel)'이라는 용어로 각 교단(교회)들 마다 강조하였다. 이것은 19세기 심프슨(A. B. Simpson)을 통해서 성결-오순절운동의 복잡한 발전과정의 마지막 단계와 정점을 이루게 되었다. 심프슨은 복음성막에서 가진 1890년 3월 대회의 개회식에서, "사중복음(Fourfold Gospel)"이라는 표현이 그에게 영감에 의해서 갖게 되었다고 언급하였다. 심프슨은 1887년 올드 오챠드(Old Orchard) 총회의 첫번째 설교에서 "사중복음(The Fourfold Gospel)"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할 때 처음으로 사중복음이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심프슨에게 사중복음의 중요성은 그의 책을 탐독하거나, 그리고 동맹의 여러 헌법들을 통한 간행물들(1882-1919년)에서 나타난다. 세계선교라는 그리스도인과 선교사동맹의 궁극적 목표에 대한 추구는 사중복음의 증언으로 나타났다.

심프슨은 사중복음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제공하시는 축복을 가장 완전한 방법으로 요약한 것이며, 특별히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이 복음을 강조해야 함을 말한다. 결과적으로 심프슨 박사는 사중복음이라는 표제 아래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시키고, 제시하였지만, 그의 교리적 입장은 완전히 밝히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주요, 성결케 하시는 자요, 치유자이시며, 재림의 왕이 선을 강조하여 가르쳐 주었다. 초기 그리스도인과 선교사동맹 즉, 심프슨의 사중복음은 성서적 성결을 촉진하는 운동과 신유를 가르치는 운동에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전천년설 운동에도 영향을 받았다.


4.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그리스도인과 선교사동맹(C. & M. A.)은 자신의 받은 사상적 영향을 동양선교회에 재현시켰다. 카우만의 선교사 서원 사건 이후에 카우만과 킬보른에 대한 심프슨의 영향력은 커졌고, 이후에 그들 스스로의 강조점으로 나타났다. 그는 힘있게 그리스도의 전천년왕국의 교리를 주창하였고, 동양선교회 설립자들은 그로부터 그 주제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리스도인과 선교사동맹(C. & M. A.)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그리스도인과 선교사동맹의 교리적 입장으로 채택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임박하고, 개인적 일 것이며, 가시적이고, 전천년적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과 선교사동맹의 프로그램은 그것의 목표로서 세계의 개종이 아니고, 복음의 증인으로서 전세계에 도달하는 전천년설적인 것으로 동양선교회도 전천년설 재림론을 받아들여 세계선교를 강조하였고, 또한 복음이 완전히 들어가지 않은 동양지역을 선교대상지역으로 삼았다. 특별히 그리스도인과 선교사동맹가 전천년설을 받아들인 것은 블랙스톤(W. E. Blackstone)을 통하여 영향을 받은 결과이었다. 심프슨은 1886년 여름, 종래의 성결형 천막집회에서 탈피하여 성숙한 삶과 세계선교를 가르치는 하기집회를 올드 오챠드(Old Orchard) 야영지에서 개최했다. 그 때 시카고(Chicago)의 블랙스톤은 성경강사 중의 한사람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전천년설)을 주된 내용으로 피력하였다. 집회 마지막 시간에 그는 전세계 복음 확장과 주의 재림에 대한 상호관계에 대해 설교하였고, 이것은 참석자들과 심프슨을 감동시켜 1887년에 '그리스도인동맹(The Christian Alliance)'과 '복음주의 선교사동맹(Evangelical Missionary Alliance)'을 설립케 하는 중요 요인이 되었다.

동양선교회는 동양선교회와 직접적 관련을 맺은 만국 성결교회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인과 선교사동맹의 전천년설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볼 때 동양선교회는 19세기 초에 영국에서 시작되어 19세기 말에 미국 복음주의 교회에 유행처럼 번진 세대주의라 불리우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배경 아래 영향을 받으며 종말론이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별히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자 중에 앞서 언급한 블랙스톤(Blackstone)은 그리스도인과 선교사동맹 뿐만 아니라, 동양선교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감리교 평신도인 블랙스톤의 종말론에 대한 주저서(主著書)인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Jesus is coming)는 19세기말 수많은 전천년설에 관한 책들 중에서 가장 많이 읽혀졌다. 동양선교회는 일본에서 동경성서학원을 통하여 수양생들을 교육할 때 블랙스톤의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를 창립 초기부터 일본어로 번역하여 왓슨(G. D. Watson)의 책 [백의](White Robes), 힐(A. M. Hill)의 [성결과 능력](Holiness and Power)과 함께 종말론에 대한 교과서 격으로 사용했다. 블랙스톤은 일본에서 카우만이 벌인 마을 대 전도운동을 위하여 경제적인 도움에 대한 요청에 대해서 15,000불을 지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카우만 부인인 레티 카우만(Lettie B. Cowman)이 '宣敎의 戰士, 촬스 카우만의 信仰(二)'의 제목으로 쓴 다음의 글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어느 주일 아침에 시카고에 있는 무듸 敎會에 出席하였는대 거긔서는 토-레이 博士가 그리스도의 再臨에 關하야 講演을 하고 있는 때이였다. 이 前에는 그리스도의 再臨의 信仰이 確實치 못하였다. 저는 그날 福音을 통하야 全世界는 다 그리스도께로 도라와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엇다. 그 때에 얼마나 저가 하나님이 이 眞理를 저에게 가라처 주신 것을 感謝하였는지 알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의 世世에 關한 經綸을 알게 되었는 緣故이다. 곳 世界를 다 悔改시키는 것이 아니고 모든 나라와 族屬 가운대서 救接해 내는 것을 알았다. 그 날부터 聖?은 저에게 對하야 一層 새로운 冊이 되였다. 모르고 잘 알 수 없는 句節이 별안간 알게 되며 靈眠이 열리게 되어 이로부터 오는 새로운 힘이 저의 全生涯를 變更시키게 되었다. 저가 數年 後에 말하기를 [어느 眞理라도 이보다 더 큰 恩惠가 된 것은 나의 生涯를 通하여 없다. ] A. B. 심프슨 博士는 이렇게 말하였다. [ 主의 再臨은 正當하게 믿는 者의 마땅히 할 바는 自身을 이에 對하야 準備하는 것은 勿論이나 복음을 모든 百性에게 宣傳함으로 할 것이다. 하나님은 今日 이 所望을 품고 一大 宣敎 十字軍을 이르키는 者들을 要求하시며 부르신다. 그렇면 이것이 一世代에 效果잇는 結果를 볼 것이며 아니다. 一世紀 內에 볼 수 있을 것이다].

5. 신유

근대 신유운동은 19세기 산물이다. 부흥운동이 휩쓸었을 때, 그와 유사한 운동이 영국과 유럽에서 일어났다. 독일의 부흥운동을 이끈 자는 신유운동으로 여러 나라에 명성이 알려진 블룸하트(Johann Chrostoph Blumhardt)이다. 예수는 죄뿐만 아니라 육신의 질병까지도 승리하셨다는 블룸하르트(Blumhardt)의 신유사상은 독일에서 강력해졌고, 심프슨은 블룸하르트의 사역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세기말에는 심프슨은 자연스럽게 컬리스(Cullis)와 보드만(W. E. Boardman) 또한 고든(A. J. Gorden)과 함께 신유운동의 지도자로서 활발히 활약하게 되었다. 심프슨은 뉴욕(New York)에서 두 번째로 목회를 하며 건강악화로 인해 잠시 올드 오챠드(Old Orchard)로 휴양차 내려갔다. 그는 그 곳에 있는 동안 신유의 가르침을 듣게 되었다.

심프슨 가족이 인기 있는 해변휴양지의 하나인 메인(Maine) 주의 올드 오챠드로 휴양하러 간 때는 1881년 7월말이나 또는 8월초로, 마침 그곳에는 보스톤(Boston)의 의사인 컬리스(Charles Cullis)박사가 집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심프슨(Simpson)은 컬리스(Cullis)박사의 올드 오챠드(Old Orchard) 신유예배에 참석하였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신유에 대한 간증을 듣게 되었다. 컬리스(Cullis)는 성서연구를 통해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치유하시고, 교회는 신유목회를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심프슨은 신유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심프슨은 주님께 그 문제를 의뢰했고, 성경에서 그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그가 숲 속에서 하나님의 영은 말씀 가운데 그에게 신유의 진리에 분명한 확신을 주었고, 그 순간 자신의 육체의 질병이 치유되는 신유의 체험을 갖게 되었다.

심프슨의 신유 은혜체험은 신유은사는 사도시대로 종결되었다는 장로교단의 교리와 상충될 뿐만 아니라 이 일은 은혜를 체험한 1881년말 동역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고, '13번가 장로교회'를 사임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그는 형식적이고 진부한 장로교목회를 떠나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에 모든 것을 맡기는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였다. 심프슨은 신유가 강조되기를 원하였다. 그는 신유에 있어서 믿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라는 것을 가르쳤다. 만일 질병이 인간의 타락으로 온다면 그것은 구원자에 의해 원상태가 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며, 그것의 결론을 이사야서 53:4, 5, 마태복음 8:17, 시편 103:2, 3, 출애굽기 15:25, 26과 같은 성경구절들로부터 이끌어 냈다.

따라서 심프슨(Simpson)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중심으로 신유론을 주장하며,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죄와 질병이 이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사죄와 신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신유의 가능성을 주어졌음을 말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심프슨(Simpson)의 신유론은 초기 동양선교회 창립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여기에 대해 동양선교회의 초기역사를 기록한 우드(R. D. Wood)는 동양선교회와 창설자인 카우만이 심프슨에게 받은 영향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A. B. Simpson의 신유에 대한 강조는 Charles Cowman과 동양선교회에 깊은 감명을 가져다 주었다. 심프슨은 신유를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에 대해서도 완전한 구세주가 되시려는 주님의 의도의 지시로서 간주하였다. 1919년 그가 Los Angeles에 머물며 카우만은 전혀 깨닫지 못했던 "The Bible Readings on Divine Healing or Studies from the Scriptures"를 출판하기 위해 준비했다. 그는 요한 3서 2장을 본문으로써 정했다. 그가 자신의 상태 때문에 도움을 얻기 위한 훈련으로서 연구를 했다는 것은 서론에 잘 나와 있다. 카우만은 회개와 신앙에 기초를 둔 속죄 가운데 신유의 준비를 발견하였고, 그의 질병은 과로로 인해서 주어졌다는 자신의 믿음을 반복하였다.

동양선교회는 치유를 위한 신적 공급의 장소를 계속해서 만들었다. 최근에 시행된 신유예배들은 연례 국제회의의 한 부분이 되었다.


6. 침례시행과 유아세례 반대

심프슨은 세 번째 목회지인 뉴욕(New York)에서 사역을 할 때 건강이 악화될뿐만 아니라, 교리적으로도 커다란 고투에 빠져 들어갔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는 그에게 침수례에 의한 세례가 성서적인 방법임을 확신시켜 주었다. 그는 뉴욕(New York)의 침례교 목사를 찾아가서 침수례에 의한 세례를 받았다. 심프슨은 침수례가 성경적인 방법이라는 놀라운 발견 이후에, 그 자신이 침례를 받고나자 장로교회의 법에서 요구하는 유아세례가 무용한 것을 깨닫고 유아세례를 반대하여 더 이상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이같은 일은 그가 '13번가 장로교회'뿐만 아니라 장로교단을 영원히 떠나 독립사역을 하게 되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였다. 동양선교회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만국성결교회와의 교리적 상이성'에서 신조에 나타난바 동양선교회는 침례를 강조하고 있다. 더구나 초기 한국성결교회에서는 약례 대신 침수례를 강조하고, 유아세례를 인정치 않고 대신 헌아식을 실행하였다. 만국성결교회는 침수례의 언급없이 특별한 수세방법을 강조하지 않고 유아세례를 고교회(High Church)적인 성례전 이해를 바탕으로 한 영국성공회와 웨슬리(J. Wesley)도 따라서 유아세례를 시행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고 있다.

동양선교회는 19세기 성결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만국성결교회와 동일하게 '성령 세례를 통해' 부패성의 제거, 즉 원죄로부터의 정결하게 씻음과 성별(聖別)되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능력받음으로 성결을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장로교 개혁주의 전통에서 처음으로 나온 성결교파인 기독교인과 선교사동맹(C. & M. A.)은 성결을 이와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심프슨은 성결에 대한 정의를 동일한 경험의 다른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하여 성결과 그리스도의 임재나 성령의 내주로 설명한다. 그는 성화를 인간자신의 향상이나 완전이 아닌 신적 거룩함으로 가르쳤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때 심프슨은 그의 책 [사중복음]에서 "성결(Sanctification)"을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 성결은 죄로부터의 분리(Separation from sin)이다.

2. 성결은, 또한 하나님께 대한 헌신(dedication)을 의미한다.

3. 성결은 하나님의 형상(the likeness of God)과의 일치함을 포함한다.

4. 성결은, 또한 하나님의 형상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의 뜻에 일치함을 의미한다.

5. 성결은 사랑, 하나님과 온 인류에 대한 지고한 사랑을 의미한다.

이러한 성결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속죄와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로서 받을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심프슨은 육을 억압함으로써 성령충만이 가능하다는 장로교계통의 케직파의 억압설론자들(Suppressionists)이나, 성령세례를 통한 원죄의 씻음을 가르치는 동양선교회의 제거설론자(Eradicationists)과는 다른 입장에서 예수의 인격적 내주를 통해 성결을 받을 수 있음을 가르쳤다. 또한 재림에 있어서도 심프슨의 재림사상은 동양선교회와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심픈이 환란전휴거를 내용으로 하는 전천년설을 강조하였으나 동양성교회가 주장하는 미래적 전천년설을 말하지 않고 역사주의적 전천년설을 따를뿐 아니라 7년대환난의 기간을 인정하지 않는 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Ⅴ. 한국성결교회와 사중복음

한국성결교회는 그 출발부터 사중복음의 고조(高調)에 그 특징을 두어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중복음의 고조는 인위적이며, 사변적인 교리의 틀이 아닌 성서에 근간되는 순수한 진리에 대한 고조로 달리 말할 수 있다. 이 소박한 성서적인 초기 전도표제(傳道標題)인 사중복음은 복음전도관시대인 당시 한국사회의 상황에 적절한 순복음이 되었고, 성결교회의 대명사로서 인식되어 그 특색이 지어졌다. 따라서 복음의 단순한 근본적 진리인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의 내용은 한국성결교회 초기교리 가운데 중추적인 교리로서 반영되어 나타나 있다:

우리의 第一은 目的은 罪人으로 重生하게 하고, 重生한 자로 聖潔케 하되 또한 神癒의 權能을 나타내며 再臨하샤 千年王國을 建設하실 것과 全世界에 福音을 傳한 일을 가라칠 것이니라.

초기 한국성결교회가 가르친 사중복음의 내용은 1925년 킬보른이 출간한 [東洋宣敎會 聖潔敎會 敎理及 條例]의 '第 3章 信仰個條'에서 중생, 성결, 신유, 재림으로 초기 성결교회의 교리적 강조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중생 - 第七節 稱義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올타함을 엇는 것은 우리의 善行과 功勞로는 엇을 수 업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功勞와 우리의 信仰으로 말미암아 義롭다 하심을 엇나니 이것이 明白한 敎理도 되고 마암에 眞正한 安心도 엇나니라(롬 1:17, 3:26, 4:25, 창 15:6, 롬 3:28, 4:5, 5:1, 4:6, 5:11, 16, 행 13:39, 롬 1:16)

성결 - 第八節 聖潔

完全한 성결이라 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聖神의 洗禮를 밧음이나 卽, 거듭난 後에 신앙으로 瞬間에 밧을 ?驗이니라. 또한 完全한 聖潔은 原罪에서 淨潔하게 씻슴과 그 사람을 聖別하야 하나님의 聖旨를 일울 能力을 주심이니라(고전 1:3, 살전 5:23, 히 13:12, 요 17:17, 20, 벧전 1:2, 롬 15:16, 행 2:1-4, 요일 1:9, 눅 24:49)

신유 - 第十四節 神癒

聖?에 病을 곳치는 敎理가 記載되여 잇슴은 윌가 밋는 바라. 마가 16장 17-18절과 야고보 5장 14-15절의 말상대로 하나님의 子女들이 信仰으로 祈禱하야 病고침을 밧을 特權이 잇나니라. 그러나 이대로 하지 못하고 匡藥을 의지하는 者에게 對하야 批評도 하지 말지니라(악 5:16, 행 4:10, 마 10:8, 눅 9:2, 10:9, 막 16:15-18, 고전 12:9, 28, 4:14, 요 9:1-34, 마 8:16-17).

재림 - 第十五節 再臨

주께서 肉?를 가지시고 親히 千年時代前에 再臨하실 일이 切迫함을 우리가 밋노니 主께서 恩치 아니한 時에 空中에 오시기는 聖徒들을 仰接하실 일과 그 聖徒들과 갓치 地上에 臨하실 일을 區別할지니라. 또한 地上에 臨하시기 前에 이스라엘人들이 一處에 會集되고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난 後에 오셔서 千年王國을 建設하시나니라(행 1:9-11, 살전 4:14-17, 마 2:27, 25:13, 26:29, 묵 22:12, 20:4, 겔 36:24, 37:27-28, 살후 2:8-10, 묵 19:20).


Ⅵ. 닫는말

감리교회와는 달리 성결교회는 세례항목에서 침례(침수례와 약례중 선택, 그러나 초기는 침례)가 강조되어 있고, 교회의 예식항목에 신유가 첨가되어 있고, 감리교회에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전천년적 재림이 첨가되었고 의인항목에는 중생(구원)이 첨가되어 있다. 감리교회와 다른 이질적인 이같은 내용들은 19세기 말 미국의 성결운동의 영향을 받은 '만국성결연맹과 기도동맹'과 '기독교 연합선교회(또는, 그리스도인과 선교사동맹)'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이 중에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으로 한국성결교회가 강조하는 4중복음, 중생, 성결, 신유, 재림 가운데 특별히 신유와 재림 또한 침례가 첨가된 것이다. 따라서 한국성결교회의 신학은 웨슬레 부흥운동에 영향을 받은 19세기 말의 미국 웨슬레안 성결운동의 반영의 결과로 생겨난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조종남 교수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 최근 그의 논문에서 "성결교회의 신학은 미국의 만국성결운동을 통하여 전수된 복음주의적인 웨슬레 신학계통"이라고 말하고 있다.

강근환 교수는 이에 대해, 한국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과 전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基督敎大韓聖潔敎會의 神學的 傳統은 東洋宣敎會와 美國의 聖潔運動을 통한 Wesleyan Arminian 福音主義的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이라고 할 것이다.

한국성결교회의 신학적 정체성 규명에 대한 연구로 지금까지의 요한 웨슬레 신학 편중자세나 아니면 심프슨의 기독교연합선교회를 또한 사중복음의 유래강조, 또한 이와는 달리 만국성결연맹 및 기독동맹의 시각에서만 해석하는 신학작업의 자세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한국성결교회의 신학적 정통이 위에 언급한 어느 한 단선적인 근원에서만 출발하거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국성결교회 신학은 복음주의적인 웨슬레 신학의 맥락에 선 신학적 전통을 가진 19세기말 미국성결운동이(주로 만국성결연맹과 기도동맹 또한 기독교 연합선교회) 동양선교회를 통해 반영되고 전수된 신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