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


이상직(호서대학교 교수)

 

1. 들어가는 말

바르트의 견해에 의하면 전체 교의학의 체계에 있어서 삼위일체론은 "결정적이고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KD I/1, 319). 삼위일체론이야말로 기독교 신관을 가장 기독교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기독교의 계시개념을 가장 잘 드러낸다(KD I/1, 318)고 바르트는 본 것이다. 삼위일체론은 교회사를 통하여 기독교의 신관의 독특성을 보존하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와 본질에 대해서 명확히 하는데 있었다. 특히 바르트에 있어서 교의학의 출발점은 어떤 하나의 도그마들이 아니라 계시 곧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신다는 순수한 사실이다. 그의 출발점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이 말씀이 인간에게 들려온다는 현실성에 있으며, 이 말씀이 삼위일체의 주제를 가능하게 한다.

윌리암스(R. D. Williams)에 의하면 "바르트는 20세기의 교의학자들 가운데서 삼위일체교리를 신학 전체를 위한 초석으로 제시하려고 했던 거의 유일한 독보적 신학자였다."1) 다소 과장 섞인 판단이긴 하지만 적어도 삼위일체교리에 대한 20세기 신학자들의 새로운 관심은 바르트의 영향으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2) 삼위일체교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 이유와 삼위일체교리의 내용에 대해서는 뒤의 부분에서 밝히기로 하고 19세기에 있었던 삼위일체론에 대한 학자들의 논의의 추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위일체론은 쉴라이에르마허와 19세기의 도덕적 신학 이후 아무 의미도 없는 신학적 사변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어왔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신앙의 실제적이고 도덕적인 요소를 강조하면서 "우리는 삼위일체 이론으로부터, 문자 그대로 취한다면, 아무런 실제적인 것도 얻을 수 없다"라고 언급하였다.3) 또한 신학자 쉴라이에르마허는 그의 저서인 「신앙론」에서 삼위일체론을 뒷부분의 첨가부분으로 다루면서 "삼위일체론 자체는 기독교적 자기의식에 대한 직접적 진술은 아니며 이와 같은 진술들의 결합에 불과하다"4)라고 말한다.

계몽신학에서 불신 당한 삼위일체론은 뜻밖에 관념주의에서 새로운 활기를 얻게 된다. 헤겔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자기 객관화 혹은 정신의 지적실현으로 본다. 헤겔주의의 열쇠는 '이성, 진리, 개념, 사유, 정신, 하나님 자신'을 '사건, 생, 운동, 과정'으로 다루는데 있다. 그런데 헤겔에 따르면 진리의 이해는 언제나 역사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역사적 이해만이 진리의 운동을 포착하며 끊임없는 과정들 속에 있는 모순들의 해소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리도 역사의 변증법적 운동에 의해 이해되어야 한다. 절대정신 즉 하나님은 하나 안에 셋인 하나님으로 계시면서 자체 내에 구별이 일어나며 이 구별을 자체 속으로 다시 흡수하는 영원한 과정으로 이해된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학의 범주가 아니라 보편이성의 범주로 자리를 옮겨 헤겔에게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삼위일체론적 신학을 전개하였다. 그는 자신의 방대한 「교회교의학」 제I권에서 서론을 기술한 후에 교의학의 규범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과 삼위일체론을 기술하였다. 바르트가 여기서 강조하는 면은 신학은 교회의 신학,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즉 계시와 그 계시에 대한 증언과 선포는 삼위일체론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신학은 삼위일체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바르트는 부각시키고 있다. 바르트는 19세기 실용적 도덕주의에 의해 소홀히 취급되고 관념적 이성주의에 의해 왜곡된 삼위일체론을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기초한 신학의 중심주제로 부각시켰다. 몰트만의 말처럼 바르트는 "19세기 개신교의 전통에 반대하여 그의 교의학을 변증학적 서론이나 해석학적 기본 규칙들을 쓰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주이시다>라는 기독교적 기본 명제를 이해하기 위한 해석학적 규범이 된다고 생각한 삼위일체론으로부터 시작하였다."5) 이제 삼위일체론의 내용을 살펴보기 위한 전이해로서 계시에 대해 고찰하여 보기로 하자.


Ⅱ. 삼위일체론의 근거로서의 계시


1. 바르트 신학의 방법론적 전제: 인간의 불신의 상황과 계시

틸리히(P. Tillich)의 신학의 방법론은 상관관계적 방법(the method of correlation)이다. 인간은 삶과 죽음 등의 여러 상황 속에서 삶의 본질적 의미를 묻는 실존적 질문에 봉착한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에 대해 신학적인 답변을 추구하는 것이 틸리히가 말하는 신학의 상관관계적 방법이다. 그러나 윙엘(E. Jungel)이 주장한 대로 바르트에 있어서 신학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인간이 신학적으로 물음을 제기하는 것보다 선행한다고 하는 사실이다.6)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성격을 가지신 분으로서 신학의 길을 확립하신다.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말씀하시는 사건이나 사건들의 구조가 신학이 말씀하고 계시하시는 주님의 존재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신학이란 바르트에 있어서 '따라서 생각하기(Nachdenken)'에 의한 진술인바, 계시의 질서를 따라서 사고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빠진 불신의 상황도 실제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진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통찰이다. 인간 스스로가 탕자라는 것을 깨닫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아버지의 집을 회상하는 아들일 때에만 가능하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인간 스스로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가능성만이 남게 된다. 계시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할 수 없는 죄인인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동을 말한다.7) 삼위일체론은 하나의 해석이다. 즉 신앙으로 수용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에 대한 필연적 해석이다. 이 해석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문법적이고 합리적인 해석8)을 배제하고 오직 성경의 증거아래 깔려있는 사건에서 말씀하시기로 선택하신 그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 계시에 대한 해석이다.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삼위일체론적으로 답변하도록 하는 말씀이다(KD I/1, 303).

2. 삼위일체론의 근거

바르트에게 있어서 계시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운동이며, 그것은 세 가지 형식을 취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론이라는 제목 밑에 하나님의 말씀을 세 가지 형식인 계시된 말씀, 기록된 말씀, 그리고 선포된 말씀으로 나누고 자신의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신학임을 밝힌다.

계시된 말씀은 원초적 계시의 사건으로 곧 성육신을 통한 말씀의 진술이다. 성경은 기록된 말씀으로서 이 원초적인 계시 사건에 대한 회상이 들어 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말씀은 원초적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요, 증거요, 선포요, 설교이다. 성경의 권위는 원초적인 계시인 하나님의 자유로운 말씀에 준거점을 가지며, 여기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교회의 설교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 안에서 가능한, 하나님의 자기 규정에 근거한 인간의 선포이다. 그리스도와 성경에 충성할 때에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바르트는 이와 같이 계시를 강조함으로서 신학의 인간학적 출발점을 철저히 비판한다. 도덕적 실용성에 근거한 신학, 보편적 이성에 근거한 신학은 우상숭배 내지는 인간의 자기 신격화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르트 신학에 있어서 계시가 신학의 규범 또는 출발점이 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계시는 삼위일체론적 구조를 갖는다. 계시가 삼위일체론적 구조를 갖는다는 것은 계시를 관념적으로, 또는 인간학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해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 자신을 주님으로 계시한다"(KD I/1, 324).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사건은 아버지, 아들, 성령의 삼위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이다. 본질상 인간에게 드러내어 질 수 없는 하나님이 스스로를 자신의 자유 가운데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시하신다. 바로 이런 점에서 삼위일체론의 근거와 뿌리는 계시에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하여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스스로를 삼위일체로 계시하시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물론 성경이 직접적으로 삼위일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삼위일체론은 교회가 가진 "신앙의 문서"이며 그런 한에서 "단지 간접적으로 계시 자체의 한 문서이다"(KD I/1, 325).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은 성경의 본문을 반복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에 의하면 삼위일체론적 해석은 "성경의 적절한 해석"이다(KD I/1, 327). 비록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증언과 삼위일체 교리 자체를 혼동할 수 는 없으나, 성경의 이 증언이 바르게 이해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의 교리는 불가피하다. 이 점에서 삼위일체론은 성경적 타당성을 갖는다.

둘째로, 삼위일체론은 계시에 대한 인간의 해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해석"이기도 하다(KD I/1, 328,329).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이 누구이신 가를 우리가 알도록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방식이다.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삼위일체론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하나님 자신의 삼위일체론적 계시의 해석이다.

자신을 삼위일체론적으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은 우리에게 다음의 세 가지 질문들을 불러일으킨다; 1)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2) "이 하나님은 어떤 행동을 하시는가?"; 3) "이 하나님은 어떤 결과를 일으키시는가?"(KD I/1, 319) 다시 말하면 계시자, 계시, 계시의 작용에 대한 세 가지 질문으로 요약된다. 삼위일체론의 과제는 바로 이 질문들에 대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질문들이 제기하는 계시의 삼위일체적 특성을 해명하는 일이야말로 교의학에 있어서 중요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은 자신을 삼위일체로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통하여 자기를 계시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계시한다. 만일 우리가 계시를 정말 그의 주체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이해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다음의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즉 계시의 주체이신 하나님, 곧 계시자는 계시에 있어서 그의 계시하시는 행동과 동일하며 또한 이 행위의 결과와도 동일하다는 것이다"(KD I/1, 312). 이것을 다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성경에 따르면 계시는 그 본질상 인간에게 드러내어 질 수 없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대한 그 자신의 드러내심(Selbstenthullung)을 뜻한다. 숨겨진 하나님이 자신을 눈에 보이게 드러내심으로 그 자신이 아닌 것의 형태로 다시 한번 하나님이 되신다. 하나님은 자기자신과 다르게 되면서도 자기자신으로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다른 자아(his own alter ego)가 되심으로 자신이 무엇이며 누구인지 우리에게 해명하신다. 즉 아버지 하나님인 동시에 아들 하나님으로 존재하여 바로 이 아들의 신분이 그의 계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임을 드러낸다(KD I/1, 338).

둘째는, 하나님의 은폐성(Deus absconditus)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면서도 언제나 숨어 계신다. 신성의 비밀은 감추어져 있다. 드러내면서도 감추시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전적으로 파악될 수 없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우리 인간과 절대적으로 독립해 계심을 나타내시고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의 주되심을 나타내신다(KD I/1, 307). 아들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파악으로부터 자신을 감추신다.

셋째는, 하나님의 계시의 전달(Mitteilung)이다. 계시는 인간에게 자연 안에서 보편적으로 전달되지 않고 구체적 인간들에 대하여 구체적 사건으로 전달된다.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계시가 역사를 설명하기 위한 범주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오히려 역사가 계시를 설명하는 범주 가운데 하나이다(KD I/1, 146,147). 역사 자체는 계시가 될 수 없다. 그것은 헤겔적인 생각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의 신성을 보장하시면서, 세상적인 사건이라는 불확실한 매체를 통하여 인간을 기적적으로 붙잡으셔서 이 인간을 신적인 존재의 유일한 참된 사건으로 인도하신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성령 하나님의 전달의 방식이다.

3. 삼위일체론의 흔적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존재의 유비를 거부한다. 따라서 어거스틴 이후 피조물의 세계의 구조가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구조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 삼위일체의 흔적(Vestigium trinitatis)의 교리를 바르트는 거부한다. 본래 삼위일체의 흔적에 대한 교부들의 동기는 이 세계로부터 삼위일체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삼위일체로부터 설명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부들의 의도는 차츰 망각되고 인간의 이성이 가지고 있는 계시의 성격이 강조 주장되었다. 인간의 자기 의식이나 다른 피조물로부터 삼위일체를 연역하고 근거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 안에 내재하고 있는 삼위일체에 대하여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헤겔). 이러한 신학적 조류는 결국 신을 인간 자신의 총괄개념, 가장 완전한 원리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성경적 삼위일체관과는 다른 것이다(KD I/1, 361).

그런데 바르트에 의하면, 피조물 가운데 "한 참된 삼위일체의 흔적"이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나타나있다. "참된 삼위일체의 흔적은 계시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취하여진 형태이다"(KD I/1, 359).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그 자신의 흔적을 취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 하나님의 삼위일체가 나타나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만이 삼위일체론의 뿌리이다. "이 흔적은 명확하고 신빙성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라고 불릴 만한 하나님의 흔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말 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의미에 있어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흔적이다"(KD I/1, 367).

Ⅲ. 하나님의 삼위일체

1. 삼위의 일체성과 일체의 삼위성


바르트는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기독교적 일신론"(KD I/1, 371)이라고 언명한다. 삼위일체가 삼신론 즉 세 신들의 교리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고, 반대로 인격들 사이의 구분을 흐리게 하는 양태론을 방지하는데 바르트의 주안점이 주어진다.

바르트에 의하면 아버지, 아들, 성령은 세 가지 신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삼위는 하나님의 본체에 있어서의 다양한 신성이나, 한 신성 안에 많은 개체들이 있다는 의미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KD I/1, 369). 삼위의 일체성은 "세 번의 반복 가운데서 단 한 분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바르트는 삼위에 대하여 "인격"이란 개념 대신 "반복"이란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삼위의 일체성을 여러 종류의 인격이 가진 일체성 즉 "류의 일체성 혹은 하나의 단순한 집합적 일체성의 표상을 피하고 세 인격들의 본질의 수적인 일체성의 진리를 강조하는데 그 의도가 있다.

바르트는 삼위의 일체성과 더불어 동시에 일체의 삼위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 구분 혹은 질서가 있으며, 이 구분 혹은 질서는 세 인격들의 구분 내지 질서이다(KD I/1, 374). 바르트는 여기서 인격이라는 개념 대신 존재양식이라는 개념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인격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페르소나는 가면 또는 신분이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종종 첫 번째의 뜻인 세 가지 가면으로 인격이라는 의미를 오해하기도 했기 때문이다.9) 가면들 뒤에 있는 한 인격을 포함하면 4인격이 될 우려가 있으며, 이단적인 삼위일체론인 양태론에 결국 빠지게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세 가지 존재양식 즉 아버지의 양식, 아들의 양식, 성령의 양식은 서로 혼동되거나 혼합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 가지 존재양식으로 존재한다고 해서 세 하나님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모든 세 가지 존재양식 안에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 안에 계시며 세계와 인간에 대하여 단 한 분 하나님이시다"(KD I/1, 380).

2. 경세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전통적으로 많은 학자들은 삼위일체론을 경세적 삼위일체론(Economic Trinity)과 내재적 삼위일체론(Immanent Trinity)으로 나누어 논해왔다. 바르트도 이러한 분류를 받아들인다. 경세적 삼위일체란 밖을 향한 하나님의 활동 즉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활동을 통해서 나타난 우리를 위한 삼위일체를 말한다. 내재적 삼위일체란 내적 인격들의 본질적인 관계를 말한다. 이 두 가지 길을 택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자유에 속한다. 바르트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강조한다.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존재는 동시에 인정되어야 한다.

밖을 향한 하나님의 활동은 "그의 모든 세 가지 존재양식 안에서 동시에 그리고 공동으로 일어나는 단 하나의 행위이다"(KD I/1, 395). 하나님은 삼위일체적으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신다. 계시자, 계시, 계시의 결과로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창조자, 화해자, 구원자로서 자신을 표현하신다. 이 활동은 한 하나님의 하나의 활동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에게는 내적 인격들의 본질적 관계가 있다. 하나님은 내재적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존재한다.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의 세 존재양식과 하나님의 활동에 있어서의 세 존재양식은 상호 상응관계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내적 본질은 언제나 인간으로서 파악 불가능한 요소가 있으며, 경륜적 삼위일체의 근거로서 내지적 삼위일체를 밝히는 데는 인식적 확실성보다는 계속적인 신앙과 경외와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3. 종속론과 양태론에 대한 비판

"세 번의 반복 가운데서 단 한 분의 하나님"이라는 바르트의 삼위일체 교리는 전통적인 이단설인 종속론과 양태론을 극복하기 위한 의도를 나타내고 있었다. 종속론에 의하면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와 동등 되지 아니한 중간자 또는 첫 번째 피조물 등으로 묘사된다. 양자론적 종속론, 사모사타의 바울, 아리안주의는 종속론의 대표적 이론들이었다. 종속론에 반대하여 바르트는 아버지, 아들, 성령은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주장했다(KD I/1, 402).

종속론과 마찬가지로 양태론도 이단사상이다. 종속론이 그리스도를 성부에 종속시킨다면, 양태론은 한 하나님 안으로 삼위의 구별을 폐기 시켜 버린다. 성부 수난설, 사벨리우스의 양태론 등이 있다. 사벨리우스에 의하면 한 하나님 자신은 구분될 수 없고 전달될 수도 없고 인식될 수도 없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는 세 가지 이름으로 불려 지는 거하심들을 통하여 자기를 인식하게 한다. 바르트는 양태론을 반대하여 인격 즉 페르소나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주의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아들은 아버지가 현현하는 양태론적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 아들, 성령은 한 하나님의 존재양식이다. 그러나 인격이라는 말 대신에 존재양식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서 바르트가 결국 자신이 피하려고 했던 양태론에 빠지게 되었다고 몰트만은 비판하고 있다.

Ⅳ. 삼위의 존재양식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관은 세 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의 통일성이 세 "인격들" 속에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세 인격들은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면서도 각각의 특징적인 성격들을 가지고 있다. 바르트는 이 계시 사건 자체를 부활절, 성(聖)금요일, 및 오순절의 이야기로 생각한다(KD I/1, 332). 이 순서는 성자, 성부, 성령의 순서에 상응한다. 바르트는 경세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구분에 따라 삼위의 존재양식의 특성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1. 경세적 삼위일체에 의한 삼위의 존재양식

1) 창조자로서의 하나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성부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이다. "예수께서 아버지로서 계시하신 분은 인간 예수의 죽음 곧 그의 실존의 끝에서 알려진다"(KD I/1, 406). 성부의 뜻은 인간에 대한 죽음인데, 이것은 인간의 살려는 의지와 정반대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열망과 본성과는 전혀 다른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인간 실존들 위에 계시는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한계상황, 경계선과 동일시하는 인간론적인 계시이해는 하나님의 인간 실존에 대한 주되심을 부인하는 것이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것은 그를 새 인간으로 창조하셔서 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만나시기 위한 것이다. 죽음을 가져오는 분으로서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인간의 죽음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지배하고 전적으로 통치하고 계심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은 또한 죽음을 넘어서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는 생명과 죽음의 주님이시다. 그 분은 우리의 실존을 지탱하시고, 우리 실존의 원천이 되시며, 우리 실존의 자유롭고 자기 충족적인 창조자이시다(CD I/1, 406-8).

2) 화해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계시하신다. 그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 외에 누가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는가?"(KD I/1, 427).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계시한다면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일 수  밖에 없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한다. 그 당시 주변 국가들에서 쓰이던 왕에 대한 칭호로서 쓰이던 "주"라는 칭호는 구약성경의 전통과 사도들의 전통에서는 하나님에게 쓰이던 칭호였다.

그리스도는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파악할 수 없다"는 명제를 파기시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이야기를 하시고, 우리의 간구를 듣고, 우리의 책임을 알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의해 마련된 그와 우리 사이의 사귐의 현실"(KD I/1, 427), 곧 화해를 뜻한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의 적이 아니라 친구로서 그와 사귐을 갖고 교제를 나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의 계시이다.

창조는 인간의 죽음과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하며, 반면에 화해는 인간에 의해 파괴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뜻한다. 인간 예수께서는 그가 행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아버지께 순종하신다. 그의 순종은 죽음에서 나타났으며, 이로 말미암아 예수의 아버지는 삶과 죽음의 주님 즉 창조주로 계시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한다. 인간의 자기 신뢰와 인간의 의지는 죽음이라는 순간 앞에서 철저히 거부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자신의 전 실존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하시는 심판을 알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게 해 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을 통하여 영생으로 인도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부활절은 죽음과 진노의 저편으로 인간들을 인도하여 새로운 생병을 주심으로 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만나시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적대관계를 청산하시고 인간에게 말씀하시며, 이 인간과 사귐을 가진다는 무조건적 기적의 사건이다. 여기에 성부에 의해 창조된 새 삶, 이 세상에 그냥 주신 새 삶이 여기에 있다.

3) 구원자 하나님

성령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확신시키시는 그러한 하나님의 존재양식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와 구별된다. 왜냐하면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하나님의 객관적인 계시가 종결되었으며 완결되었다는 전제 위에서 성령은 발견되기 때문이다(KD I/1, 451). 그러나 성령은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말씀의 영,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다.

성령에 있어 계시의 주관적 측면이 드러난다. 성령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기적적으로 들을 수 있는 가능성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성령은 새로운 계시를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한 계시의 실현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은 구원자이다. 인간이 성부와 성자의 주권에 반응케 된 것은 성령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능하며, 들을 수 없는 인간에게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듣도록 하시는 분은 성령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계시에 참여하여 신앙과 인식과 복종을 할 수 있게 된다. 성령은 우리의 교사가 되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가르치고 인도하신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계시가 현재화 되도록 하게 하는 유일한 능력이요 가능성이다.

지금까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나타난 경세적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경세적 삼위일체는 계시 사건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행동의 삼중적 성격을 확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과제가 있다. 즉 이 구조의 기초를 하나님 안에 두려는 관심이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의 영원한 측면을 각 인격을 다루는 단락 다음에 놓고 있다.

2. 내재적 삼위일체론

바르트에 의하면 밖을 향한 계시의 삼중구조에 상응하여 하나님 안에는 삼중적 구조가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신적 자율의 원리를 적용시켜 나가는 구조라고 볼 수 있다.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상응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삼위일체론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내재적 삼위일체론이 경세적 삼위일체론을 해석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김균진교수는 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르트의 텍스트를 조심스럽게 분석하여 볼 때 바르트는 이 양자를 분리시키고 후자의 근거로 삼고자 하는 의도를 갖지 않았다. 단지 그는 계시의 사건을 이야기할 때 이 사건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내적 가능성을 이야기 할 수밖에 없었고, 이 계시의 사건에서 나타나는 창조자 하나님과 우리의 아버지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이것이 사건화 되기 이전에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내적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10) 하나님 안에서의 내적 가능성은 계시 사건이 계시 사건으로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가능성이다.

1) 영원한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신 것은 계시의 사건 이전 즉 그가 우리의 아버지와 우리의 창조자이시기 이전부터 그의 영원한 존재 안에서 그렇다. "그는 이미 전부터 그리고 자신 안에서 아버지이시요, 창조자이시다"(KD I/1,412).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간의 실존이 창조자와 주님으로 계시하실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그 이전부터 그리고 그 자신 안에서 이미 아버지요, 근원자이시며, 이미 자기 자신이 아닌 그 무엇과 자신을 관계 맺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KD I/1,416). 인식론적으로 우리는 계시된 아버지로부터 영원한 아버지로 연역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버지의 자유와 주권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자기 자신이 되시고자 하는 영원한 아버지의 주권적 의지가 바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의 근거요 모든 부성의 근거가 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영원한 아버지는 아들과 성령의 "원인자로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양식"을 뜻한다(KD I/1, 414). 아버지는 스스로 존재하시면서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오고(generatio)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온다(spiratio). 여기서 나온다는 말이 신 플라톤주의적 유출설이나 아들과 성령의 아버지에 대한 종속론의 뜻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양식을 뜻하는 것으로서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진 삼위의 존재하는 방식을 말한다. 삼위 하나님은 자신의 고유한 역할과 인격에 있어서 구별되어 있다(점유). 즉 창조자, 화해자, 구원자로서의 고유한 구별을 각 인격이 점유하고 있다. 반면에 삼위는 내적인 통일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상호 침투하여(순환) 사귐을 갖는다. 아버지 홀로만 창조자 하나님이신 것이 아니라 아들과 성령 역시 아버지와 더불어 창조자이시다. 또한 구속자 하나님이시다(KD I/1, 416-7).

2) 영원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계시 사건을 통하여 비로소 아들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자신 안에서 아들로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를 계시할 수 있고 우리와 아버지를 화해시킬 수 있는 것은 그가 계시와 화해의 사건 이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화해가 그의 신성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성이 계시와 화해를 형성한다(KD I/1, 436-7).

바르트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의 제2조를 주석하면서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버지의 독생자의 존재양식 안에 계심, 선재하는 그리스도, 하나님 안에서의 통일성과 구분을 유지하심,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심, 만물이 그로부터 창조 됨 등에 대한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 바르트는 전통적 교리를 주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선재성, 하나님과의 동질성 등을 강조하고 있다.

3) 영원한 성령

성령의 주된 역사는 인간의 구원에 있으며, 그러므로 성령은 구원자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계시에 있어서 성령의 일은 곧 하나님의 일이라고 분명히 증거한다. 성령은 피조물적인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 아들과 마찬가지로 영원 전부터 존재하는 한 하나님의 존재양식이며, 그러나 아들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아들과 구분되는 한 독립적 존재임을 바르트는 강조한다.

그러나 니케아-콘스탄티노플의 신조를 주석하면서 바르트는 성령의 인격을 다룰 때 아버지와 아들과는 달리 불확실하게 취급하고 있다.11) 성령은 주님으로 불리워 지지만, 형용사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중성으로 호칭된다. 이것은 바르트에게 성령의 존재양식이 '중성적'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특징 지우는 상호관계와는 달리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양식 속에 들어 있는 공통적인 요인으로 취급되고 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귐이다. 이것은 계시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사귐의 행동에 상응한다(KD I/1, 494).

성령은 사귐 즉 사랑이다. 바르트의 설명에 있어서 이 사랑은 두 다른 존재양식의 기능으로 생각되어 진다. 성부와 성지의 공통적 행동이 성령이라면 그의 인격의 측면이 손상되는 것이 아닌가? "비록 아버지와 아들은 인격의 의미에서 불리워 질 수 있으나 성령은 제 삼의 '인격'이라고 불리워 질 수 없다"(KD I/1, 495)는 바르트의 언명에서도 이러한 암시를 얻을 수 있다. 그러면 바르트가 성령이 단순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하여 하나의 독립된 신적 존재양식"(KD I/1, 511)이라고 밝힌 부분은 무엇을 뜻하는가? 바르트는 세 존재양식들 사이의 균형의 유지를 위한 관심을 계속 보이고 있으나, 성령론을 다룰 때 불확실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Ⅴ. 맺는 말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19세기 개신교 신학이 자유주의의 합리적 정신과 도덕주의의 실용적 정신에 의해 등한시되거나 인간의 역사 중심주의로 빠졌던 신학적 풍토를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에 기초한 신학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세상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오만과 스스로 하나님의 지식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교만이다. 바르트의 삼위일체 신관은 이러한 인간의 무지와 교만을 깨뜨리고 이 세상에 찾아오시는 하나님 스스로의 계시의 사건이 모든 신학적 논의의 기초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바르트의 공적은 인간중심주의적, 문화주의적 기독교가 더 이상 오늘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는 것을 웅변해 주고 있다는데 있다.

그러나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에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첫째로, 바르트의 삼위일체신학 내부에 방법론적인 긴장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자유, 즉 주님으로 계시하신 하나님을 한편에서는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삼위일체론의 근거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강조하고 있다. 바로 이점에서 긴장이 발생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유를 강조하는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인간의 죄를 짊어지신 속죄의 죽음을 그 깊이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님의 자유는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한다. 통치와 다스리심, 인간에 대한 심판, 그리고 인간의 절대순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전통적으로 이해된 하나님의 자유이다. 반면에 화해자 그리스도는 인간의 자리에 서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인간의 자리에서 인간을 위해 죽으신 사랑의 주님이시다. 적어도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제1권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고난에의 참여가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다. 제4장에 가서야 이 문제가 심각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즉 자기 자신의 위치를 변경하여 심지어 그리스도안에서 자기 자신과의 모순을 감수하시면서 그 갈등과 모순을 건너오사 타자와 연합하신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제1권에서는 발전이 되지 않고 있다.

몰트만은 그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과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불트만의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는 삼위일체론을 발전시킨다. 몰트만의 성부의 개념에 있어서 성부의 사랑이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었으며, 성자 개념에 있어서 아들의 사랑은 자기의 버림받음과 모든 인간의 버림받음을 자기의 것으로 취하셨으며, 성령의 개념에 있어서는 성령은 십자가의 사랑을 통하여 알려지고 주어진 끝없는 미래로 알려진다. 정죄 받은 하나님, 죽어 가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삼위일체론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즉 이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 받으신 삼판자이신 하나님이시다.

둘째로 고려할 점은 바르트 자신이 비판하고 극복하려고 했던 양태론적 단일군주론에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이 빠지고 있다는 비판이다. 바르트는 세 인격이라는 말 대신에 세 존재양식이라는 언어를 쓰고 있다. 그러나 인격 즉 라틴어 페르소나에는 가면이라는 뜻도 있으나, 신분 또는 어떤 자격을 갖춘 실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면 페르소나라는 말을 쉽게 버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반면에 바르트 자신이 쓰고 있는 존재양식이라는 언어는 세 번의 반복 가운데 있는 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기독교적 일신론의 사상을 강하게 시사한다. 즉 삼위와 일체 가운데서 일체를 더욱 강조하는 신론이라는 오해를 살 수 있다. 몰트만의 비판도 이점에 집중되고 있다.12)

셋째로, 성령에 관한 비판이다. 즉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의 공통적인 관계인 사귐 또는 사랑이라고 하는 바르트의 강조는 전통적으로 성령의 구분된 인격을 강조하고 있는 전통과 충돌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성령을 가리켜 분리된 아버지와 아들을 관계시키는 사랑으로 혹은 통일성으로 이해할 때 성령은 하나의 힘 내지 관계라고 볼 수 있으나 인격이나 주체로 보기 어렵게 된다."13)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제 삼위의 인격이며, 구원자라고 하는 점이 발전적으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교회 교의학」 자체가 성령론이 완성되지 못하고 끝났기 때문에 충분히 검토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넷째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의 해석에 있어서 앞으로의 해석을 위해서 삼위일체의 상호관계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더욱 발전 시켜야 할 것이다. 계시된 진리의 불가항력적 성격과 명령과 순종의 모델과 상호 간의 참여와 사귐의 모델이 균형이 잡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목회 현장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 강조는 인간중심적 교만에 빠진 현대에 대한 심판과 경종을 울려 줄 것이다. 그러나 심판만이 하나님의 본업은 아니다. 사랑과 사귐을 통한 고난에의 동참을 강조하는 삼위일체 신관도 목회 현장에 절실히 요청된다 할 것이다.



1. R. D. Williams, "바르트의 삼위일체 하나님," 「칼 바르트의 신학방법론」 S. W. 싸익스 편, 이형기 역 (서울: 목양사, 1986), 286.
2.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학자들로는 Eberhard Jungel, H. U. von Balthasar, J. Moltmann 등이 있다.
3. I. Kant, Der Streit der Fakultaeten, A. 50.
4. F. Schleiermacher, Glaubenslehre, 170.
5. J. 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김균진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4), 252.
6. E. 윙엘, 「하나님의 존재는 <되어감>속에 있다: 칼 바르트에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책임적으로 말한다는 것」 백철현 역, 바르트 신학연구 씨리즈 2, (서울: 그리스도교신학연구소, 1988), 14.
7. 바르트의 계시론에 있어서 인간학적 전제는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할 수 없다"(homo peccator non capax verbi divini)는 것이며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의 신론적 전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Deus dixit)는 것이다.
8. 바르트는 초기 「기독교 교의학」에서 삼위일체교리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127)라는 명제의 주어, 서술어, 및 목적어를 다루는 것이라고 제안함으로서 삼위일체에 대한 문법적이고 합리적인 구성을 시도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9. 이종성, 「삼위일체론」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1), 291-300.
10. 김균진, 「헤겔과 바르트」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256-7. 몰트만은 바르트가 상응의 개념을 플라톤적으로 사용하여 위로부터 아래로, 안으로부터 밖으로 향하는 개념으로 자신의 신학을 정립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다만 바르트에게서 한가지 예외가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기술할 때이다. 바르트는 이때 아래로부터 위로, 밖으로부터 안으로, 시간으로부터 하나님의 영원으로 소급하여 일어난다. 몰트만은 바르트에게서 예외가 되고 있는 십자가 사건을 삼위일체론의 중심부분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194.
11. R. D. Williams, "바르트의 삼위일체 하나님," 「칼 바르트의 신학방법론」, 252-3. 윌리암스는 성령의 인격을 바르트가 올바로 취급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12.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155.
13. 김균진, 「헤겔과 바르트」, 274.

(참고도서명)


Barth, Karl. Die kirchliche Dogmatik. Bd. I. Zurich: Theologischer Verlag, 1970.
Jungel, E. 「하나님의 존재는 <되어감> 속에 있다: 칼 바르트에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책임적으로 말한다는  것」 백철현 역. 바르트 신학연구 시리즈 2. 서울: 그리스도교 신학연구소, 1988.
Kant, I. Der Streit der Fakultaten.
Moltmann, Jurgen.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Schleiermacher, F. Der Christliche Glaube nach den Grundsatzen der evangelischen Kirche in Zusammenhange dargestellt. Critical edition by Martin Redeker. Berlin: Walter de Guyter, 1960.
Wiiliams, R. D. "바르트의 삼위일체 하나님." 「칼 바르트의 신학방법론」 S. W. 싸익스 편, 이형기역. 서울: 목양사, 1986.
김균진. 「헤겔과 바르트」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이종성. 「삼위일체론」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