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의 신학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1999.10.11/장로회신학대학원 특강)

 

들어가는 말

올해는 칼 바르트가 서거한 지 어언 31년이 된다(1886-1968). 우리 말로 "강산이 세번 바뀌었다" 할 정도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이 지나갔다. 그는 아직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가? 말하고 있다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는 이미 살아 있을 때부터 교부(敎父)라는 명예로운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온 세계로부터 크나큰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들의 명단을 작성할 때, 어거스틴과 아퀴나스, 루터와 칼빈, 슐라이어마허 다음으로 칼 바르트를 열거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맑스와 야스퍼스와 함께 또 하나의 위대한 칼(Karl)인 그를 말하기도 한다.

박사학위를 정식으로 취득하지 않았으면서도 세계의 유수한 15개 이상의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를 받은 인물이라는 것으로써 그의 위대함이 온전히 평가되지는 않을 것이다. 기독교 신학사에서 불후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 그의 미완성 교의학(Kirchliche Dogmatik: 13권)의 어마어마한 분량(9,185쪽)으로도 그의 중요성을 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로 부피가 크고 깨알같은 글자가 많은 이 책의 분량을 일반적인 크기의 책 부피로 계산한다면, 아마도 2-3만쪽은 충분히 될 것이다. 그가 쓴 글의 목록으로도 한 권의 책이 된다.

이런 외형적인 부피만으로도 이미 우리는 바르트의 신학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가를 느끼게 된다. 그의 저서의 분량 앞에 기가 질리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하물며 그의 신학의 깊이와 방대함, 복잡하고 긴 문장표현, 때로는 과격하고 때로는 세밀한 내용적, 구조적 변화를 정확히 추적한다는 것은 어쩌면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하는 일보다도 더 위험하고 무모한 일이 될 지도 모른다. 그러니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듯, 대충 보고들은 몇 마디 말로 "이것이 바르트다"고 말하는 것은 바르트를 모독하고 자신을 우상화하는 짓이다.

하지만 장님이라도 그를 더듬을 권리가 있고, 더욱이 그가 던진 도전을 받아야 할 임무가 우리 앞에 있지 않는가? 길목을 막고 버티어 선 이 거대한 바위를 우리가 감히 지고 갈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피해 갈 수는 없지 않는가? 우리의 연약한 팔로는 도저히 깨뜨려 버릴 순 없다고 하더라도, 바위 틈에 작은 구멍을 내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소중한 파편을 우리가 살 집을 짓는 재료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바르트를 말하지 않고 어찌 현대신학을 논하겠으며, 더욱이 미래의 신학을 논하겠는가?

그런데 현대의 신학자들, 특히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 등을 말하는 사람들이 "바르트의 신학은 이미 낡았다"고 성급히 말하는 것을 가끔 듣곤 한다. 그리고 요즘에는 "바르트의 신학은 포스트모던(현대이후)적 패러다임에 의해 추월당하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과연 그러한지는 차차 밝혀야 할 일이지만, 이들은 대개 바르트 신학이 얼마나 거대한 수원지와 같고 얼마나 장대한 폭포와 같은지 제대로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극복되지 못한 열등감이나 과시적인 우월감 때문에 이런 성급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나도 물론 바르트에 관해 조금 밖에 눈을 뜨지 못한 반(半)장님이다. 그러므로 나도 그를 온전히 알았다고 말할 자격이 없고, 그래서 여러분 앞에 어떤 완벽한 정답을 제시할 능력도 없다. 더욱이 단숨에 고래를 낚아 올릴 도구가 있을 리도 없다. 튀빙엔 대학에서 제출한 나의 박사학위논문(Gestalt und Entwicklung der Ekklesiologie K. Barhts)에서 나는 바르트의 교회론을 중심으로 그의 신학의 구조와 변화를 추적해 보았지만, 지금도 꼭 그리해야 할 필요는 없다. 물론 '교회론'은 그의 신학을 가장 많이 관통하는 실이요, 그래서 아직도 그의 신학을 가장 포괄적으로 꿰맬 수 있는 바늘이다. 하지만 오늘은 '하나님의 나라'와 '역사와 계시'라는 두 관점으로 그의 신학지평을 조금 더 열어 보이려고 한다.

1. 1914년 이전의 바르트

1914년 이전의 바르트는 전적으로 그의 스승들이 물려준 소위 '자유주의 신학'(Liberale Theologie)의 영향 아래 있었다. 사람들은 종종 이 신학을 일컬어 '문화개신교'(Kulturprotestantismus)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신학은 기독교에서 이른바 낡은 형이상학적 교리의 외피를 벗기고, 기독교를 근대의 문화와 종합하려는 의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신학은 문화와 신학, 철학과 신학, 종교와 계시, 역사와 하나님의 나라를 종합하려는 의식 속에 수행되었다. 그리하여 이 신학은 자기 나름대로의 기독교적 경건성을 지닌 채 한 세기 이상 교회와 신학의 심성을 지배했다. 이 신학의 특징은 이 신학의 가장 분명한 대변자라고 일컬어지는 슐라이어마허, 리츨 그리고 헤르만에게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슐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 1768-1834)는 자연적 세계 안에서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 이상(理想)이 문화의 진보 이상과 범인과성(汎因果性)의 메카니즘의 형태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원인성(原因性)은 신의식(神意識)으로 경험되는 절대의존의 감정인 직접적 자의식 속에서 드러난다.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하나님과 인간이 일치되는 것이 인류의 역사의 목표인데, 이 일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범적으로 일어나서 인류에게 파급된다.

리츨(A. Ritschl, 1822-1889)은 기독교를 정신적, 윤리적으로 이해하였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세계 안에서 성장, 진보하며, 이 목표는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 목표로 주어진다. 이 목표는 인간이 최고의 윤리적 공동체 안에서 정신화됨으로써 실현된다. 예수는 윤리적으로 완전한 인류의 원형, 모범으로서 이 세상 안에 이러한 이상을 제시하여 인간 안에서 이 이상을 실현시킨다.

헤르만(W. Herrmann, 1846-1922)은 슐라이어마허와 리츨의 요소를 결합하여, 예수가 인간에게 주는 인상(印象), 인격의 힘, 인격의 상(象)과 같은 경험의 요소와 예수의 의와 사랑의 계명을 종합하였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인격의 힘에 사로잡힌 자들의 의지의 친교, 공동체 위에 세워진 것으로서 인간에게 시작된다.

이러한 현대학파의 충실한 추종자였던 젊은 시절의 바르트는 이들의 가르침에 따라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역사적 현상이나 압도적으로 종교적, 도덕적인 특징을 띤 내적인 체험의 사건으로 보았다. 바르트는 이 신학의 근본사고가 인간중심적인 것이라고 보았고, 스승들로부터 물려받은 학습의 내용을 '종교적 개인주의'와 '역사적 상대주의'라는 공통분모로 요약된다고 보았다.

바르트의 스승들의 신학에서 역사(역사의식, 경건, 도덕, 체험)는 계시의 술어(述語)일 뿐만 아니라 그 주어(主語)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계시는 역사로서 일어날 뿐만 아니라(계시=역사), 역사는 계시로서 나타난다(역사=계시).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 그 자체가 아니라 계시의 모범, 원형이다. 그러므로 계시는 역사 속에서 모형적으로 반복될 수 있다. 그는 구원의 모델이지, 구원자 그 자체는 아니다. 계시는 역사를 통해 중재될 뿐 아니라 역사 그 자체로 나타나며, 인간의 역사는 계몽과 교육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진보, 발전한다.

바르트의 스승들이 구상한 하나님 나라의 이상에 따르면, 인류사의 목표는 완성된 인간성, 도덕성, 이성의 목적을 보편적으로 실현하는 데 있었다. 그들이 꿈꾼 '범종말론적인 꿈'(Paneschatologischer Traum)은 역사에 대한 진보적, 낙관적 이해를 바탕으로 삼고 있었으며, 비록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 나라의 피안성을 인정하고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실현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세계 내의 인간의 가능성에 두고 있었다.

2. 1919년(로마서 주석 제1판) 이후의 바르트

바르트는 점차로 스승들의 신학 가운데서 결점을 발견하기 시작하였다. 그에 의하면, '종교적 개인주의'와 '역사적 상대주의'로 요약되는 스승들의 신학은 인식론적 상대주의(相對主義), 신앙적 복수주의(複數主義), 교회의 실천적 당위성의 결핍이라는 문제점을 낳는다. 자유주의 신학은 특히 이론적, 학문적 기능만을 할뿐이지, 교회로 하여금 공동으로 실천하게 만드는 데 무력하며, 신학자로 하여금 실천에 무능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바르트는 절감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자유주의 신학의 진보적, 낙관적 역사관을 뒤흔든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었다. 칼 바르트는 그 당시의 경험을 스승들의 신학으로부터 결정적으로 결별하게 된 계기로서 술회했다:

그 해(1914년) 8월 초순은 적어도 나에게는 암흑의 날이었다. 93명의 독일 지식인들이 빌헬름 2세의 전쟁선포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지지서명을 발표했는데, 이 지식인들 중에는 이제까지 숭앙해 왔던 신학스승들의 이름(필자주: 하르낙,제베르크, 헤르만 등)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 경악케 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이들의 윤리학과 교의학, 성서해석과 역사관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했고, 더욱이 19세기의 신학은 더 이상 장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점을 절감했다.

스승들의 신학은 서구 문화의 부르즈와적, 제국주의적 발전의 종착역인 제1차 세계대전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전쟁신학으로 귀착되었다. 바르트에게 이 전쟁은 낙관적, 진보적인 역사이해를 계시와 적극적으로 연결시키려던 고리의 파탄을 의미했다. 신학과 철학, 교회와 문화, 신앙과 종교의 동맹 위에 세워진 범종말론적인 꿈은 인간의 망상(妄想)으로 드러났다.

바르트에 따르면, 스승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온갖 인간 경험의 술어, 종교체험의 현상으로 오해하였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자신의 일에 더 몰두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고 하면서 인간적인 말만 늘어놓았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다고 하면서 이것을 새로운 변종의 종교성, 경건, 역사적 현상, 인간성의 현실로 바꾸었다.

이 날 이후로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허구적 자유의 체계와 그 이데올로기의 내적 모순, 붕괴와 더불어 절대적인 하나님, 철저히 이 세계에 대하여 낯설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나라'로의 새로운 부름의 소리를 들었다. 이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를 그는 성서 안에서 발견했는데, 이것은 그의 스승들이 가르쳐 주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진기하고 새로운 세계'였다. 이것은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로부터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상대적, 주관적 입각점(도덕의식, 종교체험, 역사의식)으로부터 절대적, 객관적 입각점(인간과 세계에 대해 주체로서 자유로이 대면해 있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으로 돌파하였다. 그 결과로 바르트는 역사를 계시와 동일시하였던 스승들의 신학체계를 무너뜨리게 되었다. 역사는 계시의 그릇이 아니다. 물론 계시는 여전히 역사로서 오지만(계시=역사), 역사는 더 이상 계시로서 오지 않는다(역사≠계시).

그의 이런 입장변화는 로마서 주석 제1판(1919년)에 잘 드러난다. 여기서 바르트는 특히 블룸하르트(Chr. Blumhardt)와 토비아스 벡(T. Beck) 등의 영향 아래서 진정한 의미의 초월적인 '하나님의 나라'와 그 역사변혁적, 혁명적 특징을 재발견하였다. 이 시대의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까지 존재해 온 제 가능성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전진, 발전이 아니라(자유주의 신학의 진보적, 낙관적 하나님의 나라 이해에 대한 부정), 모든 시대들을 관통하며 모든 시대들의 신적 가능성을 출현시키면서 유기적으로 성장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존의 것을 유지하지도 않고(부르즈아적,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부정), 기존의 것을 파국적으로 끝장내지도 않는다(레닌주의적, 공산주의적 혁명에 대한 부정).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 자신의 나라로서 모든 기존 현실을 통과하면서 모든 신적 성향과 가능성을 실현시키면서 성장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이다. 그 나라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인해 가능해졌고 그의 부활로 인해 현실화되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이 왔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씨앗, 변혁된 자연 법칙의 원리, 새로운 세계의 결정핵, 새로운 인간과 사물의 유기체의 시초와 머리, 새로운 창조의 배아(胚芽)로서 죽음을 통하여 낡은 요소를 받아서 새로운 갱신된 세계를 조성해 낸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과 세상 및 인간 사이에서 상실된 유기적 일치 관계를 회복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재건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혁명으로서 모든 혁명의 혁명이다. 그리고 혁명의 능력은 하나님의 영이다. 이 영은 기존 현실을 파괴하지도 않고 보존하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철저히 변혁시킨다. 여기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나라를 모든 종류의 인간적 혁명 혹은 개혁의 시도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저항운동으로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혁명은 아무리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낡은 나라를 대변할 뿐이지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바르트가 하나님 나라의 혁명을 위한 인간의 협력이나 참여조차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혁명은 물론 우리 밖에서(extra nos) 시작하지만, 우리 안에서(in nobis) 우리와 함께(cum nobis) 일어난다. 하나님은 아래로부터 활동하시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이다. 하나님은 지배구조 아래서 고통당하는 하층민들의 편을 들면서 억압받는 자들에게 활약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인간소외, 인간의 우상생산(국가, 맘몬, 인물, 예술, 학문, 교회, 미덕 등의 우상화), 인간의 물화(物化)와 주인없는 권세들(자본, 국가, 군국주의)의 지배에 맞선 하나님 나라의 혁명에 길들여짐으로써, 하나님의 혁명에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사회민주주의 안의 정치적 참여 속에서 이루어진다.

3. 1921년(로마서 주석 제2판) 이후의 바르트

스위스의 작은 마을 자펜빌(Safenwil) 교회의 평범한 젊은 목사가 쓴 로마서 주석 제1판은 세인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런 탓인지, 바르트는 이 책이 출간된 직후부터 자신의 입각점을 재검토하고, 로마서 주석을 다시 쓰기 시작하였다. 여러 사상가들, 특히 플라톤(Platon), 칸트(Kant), 오버벡(F. Overbeck), 도스토예프스키(Dostoyewski),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 종교개혁자들(Luther, Calvin)의 저서를 읽은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완전히 새롭게 쓰여지고 철저히 논리적으로 재구성된("돌 위에 돌 하나도 얹지 않은") 로마서 주석 제2판은 바르트를 하루 아침에 유명하게 만들었다. 이 책은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거대한 종소리와 같았고,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놀던 마당에 터진 폭탄과 같았다. 제2판은 제1판에서 인간(교회)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성취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는 여지를 철저히 청산해 버렸고, 제1판보다 더 철저히 인간의 종교와 윤리, 자연적-영적 우주와 대립해 있는 하나님의 독자성, 타자성(他者性), 초월성, 배타성을 강조하였으며, 이에 직면한 인간과 세상, 교회의 위기와 심판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배가 모래 위로 올라가는 것과 같은 위험에 처한 자유주의 신학을 180도 완전히 돌려놓은(나중에 바르트가 술회하였던 것처럼 다소 이교적이고 과격한) 결과를 낳았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시 대신 인간, 인간의 신앙, 경건, 종교, 문화, 정신, 감정, 역사의식을 중심에 둔 신학, 즉 인간이 세운 온갖 우상을 파괴하고 교회를 정화하려던 그의 시도로 인하여 역사와 계시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역사가 계시로서 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역사≠계시), 이젠 계시도 더 이상 역사로서 오지 않는다(계시≠역사).

이런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바르트는 여러 가지 표현과 개념들을 빌려왔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 위에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가 있다. 탄젠트 곡선이 선에 무한히 접근하지만 서로 접촉할 수는 없듯이, 계시는 결코 역사가 되지 않는다. 계시와 역사 사이에는 오직 진공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유일한 접촉점인 예수 그리스도마저도 오직 역설적으로만 이해된다(양적-형식적 변증법이 아닌, 질적-내용적 변증법). 예수는 역사적-심리적-종교적 현상이 아니다. 계시는 결코 역사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며, 번개처럼 사라지기 위해 들어온다. 역사 안에는 계시가 머물지 않고, 오직 폐허만을 남길 뿐이다. 계시는 오직 비약, 결단, 역설, 모험적인 신앙 속에서만 파악될 뿐이다. 신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적, 은총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인간의 혼합, 인간적인 것의 신적인 고양(高揚), 인간 존재 안의 신적 존재의 주입(注入)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비시간적인 시간, 비공간적인 영역, 불가능한 가능성, 부정 속의 긍정, 시간 속의 영원, 죽음 속의 생명이다. 이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왔다. 그는 역사의 의미이며 시간의 종말이고 오로지 역설(Kierkegaard), 승리자(Blumhardt), 원역사(Overbeck)로서만 이해될 수 있는 자이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위로부터 수직적으로' 단절하는 미지(未知)의 차원이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의 가시성 내에서는 문제꺼리, 신화로서만 이해될 뿐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나라는 가장 작은 입자 속에서도 땅에 도래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장 고상한 형태 속에서도 오지 않았다. 그것은 가까이 왔을 뿐이다. 그것은 선포되고 신앙될 수 있을 뿐이지, 낡은 것의 연속으로서 가까이 온 것은 아니다. 새로운 세계는 가까이 왔지만 어디까지나 영원한 세계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그것의 반사(反射) 안에 있을 뿐이다.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부정적, 불가시적이고 은폐된 것이다. 그것은 이 세계의 소멸, 만물의 종말, 차안의 동요와 소요, 파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제1판과 달리 유기적으로 성장하거나 건설되지 않는다. 볼 수 있는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바벨탑일 뿐이다. 우리는 두렵고 떨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나름대로 이룩하려고 노력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머리카락의 넓이만큼도 접촉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영원한 순간은 모든 순간들과 비교할 수 없이 대립하고 있고,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시간들과 비교할 수 없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순간들의 초월적 의미, 모든 시간들의 성취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철저히 배타적으로 하나님 자신만의 일이라고 간주된다. 물론 그것은 우리들을 위해(pro nobis) 일어나지만, 더 이상 우리와 함께(cum nobis), 우리 안에서(in nobis) 일어나지 않고, 우리에게 맞서서(contra nobis) 일어난다.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혁명, 하나님 나라의 일에 협력하지 못한다. 가장 철저한 혁명조차도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오기는커녕, 단지 기존적인 것을 기존적인 것으로 대체할 뿐이고, 새로운 형태의 악을 불러들인다(인간의 혁명 시도, 특히 레닌 혁명에 대한 비판).

그렇다고 해서 바르트가 여기서 전적인 체념, 윤리적 행동의 상대화, 부르즈와 계급적 반동, 종말론적 비관주의를 장려하자고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세상에 대해 절대적으로 다른 하나님을 통하여 세상을 절대적으로 다르게(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긍정하려고 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활동할 수는 없지만, 기존질서 내에서 사회적 긍정, 억압, 독재에 맞선 개혁정치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준비하고 시위할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는 로마서 주석 제1판에서와 같이 온갖 경직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 속에서 이루어지며, 사회민주주의적 정치 안에서 실천된다.

4. 1932년(교회교의학) 이후의 바르트

로마서 주석 제2판은 신학과 철학, 하나님과 인간을 종합하려는 자유주의 신학을 철저히 청산하려는 몸짓이었다. 인간이 생산해 내는 온갖 우상을 파괴하고 성전을 더럽히는 온갖 혼합주의를 축출하는 데 큰 공로를 세운 이 책은 잠자는 그리스도인들을 깨우는 닭소리, 종소리가 되었고, 인간으로 하여금 무상한 것을 절대화하려는 시도로부터 결별하여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은혜로운 하나님 앞에서 전율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이 신학은 잠시 동안만 주효했다.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대가로 하나님의 위대성을 상실시킨 스승들의 신학을 반박하기 위한 바르트의 의도는 정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스스로도 나중에 반성한 대로, 로마서 주석 제2판의 신학은 하나님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인간을 지나치게 희생시킨 것이었다. 이것은 제1판과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의 위기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역사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폐허, 진공 밖에 없는 것 같았고,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가 차용한 시간-영원의 변증법도 역사의 희망에 대해서는 너무 인색할 뿐만 아니라 과도하게 철학에 의존하고 있다는 따가운 비판도 그를 괴롭혔다.

그에게 일약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 준 이 책이 출간된 바로 같은 해에, 그러나 로마서 제2판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제1판의 공로 때문에 바르트는 괴팅엔(Göttingen) 대학의 종교개혁 신학을 담당하는 석좌교수로 부름받게 되었다. 여기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강의하던 그에게 그들의 유산이 그의 신학 체계 안으로 서서히 흡수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바르트는 그들의 신학을 이전보다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이전의 체계를 조금씩 심화, 수정하게 되었다.

이 시대의 신학을 사람들은 적절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라고 불렀다. 그 이전의 신학도 철저히 로마서 주석을 빌린 말씀의 신학이었지만, 특히 존재론적 신증명을 시도한 안셀름(Anselm)에 대한 바르트의 독창적인 해석서 'Fides quaerens intellektum'(인식을 추구하는 신앙: 1931년)이 출간된 직후부터 바르트는 자신의 사고에서 철학적, 인간학적 기초와 해명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이제부터 신학은 절대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바르트는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변증법(辨證法: Dialektik)적 체계는 유비론(類比論: Analogia)적 체계로 바뀌어 나갔고, 시간-영원의 종말론, 변증법적-수직적 종말론은 계시적 종말론, 성서적-수평적 종말론의 체계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철두철미하게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과 인격, 사역을 통해서만 해명되었다. 사람들은 이를 '그리스도론적 집중', '그리스도론적 일원론', '그리스도론적 보편주의' 혹은 '그리스도론적 왜소화'하는 말로 제각기 다르게 평가하였다.

이전의 체계에서도 그러했지만, 특히 교회교의학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하고도 의식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구상되고 설명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진 지배, 그분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그분 자신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인격 안에서 온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리고 바르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화해(和解)를 하나님의 혁명이라고 불렀는데, 이 혁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의 돌입이다. 이 하나님 나라의 돌입, 하나님의 혁명은 인간과 세계의 급진적, 전체적, 보편적 변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참 혁명가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 나라의 혁명은 사회집단과 관습에 맞선 충돌 안에서 일어나서 모든 인간들의 상황변혁을 목표로 삼는다.

그렇지만 이 혁명은 율법적 강요의 전체주의 속에서가 아니라 '은총의 전체주의' 속에서 일어난다. 이 혁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인간도 변혁의 주체가 되도록, 하나님의 투쟁에 참여하도록 부름받는다. 이 투쟁은 특히 인간의 소외, 물화, 관료주의화, 억압에 맞선 행동 속에서 구체화되며, 이 행동은 사회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사회, 화해된 사회를 위한 실천 속에서 이루어진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선행적 형태, 비유, 반영, 복사로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지시하고 이의 도래를 위해 기도하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혁명인 화해의 인식으로부터 유래했기 때문에, 사회의 부정적 요소들에 대한 비판적 역할과 더 나은 사회질서의 수립을 위한 건설적인 역할을 통하여 사회변혁을 위한 적합성을 실증할 수 있다. 교회는 이론적-실천적으로 더 나은 화해된 질서를 향해 진군하는 전위대, 선구자로서 자신을 입증할 수 있고 또 입증해야 한다.

그렇지만 바르트에 따르면, 교회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적합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비록 주관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세속적인 휴매니티, 우주의 빛들과 진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매개하며, 사회민주주의는 인간적, 정치적 세속성의 진정한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의 반사로 입증된다. 왜냐하면 사회민주주의는 기독교의 신앙고백의 정치적 차원과 내용적인 공통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혁명에의 인간참여는 특히 사회민주주의 안에서의 영속적 체제변혁, 영속적 개혁정치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교회교의학의 시대에 와서 계시는 다시 역사적 특징을 분명히 회복하게 되었다. 역사는 여전히 계시가 아니다(역사≠계시). 하지만 계시는 역사로서, 특히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의 역사로 나타난다(계시=역사). 역사의 선은 계약에 의해 둘러싸인 시간적, 역사적 진보를 보여준다. 바르트에 따르면, 이 계약의 근거와 요약,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역사는 계약사의 의미를 지닌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는 세속사와 구원사를 단순히 분리하지 않는다. '구원사'는 '계약사'로서 '보편사' 안에서 드러나고 완성된다.

나가는 말: 바르트 신학의 상수(常數)


바르트의 신학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그의 신학적 개방성에 있다. 그의 신학은 늘 도상(途上)의 신학이었다. 바르트는 생전에 "나의 신학을 절대화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으며, "나는 바르티안(Barthianer)이 아니다"고 말하였다. 기독교 신학사에서 바르트의 신학만큼 그렇게 자주 바뀌었던 신학을 찾아보기 어렵다. 힘겹게 얻은 새로운 통찰과 그를 통해 얻은 인기를 용감하게 버릴 수 있는 용기, 대중이 따르는 것을 경계하고 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과단성은 신학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바르트 신학의 또 다른 특징이다. 그러므로 바르트 생애의 어느 시점을 못박아 "이것이 바르트 신학이다"라고 단정해서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르트 신학의 불변하는 요소, 상수(常數)를 묻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라는 말은 아니다. 오트(H. Ott)는 개혁교회의 '하나님의 주권신앙'을 바르트 신학의 지배적인 동기로 보았다. 바로 이로부터 바르트는 자신이 발견한 신학적 토대를 항상 더 철저히 검증하고 심화하였다는 것이다. 마르크바르트(F-W. Marquardt)는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바르트의 생애와 신학에 일관되게 흐르는 근본 특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들은 그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나로서는 바르트의 신학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이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물론 후기로 갈수록 바르트의 신학은 더욱 더 삼위일체론적 구조 혹은 삼중 구조(Trias)를 갖는다. 또 어떤 사람은 후기로 갈수록 두드러지는 성령론적 특징을 부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증언'(출발-전향-고백: 1968년)은 자신의 신학이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하려는 운동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일평생 동안 바르트의 서재에 걸려 있었던 그뤼네발트(Grünewald)의 그림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와 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세례 요한을 그리고 있는데,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도 늘 세례 요한의 손가락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것이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자신을 낮추고 비웠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바르트는 늘 겸손하게 자신을 비우고 낮추었다.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사로잡히기 위해서 늘 새로이 출발하고 전향하고 고백하려고 애썼다. 바르트의 현란한 신학체계와 방대한 가르침보다 바로 이것을 우리는 가장 분명하게 배워야 하지 않을까?


참고도서

김재진, 바르트 신학해부(한들출판사, 1999)

이신건, 칼 바르트의 교회론(성광문화사, 1989)

이신건, 하나님 나라의 지평 위에 있는 신학과 교회(한국신학연구소, 1998)

U. Dannemann, 이신건 역, 칼 바르트의 政治神學(한국신학연구소,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