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크리스천

본회퍼

유석성

 

디트리히 본회퍼는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20세기 후반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와 새로운 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준 신학자였다. 그의 신학은 신학적 체계와 내용보다는 그의 순교자적 죽음으로 인해 더욱 빛난다.

본회퍼는 2차대전중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했다가 발각돼 2년 동안의 감옥생활 후 종전되기 직전 교수형으로 숨진 인물이다. 본회퍼는 그리스도를 증거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자기의 신앙에 따라 그 고백한 신앙을 실천에 옮긴 신앙고백적 삶을 산 기독교인이었다.

본회퍼는 1906년 2월4일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다. 본회퍼는 튀빙겐 대학교와 베를린 대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21세 때인 1927년 ‘성도의 교제’라는 학위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였다. 카를 바르트는 이 논문을 가리켜 ‘신학적 기적’이라고 극찬했을 정도다.

본회퍼는 신앙과 행동이 일치되는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은 세상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책임과 교회의 역할을 일깨워줬다. 신학계에서는 처음으로 책임윤리를 말한 본회퍼는 그의 신학과 삶에서 신앙과 행동, 개인적 경건과 정치적 책임이 분리되지 않고 일치함을 제시하고 실제로 보여줬다.

1933년 1월30일 히틀러가 집권한 후 유대인들을 박해하였다. 히틀러는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하였으며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수천만명의 희생자를 냈다. 독일의 양심적 지식인과 신앙인들은 히틀러에 항거하다 감옥과 집단수용소,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본회퍼도 히틀러를 '적그리스도'로 보고 저항의 깃발을 들었다.

본회퍼는 교회가 박해받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적극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유대인을 위하여 소리치는 자만이 그레고리안 찬가를 부를 수 있다"고 갈파했다. 히틀러는 교회까지도 그의 말에 복종하는 ‘제국교회’로 통합시켰다. 여기에 저항한 일부 목사들은 '긴급목사동맹'을 결성하고 제국교회에 반대하는 '고백교회'를 탄생시켰다. 고백교회는 목사의 파면과 투옥, 교회 폐쇄에도 굽히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1939년 7월 미국 뉴욕의 유니언신학교에 초청교수로 있던 본회퍼는 히틀러 치하의 독일로 돌아갔다. 그의 귀국을 만류하는 미국과 독일 성도들에게는 "조국의 위기에 동포들과 함께 지내지 않는다면 전후 독일 기독교 재건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는 편지를 남겼다. 그가 독일로 돌아온 지 두달이 채 못돼 히틀러의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했다. 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

1943년 4월5일 비밀경찰 게슈타포가 본회퍼를 체포했다.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는 혐의였다. 본회퍼는 2년 동안 독일 각처의 강제수용소를 전전했다. 이때 그가 친구 베트게와 가족에게 보낸 편지들은 나중에 '옥중서간'이란 제목으로 출판돼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과 용기를 줬고 새로운 신학을 만들어내는 단초를 제공했다. 이 옥중서간은 한국에서도 출간돼 군사독재시절 민주화 운동으로 감옥에 갇힌 젊은이들에게 용기와 위안이 되기도 했다.

1945년 4월 9일 이른 아침 본회퍼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본회퍼는 다음과 같은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교수대로 끌려나갔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삶의 시작입니다."

본회퍼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진지한 자세로 기도한 뒤 처형대로 올라갔다. 그는 다시 짧게 기도하고 용감하게 교수대를 붙잡았다. 수용소 의사 피셔 휠슈트룽은 "50년동안 의사로 활동하면서 그렇게 하나님께 헌신적인 모습으로 죽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고 39세 천재 신학자의 마지막 모습을 증언하였다. 본회퍼가 처형된 3주일 뒤 히틀러는 자살했다. 1945년 5월8일 독일은 패배했고 연합군은 승리했다.

본회퍼의 삶은 오늘도 그리스도의 제자로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신앙 양심에 따라 자유와 사랑과 평화와 정의를 위해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작과 격려와 교훈으로 남아 마침표 없는 현재 진행형의 삶이 되고 있다.

본회퍼는 기독교 평화신학과 평화운동의 선구자였다. 그는 1934년 8월 28일 덴마크 파뇌에서 개최된 에큐메니컬회의의 아침예배시간에 '교회와 열방의 세계'라는 제목의 유명한 평화설교를 했다. 그는 이 설교에서 세계교회를 향해 '평화를 위한 에큐메니컬 회의'를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56년 후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교회협의회의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JPIC)' 세계대회에서 결실을 거두게 됐다.

그 당시 본회퍼는 2차 세계대전을 예고했다. 그는 평화는 하나님의 계명이요, 그리스도의 현존이라고 했다. 평화는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군비증강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야 실현될 것임을 강조했다. 이런 평화의 신학은 지난해 9·11 테러 이후 테러와 전쟁의 위협과 분단상황 속에서 북한핵 문제 처리에 긴장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본회퍼에게 늘 제기되는 문제가 있다. 평화주의인 목사요,신학자인 그가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할 수 있는가? 본회퍼는 감옥에서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일 어떤 미친 운전사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인도 위로 차를 몰아 질주한다면 목사인 내 임무는 희생자들의 장례나 치러주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자동차에 올라타서 그 미친 운전사로부터 핸들을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

본회퍼는 그 당시 미친 운전사인 히틀러를 제거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본회퍼의 이런 행동은 폭력인가,비폭력인가의 문제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책임윤리와 저항권의 입장에서 봐야 한다.

본회퍼의 진실된 모습은 그리스도와 교회 중심적인 신앙과 신학에서 찾아야 한다. 본회퍼의 신학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지배적이며 교회중심적이다. 그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일치시켜 "교회(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라고 말하였다.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있어 누구인가?"를 질문하였다. 그가 찾은 답은 "예수 그리스도는 타자(他者)를 위한 존재"라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타자를 위한 존재라면 교회도 역시 '타자를 위한 교회'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자기 자신을 위해 있지만 교회만은 타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이 말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로 흐르는 현대의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한 모습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것을 그는 '형성으로서의 윤리'라고 했다.

본회퍼의 위대한 공헌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인 제자직의 고귀함을 일깨워준 데에 있다. 그는 특히 십자가와 고난의 의미,순종하는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에 순종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길,바로 제자의 길이다. 교회도 십자가 아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십자가와 고난이 없는 신앙은 기독교의 신앙이 아니라 기복을 강조하는 샤머니즘에 불과할 뿐이다. 본회퍼는 당시의 독일교회를 순종없는 신앙,십자가 없는 은혜를 소유한 값싼 교회라고 질타했다.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본회퍼의 이같은 질타를 경고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야 한다.

본회퍼의 또 다른 공헌은 경건과 영성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해준 것에 있다. 오늘날 영성 신학의 큰 산맥을 이루는 것이 본회퍼의 경건과 영성에 대한 견해이다. 본회퍼는 현실도피적인 경건과 영성이 아니라 이 세상과 역사에 참여하는 경건과 영성을 강조했다. 본회퍼는 경건이 세상을 위한 봉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본회퍼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두 가지 존재방식에 의해서만 성립된다. 기도와 인간 사이에 정의를 행하는 것이다."

본회퍼가 쓴 성도의 교제, 행위와 존재, 창조와 타락, 나를 따르라, 신도의 공동생활, 윤리, 저항과 복종(옥중서신) 등 16권의 전집으로 나와 있다. 2000년에는 그의 저항적 일생을 주제로 한 영화 '디트리히 본회퍼'가 제작돼 구미 여러 나라에서 상영됐다.

본회퍼는 신앙과 일치된 삶으로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에게도 관심을 끌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책임적인 기독교인의 삶의 모습과 교회의 참모습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사회참여 신학의 선구자로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실천하는 길을 보여주었다. 그리스도 앞에서 진실되게 살려고 했던 한 신앙인의 죽음은 후세의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신앙적 삶의 지평'을 열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