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의 비종교적 해석과 한국교회

 

 

정지련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디트리히 본회퍼는 서구 사회에서는 용기 있는 지성인, 행동하는 신앙인, 그리고 신앙을 위해 생명까지도 바쳤던 순교자로 기억된다.1) 비록 39년이란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후대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그러나 그가 단지 후대 사람들에게 악과 타협하지 않는 순교자적인 용기와 헌신적인 신앙의 모델로만 알려진 것은 아니다. 단편적이고 비체계적이지만 그의 글에 나타난 깊은 신학적 통찰력은 20세기 후반의 신학에 창조적인 영감을 선사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해방신학자에서 영성신학자에 이르기까지 많은 제자들을 가질 수 있었다.


 

교회사적 상황

 

1920년대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경제적, 정신적, 문화적인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위기 극복의 일환으로 국가 자체를 이른바 최고의 목적으로 간주하려는 국가 사회주의적 경향이 사회 전반에 고조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히틀러가 등장했고, 열광적인 군중들은 히틀러라는 인물 속에서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할 구원자를 발견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독일 그리스도인’(Deutsche Christen) 운동이 나타났고, 독일 국민, 독일 성서, 독일 전통을 모든 비독일적인 것과 대립시키려는 운동이 확산되었다. ‘독일 그리스도인’은 점진적으로 성장해 나갔으며, 1933년에는 나치당의 도움을 받아 교회 선거에서 독일 개신교의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독일그리스도인 운동에 저항하는 ‘고백 교회’(Bekennende Kirche) 운동도 시작되었으며, 급속도로 독일 전역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

 

이후 두 운동의 싸움은 격렬해져 갔다. 이러한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1934년 5월 바르멘(Barmen)에서 고백교회 총회가 소집되어 ‘바르멘신학선언’(Barmer Theologische Erklarung)을 탄생시켰다. 이 선언에는 칼 바르트가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독일의 국가사회주의를 하나의 종교로 규정하면서 기독교가 그 종교에 빠져드는 유혹의 위험 앞에 처해 있음을 경고하기 시작했다.2)

 

국가사회주의 및 독일교회에 저항하는 고백교회는 독일 개신교의 1/10의 지지 밖에 얻지 못했지만, 저항 움직임은 활발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 이후 고백교회는 탄압받기 시작했지만, 세계교회협의회의 지원을 받아 투쟁을 계속했으며, 이 과정 속에서 저항 운동가들이 교파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신뢰하고 도움으로써 에큐메니칼 운동을 활성화시켰다.


 

생애와 사상

 

디트리히 본회퍼는 1906년 2월 4일 독일의 브레슬라우에서 한 유명한 의과 대학 교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미 어린 시절에 신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던 본회퍼는 21살 때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를 발간했다. 교회론을 주제로 다룬 이 논문은 교회를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Christus als Gemeinde existierend)로 정의함으로써, 그리스도는 말씀뿐 아니라 성도의 교제(공동체)로 현존함을 부각시킨다. 이로서 본회퍼는 성도의 교제로서의 교회가 개인적 신앙의 원천이며 동시에 목표임을 암시한다. 바르트는 이 정의가 그리스도와 교회를 동일시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본회퍼는 그리스도는 이 세계 내에 실재로서 현존하며,‘사회적-윤리적인’(sozlal-ethische) 사고야말로 현존하는 그리스도에 상응할 수 있는 신학적 사고 범주라는 자신의 확신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러한 사고범주를 고수한다. 이러한 신학적 인식은 후에 삶을 통해 보다 구체화되고 심화되지만, 기본적인 틀에 있어서는 후기 사상까지 계속 이어진다. 그 후 본회퍼는 바르셀로나에서 전도사 생활을 마친 후 교수 자격 취득 논문, 「성도의와 존재」(Akt und Sein)를 제출함으로써 베를린 대학의 강사가 될 수 있었다.(1930) 이 논문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획득했던 사상을 당시 젊은 신학자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칼 바르트와의 논쟁을 통해 심화시킨 논문이었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는 집권하자마자 유대인들을 박해하였다. 본회퍼는 교회가 박해받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적극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고백교회에 참여했다. 그는 1935년 고백교회의 부름을 받고 독일에 돌아와 핑켄발트에 있는 고백교회의 한 신학교를 맡게 되었다. 그는 영국의 수도원에서 배운 수도원적인 영성을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면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실습시켰다. 그는 그 곳에서의 생활과 강의를 기초로 해 『나를 따르라』(Nachfolge), 『신도의 공동 생활』(Gemeinsames Leben), 『성서의 기도서 시편 해석』(Gebetsbuch der Bibel) 등을 저술했다. 그는 이 책들에서 산상 수훈과 루터의 사상을 재해석하면서, 진정한 은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순종의 삶, 즉 성화의 삶으로 부르며, 이러한 성화의 삶은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고 성도의 교제를 향해 나아감을 강조한다.

 

1939년 7월 미국 뉴욕의 유니온신학교에 초청교수로 초빙되었던 본회퍼는 히틀러 치하의 독일로 돌아갔다. 조국의 위기에 동포들과 함께 지내지 않는다면 전후 독일 기독교 재건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독일로 돌아온 지 채 두 달이 못돼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본회퍼는 이 신학교가 1940년 나찌 정권에 의해 폐쇄된 후 히틀러에 대한 저항 운동에 가담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저항 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신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숙고하는 윤리적 단편들을 저술해 나갔다. 이 단편들은 후에 그의 친구이며 제자였던 베트게에 의해 『윤리』(Ethik)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는 그 깊이에 있어서는 그 어떠한 윤리적 이념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실에 동참하는 성례전적인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즉 개인의 성화와 사회적 책임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43년 3월 두 차례에 걸친 히틀러 암살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대대적인 관련자 수사 및 검거 열풍이 몰아쳤고, 본회퍼도 같은 해 4월 5일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옥중에서도 그의 친구 베트게와 전후의 기독교 등을 주제로 한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자신의 신학 사상을 심화시켜 나갔다. 이 편지들은 후에 베트게에 의해 『옥중서간』(Winderstand und Ergebung)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어 신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18개월 동안 베를린에 있는 테겔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1945년 4월 3일 히틀러의 특별 명령에 의해 플로쎈부르크에 있는 강제 수용소로 옮겨져 4월 9일 플로쎈베르크 강제 수용소에서 처형당했다.


 

본회퍼의 비종교적 해석

 

본회퍼의 종교 비판 및 비종교적 해석은 본회퍼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3) 1970년대 이후에도 비종교적 해석의 신학적 귀결에 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비종교적 해석은 한 때 동독의 신학자 뮐러(H. Muller)와 영미의 급진적 신학자들에 의해 본회퍼 후기 사상의 ‘질적인 도약’으로 해석된 적도 있었다. 즉 후기와 전기의 본회퍼 사이에 불연속성이 존재하며, 후기의 본회퍼는 전통적인 기독교를 질적으로 뛰어넘어 전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 즉 무신론적 기독교를 제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이미 당시에 주로 베트게 등에 의해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성서 신앙과 하나님의 현존에 의해 각인된 본회퍼의 전체성을 간과한 해석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본회퍼가 성숙한 세계에 종교적인 방법으로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려는 시도를 거부하고 인간과 세계의 자율성과 책임성을 받아들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는 우리는 성실할 수 없다” (1944년 7월 16일). 그러나 이러한 진술이 본회퍼 후기 사상의 무신론적 전환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곧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인식하는 것은 바로 신 앞에서인 것이다. 신 자신이 우리를 강요하여 이렇게 인식하게 한다. … 신은 자기를 이 세상에서부터 십자가로 추방한다. 신은 이 세계에서는 무력하고 약하다. 그리고 신은 바로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함으로써만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를 도와준다. 그리스도가 그의 전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약하심과 고난에 의해서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은 마태복음 8장 17절에 아주 분명하다.


그는 이러한 인식 속에서 성서 개념에 대한 비종교적 해석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시사한다.


종교가 기독교의 한 의복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 - 그 의복은 여러 시대에서 매우 다양한 외관을 보이고 있지만 - 무종교적 기독교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종교 없이, 다시 말하면 형이상학이나 내면성 등의 시간적으로 제약된 전제 없이 어떻게 신에 대해서 말할 것인가?(1944년 4월 30일)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본회퍼가 성숙한 세계를 받아들인 것은 시대의 무신성에 동화되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가 성인으로 성숙하여 그릇된 신 관념을 일소시키고 … 성서의 신을 볼 수 있게 그 눈을 해방”(1944년 7월 16일)시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종교적 해석을 거부한 것은 “종교적 해석이 성서적인 사신에도 오늘의 인간에도 맞지 않았기”(1944년 5월 5일) 때문이었다.

 

따라서 본회퍼가 성서의 사신을 현대의 무신성과 일치시켰다고 말하는 것은 본회퍼의 의도를 왜곡시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종교적 기독교 속에서 현대의 무신성과 은밀히 타협하려는 시도를 보았다. 본회퍼가 현대인의 자율성을 받아들인 것은“세계와 인간의 성인성을 … 그의 가장 강한 장소에서 신과 대결”시키고, 세계를 그가 자신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잘 이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본회퍼는 현대의 무신성의 빛에서 기독교 신앙을 무신론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성서의 빛에서 성인이 된 세계를 받아들이고 종교적 기독교를 비판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상 본회퍼의 비종교적 해석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사상이 아니라 초기 사상에서부터 준비되고 점차적으로 심화되어 온 사상이며, 따라서 본회퍼의 신학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해석학적 열쇠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4)

 

그러나 기독교를 종교와 분리시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가? 현대의 종교학자와 신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비종교적 기독교란 개념은 자기모순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본회퍼의 이 개념은 현대의 보편적인 관점이 아니라, 본회퍼가 처해있었던 제한적인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980년대 이후 본회퍼 해석을 주도하고 있는 파일(Ernst Feil)은 본회퍼의 종교 이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본회퍼는 ‘종교’로 불리는 체험 세계를 근대의 한 특성, 즉 지금은 지나가 버리고만 역사적 시대의 한 현상으로 파악했다.”5) 즉 본회퍼가 말하는 종교 또는 종교적 해석이란 기독교 신앙을 형이상학적으로, 또는 개인주의적으로 해석했던 근대 기독교 내의 역사적 한 형태(자유주의신학 또는 경건주의)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논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종교 개념의 유래와 역사적인 발전 과정을 제시한다.


종교란 말은 원래 라틴어권 세계에서만 사용되었던 말이다. 이 말은 라틴어권에서는 결코 낯선 말이 아니었다. … 종교란 말은 그들에게는 ‘하나님 경배’ 또는 ‘하나님 경외’를 의미했다. … 그러나 이 말은 근대에 우리(게르만 민족)에게 전해지면서 의미의 변화를 맞이했다. …즉 근대 독일어권에서는 인간학적인 근본 소여성, 즉 인간의 종교적 선험성 및 신에 대한 상이한 확신들을 표현하기 위해 이 말을 사용했다.6)


파일은 이러한 분석을 통해 본회퍼가 비판하려 했던 것이 성서의 하나님 신앙 그 자체가 아니라 신을 인간의 형이상학적 선험성 및 내면의 종교적 체험 속에서 찾으려 했던 근대의 특정한 한 기독교 해석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파일은 이와 같이 본회퍼에게는 종교 개념이 기독교 신앙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한 해석 범주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따라서 본회퍼의 종교 비판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신을 특정한 사고 범주 속에서 해석해 온 시도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종교를 근대의 한 기독교 해석 범주로 본 파일의 분석은 본회퍼 해석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러나 본회퍼가 비판하는 것은 근대 기독교의 몇몇 신학만은 아니었다. “우리들의 1900년에 걸친 기독교의 선교와 신학은 인간의 종교적 선험성 위에 세워져 있다. 기독교는 항상 ‘종교’의 하나의 형식이었다.”(1944년 4월 30일) 그는 또한 경건주의를 “기독교를 종교로서 보존하려는”-최초의 시도가 아니라-“최후의 시도”로 보았다. 이러한 본회퍼의 진술은 신학자들의 진술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자신의 신학적 논제를 부각시키기 위한 별 의미 없는 과장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그가 말하는 종교적 해석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본회퍼가 종교적 해석을 비판하고 성서 개념에 대한 비종교적 해석을 제시한 편지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어김없이 구약성서 인용과 사상이 등장하고 있음이 밝혀진다.7) 그는 항상 구약성서 사상에 근거해 종교적 기독교를 비판했다.


도대체 구약성서에 영혼의 구원이라는 것이 문제된 곳이 있을까? 일체의 중심점이 이 세상에서의 신의 의와 신의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닐까?(1944년 5월 5일) 그는 사실 자신의 사상을 구약성서적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언제나 구약성서적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 것 같다. …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때라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허락되는 것이다. 인생과 이 세상이 상실되면 모든 것이 상실되고 종언을 고한다고 생각될 정도로 인생과 이 세상을 사랑할 때라야 비로소 죽은 자의 부활과 새로운 세계를 믿는 것이 허락된다.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들일 때라야 비로소 언젠가 은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허락된다. … 너무나 조급하게 그리고 너무나 직접적으로 신약성서적으로 존재하고 느끼려고 하는 것은 내 생각으로는 결코 기독자적이 아니다(1943년 12월 5일).


그는 또한 자신이 제시한 비종교적 해석의 귀결들을 구약성서적이라고 부른다.


나는 한계에 처해서가 아니라 중심에서 … 신에 대해 말하고 싶다. … 신은 우리들의 생활의 한가운데서 피안적이다. 교회는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 한계에서가 아니라 마을의 한가운데 있다. 이것이 구약성서적이라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직 신약성서를 구약성서적으로 읽는 일이 너무나 적다.(1944년 4월 30일)


신을 인간의 중심이 아니라 한계에서 찾고, 신앙을 이 세계에서의 신의 무력과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개인의 구원의 문제로만 이해했던 종교적 기독교의 오류는 그리스도를 구약성서의 빛에서 읽지 않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다는 것이다.

 

본회퍼는 물론 다른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구약성서를 그리스도의 빛에서 해석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구약성서는 단지 신약성서의 전 단계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신약성서 및 그리스도의 의미를 조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해석학적 지평의 의미를 지닌다. 바로 여기서 그가 말하는 종교 비판의 실체가 밝혀진다. 종합하자면, 본회퍼에게 종교란 파일이 해명했듯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 그 자체가 아니라 이러한 신앙을 인간의 내면성과 형이상학적 세계에 한정시킨 기독교 내의 특정한 해석학적 범주이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적 해석 범주는 근대에 비로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신약성서를 구약의 빛에서 이해하지 않는 고대 교회 이후의 보편적인 신학적 경향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본회퍼의 비종교적 해석을 구약성서적 해석이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조심스러운 일이다. 구약성서적이란 말이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고, 본회퍼 또한 이 말을 엄밀한 의미의 해석학적 관점에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회퍼가 비종교적 해석을 통해 호소하려 했던 것, 즉 기독교 신앙은 곤궁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전능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무력과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단순한 시대 상황적인 해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구약 사상의 빛에서 바라보면서 자신의 신학을 총 결산한 사상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바르트가 종교를 교회를 대치했다는 비판이나, 고백교회가 자기 보존에만 급급하다는 비판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본회퍼에 의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신의 곤궁만 생각하고 이웃과 세계의 고난을 외면하는 것은 성서적이 아니다. 이웃과 세계의 고난에 뛰어들어 그 고난을 나누는 삶이야말로 성서를 신앙하는 사람의 삶의 방식이다. 본회퍼의 이러한 사상은 가난한 자들의 고난 속에서 고난 받는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가난한 자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그 깊이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아씨시의 프란치스코(1182-1226), 더 나아가서는 강도만난 자를 외면하지 않은 사마리아 사람의 자비(눅 10:25-37)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어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는”(마 25:31~40) 행위를 진정한 사랑이요, 마지막 심판 때의 기준으로 제시한 예수의 비유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본회퍼의 비종교적 해석에서 주제가 되는 하나님의 고난은 단순한 상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의 행위를 통해 인식되는 실재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 세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곧 이 세계의 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성례전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본회퍼는 “기도하는 것과 사람들 사이에서 정의를 행하는 것”을 동시에 요청하였다. 타자의 고난에 동참할 때 비로소 나를 처음부터 고난의 현장으로 부르셨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이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사회정치적 차원이 우선하는가, 아니면 심리적 차원이 우선하느냐의 문제, 또는 환경문제가 우선인가 경제문제가 우선인가의 문제는 본회퍼에게 있어서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시대상황에 따라 답변이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역사란 지평 또한 본회퍼에게 있어서 중요한 신학적 지평이었지만, 역사철학 그 자체가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본회퍼에게 왜 간디처럼 비타협 비폭력적 운동을 전개하지 않았느냐는 물음도 본회퍼의 주제를 비껴가는 물음이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역사철학이나 사회 윤리학적 방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삶 한 가운데 현존하시며, 타자의 고난에 참여할 때 비로소 우리와 함께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고난의 문제는 물론 오래 된 신학적 주제다. 그러나 본회퍼는 고난의 신비 앞에서 어거스틴 처럼 고난의 본질을 ‘선의 결핍’(Privatio Boni)으로 설명하는 대신, 타자의 고난에 동참하는 행위를 하나님의 신비에 참여하는 성례전적 행위로 제시하고 이 행위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


 

본회퍼와 한국교회

 

한국의 개신교회는 비록 현재는 성장이 정체되어 있지만, 그동안 수많은 성도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왔다. 이름도 빛도 없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해 헌신한 성도들은 한국교회의 원동력이었다. 그들의 헌신은 그들이 체험한 은혜를 나누려는 복음 전도로 이어져, 전도의 열기가 뜨거웠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또한 1974년의 로잔 협약(Lausanne Covenant)에 명시되어 있는 개인의 구원을 일차적인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다. 사실상 한국교회는 드러난 것 보다 많이 소외된 이웃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대다수의 한국교회가 구제 봉사라는 다소 소극적이며 미온적인 형태의 사회 참여를 선택하고 있다고 말한다. 전도와 구제에는 열심인데 보다 적극적인 사회 참여에는 미온적이라는 것이다.

 

반면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진보적인 교회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복음의 실천이 아닌 그 어떤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실현하려는 시도로 보고 있다.

 

전도와 구제, 그리고 사회정의 모두 성서에 명시되어 있는 교회의 사명이다. 어느 것이 어느 것 보다 앞선다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우선시되는 것은 서로 이해하고 보완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일일 것이다. 여기서 깊은 영성의 소유자이면서도 정의 실현을 위해 생명을 바쳤던 본회퍼가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타자의 고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신학적 주제로 삼았던 본회퍼의 영성을 되돌아본다면, 전도와 구제, 그리고 사회정의 모두가 타자의 고난을 나누려는 사랑의 행위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본회퍼가 고백교회와 관련해 지적했듯이, 교회가 자기 보존과 성장에만 치우쳐 함께 살아가는 이웃의 고난을 외면하고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회피한다면, 결국 교회는 생명력을 잃고 민중들도 교회를 등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현재의 정체 상태를 넘어서 재도약하려는 한국교회가 반드시 숙고해야 할 점이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가 본회퍼를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은 타자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믿음에 덧붙여지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믿음을 믿음 되게 만들고, 보다 더 깊은 영성으로 나아가게 하는 필수사항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본회퍼가 한국교회의 바이블은 아니며, 비판의 소지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본회퍼의 균형 잡힌 영성은 우리가 진지하게 숙고하고 받아들인다면, 한국교회의 장점인 기도의 영성이 타자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더욱 깊은 기도의 영성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커다란 도움을 줄 것이다.




1) 다음의 책은 본회퍼의 사상과 삶의 일치를 본회퍼의 삶의 단계마다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Christian Gremmels, Hans Pfeifer, Theologie und Biographie. Zum Beispiel Dietrich Bonhoeffer(Kaiser Verlag 1983)

2) 참조. Karl Barth, Texte zur Barmer Theologischer Erklarung (Theologischer Verlag Zurich 1984)

3) 이 논쟁은 「성숙한 세계」(Die Mundige Welt) I-IV에 실려 있다. 이 논쟁에 참여한 신학자들로는 에벨링, 몰트만, 한프리트 뮐러 등을 들 수 있다. 에벨링은 본회퍼의 비종교적 해석을 율법과 복음을 구분하는 해석학적 시도로 보았으며, 몰트만은 신앙과 사회 참여의 관계를 해명한 사회 윤리적 시도로 해석했고, 뮐로는 맑스주의적으로 해석했다.

4) 참조, Sanctorum Communio S. 257. “일반적인 종교 개념에는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다.” 또한 1935년 그의 형 칼 프리드리히에게 보냔 편지에도 “기존의 형태와 해석으로는 기독교가 곧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 실려있다.(GS II 158)

5) Feil, “Ende oder Wiederkehr der Religion? Zu Bonhoffers umstrittener Prognose eines religionslosen Christentums” in: IBF 7. 40.

6) 앞의 책 31~32.

7) 참조. 1943.12.5; 1944.4.30; 1944.5.5; 1944.6.27; 1944.7.18의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