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의 생애

 

 

1906년 독일 프로이센 브레슬라우에서 칼 본회퍼(Karl Bonhoeffer)와 파울라 본회퍼(Paula Bonhoeffer)사이에 팔남매 중 여섯째(네 아들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곱째인 누이 사비네(Sabine)와는 쌍둥이였다. 부계(父系)는 학자, 법률가 집안(아버지는 정신의학과 신경의학 교수), 모계(母系)는 귀족 출신으로서 신학자, 목사 집안(어머니의 부친은 황제 빌헬름 2세 때 궁중 설교가, 조부인 Karl-August von Hase는 교회사 교수) 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본회퍼가 독일제국의 엘리트 가정에서 성장하였음을 알 수있다.

1912년(6세) 아버지가 베를린 국립대학병원의 원장과 대학 정신의학 주임 교수로 취임되었기에 가족 모두가 베를린으로 이주하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1914-18).

1920년(16세) 그는 음악과 종교에 관심이 많았으며 결국 신학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였다.

1923년(17세) 그룬발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튀빙겐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A.Schlatter, K.Heim, K.Gross 등에게서 배웠고, 두 학기를 보내는 동안 신학부에서 교회사·철학 등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모든 것을 중산층의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신학을 이해하였다.

1924년(18세) 로마와 아프리카 대륙 여행을 하였다.(4월 초) 여행 중 독일에서 느끼지 못했던 카톨릭 교회의 보편성과 예배 의식에 감명을 받고 교회에 대한 새로운 안목과 진정한 교회의 중요성을 발견하였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현실을 직접 목격하는 등, 여행은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24년(18세)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6월) 1927년(21세) 7월까지 머물렀다. A. Harnack, H. Litzmann, E. Sellin, K. Holl, R. Seeberg 등에게서 배웠고, 이 기간동안 루터 계열의 전통신학을 주로 홀(Holl)에게서 소개 받았으며, 라인홀트 제베르크의 지도로 박사학위 논문 보고서를 제출하였다.(1925-1926 겨울학기), 논문의 주제는 1927년 8월에 통과된 "성인들의 통공 혹은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 교회 사회학에 대한 교의 신학적 고찰"이다.

1927년(21세) 교회의 본질에 대한 문제를 추구하던 그는 하르낙을 비판하며 칼 바르트(Karl Barth, 1886.5.10∼1968.12.9)의 변증법적 신학에 매료되었다.
1928년(22세) 스페인의 바로셀로나에서 독일인들을 위한 교회의 Vikar(전도사, 부목사)로 일하였다.

1929년(23세) 베를린으로 돌아와 교수 자격논문(Habilitationsschrift)을 제출하였다.(행위와 존재Akt und Sein: 조직신학에 있어서의 존재론과 선험철학) 당시 세계 시장경제의 위기를 예고한 뉴욕 증권가의 주식시세가 폭락(10월24일, 1929-33)하였는데, 그는 정치적·경제적 사건들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적었다. 그것은 여전히 중산층의 한계를 드러내는 즉, 완전히 자신의 삶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1930-31년 교환학생으로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연구하였다. Reinhold Niebuhr와 J. Baillie, P. Lehmann을 만났고, 이런 해외 경험을 통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뉴욕 할렘가의 흑인 문제를 보며 인종차별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지성과 직감이 한데 어우러진 흑인 공동체 예배를 통해(할렘의 교회) 개인적으로 해방감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성인들의 통공'이 자신이 속해 있던 중산층만을 배경으로 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1931년(25세) 다시 베를린 대학교로 와서 조직신학 강사로 임명되었다. 1936년 나치 정부에 의해 쫓겨 날 때까지 베를린 대학교 강사로 지냈다. 이 때「그리스도론」,「창조와 타락」,「교회의 본질」등을 강의하였다. 영국 켐브리지에서 열린 "교회를 통한 국제적 우호관계를 증진 시키기 위한 세계 연맹"의 유럽 청년부 간사가 되어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해 다른 나라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독일교회가 벌이고 있는 투쟁의 중요성과 히틀러의 진상을 자유세계에 알리던 중 영국 치체스터 주교 G.K.A.Bell 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1932년 나치스당의 의석수가 230석이 되었고, 이때 독일 대다수의 목사들은 기독교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를 종합하기 위한 운동으로 "독일 기독교 신앙운동"에 가담하였다. 이때는 본회퍼가 이미 중산층으로서의 사회적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1933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권력을 장악하고 총통에 취임하였다(1월 30일). 본회퍼는 즉시 라디오 강연(2월 1일)을 하였다. 그는 "지도자와 젊은 세대"라는 제목의 글에서 '스스로 신성화하는 지도자의 직위는 신을 모독하는 것임'을 말하던 중 강연이 중단되었다. 그 후 나치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여름에 베를린 대학에서 기독론을 강의하였는데 이 강의는 1.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2. 역사적 그리스도 3. 영원하신 그리스도로 구성되었으나, 도중에 중단되어 3부는 강의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영국 런던에 가서 목회를 한다. 18개월간의 영국목회 활동을 통해 본회퍼는 독일 밖에서 독일교회의 반히틀러 투쟁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덴마크에서 열린 W.C.C. 회의에 독일에서는 히틀러를 지지하는 독일 기독교회만이 참여했는데, 본회퍼는 이 곳에 참여하여 W.C.C.가 "독일 기독교회"를 정죄하고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1934년에는 바르트가 선언한 "바르멘 선언"이 나왔다.

1935년(29세) 본회퍼는 영국에서 간디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C.F.Andrews를 알게 되었고, 그의 소개로 간디의 비폭력적 평화주의를 배우기 위해 인도로 갈 계획을 세웠지만, 1935년 4월 고백교회 총회로부터 긴급 부름을 받아 귀국, 발틱해 근처에 있는 Zingst에서 25명의 목사 후보생을 돌보는 신학교의 책임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런데 이 신학교가 곧 슈테틴 부근의 핀켄발데(Finkenwald)로 이전하였다. 본회퍼는 이 신학교에서 특수교육의 과정을 만들고, "형제의 집"(Bruderhaus)이라고 불리우는 집에서, 귀국하기 전 몇몇 수도원과 신앙 공동체들에게서 배운 내용들을 토대로 공동생활, 강의, 기도와 명상, 죄의 고백등의 교과과정을 실시하였다. 그는 이 기간을 자신의 생애에 가장 만족한 시간으로 회고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신학교는 결국 1937년 게쉬타포(Gestapo)에 의해 폐쇄되었다. 이 핀켄발데 신학교에서 강의하였던 내용이「나를 따르라」(Nachfolge, 1937), 「성도의 공동생활」(Gemeinsames Leben, 1939)이다. 그는 고백교회의 신학교에서 일한 결과로 베를린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는 미래의 목사가 그들의 삶과 일에서 필요로 하는 저항의 힘은 오직 성공적인 공동생활(연대감)에서 길러진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레나테 빈트)

1939년(33세) 2차 세계대전 발발하였다.(1939-45), 라인홀드 니버와 폴 레만은 본회퍼를 미국 유니온 신학교로 초빙, 뉴욕에 도착하였다(6월 12일). 본회퍼는 독일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생각으로 항상 번민, 미국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니버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저는 독일의 기독교인과 더불어 우리 조국의 이 어려운 시기동안 내내 함께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의 동포가 함께 이 시대의 시련을 나누지 않는다면 전쟁 후 독일에서 기독교인 삶의 재건에 참여할 권리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미국을 떠난다(7월 7일).

1940년(34세) 본회퍼는 독일로 돌아와서 매형인 한스 폰 도나니(Hans von Dohananyi)의 도움을 받아 저항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도나니는 독일 군 정보부의 정보부장 부관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정보부가 채용한 민간인의 요원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곧 히틀러 암살 음모는 그의 매형 및 고위층의 반 히틀러 세력들이 군 정보부와 더불어 시도했던 것인데, 본회퍼도 여기에 적극 참여하게 된 것이다("...미친 사람이 모는 차에 희생되는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것만이 나의 과제가 아니다. 이 미친 사람의 운전을 중단시키는 것도 나의 과제이다....", 본회퍼).

1941-42년 군 정보부(저항운동의 중심역할)의 덕분으로 스위스, 노르웨이, 스웨덴을 방문, 특히 42년 5월에는 벨 주교를 통해 저항운동가들의 평화협상안을 영국 정부에 보냈으나, 이러한 희망은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 정책 때문에 좌절되었다. 이 기간에 그는「윤리학」의 저술을 위한 원고를 틈틈이 썼다. 이 책은 본회퍼 사후에, 튀빙겐 신학교 시절때부터 절친한 동료였던 에버하르트 베트게(Eberhard Bethge)에 의해 편집 출판되었다.

1943년(37세)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와 약혼(1월)하였다. 본회퍼와 도나니는 혐의를 받고 게쉬타포에 의해 체포 수감된다(4월 5일). 본회퍼는 테겔 형무소에 수감되어 18개월을 보냈는데, 이 기간 중 베트게에게 보낸 편지가 사후에「저항과 복종」(Widerstand und Ergebung)으로 출판되었다.

1944년 히틀러 암살 음모가 실패로 끝이 나고 만다. 히틀러는 이 음모에 정보부가 연관되었음을 알아내고, 많은 저항자들을 적발하였으며, 본회퍼도 집단 수용소로 이송된다(7월 20일).

1945년 나치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4월 8일 이른 아침에 저항에 참여한 그의 가족 3명을 포함한 5천명의 사람들과 함께 교수형을 당한다. 3주 후 히틀러는 자살, 5월 8일에 독일이 항복하게 된다. 그 리고 사후 50년만에 베를린의 한 법정에서 독일의 양심 본회퍼 목사를 복권시켰다. (복권판결의 이유: 본회퍼는 결코 국가를 위태롭게 한 적이 없고 오히려 나치의 폐해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구출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