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본문의 배경: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말 3:14)

 

말라기서에는 페르시아의 총독이 언급된다: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말 1:8). 이는 예언자 말라기의 활동시기가 포로기 이후(주전 539년 이후)라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말라기는 성전에서 행해진 종교의식들을 비판한다:"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말 1:10). 이 성전은 주전 515년에 봉헌된 제2성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선배 예언자들, 특히 학개와 스가랴가 예고한 성전 재건 이후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백성들에게는 낙담하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말 1:2). 따라서 예배는 변질되어 겉으로만 형식을 갖추었다:"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 도다"(말 1:7). 하나님의 율법은 될 수 있는 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너희가 내 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편벽되이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를 모든 백성 앞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말 2:9).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기에 이른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야웨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말 3:14-15).

말라기서에는 여섯 가지의 논쟁 형식의 말(Disputationswort/Diskussionswort)이 들어 있다(1:2-5; 1:6-2:9; 2:10-16; 2:17-3:5; 3:6-12; 3:13-4:3). 예언자가 한 가지 주장을 펼 때마다 그 상대자는 이의를 제기하고 뒤이어 예언자는 자기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밝힌다. 여기서 다루게될 본문(말 3:6-18)도 이러한 논쟁의 말 양식에 속한다. 한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예언자의 주장: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말 3:7a)

청중의 이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말 3:7b).

예언자의 주장: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말 3:8a).

청중의 이의: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말 3:8b).

예언자의 주장에 대한 근거: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말 3:8b).

 

오늘의 본문(말 3:6-18)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있다:

1) 3:6-12:조건적인 축복의 약속

 6절:하나님의 사랑과 이스라엘의 배반

 7절:지속된 불순종의 역사로 무디어진 양심

 8절: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사람들

 9-11절:없어서 못한 것이 아니라 안 드려서 없어진 것

 12절: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2) 3:13-18:의인과 악인의 분별

 13-15절:신앙의 심각한 위기

 16절:다 듣고 보고 알고 계시는 하나님

 17절:하나님의 정한 날을 인내하며 기다리는 신앙

 18절:그 날이 오면 의인은 의인으로, 악인은 악인으로

 

인간 말라기:

예언자 말라기 혹은 무명의 나의 사자?

말라기라는 히브리어는 "나의 사자(메신저)"라는 뜻이다. 말 3장 1절에 나오는 "내 사자"라는 말도 히브리어로 "말라기"이다. 또한 헬라어 번역본(LXX)은 말 1장 1절의 "말라기로"를 "그의 사자를 통하여"라고 번역하였다. 사실 말라기서에서 말라기를 예언자로 표기한 본문은 없다. 따라서 말라기는 보통 명사로 보면 그 말 뜻대로 무명의 "나의 사자"일 수도 있고, 전통적으로 부르고 있는 것같이 고유명사로 보면 말라기 예언자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아랏(Arad)에서 발굴된 항아리 손잡이에 따르면 말라기가 고유명사로 언급된다. 따라서 말라기가 사람이름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또한 이 사실을 부인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참조. A. Meinhold, Maleachi/Maleachibuch, TRE 22, 1922, 6-7). 예언자 말라기에 대해서는 그의 이름 외에는 더 이상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이름조차 불확실한 것 같이 그의 활동 시기도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말라기가 언급한 죄악은 특히 주전 5세기에 활동한 느헤미야가 지적한 것과 유사하다. 이들 두 사람은 성전의식에 대한 제사장들의 태만(말 1:6-14과 느 13:4-9),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죄(말 3:8-10과 느 13:10-13), 그리고 이방 여인과의 혼인(말 2:10-12과 느 13:23-28)에 대하여 책망하였다. 따라서 말라기는 주전 5세기경(주전 460-450년경)에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메시지

1)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이스라엘의 변치 않는 배반(6절)

이 단락(3:6-12)은 야웨와 백성 사이의 논쟁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은 백성의 비난에 대한 변호로 말씀을 시작하신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바꾸거나 적어도 그들에 대한 구원의 계획을 바꾸셨다고 생각한다:"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1:2).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변하지 아니하였으며 그들(야곱의 자손들)도 변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신다. 6절 하반절의 해석이 다소 문제가 되지만 히브리어 본문에 준하여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우리의 개역 성경과는 다른 번역이 된다:

 

"나, 야웨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너희는 야곱의 자손임을 그치지 않았다(말 3:6)."

 

여기서 야곱이란 "속이는 자"(창 27:36; 호 12:2)를 암시하고 있다:"네 시조(야곱)가 범죄하였고 너희 교사들이 나를 배반하였나니 그러므로 내가 성소의 어른들에게 욕되게 하며 야곱이 진멸 당하도록 내어 주며 이스라엘이 비방 거리가 되게 하리라"(사 43:27). 야곱의 자손인 이스라엘은 야곱의 속임과 범죄를 아직도 반복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변하였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시다. 이스라엘도 변화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변화가 없는 것은 사랑이다. 이것이 변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변화가 없이 지금도 지속되는 것이 있다. 이것은 바로 속임과 범죄 행위이다. 이것은 이제 변해야 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변화가 요구된다:"너희는 항상 있던 모습대로 여전히 있으므로 이제 변해야 한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이스라엘의 변치 않는 배반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7절은 6절 하반절의 내용을 보다 자세히 설명한다:"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 하였도다"(참조. 스 9:7).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신다:"내게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회개하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반발만 야기 시킨다:"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 가리이까?" 그들은 회개의 준비도 안되어 있을 뿐더러 회개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의 양심은 오랜 불순종의 역사로 말미암아 무디어졌다. 그들에게는 죄의식도 수치심도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이때 말라기는 놀라운 질문을 던진다:"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말라기는 이 백성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말한다. 당연히 이스라엘의 반문이 이어진다:"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8절). 말라기는 이 백성이 하나님께 드려야할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은 것을 곧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으로 간주한다. 십일조와 헌물은 성전예배 종사자들(레위인과 제사장)의 생계(민 18:21-24 등) 혹은 사회적인 약자를 돕는 일에 쓰였다(신 14:28-29). 이러한 십일조와 헌물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이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하여 쓰여질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할 것을 바치지 않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그 주권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속된 불순종의 역사로 오래 전부터 양심이 무디어졌다. 결국 마땅히 드려야할 십일조와 헌물도 드리지 않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예언자는 이를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질책한다. 아마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이 중단되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하나님의 계명에 따른 최소한의 의무와 책임도 저버린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의 배반은 끝나야 한다!

 

2) 없어서 못한 것이 아니라 안 드려서 없어진 것(9-11절)

이렇게 십일조와 헌물을 등한시한 것은 한 두 사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에 저주가 임했다(9절). 당시 이스라엘은 비가 오지 않아 생긴 기근과 메뚜기 떼로 인한 재앙, 이들로 인한 흉년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약속에 전제되어 있다:

 

"내가 하늘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비를) 붓지 아니하나 보라

… …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말 3:10-11).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현재 당하고 있는 이러한 파국을 형벌, 곧 하나님의 저주로 해석한다. 이러한 절망적인 형편에 처하게 되었을 때는, 먼저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소홀히 했는지를 살펴보고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요 자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참회의 의지도 없고 여전히 옛날 죄에다 새로운 죄를 더하고 있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근, 재앙 그리고 흉년으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고 변명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형편 때문에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형편이 어렵다고 도적질을 해도 되는 것인가! 그것도 하나님의 것을. 말라기는 사실 도적질, 그것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기 때문에 이러한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역사를 보는 눈이 다르다. 사건의 본질을 꿰뚤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다. 없어서 못한 것이 아니라 안 드려서 있는 것마저 없어진 것이다.

말라기는 이러한 저주의 상황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지금까지 가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라, 즉 하나님께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회개는 단순히 마음의 돌이킴뿐만 아니라 삶의 돌이킴을 포함한다. 여기에서의 회개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일탈된 궤도에서 정상 궤도로 진입하는 유일한 길이다. 말라기는 구체적으로 말한다:"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라"(10절). 온전한 십일조란 물질의 양적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를 암시한다. 많이 드리는 것보다는 합당하게 드리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기근과 재앙, 그리고 흉년으로 황폐하게된 이스라엘 땅에 축복의 비를 퍼부어 주시고, 메뚜기를 금하시고, 밭에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따라서 이스라엘 땅은 비옥해지고 모든 민족들이 그들을 복되다 할 것이다(12절). 예언자는 확신에 차서 다음과 같이 외친다:"하나님을 시험하라 이것이 사실인지!"(10절).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보통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행위를 간주된다(말 3:15; 시 95:9). 이는 하나님의 약속의 확실성을 뒷받침한다.

이스라엘은 가뭄, 기근, 메뚜기 재앙, 그리고 흉년 등으로 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 이러한 형편에 처한 그들은 아마도 십일조와 헌물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언자를 통한 하나님의 판단은 다르다. 처음부터 가진 것이 없어서 못 바친 것이 아니고 드릴 수 있었고(능력) 또한 마땅히 드려야할(의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기 때문에 결국 상황이 더욱더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분에 넘치는 많은 정성이 아니라 형편에 합당한 온전한 정성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정성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지 뇌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3) 그 날이 오면 의인은 의인으로, 악인은 악인으로(18절)

이 단락(3:13-15)도 앞선 단락(3:6-12)과 같이 야웨와 백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이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였다"고 하면서 먼저 운을 떼신다.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13절).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한 말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신다. 그들은 말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야웨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14-15절).

 

정치적으로 암울하고 경제적으로 피폐된 상황에서 이전 예언자들의 구원 약속은 성취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당시 이에 크게 실망하고 낙담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하나님에게 예배드리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조차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 보인다. 드디어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실망과 낙담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회의로 바뀌었다:"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야웨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2:17). 이러한 회의는 결국 하나님께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발전된다:"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선을 행하면 선을 거두고, 악을 행하면 악을 거둔다"(인과응보의 신앙)는 전통적 신앙에 충실한 사람들에게는 의인에 대한 하나님의 무관심(14절)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악인의 형통(15절)은 전혀 이해될 수 없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이 땅에서의 형통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단 말인가! 전통 신앙이 무너져 버릴 수 있는 심각한 위기의 순간이다. 말라기는 이러한 전통적인 신앙에 반기를 드는 자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간주한다. 의심과 회의에 빠진 신앙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는 회의론 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의 사람이 절망 속에서 의심과 회의에 빠진 가운데에서도 그 수를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 알 수는 없다. 본문이 이를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그 때에 야웨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16a절).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기념책에 기록하신 것으로 보아 그들의 말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회의론 자들이 주장하는바와 같이 과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된 일일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全知) 계시고 어디에나 계신(無所不在) 분으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분명히 들으시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두시는 분이시다(16b절). 여기에서 언급된 "기념 책"(기억의 책)은 구약성서에서 여기에만 나온다. 물론 하나님이 그의 백성의 이름을 기록한 책에 대한 언급은 다른 곳에서도 여러 번 나타난다(참조. 출 32:32-33; 사 4:3; 겔 13:9; 시 69:28 등). 하나님을 섬기고 그 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의 효과가 당장 눈앞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그것이 무익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과 행실을 다 듣고 보며 정확히 알고 계신다. 이를 믿고 그에 맞추어 묵묵히 실천하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이름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마냥 내버려두지 아니 하신다. 하나님은 정하신 날이 이르면 그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세굴라)로 삼으신다(17절). 구약성서에서 특별한 소유란 본디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세굴라)가 되겠고"

(출 19:5; 참조. 신 7:6).

 

 그러나 여기에서 특별한 소유는 백성 전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고대 근동의 관습에 의하면 부모들은 자신을 잘 섬기는 아들을 특별히 우대했다. 하나님도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특별한 소유로 삼으시고 특별히 사랑하는 아들로 간주하신다:"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17b절). 그렇다면 그 때는 언제인가? 그 날은 하나님이 홀로 정하신 날이다(17a절). 그 날이 이르러야 비로소 하나님의 정의가 만 천하에 드러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 당장은 실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정한 날을 인내하며 기다리는 신앙이 우리 모두에게 요구된다. 의심의 유혹을 뿌리치고 끝까지 인내하는 신앙인 만이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될 자격이 있다.

말라기 시대의 가장 큰 문제중의 하나는 도덕적이고 신앙적인 가치가 희미해져 가는데 있었다. 한마디로 도덕과 신앙의 위기 시대이다. 그 누구도 옳고 그른 것, 또는 의인과 악인을 구별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듣고 보고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의인과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는 악인은 분명히 다르고, 누구나 그 다른 점을 분별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신다(18절). 하나님이 정하신 그 날이 오면 의인은 의인으로, 악인은 악인으로 반드시 분별될 것이다. 의인이란 이것을 굳게 믿고 하나님이 정한 날을 인내하며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합 2:3-4)?